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 가문
한자 加藤
영어 Kato
출신지 도쿄도 신주쿠구
근거지 도쿄도 신주쿠구

카토 가(일본어: 加藤)는 18세기 중반부터 현대 일본까지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다.

카토 가문은 두 명의 일본 총독(카토 쿄코, 카토 준이치)과 네 명의 일본 총리(카토 타카아키, 카토 토모사부로, 카토 에이사쿠, 카토 메구미)를 배출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국립일본메디컬센터의 민영화를 통해 일본 의료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역사

가문의 유래와 성장

카토 가문은 도쿄도의 현재 신주쿠 지방에서의 지역 유지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688년의 '도쿄부 통일토지장'에서 였다. 농업으로 재산을 모은 다음, 부동산업으로 발전한 가문이기 때문에 당시의 경제체제에서는 독점적으로 발전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에도의 물주로 알려졌으며, 도쿄의 토지거래에는 거의 반드시 카토 가문의 사람이 개입한다는 설이 돌 정도였다.

1761년 카토 소이치로(1701~1787)는 부동산업을 공식화하여 카토 가문의 거래법을 국가 표준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회 의원 총선거에 참여하여 일본의회 의원이 되어 부동산법의 통과를 주도하였다. 해당 법안의 통과로 카토 가문은 정계에서도 손꼽히는 막대한 부를 소유한 가문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1776년부터 14년간 이어지던 노다 신이치 총독정부를 끝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카토 쿄코(1729~1795)를 내세워 대대적으로 일본의회에 로비활동을 벌였다. 결국 1780년 총독 선거에서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민투표에서 카토 쿄코가 당선되었다.

불명예스러운 정치능력

하지만 문제점은 총독이 된 후에야 터졌다. 카토 가문은 본래 상업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정치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국가적 결정이나 국가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매우 유복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과의 생활수준차이에서 오는 가치관도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도쿄에서 발생하던 인구난과 주택난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고, 결국 1787년의 후생집행부 장관의 국민 무시발언으로 1788년 총독직에서 사임한다. 여기서 원래대로라면 1788년 보궐선거가 치뤄져야 했지만, 카토 쿄코의 장남 카토 준이치(1742~1814)의 대규모 로비와 특례 입법으로 1788년 의회 내의 선거로 총독에 당선된다. 하지만 초법적 권한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동안 많은 정치체제가 변화하였음에도 아무런 성명을 내놓지 않던 천황이 비공식적으로 카토 총독을 불러 사임을 권하자 1789년 불명예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