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문서:프리슬란드

프리-판크라티온

신대륙 북부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34000년으로 추정된다.

구대륙 동부인 오플란 북부로부터 빙하기로 인해 낮아진 해수면으로 건너온 북방인이 프리슬란드 최초의 인간이다. 북방인은 수렵과 채집 중심으로 생활하며, 뗀석기를 사용하는 구석기 수준의 기술을 갖췄다. 북방인들은 대륙 북부와 서부를 시작으로 신대륙 각지로 퍼져나갔다. -20000년 전부터는 신대륙에 자생하는 일부 동식물을 가축화/작물화하면서 농업과 목축을 시작했고, 강을 중심으로 원시적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4000년 부터는 헤스페로스벨트 북부로부터 해로를 통해 해양인이 유입되었다. 해양인은 석기시대였던 신대륙 북부 원주민인 북방인과 달리,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 제련 기술을 갖춘 상태였다. 해양인은 금속기를 활용해 북방인을 정복하거나, 북방인과 동화하면서 신대륙 동부를 중심으로 사회를 형성했다. 금속기 기술을 갖춘 해양인과 그에 동화된 북방인은 서부로 유입되었고, 금속기 도입이 늦었던 서부의 북방인들은 대부분 해양인 출신들에게 복속당하고 만다.

해양인들이 지배층, 북방인들이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계급사회가 신대륙 북부 각지에 형성되었으며, 대륙 중부에는 해양인들에게 땅을 뺏기거나, 농경지에 부적합한 곳에 이주하게 된 북방인들이 유목민족화되었다.

신대륙 북부에 문명이 자리잡은 것은 -1000년 부터였다. 당시 프리슬란드 문명권은 크게 동부의 도시국가, 서부의 왕조, 중부 대평원의 유목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부는 좁은 의미의 동부인 동북부와 해안과 맞닿은 동남부로 나뉜다.

동부 도시국가들은 공통적으로 토지를 보유한 시민과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나뉘었다. 농민은 시민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고, 시민은 보유한 토지를 기반삼아 농민을 지배하는 지주였다. 시민들은 서로를 견제했고, 다른 시민을 압도하는 대지주의 출현을 경계했다. 그 결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토론과 투표로 의사를 결정하는 공화정이 주류 체제로 자리잡았다.

동부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도시국가가 난립했고, -800년 부터 세워진 판크라티온도 그 중 하나였다.

고대 판크라티온

과두정

판크라티온은 본래 자신만의 땅을 가지려는 개척자, 도시를 떠난 농민, 도망노예, 떠돌이 유랑민, 몰락시민 등이 모여사는 정착지였다. 판크라티온 지역은 크게 3개의 언덕과 중앙 구릉으로 구성된 지형이었다. 거주민들은 맹수의 침입과 노예사냥꾼, 다른 도시의 침략 같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3개의 언덕에 망루를 세우고, 언덕 사이를 성벽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언덕 안쪽 구릉지에 거주지를 건설해 도시를 형성했다.

판크라티온은 다른 도시국가들처럼 시민들의 투표와 토론으로 주요 안건을 결정했다. 그러나 판크라티온은 시민의 선정 기준이 다른 도시들과 차이가 있었다. 다른 도시국가들에선 토지 보유자가 시민의 자격이었던 것과 달리, 판크라티온에선 판크라티온의 주민이냐 아니냐가 시민의 선정 기준이었다. 토지가 없음에도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판크라티온의 이점이었다. 이는 다수의 피지배층들에게 매력적이었고, 판크라티온으로의 이주가 잦아졌다.

비록 지식과 능력의 차이로 인해 판크라티온에서도 몰락 시민들이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토지를 통해 세습되는 다른 도시국가의 시민계급과 달리,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은 순전히 선거를 통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선거에 떨어지면 더 이상 지배층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고, 출신에 상관 없이 판크라티온 시민이라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치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통치자는 항상 다수로 구성되었다.

인구 확장과 다른 도시와의 외교 등 통치자의 업무가 세분화 되면서 경제, 산업, 재정, 법률, 군사, 외교, 행정, 학문을 다루는 8명의 전문가와 4명의 선출자, 그리고 전문가와 선출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대표자로 구성된 13인의 의회에 기반한 과두정이 판크라티온의 통치 체제로 결성되었다.

판크라티온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통해 빠른 속도로 인구를 늘렸고, 그 인구를 분산시키고자 영토를 확장했다. 판크라티온을 중심으로 개척 도시를 건설하고, 다른 도시를 무력으로 복속시키면서 해당 도시의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되 농민을 해방시켰다. -2세기 즘에 들어설 때면 판크라티온은 여러 개척 도시와 동맹시를 보유한 영토국가로 거듭났다.

시민과 농민을 가리지 않는 수평적인 통치구조는 판크라티온의 유입 인구를 늘리는데 효율적이었으나, 그만큼 자국의 노동력과 인재 유출을 우려하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견제 대상이 되었다. 특히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만연했다. 판크라티온에서도 토지는 재력의 상징이었고, 인구 부양과 생산력 확대를 위해서라도 토지가 필요했다. 다른 도시국가들도 토지가 중요 자원인 만큼, 판크라티온의 영토확장을 경계했다.

-185년, 말루스와 라쿠스를 주축으로 한 신대륙 동북부의 프록터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록터스 동맹은 판크라티온에 동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으나, 판크라티온은 이를 거부했다.

-164년, 프록터스 동맹과 판크라티온의 도시전쟁이 발발했다. 프록터스 동맹은 판크라티온에 의해 노동력을 유출당한 도시국가들이 많았고, 이 기회에 판크라티온을 제압해 노동력 유출을 방지함과 동시에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4년간의 전쟁 결과, 판크라티온이 승리했다. 프록터스 동맹은 와해되었고, 그 곳의 농민들은 '해방'되어 판크라티온의 시민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프록터스 동맹의 지배층에게도 판크라티온의 시민으로 합류할 선택권을 제공했다. 그들은 선택을 거부하면 세금과 보조 병력 제공을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다.


귀족정

프록터스 동맹의 복속으로 도시국가 지배층들이 판크라티온 사회에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자치를 통해 세력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고, 판크라티온이라는 단일 체제를 통해 다른 도시의 지배층과 긴밀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판크라티온의 인구와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를 총괄할 수 있는 지배 수단이 필요했다.

구 지배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분야의 전문가들과 행정관료직에 진출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농업을 위해 교육과 정치에 참여할 시간/자원이 부족했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출 뿐 아니라, 인맥과 교육을 통한 학력까지 갖춘 구 지배층은 관직에 오르기 유리했다.

건국력 원년에 이르러서, 판크라티온은 귀족과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재력과 교육, 인맥을 갖춘 귀족은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으로써 군림했고,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들은 지배층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비록 장군을 비롯한 소수의 지휘관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판크라티온의 병력 대부분은 일반 시민들이었기에 귀족은 시민을 어느정도 존중했다.

정치체제 역시 과두정에 기반한 공화정을 채택했다. 판크라티온의 정치 체제는 귀족들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이 주어진 원로원과 그들에 의해 임명되는 12명의 위원과 집정관, 그리고 원로원의 결정에 거부권과 이의권을 가진 민회, 법률과 무력의 집행을 담당하는 법관이 공존하는 귀족정으로 체계화되었다.

건국력 원년기 신대륙 동부는 북동부의 판크라티온과 북남부의 마리아네스 해양왕조로 양분되었다. 토지에 근간한 영토국가였던 판크라티온과 달리, 마리아네스는 해안 습지와 바다, 신대륙 남부와의 교역 등 해양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쌓은 국가였다. 바다민족으로 불리는 말레나인이 주축인 마리아네스는 초창기만 해도 판크라티온과 교역 중심의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의 확장을 경계했고, 추후 판크라티온이 마리아네스의 경쟁자로 성장할 것을 우려했다. 해양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복속시켰던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 역시 복속시키고자 했고, 판크라티온 역시 마리아네스의 해양 세력을 자신들이 차지하고자했다.

45년부터 195년에 이르는 150년의 기간동안 54년에서 60년, 169년에서 174년, 190년에서 195년에 이르는 총 3차례의 테메르 전쟁과 그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과 경제전쟁, 체제경쟁은 판크라티온이 겪은 최대의 충돌이었다.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과 경제적, 군사적으로 동등했으며, 해군력을 활용한 기동전으로 판크라티온의 동부 해안을 유린했다. 그러나 토지에 기반한 농업국가였기에 인구와 생산력 면에서 유리한 판크라티온은 지구전으로 마리아네스를 압도해나갔다. 해군력 역시 지속적인 경험 축적으로 3차 테메르 전쟁 시점에서는 마리아네스와의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마리아네스의 무역로를 장악해 경제적으로 고사시켰다.

판크라티온은 200년에 들어서 신대륙 동부를 통일했다. 그러나 방대한 영토와 분배 주도권을 갖춘 귀족층에게 부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귀족층은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개척과 정복을 통해 시민에게도 출세의 희망을 주고자 서부로의 원정을 펼쳤다.

농사와 병력, 물자 수송에 유리한 강과 호수를 중심으로 신대륙 서부로의 개척이 판크라티온에서 이뤄졌다. 판크라티온 시민들은 귀족과의 격차를 매꿀 수 있는 법은 서부로 진출해 개척&개간으로 토지를 얻고, 자원을 개발하는 것 뿐이었다. 그 결과, 판크라티온인들은 대평원에까지 진출했다. 이때 대평원에는 유목민들의 정복 왕조가 형성되었다.

총 200여년에 걸친 서부 개척은 대평원에 판크라티온의 문명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평원의 유목민족과 판크라티온의 충돌을 자아냈다. 판크라티온의 유목민족들은 수오족, 힌족, 아켈렌족, 코우치족, 감람족 등이 있었다. 5갈래의 야만인이라는 뜻의 '펜타길로스'라 불린 이 유목민족들은 판크라티온 개척민들을 약탈, 복속시키면서 판크라티온과 갈등을 빚었다.

판크라티온 지배층은 시민들의 개척을 장려하면서 개척민들이 진출한 영역의 원주민과 충돌이 빚어질 시,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단을 파견해 복소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평원의 원주민인 유목민족들 중 오직 펜타길로스로 언급된 5개 부족만이 살아남았고, 그들은 각각 통일 왕조를 구성할 때 마다 판크라티온을 침략했다.

309년, 유목군주 테오-네-키칸은 수오, 힌, 아켈렌, 코우치, 감람족을 모두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판크라티온의 문명과 위세를 잘 알고 있던 테오-네-키칸은 이를 자신의 부족인 힌 부족에 적용했다. 아켈렌 부족 다음으로 판크라티온 문명을 받아들인 힌 부족은 테오-네-키칸의 지도하에 다른 부족들을 복속했다. 유목민 특유의 기동성에 판크라티온의 문명이 더해진 힌 부족은 다른 부족들을 압도했고, 판크라티온 역시 다른 부족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테오-네-키칸을 지원했다.

320년, 모든 부족을 통일한 테오-네-키칸은 판크라티온을 침략했다. 당시 판크라티온은 사회적 불만 해소와 출세 수단을 서부 개척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테오-네-키칸에 의해 서부로의 진출이 막히면서 귀족과 원로원은 사회적 불만에 직면했다.

귀족들 사이에서조차 기득권을 양보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기우스 그라이스에 의해 나오고, 330년에 그가 집정관에 임명되면서 이를 실천에 옮기려다 암살당했다. 그러나 테오-네-키칸과의 전쟁에서 이는 악수로 작용했다. 그라이스를 암살한 귀족층은 주도권 경쟁으로 내분에 빠지면서, 테오-네-키칸은 판크라티온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수도 판크라티온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333년, 판크라티온의 수도 군단장이었던 율 제시우스는 분열된 귀족층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쿠데타를 일으켰다. 율 제시우스는 원로원을 장악하자마자 원로원의 모든 결정권을 집정관인 자신에게 위임하고, 전문가와 대표자는 집정관의 보좌진으로 전락시켰다. 그 후 지휘체계를 단일화해 수도 판크라티온에서 테오-네-키칸을 몰아낼 회전을 준비했다.

테오-네-키칸을 비롯한 유목민족들과의 전투 경험이 많았던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이 직속 부대를 비롯한 소수 정예 기병 중심의 기동전으로 수도까지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후방이 노출되었다는 걸 간파했다. 테오-네-키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수도에서의 회전을 유도하고, 그 사이에 테오-네-키칸의 후방을 차단해 보급과 지원을 봉쇄하는 전략을 짰다.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을 도발한 뒤, 수도로 진격하도록 유도했다. 성벽에서 농성전을 벌이며 돌파구가 생기면 그 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식으로 지구전과 소모전을 벌인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이 그에 휘말려 보급과 병력 보충이 안되는 걸 눈치채자, 그의 부대를 포위 섬멸했다. 그 후, 제시우스는 후방을 안정화한 다음 유목민족들을 각개격파했다. 속전속결을 상정했던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구심점인 테오-네-키칸의 전략이 실패하면서 주도면밀하고 압도적인 물량과 생산력에 기반한 제시우스의 전략을 감당할 수 없었다.

335년, 제시우스는 5대 유목민족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제시우스는 판크라티온으로 개선한 다음, 집정관으로써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전쟁영웅으로써 명성과 능력을 모두 갖춘 제시우스가 종신 집정관으로 군림할 것을 우려한 원로원이 제시우스를 암살하면서, 그의 후계자였던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이 집정관에 올랐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원로원에 동조하는 척 했다. 그러나 제시우스가 원로원에 암살당했음을 시민들에게 폭로했고, 더 나아가 원로원을 구성하는 귀족층의 부정과 독점을 비난하며 선동했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선동한 시민과 제시우스로부터 물려받은 군권을 토대로 친위 쿠데타를 벌였다. 그 결과 원로원은 유명무실해졌고, 1인 독재정인 참주정이 자리잡았다.


참주정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원로원을 숙청한 뒤, 자신을 참주(True Lord)로 선언했다. '참된 군주'라는 뜻의 참주는 판크라티온의 유일한 세습직이되었고, 원로원은 참주를 보좌하고, 민회와 의견을 조율하는 기관으로 조정되었다.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참주정의 근간을 마련했다.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와 이를 보조/지원하는 체계적인 관료제, 그리고 세부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자치를 보장하는 형태로 체제를 구축했다. 참주 아래에서 모두가 균등한 전제 체제를 통해 귀족과 시민의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참주직이 부족의 족장과 대표 직을 겸하는 식으로 대평원의 유목민들을 판크라티온 체제에 편입시켰다.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생전 동안 판크라티온의 내정을 안정화하는데 집중했다. 유목민족과 판크라티온의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면서 도로와 수도망을 판크라티온 전역에 구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의 정책 중 결정적인 것은 공공복지 제도였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삶이란 생존과 생활이며, 이 두가지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참주의 의무임을 주장했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판크라티온 시민들에게 곡식과 소금, 소량의 야채와 고기, 생선을 배급하는 기본 배급제를 실시하고, 오락을 위해 문화산업을 장려했다. 이 2가지 정책을 통해 판크라티온 시민들은 참주정 체제에 만족하면서 수백년간 참주정이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

마그나 판크라티온으로 대표되는 판크라티온의 전성기는 500년 가까이 이어졌다. 거대한 신대륙의 영토를 바탕으로 거둬지는 생산력은 재건된 자영농과 상업망을 통해 고루 분배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남부의 나왈라를 비롯한 이민족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남부에 장벽을 건설하고, 유목민족들을 기병으로 편입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마그나 판크라티온이 500년간 지속되면서, 전제군주제에 기반한 참주정의 권력은 집중되었다. 시민들 역시 공공배급과 문화 오락을 통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면서, 판크라티온 사회는 점점 경직되었다.

854년, 판크라티온의 암군 헤세누스가 참주로 즉위했다.

헤세누스는 소유욕이 강한 인물이었고, 참주라는 권력을 활용해 자신이 가지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지고자 했다. 9세기 경에는 부패가 만연하게 된 판크라티온의 관료제는 그 중심에 참주가 있었다. 관료제의 말단에서 윗선으로 향하는 뇌물의 종착지는 참주였고, 권력이 참주에게 집중된 가운데 관료층은 참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헤세누스는 그 점을 이용해 관료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재력을 모으고, 이를 자신의 사치에 낭비했다.

헤세누스의 낭비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 비용이 유출되었다. 그 결과 나와틀 포식왕조에 의해 남부가 무방비해졌고, 신대륙 북방의 부족들 역시 판크라티온을 공략하고자 했다. 판크라티온 내부에서도 시민들의 눈을 가릴 공공복지와 문화 오락의 공급이 끊어지면서 참주에 대한 반발이 곳곳에서 산개되었다.

판크라티온 내외부적으로 참주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헤세누스는 이를 군사적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판크라티온의 군사력 역시 분열되었다. 참주의 지배령은 수도 인근에만 유효했고, 판크라티온 각 지역에는 반란과 이민족의 침략이 확산되었다.

860년, 6년의 지배 끝에 헤세누스는 쿠데타로 쫒겨나고 말았다. 헤세누스의 뒤를 이어 참주의 자리에 오른 콘스난티우스는 판크라티온의 기강을 확립하고, 내외적 혼란을 수습하는데 집중했다.

콘스난티우스는 헤네누스가 축적한 재화와 사치품을 모조리 처분해 막대한 자금을 얻었다. 그리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반란 세력을 포섭했다. 총 15년에 걸친 수습전쟁 결과, 콘스난티우스는 가까스로 판크라티온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난티우스는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수단을 서부 개척으로 찾았다.

대륙 동부에서 서부를 완전히 잇는 대륙의 동서횡단을 통한 새로운 개척이야말로 정체된 판크라티온을 바꿀 유일한 기회로 판단한 것이다.

콘스난티우스는 대륙 서해안을 목표로 새로운 개척을 실시했다. 스스로 서부로의 진출을 주도하고,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세력 기반을 마련해 참주정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려는 의도도 있었다. 콘스난티우스는 대륙 서해안에 신도시 옥시덴탈리스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 도시를 거점삼아 판크라티온 동부, 중부 대평원과 연결망을 구축하고, 서부 개척을 주도했다.

비록 콘스난티우스는 872년, 과로로 죽었으나 그의 사후에도 참주정의 서부 개척은 계속되었다.

콘스난티우스 사후 참주에 즉위한 라네스토스는 수도를 옥시덴탈리스로 옮겼다. 그 후 수도 이전으로 고조된 동부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판크라티온의 도시들에 자치권을 허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콘스난티우스가 형성한 서부를 핵심 지지세력으로 구축한 뒤, 판크라티온 본토에서는 지지를 유지하는 식으로 참주의 권력을 재건한 라네스토스는 자치가 허용된 도시의 대표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는 광대한 판크라티온의 영토를 통치하고, 민심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이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구조적으로 판크라티온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된다.


영성교의 발흥

판크라티온의 후기 참주정은 참주를 중심으로 한 관료와 각 도시, 지역의 대표자와 유력자들로 대표되는 지배층이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 연결망은 거대한 인맥이었고, 판크라티온 사회에서 이 연결망에 들어가는 것이 곳 출세의 증표였다. 후기 참주정의 초기만 하더라도 연결망 외부의 인재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는 식으로 영입해 사회 불만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판크라티온의 연결망이 이너서클화되면서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형태로 변해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판크라티온 후기 참주정이 위기를 맞은 것은 13세기 부터였다. 헤스페로스벨트의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신대륙의 존재가 구대륙에 알려졌다. 구대륙의 항해사들은 신대륙으로의 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과의 교역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교역은 결과적으로 판크라티온의 경제를 헤스페로스벨트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교역망을 담당한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은 화약을 비롯한 헤스페로스벨트의 문물과 자원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도 그것들이 필요한 판크라티온 귀족과 관료들은 교역에 적극적이었으며, 참주역시 이러한 교역을 장려했다.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를 위시한 해양세력들은 무역 독점과 판크라티온 내부의 경쟁을 유도했고, 판크라티온 내부에서는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한 암투와 정쟁이 가속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배층의 연결망 내부에서 다수의 인물이 암살, 사퇴 등으로 제거되었다. 연결망 외부의 인재 역시 영입이 거부되면서 여전히 사회 불만 계층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크라티온에선 새로운 신앙이 대두되었다.

헤스페로스벨트와의 교역은 주로 신대륙 동부에서 이뤄졌다. 판크라티온 시를 비롯한 동부 해안은 콘스난티우스의 자치권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었다. 고대 이래 건설된 주요 도시들은 자치를 토대로 자유도시로서 교역을 주도했다. 그러나 교역 과정에서 판크라티온의 문화와 경제가 헤스페로스벨트에 장악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들은 헤스페로스벨트의 신앙에 관심을 가졌다. 헤스페로스벨트의 주류 신앙인 황제교 같은 종교는 군주를 중점으로 한 교리에 기반했다. 이 종교적 특징을 눈여겨본 이들은 세속의 군주 대신 영적인 군주인 영주(Spiritual Lord)를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불필요한 욕망의 배제와 정신과 철학, 실용을 중시하는 금욕적 사상을 영주의 뜻이라는 교리로 설파했다.

이러한 교리는 1200년에 카르반 베잇에 의해 영적이며 성스러운 신앙이라는 뜻의 영성교(Holy Spiritualism)는 신흥 종교를 탄생시켰다.

영성교는 신대륙 동부를 시작으로 판크라티온 곳곳에 포교되었다.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의 경제적 침탈의 가장 큰 피해자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영성 신앙이 형성되었으며, 영성교에 대한 신앙은 헤스페로스벨트의 침탈에 항거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영성교에 대한 해석에 따라 판크라티온이 동서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판크라티온 분단

영성교는 옥시덴탈리스를 중심으로 한 신대륙 서부에도 퍼져나갔고, 1200년대에 제위한 참주 크로니누스는 영성교에 주목했다. 선대 참주인 하드라누스의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기존 지배층과 거리감이 있었던 크로니누스는 참주권을 강화하고, 판크라티온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세로운 헤게모니가 필요했다.

그리고 판크라티온 각지에 확산되는 영성교 신앙은 헤게모니로써 잠재력이 충분했다.

영성교의 확산을 경계하던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이 판크라티온 동부의 자유도시들을 압박하면서 영성교는 보호자와 후원자가 필요했다. 크로니누스는 자신이야말로 영성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영성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크로니누스는 본질적으로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영성교를 원했다.

크로니누스는 영성교의 교리를 분석했고, 그 기원인 헤스페로스벨트의 황제교 같은 신앙의 교리를 연구했다. 본래 헤스페로스벨트의 근원에 맞춰 군주를 숭배하고, 영적인 군주가 아닌 실존하는 군주, 즉 판크라티온 참주를 숭배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임을 주장했다. 영성교는 크로니누스의 주장에 분열되었다. 참주의 지원을 필요로 한 수정주의와 본래 교리를 곡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 근본주의는 충돌했고, 이는 각각 참주의 권력이 강한 서부와 자유도시들의 중심지인 동부로 나뉘었다.

참주 숭배를 인정한 서부 교파는 참주의 보호와 후원 아래 발전할 수 있었던 반면, 참주정과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정한 동부 교파는 독자적으로 헤스페로스벨트의 침탈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의 영성교 탄압이 계속되면서, 동부 교파는 영성교 신자들을 규합한 뒤 '신성 판크라티온'이라는 저항 세력을 결성했다. 이들은 화약무기를 비롯한 헤스페롯스벨트의 문물과 기술을 연구했고, 자유도시의 지배층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확산되는 영성교 신앙을 인맥으로 이용했다.

1220년, 신성 판크라티온은 영성교 신자들이 분포된 자유도시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 봉기를 일으켰다. 영성교 서부 교파 교주 샤르네수스와 노예 출신 지휘관 프로테이어스의 주도하에 판크라티온 시를 장악한 신성 판크라티온은 화약무기와 수레를 활용한 대기병전술, 게릴라전 등을 통해 판크라티온 시를 포위한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 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신성 판크라티온은 영성교 신앙을 중심으로 자유도시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연합체를 표방했다. 종교적 지도자이자 구심점인 사도성을 중심으로 영성교의 봉기가 성공한 자유도시들을 합류시켰다.

그러나 마그니우스, 베른하이어 등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은 신성 판크라티온에 맞서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했다. 동시에 자유도시들을 매수하고, 용병을 고용해 신성 판크라티온을 압박하면서 자유도시간 내분을 이용했다. 또한 판크라티온 참주령 역시 신성 판크라티온의 봉기를 방관하면서, 신성 판크라티온은 결성 19년 만인 1239년에 붕괴되고 만다.

신성 판크라티온의 붕괴와 함께,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은 참주령 판크라티온과의 협약으로 판크라티온을 동서 분할했다. 중부 대평원을 원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중립지대로 삼아 그 서부는 참주령, 동부는 열강에 의해 관리되는 자유령으로 나누는 판크라티온 협약이 1240년에 체결되었다.


식민지 시대

판크라티온 협약에 의해 판크라티온은 3갈래로 분할되었다.

참주령은 서부에서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영토의 절반을 잃고, 정치/경제적으로도 헤스페로스벨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참주의 즉위 과정에서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의 입김에 직면했고, 경제중심지인 동부 해안은 자유도시들의 연합체인 자유령이 되었다. 자유령은 명목상으로는 자유도시들의 자치를 보장하는 자유도시의 연합체였으나, 그 실상은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였다. 베른하이어 같은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은 판크라티온 동부의 자유도시들에 자국의 영향력을 끼쳤으며, 마그니우스 같은 후발주자들도 이에 참여하면서 도시국가간 대리전과 무역경쟁이 심화되었다.

판크라티온 자유령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헤스페로스벨트 열강은 선발주자인 베른하이어와 후발주자인 마그니우스였다.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는 자유도시간 동맹을 통해 상대 도시의 무역과 외교를 견제했다. 베른하이어는 말루스 시를 주측으로 한 프라이란트 동맹, 마그니우스는 마리아노스 시를 중심으로 한 나바르 연맹을 후원했다. 판크라티온 대륙 동부의 중심지인 판크라티온시는 영성교의 반발을 막을 겸, 주요 불만 세력을 한데 모아 관리하기 쉽도록 영성교의 자치를 허용했다. 판크라티온 시는 사도성이 직접 다스리는 사도령으로 인정받았고, 이는 판크라티온 시 외부 상황에 영성교를 통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대가였다.

판크라티온 동부는 마그니우스 문화, 베른하이어 문화와 기타 헤스페로스벨트 문화, 대평원 유목민의 문화, 판크라티온 문화가 섞이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고, 헤스페로스벨트로부터의 이민도 유입되었다.

한편, 대륙 서부의 참주령에서는 헤스페로스벨트를 축출하고 동부를 되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참주 개인 숭배에서 벗어나 영성교의 본래 교리로 돌아가야 하며, 판크라티온 역시 만인이 시민으로써 권리를 행사하던 시민권의 전통을 되살려야 함을 주장하는 회귀주의가 대두되었다.

이 회귀주의는 오랫동안 탄압받았으나, 1473년에 센크란시우스가 참주에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참주 센크란시우스는 독실한 영성교 신자로, 영성교의 동서부 교파를 통합하고, 이를 통해 판크라티온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참주령을 개혁해 국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기득권의 저항을 제압하는 것도 중요했다.

센크란시우스는 회귀주의에 접근하면서 기존의 영성교 동부 교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된 회귀주의를 통해 종교적으로 기존 기득권을 이단으로 내몬 뒤, 이를 바탕으로 신흥 소장파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개혁을 꾀했다. 동시에 영성교 신앙을 활용해 반대 세력을 제압했고, 동부의 사도성과도 물밑으로 접촉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판크라티온 동부에서도 헤스페로스벨트 열강에 대한 반발이 고조되었다. 본래 반 헤스페로스벨트 성향은 판크라티온인에게만 국한되었으나, 구대륙에서 이주한 헤스페로스벨트 출신들도 선발 주자들에게 차별받으면서 불만 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영성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열강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원했다.


프리슬란드 결성전쟁

헤스페로스벨트의 해운국가이자 상업국가인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는 제해권 장악과 해운무역을 통한 수익을 국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다 16세기 들어 마그니우스가 식민지 지배의 최종승자가 되면서, 자유도시의 정세에도 격변이 생겼다. 판크라티온의 자유도시들은 마그니우스 식민지 중 최대 흑자 산출국이었다. 마그니우스가 판크라티온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을 토대로 벌인 상품거래 독점과 정치적 간섭은 그들의 수익을 유지시켰을지언정, 판크라티온의 불만을 고조했다.

마그니우스는 Divide and Rule 에 의거해, 베른하이어로부터 프라이란트의 통제권을 확보했음에도 나바르 연맹과 통합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1500년에 즉위한 참주령의 참주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센크란시우스의 뒤를 이어 판크라티온 동부를 탈환하고자했다.

1501년, 마그니우스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말루스 시에서 마그니우스의 높은 관세와 선박 독점으로 인해 물가가 치솟으면서, 말루스 시 시민들의 생계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말루스 시 시민들은 관세 완화와 입항 선박의 자유화를 요구했으나 마그니우스의 주둔군은 이를 무력 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말루스 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말루스 시 항구에서 무력충돌로 비화되었다.

영성교의 중재하에 무력충돌이 더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말루스 시민들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말루스 시 봉기를 계기로 판크라티온 동부에서는 헤스페로스벨트 열강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확대되었다. 영성교의 수장 사도성은 지속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참주와 밀약을 맺었고, 참주가 지원하는 물자와 장비가 영성교 신자들을 통해 비밀리에 공급되었다.

5년간 고조된 불만은 1502년에 다시 확산되었다. 1502년,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선원들에게 급료가 미지급되고, 식사 역시 부패한 염장고기와 곰팡이가 핀 빵이 배급되자 선원들이 일제히 파업에 나섰다. 이 파업으로 프라이란트 동맹의 마그니우스 선박 물류가 마비되면서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물가가 급상승하고,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졌다.

프라이란트 동맹의 자유도시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국 선박의 입항을 허가할 것을 요구했으나, 마그니우스는 이를 묵살하고 반발에 대한 본보기로써 말루스시를 유혈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피난한 영성교 교회가 마그니우스군에게 포위당했다. 1달간의 포위 끝에, 영성교의 말루스 주교 라오니스는 투항하는 대신 포위를 풀 것을 합의했으나, 투항하자마자 마그니우스군의 진압으로 교회의 시민 다수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라이란트 동맹 내 영성교 신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사도성 역시 말루스 시 참극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시성하면서 영성교 신자들의 봉기를 유도했고, 봉기에 성공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유도시연맹이 결성되었다. 자유도시연맹은 프라이란트 동맹의 자유도시들을 제압한 뒤,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세력을 장악했다.

마그니우스는 나바르 연맹과 다른 자유도시들을 규합한 자유령 연합을 결성했다. 자유령 연합은 마그니우스의 지원을 토대로 자유도시연맹을 압박했다. 1505년, 봉기의 시발점인 말루스 시가 마그니우스군의 상륙으로 함락당했고, 그 이듬해인 1506년에는 수도 격인 판크라티온 시 조차 함락당하기에 이르렀다.

판크라티온 시 공략에 투입된 병력은 대부분 용병이었다. 마그니우스는 용병들에게 급여의 절반을 선불로 지급하고, 남은 절반은 작전 후 후불로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본국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용병에게 선불을 지급할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용병대의 지휘관이 자유도시연맹군에게 저격당했다.

미지급된 급여로 인한 불만과 지휘관의 저격으로 인해 통제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판크라티온 시는 마그니우스측 용병들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주민들 역시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으며,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사도성 메사누스에 의해 이 사실이 판크라티온 동부에 알려짐에따라, 자유령 내부에서 대규모 민심 이반이 발발했다. 참주 유스티니아누스는 성전을 선포하며 대규모 원정을 동부에 감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참주의 대규모 동진에 자유령 연합은 허를 찔렸다. 자유도시연맹도 동진을 계기삼아 가르강티아 시에서 재결성되었고, 1509년에는 판크라티온 시를 탈환한다.

판크라티온 참화는 자유령 연합 내부에서도 영성교 신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유령연합의 도시와 병력이 참주령과 자유도시연맹에 투항하면서 자유령 연합의 세력권은 와해되었다.

1510년의 말루스 시 공방전을 계기로 마그니우스는 판크라티온 동부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최후의 발악으로 대평원의 유목민족을 포섭해 참주령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자유령 연합에게 불리한 형세로 기울어졌고,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한 자유령 연합은 일부 해안 지대만을 점거했다.

자유령연합이 완전히 붕괴하게 된 계기는 마그니우스의 철수 결정이었다. 자유령 연합을 통한 신대륙 통제의 이익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마그니우스는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마그니우스의 철수로 인해 자유령 연합은 존재의의를 잃었다. 1513년, 동부 해안에서 벌어진 에코스트 전투에서 자유령 연합은 대패하게 되었다.

자유령 연합 최후의 사령관 코르날리스가 자유도시연맹에 항복하면서, 자유령연합은 완전히 붕괴된다.

프리슬란드 자유국

건국헌정

1514년, 자유령연합의 붕괴를 계기로 판크라티온은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동부의 자유도시연맹과 영성교의 총본산 사도령은 옛 참주령의 복귀만큼은 반대했다. 참주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회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참주직을 그대로 유지할 때의 반발 대신 변화를 받아들여 영성교의 인정을 받고, 참주시절 쌓아올린 기득권을 이용하는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양자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참주령과 자유도시연맹은 1530년 월 일에 건국헌정을 발표했다. 동시에 판크라티온의 행정구역을 자유주와 자유시로 구성한 다음, 각 주와 시에서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최초의 선거에서, 자유도시연맹을 재건하고, 승리에 기여한 에버하트 게르벨이 당선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참주 자리에서 퇴위하는 대신 건국 원로이자 비선실세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에버하트 게르벨은 건국헌정의 신체제는 신대륙의 과거인 판크라티온으로부터 탈피, 자유라는 미래의 가치를 표방하는 땅이라는 의미의 '프리슬란드'로 명명했다.

프리슬란드는 결성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동부 자유도시들의 재건, 구 참주령과 구 자유령의 연결 등 대대적인 국토 개간/개척 사업인 '리프론티어'에 착수했다. 그동안 유목민족들의 공백지로 남겨진 대평원이 이 시기를 거치며 많이 개발/개간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목민들의 거주지였던 대평원이 동부와 서부로부터 침범받으면서, 유목민족들은 프리슬란드의 리프론티어 정책에 반발했다.

리프론티어 과정에서 유목민족들은 프리슬란드 개척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유목민족과의 갈등은 프리슬란드의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프리슬란드 정부는 외교적 합의와 군사적 강행을 병행하며 대평원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족들은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프리슬란드의 확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리프론티어 정책은 1560년에 프리슬란드 정부와 유목민족의 연합체인 혈족연맹의 합의하에 한정선이 결정됨으로써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나 합정선은 대부분 혈족연맹의 유목민들을 가두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면세 등의 혜택을 받는 대신 참정권과 시민권이 제한/배제되면서 프리슬란드 사회문제로 자리잡는다.

프리슬란드는 대륙 동서부의 해안으로부터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륙 각지역의 자원을 개발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결정적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프리슬란드가 열강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프리슬란드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규모 철도망 수요가 생기면서, 철도 건설 붐이 일었다. 이를 시작으로 철강 수요가 늘어났고, 전기와 석탄, 기타 물자 수요가 급증함에따라 이를 공급하기 위한 산업이 활성화되었다. 헤스페로스벨트와 오플란 등지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들은 풍부한 노동력이 되었다. 드넓은 프리슬란드 영토의 특성상 다양한 식재료가 풍부하게 공급되었고, 풍족한 식생활은 프리슬란드 이민을 자극했다.

불과 반세기만에 프리슬란드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565년에 설치된 말루스 시에 설치된 주식시장은 불과 50년만에 주식 거래량이 10,000배 가까이 늘었고, 철도 길이와 전기 생산량, 선박 건조 톤수, 철강생산량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거대한 영토와 인구, 자원과 이민자들의 잠재력을 토대로 프리슬란드는 기존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 못지 않게 성장했다. 자유시장경제를 통한 무한경쟁은 거대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주요 산업을 독점한 거대 자본인 트러스트는 대규모 투자와 고용으로 프리슬란드 경제를 장악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로비와 정경유착, 예술/사회적 재단 설립, 기부와 장학금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성장과 발전은 노동자들의 희생에 기반한 것이었다.

프리슬란드의 이주한 노동자, 농민 대부분은 제대로 된 급료와 가격을 받지 못했다. 자유시장경제 특성상 노동자 복지는 뒷전이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도 '경쟁의 패배자'로 간주되었기에 복리후생에 인색한 분위기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 등이 결성되었으나, 노동조합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군경과 사설 무장세력에 의해 무력으로 탄압받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와중에도, 트러스트를 비롯한 거대 자본가들은 경쟁자들을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는 방법을 제거하면서 더 많은 부를 쌓았다. 프리슬란드의 빈익빈 부익부는 17세기에 들어서도 악화되었고, 1629년의 대파란은 그동안 누적된 프리슬란드의 사회문제가 일제히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대파란

1629년 10월 30일, 말루스 시 증권 거래소에서 대규모 주식 폭락이 발생했다. 본래 말루스 시 증권 거래소 주가는 계속 상승세였으나, 프리슬란드 중부 지방 은행의 자금 조달이 은행원의 태업으로 인해 늦어진 것을 계기로 해당 은행과 연계된 거래에 영향을 끼치면서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거품경제가 극심했던 프리슬란드 경제는 1629년 11월부터 급속도로 하락했다.

주식이 급강하하면서 천문학적인 금액이 증발했고, 주가가 떨어지면서 주식 투자자들의 재산도 소멸했다.

증발에 가까운 금액과 재산 손실은 여러 기업의 부도로 이어졌고, 상품 구매력이 없는 대다수 시민들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면서 잉여 재고량을 감당할 수 없었던 기업의 부도가 이어졌다. 실업률 급증과 함께 공련의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기회에 공련식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공련 역시 프리슬란드에 혁명을 수출했다.

사회적으로 총기 소유가 일상이었던 프리슬란드 특성상 무장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식량을 수송하는 열차와 차량이 각지에서 약탈당했다. 자유국군과 경찰, 주방위군의 공권력으로 이를 제압하기란 무리였고, 기업가와 상류층에 대한 공격도 빈번해졌다. 농촌 역시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농민과 어민들은 급락한 농산물 가격을 해결하기 위해 농작물과 축산물, 수산물을 폐기했고, 그것을 가져가려는 자들을 공격했다. 더군다나 지력을 고갈시키는 화학농법으로 인해 대평원의 농경지가 황폐화되면서 식량수출국인 프리슬란드가 식량수입국이 되었다.


휴버트 론의 대두

대파란을 전후로,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였던 프리슬란드 정계는 파편화되었다.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이 가시화됨에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소수 자본가를 제외하고 지지를 잃었다.

동시에 프리슬란드 정계에는 신흥 정당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휴버트 론의 책임사회당이었다.

휴버트 론은 본래 노동운동가로, 노동자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재판에서 자본가들의 책임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정경유착이 만연한 프리슬란드 특성상 재판 역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패배한 휴버트 론은 법에 문제가 있다면 정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변호사 경력을 토대로 정계에 입문했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로울 자유'를 모토로 프리슬란드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휴버트 론은 사회주의자 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공련혁명을 계기로 반공주의와 영성교 신앙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책임사회당을 창당한 휴버트 론은 대파란을 계기로 정계 주도권을 장악했다.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메세지는 노동자들에게 먹혀들었고, 책임사회당의 개혁과 재분배야말로 공련식 사회주의와 기존 체제로 인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해 자본가들의 신임을 얻었다. 무엇보다 반공과 영성교 신앙을 통해 종교인과 인텔리, 농촌의 보수층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대파란을 계기로 신속히 지지층을 결집시킨 휴버트 론은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웠다. 기존의 민주당과 자유당이 연합한 민주자유당은 형식적 대책만 내놓고, 사회당은 공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하는 와중에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 휴버트 론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1629년 11월, 하르벤 슈미트 대통령이 대파란의 책임으로 사임하면서 부통령 일 베르티신이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휴버트 론이 트러스트 자본가들의 유착을 고발하면서 일 베르티신 역시 불과 5달만에 사퇴하고 만다.

1630년, 연말 총선 결과, 프리슬란드 정계 원내는 책임사회당이 75%, 민주자유당이 5%, 사회당이 20%를 차지했다. 휴버트 론은 압도적인 원내 지지를 바탕으로 복리후생과 국책사업을 주축으로 한 대파란 수습 정책을 입안하며 지지를 공고히 다졌다. 결정적으로 1630년 5월 노동절 연설에서 자유와 책임을 주제로 한 연설을 라디오 방송으로 전파해 여론을 장악했다.

그 결과, 1630년 6월 대선에서 휴버트 론은 압도적인 우위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정헌정

프리슬란드 대통령에 당선된 휴버트 론은 정권을 잡은 직후, 부의 재분배 정책을 본격적으로 이행했다. 자본가들 역시 휴버트 론이 대안이라고 생각했으며, 대파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휴버트 론에게 반발할 수 없었다. 프리슬란드 경제는 휴버트 론의 정책을 거치면서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다. 1630년대부터 실업률은 완화되었고, 정부 주도하의 복지와 물자 분배로 기아를 막았다.

1634년, 휴버트 론은 프리슬란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휴버트 론은 재분배된 부를 바탕으로 상향평준화에 의거한 성장과 국력 신장을 공약으로 삼았다. 국내 경제 회복과 함께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해외열강들에 견줄 수 있는 프리슬란드의 건국을 목표로 삼았다.

수정헌정의 2대 대통령으로써 업무를 위해 주 지지층인 농민들을 만나고자 순회에 나서던 중, 1635년 10월 9일에 알 수 없는 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휴버트 론의 암살과 함께 프리슬란드 정계는 다시 분열되었다. 책임사회당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구심점은 휴버트 론이었다. 그러나 휴버트 론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와해되면서 책임사회당 내 계층간 차이로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영성교 교인들과 농촌 보수층, 인텔리들은 책임사회당에서 탈당해 국가공화당을 창당했다. 영성교식 금욕주의와 기술 관료정을 통한 '철인정치'를 모토로 자유에 걸맞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국가공화당의 이데올로기였다. 한편, 대파란 직후의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휴버트 론에 대한 불만 세력이 민주자유당으로 집결하면서 프리슬란드 정계는 삼각구도가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