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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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요시
(1879~1897)
타다시게
(1897~1968)
타다히데
(1968~1996)
노부히사
(1996~2018)
타다히로
(2018~)
시마즈 당주 · 미군정 · 국무총리 · 류큐 공작가

사쓰마국 제1대 국왕
타다요시 | 忠義
출생 1840년 5월 22일
에도 막부 가고시마현 가고시마군 요시노무라
(現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사망 1897년 12월 26일 (57세)
사쓰마국 슈리특별시 슈리성
국적 에도 막부 (1840~1868)
일본 제국 일본 제국 (1868~1879)
사쓰마국 (뉴 오더) 사쓰마국 (1879~1897)
재위 사쓰마번 다이묘
1858년 12월 28일 ~ 1871년 8월 29일
사쓰마국 국왕
1879년 3월 7일 ~ 1897년 12월 26일
즉위식 1880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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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시마즈 (島津)
타다요시 (忠義)
연호 분시 (文思)
부모 부친 시마즈 히사미쓰 (島津久光), 모친 시마즈 치호코 (島津千百子)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斉彬), 양모 에이쥬인 (栄樹院)
배우자 테루코 왕후 (暐子)
자녀 8남 11녀
4남·왕태자 타다시게 (忠重)
6남 타다히로 (忠弘)
7남 히사노리 (久範)
차녀 키요코 공주 (清子)
4녀 히사코 공주 (常子)
5녀 토모코 공주 (知子)
7녀 사다코 공주 (貞子)
8녀 치카코 공주 (俔子)
11녀 타메코 공주 (為子)
신체 185cm
종교 사쓰마 신토
학력 학습소 (졸업)
묘소 츠네안봉 시마즈 추도공원 (常安峰島津追悼公園)

개요

타다요시 (忠義)는 사쓰마국의 제1대 국왕이자 시마즈 왕조의 제29대 수장이다.

아명은 소노스케(壮之助), 통칭 마타지로(又次郎)이다. 원복 후 첫 이름은 다다노리(忠徳 (ただのり))였지만, 번주 재임 중은 모치히사(茂久)로 자칭했다. 또한 다다요시(忠義)는 메이지 유신 후 1868년(게이오 4년) 1월 16일에 개명한 이름이다.

일생

1840년 5월 22일 시마즈 씨의 분가인 에치젠 시마즈 가의 당주 시마즈 히사미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자가 되어, 1858년 나리아키라 사후 그 유언에 따라 호적을 잇게 되었다. 유언은 나리아키라의 아들 아키라마루(哲丸)가 어리기 때문에 임시로 입양한 형태였지만, 아키라마루도 요절하였기 때문에 본인이 시마즈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번정의 실권은 조부 시마즈 나리오키와 후견인이 된 아버지 히사미쓰, 그 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에게 장악되어 다다요시 자신은 큰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다요시가 실권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사쓰마 번이 일치단결하여 도막운동을 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었다.

1879년 일마조약에 따라 사쓰마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초기 10년 동안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섭정을 하였다. 다다요시 본인도 사이고 다카모리와 아버지 히사미쓰에 밀려 큰 영향력이 없었기에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두 사람에게 개혁과 권한을 일임하는 편이였다. 1888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신하 된 도리로서 10년을 넘어가는 것은 안 된다"는 발언을 남기며 섭정직에서 물러나 다다요시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본인의 생각보다는 원로들의 생각대로 하였고 정치에 간섭하는 것 역시 꺼렸기에 서거할 때 까지 정치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1897년 12월 26일 슈리성에서 서거하였다. 왕위는 왕태자 타다시게가 물려받았다.

여담

  • 이누오우모노(犬追物)나 승마 외 사진 촬영이나 불꽃놀이 등에도 흥미를 가지는 등 폭넓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 서양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1882년 본인이 직접 슈리성에 전기를 들여오고 불을 밝혔을 정도로 서양의 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말년에는 양복을 입고 상투를 틀지 않는 등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전통을 중요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버지 히사미츠의 방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 병을 치료할 때 서양에서 들여온 약을 절대 먹지 않고 일본 전통 약이나 한약을 복용했다. 병이 위독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