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내용은 태화국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리반이 작성한 가공 국가인 태화국과 관련된 공식 설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편집을 시도하시면 반달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꼭 수정여부를 설정자에게 물어봐주십시오. 다만 오류 및 오타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일본 간섭 시기의 통치기관

1899 ~ 1925
태화 총독부

1925 ~ 1945
태화국 국무원

태화 총독부(일본어: 台和 總督府)는 일본 제국이 태화국을 식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통치 기관으로서, 1899년에 설치되어 1925년에 해체되었다. 현재의 태화 총독부 청사 소재지는 번경이며, 위태화국 시기에는 태화국 협화원 청사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태화국 행정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개요

태화 총독부는 1899년(메이지 32년)에 태화 일치조약을 체결로부터 1925년(다이쇼 14년), 일본의 위태화국 건국까지 태화국을 통치한 기관이다. 태화 총독은 태화의 행정, 사법, 입법, 군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후에 군 지휘권이 태화국 군사령관에게 이관되면서 문관 출신의 총독이 취임이 가능해졌다. 태화 총독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내무대신과 탁무대신 등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궁중석차에 경우에는 조선 총독이 제6위, 타이완 총독이 제11위인 반면에 태화 총독이 제12위로서 육해군 대장 및 추밀고문관보다도 지위가 낮았다.

초대 총독은 타이완의 초대 총독을 역임한 가바야마 스케노리이며, 처음에는 육군 장성급 출신의 무관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제5대 총독 나베시마 마사이치 이후부터 민정장관 직책을 문관이 차지하였다가, 문관 출신인 사토 료헤이의 총독 취임 이후로는 무단 통치에서 문관 통치로 전환하였다. 문관 총독들은 식민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토지 개혁 및 전기, 수도, 교통 시설 정비, 교육 보급, 산업 육성을 통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태화인 참정권 정책

1915년부터 태화 총독부는 일본 제국 정부에 태화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15년 12월 박승연이 귀족원 의원에 칙임 된 예가 있었고, 1920년에 윤중원이 선정되었는데 윤중원은 이때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1922년에는 신진혁이 칙선되고 있었지만,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까지의 귀족원 의원은 임명되면 받아들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이것을 거절한 인물은 윤중원이 유일했다.

태화인 지식인과 관료들의 참정권 요구에 답변을 회피하던 태화총독부는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권고에 의해서든 태화인들이 12.19 운동5.3 운동 이후로 지속적인 항일 활동이 이루어지던 것을 눈치채자 이를 무마하면서도 총독부의 여론 인식을 긍정적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본국 정부에 계속해서 태화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915년부터 계속되었던 총독부의 요구는 결국 1923년 1월에 가서야 통과되었으나, 1925년에 총독부가 해체됨에 따라 이러한 참정권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이후 위태화국 시기에 의정원 선거에서 태화인 선거권이 부여되면서 참정권 운동이 결실을 맺는듯 보였으나, 의정원은 사실 명목상의 입법기구에 불과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없었다.

총독

1899년에 태화 총독부가 설치되어 1925년에 폐지될 때까지 총 10명의 태화 총독이 임명되었다. 최장 재임 기간은 사토 료헤이의 6년 2개월, 최단 재임 기간은 미나미 사마타의 1개월이며 평균 재임 기간은 대략 2년 6개월이었다. 태화의 역대 총독은 사토 료헤이를 기준으로 전기 무관 총독, 후기 문관 총독으로 분류하고 있다.

전기 무관 총독 시대

초기의 태화 통치는 현지 거주민의 저항 운동을 억압할 필요성에 따라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운 강경한 형태로 행해졌다.

무관 총독들은 태화군 사령관을 겸직하여 주둔군의 지휘권을 보유하였기에 항일 운동을 강경히 진압하는 한편, 무단 통치를 통한 식민 지배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강경 노선은 2대 총독인 시바 타츠야부터 본격화 되었다.

무관 총독 5명은 모두 현역 장성이었으며, 제1대 총독 가바야마 스케노리를 제외하고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후기 문관 총독 시대

제6대 총독 사토 료헤이부터 이른바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통치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 사토 료헤이 이후로 문관 총독들은 특히 현지 거주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총독 재임시에 사망한 사토 료헤이는 태화에 묘지가 건립된 유일한 총독이기도 하다.

문관 총독들은 내무성, 체신성, 농상무성 등의 고급 관료나 외지의 민정 담당관을 거쳐 귀족원에 칙임된 칙선의원으로 그 시기에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정당의 추천을 받아 임명되었다. 태화의 통치 방식을 항일 운동의 진압에서 경제 구축에 의한 사회 안정으로 전환한 것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역대 총독

역대 이름 사진 취임 이임 이력
제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樺山 資紀)
1899년 5월 21일 1903년 4월 13일 육군 소장, 해군 원수, 문부 대신, 내무 대신, 타이완 총독, 해군 대신
제2대 시바 타츠야
(司波 達也)
1903년 4월 13일 1906년 2월 17일 육군 소장, 문부 대신
제3대 아쿠츠 야스마사
(阿久津泰政)
1906년 2월 17일 1907년 1월 10일 육군 중장, 카제 기관 총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