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포르투나 왕국의 건국을 계기로 발생한 내전.

이 내전 이후 포르투나 제도 내에서 장원의 영향력은 완전히 붕괴 되었고 자유민이 주축이 되는 코르테스가 포르투나 제도의 정치 중심이 된다.

전개

내전 이전

고트란트 할양
고트란트 할양

포르투나 왕국은 본래 신성 루멘 제국의 일원으로 항해 기사단, 일명 포르투나 기사단이 총괄하는 기사단령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제국에게 충성 하였으며 작센 왕실과 교황청 또한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늑대시대가 시작되고 북방의 해적들이 남하하자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해적들의 남하를 포르투나 기사단의 책임으로 돌렸다.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건국 황제 오토 1세께서 항해 기사단을 창립 계기로 천명한 북방에 대한 수호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했다. 포르투나 기사단은 작센 왕실과 교황청의 지원 없이는 북방 수호가 불가능하다고 호소 하였다.

그럼에도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끝내 지원을 주지 않았고 포르투나 기사단은 결국 북방의 해적들과 협상을 벌여 고트란트를 할양하고 포르투나 제도의 안전을 보호 받았다.

이 협상을 이교도와의 타협으로 본 교황청은 포르투나 기사단을 파문 시켰고 이에 대해 포르투나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포르투나 제도 제 2의 도시이자 자유민의 도시 라고스에서 코르테스를 개최하여 대표들의 만장일치 하에 포르투나 왕국의 1대 국왕 아폰수 1세로 즉위한다.

아톨레이로스 전투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포르투나 왕국이 건국되던 한편 포르투나 왕국에 반대하는 친 제국주의자들은 브리튼의 성직자 장원이자 제 3의 도시인 포르투에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 아폰수 1세가 라고스에서 포르투나 왕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뒤 아폰수 1세는 곧장 포르투나 제도 제 1의 도시이자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거지인 리스보아로 귀환했다. 라고스와는 다른 섬에 위치한 리스보아가 언제 친 제국주의자들에게 침공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친 제국 세력이 노리던 것이었다. 아폰수 1세가 리스보아로 귀환하자 친 제국주의자들은 봉기를 일으키고 리스보아를 봉쇄했다. 이로 인해 라고스의 코르테스와 리스보아의 코르테스 간의 연락망이 끊기고 라고스의 코르테스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베리아의 친 제국 세력인 벨베스는 성전 기사단과 함께 코르테스가 소집 되어있는 라고스를 침공하기 위해 군을 진군 시켰다. 이를 막기 위해 코르테스는 민병대를 구성했고 이 민병대에 참여한 기사이자 지휘관이 바로 성전 기사단 출신의 알바레스 페레이라였다.

아르톨레우스 전투
아르톨레우스 전투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본래 벨베스 군과 함께 라고스로 진격해야 했지만 무능한 제국의 정치 상황에 실망한 경험이 있던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 300과 함께 코르테스에 투항했다. 그리하여 친 제국 세력의 벨베스 군과 페레이라가 이끄는 코르테스 민병대는 자그만한 자유민 마을인 톨레이스에서 만나게 된다. 수적 우위를 자랑하는 벨베스 군은 민병대에게 항복을 요구 했으나 페레이라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대부분의 병력이 기병 뿐인 적군의 상황을 고려해 오늘날에서는 대기병 전략으로 널리 사용되는 사각 대형을 구성해 벨베스 군과 전투를 벌인다. 다만 당시에는 이 사각 대형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실제 전투에서 이것이 활용된 적은 없었다.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당시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사각 대형 전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아톨레이로스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도 대기병 전술로 승리를 거둔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훗날 대기병 전술의 천재, 기병의 공포, 보병에게 내려온 기적 등으로 불리운다.

리스보아 봉쇄

리스보아 봉쇄
리스보아 봉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포르투나 왕국이 승리 하였다고 한들 포르투나 왕국의 수도이자 아폰수 1세가 있는 리스보아는 여전히 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봉쇄 되어 있었다.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패배한 친 제국주의자들은 내전을 장기전으로 이어가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고 리스보아에 대한 봉쇄를 지속했다. 이 작전을 주도한 이들은 친 제국주의자들의 두 기둥이라 평가 받던 아라곤 가문과 카스티야 가문이었다.

한편 라고스의 코르테스와 리보스의 포르투나 왕실은 은밀한 통신망을 구성하는데 성공 하였고 리스보아 보급 작전을 펼친다.

리스보아로 물자를 공급하는 길은 크게 세 곳이 존재한다. 하나는 바닷길을 따라 리스보아 만으로 들어오는 길이고 나머지 둘은 강을 따라 이동하여 리스보아 만까지 들어가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은 아라곤의 해군이 막고 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길은 카스티야의 육군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 봉쇄망을 뚫기 위해 포르투나 왕립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포르투나 왕국 아베스 왕조의 개창자 아폰수 1세는 작전을 준비 하였고 이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알바레스 페레이라에게 작전에 대한 전권을 건내준다.

작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리스보아로 통하는 물류의 핵심은 바닷길이다. 우리는 라고스의 해군과 포르투나 기사단의 해군의 동시 공격으로 바닷길의 봉쇄망을 풀러야한다.

2. 만약 바닷길에서 큰 성과가 없다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육군의 봉쇄망을 풀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이에 대한 준비로 도시 내의 육군은 리스보아를 봉쇄하고 있는 적군을 공격하여 혼란을 야기 한다.

3. 도시 내의 육군들이 적군에게 혼란을 주는 사이 대기 중인 도시 밖의 육군은 강을 봉쇄하고 있는 군을 기습하여 봉쇄망을 푼다.

제 1 작전은 예상대로 실패했다. 그렇다고해서 포르투나 왕국의 해군이 완패를 한 것은 아니다. 라고스와 리스보아의 해군의 동시 공격으로 막강한 아라곤 해군의 봉쇄를 푸는 것은 실패했지만 전투의 틈을 타서 보급품을 실은 라고스의 상선들이 리스보아로 진입 할 수 있었다.

제 2 작전은 굉장히 무모한 작전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공격을 막아내야 되기 때문이다. 리스보아 남동쪽에 위치한 아라곤 군의 관심을 끌기위해 아폰수 1세가 직접 군을 이끌었고 북동쪽에 위치한 카스티야 군의 관심을 끌기 위해 훗날 바다의 왕자라 불릴 엔히코 왕자가 군을 이끌었다. 그렇게 제 2 작전은 시작 되었다.

제 3 작전은 제 2 작전 직후 곧 바로 시작 되었다. 강길을 통해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모여든 이름 없는 민병대들은 아라곤 군과 카스티야 군의 혼란을 틈타 강을 봉쇄하는 소수의 병력들을 급습하였고 강의 봉쇄를 일시적으로 푸는데 성공했다.

제 3 작전의 성공으로 리스보아는 겨울을 버틸 물자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고 리스보아를 봉쇄하고 있던 친 제국주의자들은 겨울이 되어 군 내에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끝내 봉쇄를 풀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알주바로타 전투

알주바로타 전투
알주바로타 전투

리스보아 봉쇄가 해제되고 몇 달 뒤 그러니깐 다음해 봄 제국에서 새로운 교황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작센 왕실 하인리히 2세의 지명으로 교황이 된 꼭두각시 빅토르 2세였다. 빅토르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포르투나 왕국의 독립을 비난하고 아폰수 1세를 파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하인리히 2세의 명으로 트레스단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고 이 공의회에서 포르투나 왕국에 대한 십자군이 결정되었다.

십자군은 포르투나 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 항구인 브레머 하펜에 모여들었고 포르투나 제도 내의 친 제국주의자들의 중심지이자 주교령으로 통치 받고 있던 포르투로 출항하였다. 그리하여 포르투에 모여든 친 제국주의자들의 군대와 십자군은 재정비 후 리스보아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모를리 없던 포르투나 왕국측은 리스보아로 진격하는 십자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고 이 전투가 바로 알주바로타 전투이다. 숲에서 날아오는 장궁병들의 화살로 시작된 이 전투는 앞선 두 대규모 전투들과 마찬가지로 포르투나 왕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고 십자군은 분열된 체 다시 대륙으로 귀환 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나 왕국의 반격

앞선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완승을 거둔 포르투나 왕국은 거침 없이 진격해나갔다.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완패한 벨베스 가문은 성전 기사단의 도움으로 망명 했으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장원들은 모두 포르투나 왕실 소유로 전환되어 농노들은 모두 자유민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저항이 심한 카스티야 가문과 아라곤 가문은 섬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내부의 분열을 만들어나갔다.

친 제국주의자들의 분열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대립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대립

카스티야 가문과 아라곤 가문 간의 갈등은 유서 깊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포르투나 왕국의 독립으로 인한 자유민의 권력 강화와 장원의 쇠퇴라는 위기 앞에 잠시 묻어 둘 수 있었지만 세 차례의 전투에서 패하고 포르투나 왕국의 반격이 시작 됨에 따라 두 가문의 갈등은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 불에 더욱 기름을 부은 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아라곤 가문의 핵심 장원 중 하나였던 바르켈로나가 점령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바르켈로나를 통치하고 있던 아라곤 가문 당수의 차남이 포르투나 왕국의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라곤 가문은 주화파로 돌아섰고 끝내 포르투나 왕국에게 투항 하였다.

내전 종식

포르투나 왕국의 승리
포르투나 왕국의 승리

아라곤 가문의 투항으로 친 제국주의자들은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하였고 카스티야 가문이 위치한 바야돌르 마저 포르투나 왕국군에게 함락 당하고 카스티야 가문이 대륙으로 망명함에 따라 내전은 완전한 포르투나 왕국의 승리로 끝났다.

신성 루멘 제국은 여전히 포르투나 왕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역 금지령을 발표하여 포르투나 왕국을 압박 하였으나 홀란트 후국을 비롯한 몇몇 제후국들과 밀무역을 하고 항해 왕자 엔히코의 신항로 개척이 성공함에 따라 포르투나 왕국은 혼란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