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빌레펠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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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공격측 방어측
1939년
독일 침공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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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겨울전쟁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6월
포항 상륙작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1941년
3월
함부르크 공방전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9월
개성 전투 |
11월
청색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
1942년
2월
프라하 전투 · 사라예보 공방전 |
3월
백마고지 전투 |
6월
오데사 상륙작전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7월
포젠 공방전
1944년
4월
브라이턴 상륙작전(바다사자 작전) |
8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9월
바르바로사 작전 |
11월
키이우 봉기
1945년
1월
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협상국의 글래스고 재상륙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Siege of Königsberg
Осада Кёнигсберга
Die Belagerung von Königsberg
제2차 벨트크리그바그라티온 작전의 일부
날짜 1940년 9월 8일~1943년 1월 27일 (총 871일)
장소 쾨니히스베르크
결과 독일제국의 쾨니히스베르크 사수
영향 러시아 발트 방면군이 끝내 후퇴함
교전국
라이히스팍트
독일제국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왕국
발트 연합공국
핀란드 왕국
모스크바 협정
러시아국
병력
72만명 93만명
피해규모
독일군 사상자 101만명
민간인 사상자 22만명, 피난 10만명
총 사상자 67만명
지휘관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한 보급선


개요

굶주림으로 숨통을 끊고 지구상에서 흔적을 없애 버려라!
보리스 사빈코프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쾨니히스베르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쾨니히스베르크 포위가 끝나고 독일 시민들과 독일군 사이에서 퍼진 말
러시아의 광대함은 헤아릴 수가 없다... 사단 열두 개를 처부술 때마다 또 다른 사단 열두 개가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 뒤엔 수천만 유럽 자유인들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다.
프란츠 할더. 러시아 공군의 쾨니히스베르크 대공습 이후.

제2차 벨트크리그, 독러전쟁에서 1940년 9월 8일부터 1943년 1월 27일까지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시와 그 근방에서 871일 동안 독일과 라이히스팍트 연합군과 러시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경과

1940년

1940년 9월 3일부터 시작된 러시아 국방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허를 찔린 독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세 개 방면군으로 나눠서 독일을 공격했는데, 이 때 발트 방면군이 공격한 도시가 바로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제국과 그 왕가의 기원인 동프로이센의 중심지이자, 발트해의 주요 항구중 하나였기에, 이 도시는 수도 베를린 못지않은 상징적, 전략적 중요성도 넘치는 곳. 이곳의 함락은 독일이나 러시아에게나 매우 큰 사건이 될 터였다.

하여간 그 결과 독일 측은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다음 날 동원령을 선포해 국민돌격대를 조직하고 도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이와 여자를 미리 피난시켰는데, 오히려 이렇게 피난한 사람들보다 진격해 오던 러시아군을 피해 쾨니히스베르크로 몰려오던 이들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쾨니히스베르크 사령부에서는 기존 독일군과 독일인 및 동맹국 피난자와 시민들 사이에서 뽑은 의용군을 포함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 전투에 대비했다.

안톤 데니킨 원수가 지휘한 발트방면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은 9월 초순에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독일군을 탈탈 털어오던 러시아군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상당히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에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빡친 보리스 사빈코프는 9월 27일에 발트방면군 사령부를 시찰하면서 데니킨에게 12월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동프로이센 전역이 포위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한니발 작전을 통해 대규모 철수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이들이 어디로 재배치 될지 뻔히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였던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군에게 더욱 집요한 공격을 얻어맞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뵐터와 그의 4호 전차로 이루어진 부대가 하루동안 러시아 제6 기갑 사단을 저지 시켰으나 러시아군은 12월 8일에 쾨니히스베르크를 나가는 마지막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쾨니히스베르크를 제외한 모든 동프로이센 지역을 함락함과 동시에 쾨니히스베르크를 완전 포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빌헬름 2세는 바이에른 왕세자라는 이유로 계속 시의 방어를 맡겨놓았던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을 더 놔둘 수 없었고,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후임자로는 그 때 막 빌헬름 3세와 작전 계획을 놓고 언쟁을 벌이다가 총참모장 직책에서 사임한 발터 모델을 임명해 보냈다. 하지만 모델은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부임하러 가는 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그 사이인 12월 12일에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카라우스 식품창이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전소되면서 식량 수급에 적잖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창고가 목제여서 러시아군의 폭격을 받아서 전소되어버렸다. 카라우스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각각 3천 톤, 2500톤에 달했는데, 창고에서 건진 밀과 설탕은 각각 1천 톤과 900톤에 불과했다고 한다. 단 이 창고가 전소되어 식량 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카라우스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저장된 분량의 4.3% 정도였다. 12월 12일 전까지 육체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아동 및 부양가족에게 각각 일일 600g, 400g, 300g의 빵이 배급되었고, 이렇게 12월 2일부터 11일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소비된 빵이 일평균 2천 톤 가량이었므로, 밀 3천 톤은 쾨니히스베르크 주민을 1.5일(12월 이전 기준)에서 3일(12월 이후 기준. 배급량이 1천 톤으로 감소함)은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러시아군도 사빈코프의 오락가락하는 지휘 방침으로 혼선을 빚고 있었는데, 사빈코프는 데니킨에게 발트 방면군에서 전차 부대들을 빼내어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인 12월 19일에 발트 방면군은 쾨니히스베르크 시 경계를 약 10km 앞둔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여기서 계속 공격하기 보다는 포위망을 풀지 않은 채 쾨니히스베르크에 억류된 시민들과 군인들이 모두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사빈코프는 공공연히 '우리는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 따위는 관심 없다'고 떠벌이면서 독일군과 시민들을 조롱했다.

그렇다고 모델의 노력으로 사기를 회복한 독일군은 그 정도로 약체화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는 마지막 배에 타기를 거부했으며, 12월 10일에 쾨니히스베르 방어군은 시 북동부에 위치한 노이하우젠을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첫 반격전을 벌여 성공했고, 이 때부터 쾨니히스베르크의 상황이 독일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1년

1942년

1943년

시민들의 참혹한 생활상

생명의 길

레아 크라우제의 일기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