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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 관련 틀
틀:통킹 역사
동남아시아의 국가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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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ASEAN) 회원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통킹 브루나이 싱가포르

틀:통킹




통킹의 경관[1]

통킹 왕국(광둥어: 東京王國 둥깅웡궉, 영어: Kingdom of Tonkin 킹덤 오브 통킹), 줄여서 통킹(광둥어: 東京, 영어: Tonkin)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로 인도차이나 반도 일부[2]통킹 섬 및 부속도서들을 영토로 삼고 있다. 베트남, 캄보디아와 국경이 맞닿고 있으며, 충저우 해협[3]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해상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국토 면적은 96,118 km2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 중 가장 작으며, 인구는 약 1,800만 명으로 라오스(약 680만 명), 캄보디아(약 1,500만 명) 다음으로 적다. 수도는 싱룽(昇龍)[4], 최대 도시는 사이궁(西貢)이다.

226년, 사휘(士徽)[5]통킹 섬 일대를 개발한 이래로 중국 대륙의 통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지속적으로 대륙 남부를 공략하면서 영향력을 떨쳤다.[6] 또한 베트남 왕조들과 경쟁하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이어갔는데, 16세기부터는 참파를 정벌하고 캄보디아를 축출해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를 지배하였고,[7] 18세기 초에는 호신에서 반독립 세력을 이끌던 막구(鄚玖)[8]제후로 삼아 가우룽 강 삼각주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 프랑스[9]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치외법권협정관세제도를 인정하는 등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닥뜨렸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에서 태국과 같이 완충국[10][11]으로 설정됨에 따라 열강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불안정하게나마 주권을 행사하고 근대화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 호황을 누리며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고 관세 자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29년을 기점으로 세계 대공황에 의한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서 파시즘 등 극단화된 정치 사상이 대두되었고, 군주 중심의 전제군주정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태동, 1938년에 서이싱 혁명(垂聖革命)으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협력 요청에 응하는 등 추축 진영에 가담했지만 실제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으며,[12] 1944년 말부터 연합국으로 전향했다.

냉전 체제에 들어서자, 통킹은 미국의 우방국이자 동남아시아의 자본주의 체제의 교두보로서 그 중요성이 커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게 물적·인적 자원을 보급했으며, 이를 대가로 광저우만(廣州灣)을 이양받았다. 베트남 전쟁 때는 1970년대 초까지 라오스 일대에 통킹군을 파병하는 등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견제코자 노력했고, 이로 인해 미국에게서 받은 경제 자금을 토대로 중공업 육성에 나설 수 있었다.

오늘날 통킹은 풍부한 천연자원근대화 과정에서 습득한 영미식 자본주의, 자유 시장 체제를 기반으로 유수의 기업들을 설립 및 유치함으로서 급속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플라자 합의의 영향과 맞물려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을 10%씩 유지시켜나가는 등 경제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MICE 산업, 금융업에 투자를 거듭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IT 산업제조업을 위시한 국내 기업들이 국제 시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통킹의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이다. 외형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포퓰리즘, 정경유착, 쿠데타에 따른 권위주의 정치가 이어지고 있으며, 오랜 전제 통치와 왕실에 대한 우상화군주가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 국왕은 시우칭(紹淸)[13], 총리는 레이가이닥(李偕德)[14]이다.

국가 상징

국명

통킹의 공식 국명은 통킹 왕국(중국어: 東京王國, 영어: Kingdom of Tonkin)이다. 광둥어로 '둥깅웡궉'(광둥어: Dung1 Ging1 Wong4 Gwok3), 베트남어로는 '브엉 꾸억 동낀'(Vương quốc Đông Kinh)이라 부른다. 본래는 베트남 북부 홍 강 유역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16세기부터는 통킹 섬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편 17세기부터는 사이궁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가 코친차이나(交趾支那, Cochinchine)란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지면서 20세기 초까지 통킹과 함께 '코친차이나 왕국'(Kingdom of Cochinchina)이란 명칭이 혼용되기도 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통킹을 '해남'(海南), '남월'(南越), '주애'(朱崖)[15]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송나라 때는 '일남'(日南, 얏남)[16], 명나라 이후로는 '동주'(銅柱, 퉁쥐)라는 이름으로 국제 무대에 나섰다. 지금의 '통킹'이란 국호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국호로 확립되었으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Dōngjīng'(둥징), 일본은 'トンキン'(톤킨)[17]이라 표기한다. 이외에 별칭으로 사조(士朝, 시치우), 사가(士家, 시가)라 칭해지기도 했다.

국기

둥깅케이 (동 경 기)
東京旗 / Flag of East capital / Dung1 Ging1 Kei4

용도 민간기·정부기·상선기
채택일 1856년 9월 17일
국기 요소 청색 바탕의 황색 원과 초승달, 적색과 흰색 가로 줄무늬
비율 3:2
설계자 친잉힌(錢影獻, Cin2 Jing2-hin3)[18]

국장

통킹의 국장
東京國章 | Coat of Arms of Tonkin
파일:CoA Tonkin.png
용도 공식 국장
제정시기 1873년 9월 17일

국가

틴 고우 보우 윗 (하늘이 높아 달빛을 거닌다)
天高步月 | The Sky is High so Walks on the Moon

지위 공식 국가
채택일 1934년 11월 23일
작사가 푼선와(潘信華, Pun1 Seon3-waa4)
작곡가 라이청야우(黎昌休, Lai4 Coeng1-jau1)

역사

정치

통킹의 정치 정보
東京政治
부패인식지수 68점 2020년, 세계 25위
언론자유지수 27.50 2020년, 세계 53위
민주주의지수 6.05 (결함민주주의) 2020년, 세계 75위

통킹은 1938년 서이싱 혁명 이후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등 자유민주주의를 선두적으로 도입하였다. 허나 천년이 넘게 이어진 왕가의 정통성과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강화코자 한 군부우상화·신격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통킹의 국왕은 그 권위와 상징성을 통해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민주 정치에 반하는 군부의 잇따른 쿠데타 시도와 문벌 귀족재벌정경유착, 지역구 세습, 포퓰리즘 등은 현재까지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통킹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의 의원 정족수는 150명이다. 이들은 4년 임기로 2/3을 직접 선거로, 나머지는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한다. 행정권내각·지방 자치 단체·행정 기관이 담당하며, 내각이 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의회의 신임을 내각 존립의 조건으로 한다는 의원내각제를 채용하고 있다. 사법권법원이 행사한다.

각주

  1. 위에서부터 아래로 사이궁의 야경, 사이궁 노트르담 대성당, 싱룽에 위치한 현릉(賢陵)이다.
  2. 정확히는 가우룽 강 삼각주 일대와 동남부 지대를 일컫는다.
  3. 瓊州海峽, 광둥어로는 '킹자우 해협'(King4 Zau1), 베트남어로는 '꾸인쩌우 해협'(Quỳnh Châu)이라고 부른다.
  4. 통킹 섬 남부에 위치한 해안 도시이며, 적도 기니처럼 수도와 내륙 본토가 떨어져 있다.
  5. 교주의 권력자였던 사섭(士燮)의 아들로 사섭 사후, 오나라 황제 손권이 사씨 일가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자, 이에 반발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여대의 맹공을 피해 통킹 섬으로 망명, 독립 정권을 세우고 교주 일대의 반란들을 지원했다.
  6. 위진남북조시대에는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독립한 전 리 왕조(前李朝, 544 ~ 602)와 함께 한족 왕조의 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했으며, 오대십국시대에는 레이저우 반도를 비롯한 광둥성 일대를 장악했다가 남한의 공격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7. 경종(景宗, 깅중 1635 ~ 1667) 재위기엔 베트남 남부 전역에서 꽝남성(Tỉnh Quảng Nam)까지 이르는 최대 강역을 차지했으나 응우옌 주의 고관, 응우옌후껀(阮有鏡, 1650 ~ 1700)이 이끄는 베트남군에게 패배, 영토를 상실하면서 오늘날의 국토가 확립되었다.
  8. ? ~ 1736, 명나라 출신의 유민으로 청나라의 탄압을 피해 캄보디아로 이민, 재산을 바쳐 옥냐(ឧកញ៉ា, 屋牙 총독)라는 작위를 받아 호신 일대에서 화교 정착촌을 이끌었다. 1687년, 시암군에 의해 피랍되었다가 1700년에 탈출해 호신으로 돌아온 후 통킹 왕조에게 조공을 바쳐 신하를 자처하는 등 정권 유지에 힘썼다.
  9. 17세기부터 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예수회 프랑스 신부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1702년엔 영국 동인도 회사와 조약을 맺어 콴런 섬을 개항하고 무역 독점권을 인정했다.
  10. 통킹을 식민지로 편입할 시, 서로 다른 열강들의 이권을 침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11. 또한 당시 국왕 익종(翼宗, 윅중 1886~1913)과 섭정 레이안쉿(李誾說)이 주도하여 프랑스에게 람둥성, 빈푹성을 할양, 영국과는 푸궉 섬에 대한 조차 조약(1946년에 반환) 체결 등 영토 양도 정책이 국권 수호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2. 찬팅야우(陳廷休) 총리를 위시한 친일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임팔 작전 당시 지원 병력을 요청한 일본군의 요청을 묵살하는 등, 연합국과의 충돌을 피했으며 이는 종전 후 추축국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3. 휘호(輝號, 파이호우)는 '영령휘문왕'(寧令輝文王, 닝링파이만웡)이다.
  14. 연녕백(延寧伯, 윈닝박)을 세습하고 있으며, 레이안쉿의 손자이다.
  15. 사휘의 정착 이전까지는 교주(交州) 합포군(合浦郡) 주애현(朱崖縣)으로 명목상 후한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이었다.
  16. 원래는 교주 일남군(日南郡)으로 베트남 중부 꽝찌성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7. 영문식 발음과 가깝게 표기했다. '도케이'(とうけい)라 읽기도 한다.
  18. 1811~1875, 베트남식 이름인 '띠엔아인히엔'(Tiền Ảnh Hiến)으로도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구주견문록'(歐州見聞錄, 아우자우긴만룩), '법란풍토기'(法蘭風土記, 팟란풍토우게이)를 저술해 근대 사상을 보급하려 했으며, 바이튄 사건(拜屯事件)을 주도해 당시 캄보디아의 왕이었던 앙 두옹(Ang Duong, 1841~1860)으로부터 다이틴공(大天港)을 획득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