카스미가오카 안도

일본내각총리대신
다이쇼 시대
메이지 시대 내각총리대신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구로다 키요타카 하라 다카시 타카하시 고레키요 키요우라 게이고 카토 토모사부로 카스미가오카 안도 카토 타카아키
쇼와 시대 내각총리대신
일본내각총리대신
쇼와 시대
다이쇼 시대 내각총리대신
38대 39대 40대 41대 42대 43대 44대 45대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카스미가오카 안도 사이토 마코토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스즈키 간타로
46대 47대 48대 49대 50대 51대 52대 53대
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요시다 시게루 이시바시 딘잔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카토 에이사쿠
54대 55대 56대 헤이세이 시대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타케시타 노보루
일본 일본의 정치인
카스미가오카 안도
霞ヶ丘 安藤
카스미가오카 안도
생년월일 1878년 12월 9일
출생지 일본 일본 토쿠시마 현
망년월일 1969년 12월 24일 (91세)
출신교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 박사
전직 문화통신 주필
소속정당 자유민주당
수상 1951년 노벨 평화상

내각 제1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
제2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
재임기간 1920년 7월 13일 - 1925년 8월 25일

내각 제3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
제4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
제5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
재임기간 1931년 4월 1일 - 1938년 11월 20일

선거구 치바현 4구
선수 7회 ~ 24회(18선)
재임기간 1902년 - 1952년

카스미가오카 안도일본의 정치인이자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그는 1920년부터 1925년까지, 그리고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총리로 재임하면서 최장기 집권 총리로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생애

카스미가오카 안도는 1878년 12월 9일 시코쿠의 토쿠시마현에서 카스미가오카 가문의 차기 당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카스미가오카 노부테루의 철저한 변방적 교육철학에 따라 소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토쿠시마현에서 보냈다. 이러한 카스미가오카 가문의 반정치적 성향은 과거 일본 제국시대를 연 카스미가오카 노구치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7.27 사태로 안좋은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카스미가오카 노구치 이후 카스미가오카 가문은 가문의 중심지를 도쿄에서 토쿠시마로 옮겼다. 이후 백여년간 정치에서 손을 떼고 토쿠시마현의 지역 유지로서의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미가오카는 1894년의 제2차 일청전쟁을 보며 시코쿠에서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한다(1897). 이후 식민주의로 인한 열강간의 대전쟁을 논문으로 제출하며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1904). 이후 현재에도 준 국가기관으로 운영되는 제국경제연구소(현 일본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식민지 시장의 효율적인 운용 방법과 식민지 무역의 중요성을 당시 내각들에게 조언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수출중심 산업이 정체되고 경제적 지위가 뒷걸음질 치자 자유민주당이 1919년 캐스팅하여 1920년 제14회 총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게 된다. 이후 곧바로 경제문제에 대한 적임자로서 발탁되어 첫 중의원 임기에 내각총리직을 받게 된다.

36대 내각총리대신 집권기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그의 문제는 바로 경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출호황 경제가 계속이어질리는 만무했으므로, 이에대한 대책을 내놓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먼저 영국식 독점기업형 자본주의 시장을 타파하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수립하고 사회간접자본에의 투자를 통한 고용호황을 이루어야한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하지만 정치가들이나 기업가들 모두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추진으로 대규모간척사업이 이루어져 지금의 도쿄 해양라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중의원은 경제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지는 못할 망정 공산주의자들이나 할만한 시장간섭과 통제를 극도로 질색하였으며 경제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내각의 자진 해소를 요구한다. 결국 안도는 1925년 총리대신에서 퇴임하게된다.

실각기

1931년 중의원은 안도를 다시 총리직으로 부르게된다. 바로 대정익찬회 때문이다. 자유민주당은 그동안 대정익찬회의 전신인 재향군인회의 규모나 세력을 대단히 얕보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에 의회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고 1931년에는 2.26 사건을 통해 하마구치 오사치 자유민주당 총재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자유민주당은 헌법을 무시하고 자유민주당의 단독의결로 쇼와 천황을 통해 성단을 받잡았고, 이로인해 1931년 4월 1일 쇼와 천황의 조각 어명으로 인해 와카쓰키 내각이 붕괴되고 제3차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41대 내각총리대신 집권기

무덤을 뚫은 총리
어떠한 정치적 거물도 지금까지 한 번 총리를 퇴임하고 나서는 다시 총리직으로 돌아오지 못했었다.

카스미가오카 안도 내각이 소설에서나 볼법한 전개를 통해 구성되었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전해들은 시민들은 말 그대로 환호중이었다. 당장 식민지 문제나 경제 대공황 문제, 군의 정치장악 문제로 군부 정권에 대한 믿음이 바닥이 났던 시민들에게는 소설과도 같은 전개를 통해 성립된 내각이 한줄기의 희망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먼저 안도는 만주에 만주국 (일본 제국)을 세우고(1931년), 중국 군벌들을 이간질하였으며 일본인 고문들을 파견하는 등 잠재적 식민지화를 향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동시에 조선과 상하이에 식민지 시장확대를 목적으로한 산미증산계획과 다자녀추진 운동을 벌이는 등 인구 조절과 식량 생산을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1] 이후 고문들을 통한 군벌들의 상품시장화와 원료산지화를 거의 완료하였으며, 국책사업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한 결과 일본의 경제는 점차 대공황 이전으로 돌아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제연맹의 경고로 인해 중의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국제연맹을 탈퇴(1933년)하고, 군축조약을 폐기(1934년)하였다.

강제 퇴임

외교특사로의 활동

=== 사망 ===

  1. 다만 식량 생산과 인구 성장은 보통 반비례관계였으므로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 출처 1932년 6월 1일자 일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