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瀾合衆國 (からんがっしゅうこく)
河瀾聯邦
하란합중국
하란연방
국기 국장
표어 爲國獻身 萬族正事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만 겨레의 바른 일이다.
국가 만민이여, 일어서라!

붉은색이 하란합중국의 세력권
수도 청수명경(淸水明京)
최대 도시 융헌소경(融憲小京)
정치
공용어 한국어, 일본어, 유구어
국민어 민남어, 객가어, 영어
지역어 산지민어, 원주민어
천기한황天岐旱皇 보의면렴普義勉廉
예하국주例河國主
참좌평대신參佐平大臣
부여효우夫餘嚆遇
양수외랑洋秀外浪
역사
국가 성립  
 • 건국 신화 기원전 2889년 4월 3일
 • 귀곡국 건국 기원전 2333년 11월 7일
 • 영산 전투 481년 5월 13일
 • 부여 왕조 수립 664년 11월 15일
 • 명안로 대전 1637년 4월 1일
 • 서록 막부 수립 1774년 6월 14일
 • 신해개신 1851년 3월 4일
 • 합중국 수립 1925년 8월 24일
지리
면적 157,610㎢ (95 위)
내수면 비율 1.7%
시간대 HST (UTC9)
인구
2018년 어림 약 26,689,000 명
2019년 조사 27,346,356명 (51위)
인구 밀도 173.5㎢ (46위)
경제
GDP(PPP) 2019년 어림값
 • 전체 $9879억 4350만 (26위)
명목 $36,127 (25위)
통화 환(HRH, 圜)
기타
ISO 3166-1 411, UH, USH
도메인 .uh
국제 전화 +83

하란(중국어: 河瀾) 혹은 하란합중국(중국어: 河瀾合衆國)은 동아시아(東亞細亞)에 위치한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서중해협(西中海峽)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북동쪽으로는 규슈해협(九州海峽)을 사이에 두고 일본(日本)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제주도(濟州島)와 인접하고 있다. 수도는 청수명경(淸水明京)이며, 국토는 세개의 주요 섬인 영주도(英州島), 운내도(雲內島), 이문도(梨門島)와 함께 주변 수천 여개의 부속 도서들로 구성된다.

현재의 하란은 1925년, 하란 통합조약(河瀾統合條約)을 체결하여 미합중국(美合衆國)과 유사한 국가 체제를 갖춘 연방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의 하란은 하란 황실(河瀾皇室)과 방임통치제(放任統治制)를 바탕으로 매우 느슨한 국가연합(國家聯合)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현재 하란을 구성하는 소속국들은 이러한 역사적, 환경적 맥락을 바탕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정치 체계와 입법권, 행정권을 유지하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란합중국의 국토 면적은 대략 157,610㎢에 달하며, 연방 인구는 2,700만을 유지하고 있다. 주된 공용어는 한국어지만, 일본어유구어(琉球語)가 주요 공용어로 채택되고 있으며 산지민어(山地民語)와 같은 초기 현지인들의 언어를 국가 보호 대상 언어로 지정하여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상징

국명

하란의 명칭에 대한 역사적 유래는 분분하다. 국호의 의미가 '강의 물결'을 의미하는 만큼, 하란신화(河瀾神話)에 등장하여 대이강(大耳江)을 지키는 산신령(山神靈)인 하랑(河浪)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혹은 고대 군장국가인 귀곡국(歸哭國)의 창건자, 하령(河靈)에서 비롯된게 아니냐는 설도 소수 학계에서 적극 논의되고 있다.

중화권에서는 탐라국(耽羅國)과 혼동하여 '주호'(州胡)라는 명칭을 혼용하기도 했으며, 수나라 시절에는 '해동화평국'(海東和平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반도(韓半島) 국가들에게는 '두명'(斗明)으로 불렸으며, 이들 사이에서는 멸칭으로 '토아인'(土亞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사해국'(沙海國, さかいこく)으로 불렸다.

서양권에서는 명안로 대전(明安路大戰)으로 포르투갈에스파냐와의 충돌 과정에서 '하리엔'(Hairen)으로 하란이 소개되었으며,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에 의해 '하롱슈'(Halongshu)라고 하여 '금은보화의 나라'로 미화되기도 했다.

국기

紅白宗門旗 (こうはくしゅうもんき)
한국어 홍백종문기
다른 명칭 홍백기(紅白旗), 하란기(河瀾旗)

하란의 국기홍백종문기(중국어: 紅白宗門旗)로 불리며, 흰색과 붉은색으로 조합된 이색기(二色旗)를 바탕으로 하란황실(河瀾皇室)의 문장이 하단 왼쪽에 그려져 있다. 국기의 흰색은 중립과 평화를 사랑한다는 이념을, 붉은색은 연방의 단합된 의식을 의미하고 있다. 국가 위기 상태 혹은 전시에는 국기의 색상 배경을 상하반전시킨다.

국가

하란의 국가인 '만민이여, 일어서라!'는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 당시 음악가였던 랑직로주(朗直露周, 1879~1924)가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 일본제국(日本帝國)의 팽창과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청제국(靑帝國)의 몰락을 두 눈으로 경험한 랑직로주는 전쟁의 아픔과 고뇌, 그리고 평화와 공존의 여념을 노래의 담아내도록 노력했다.

제1악장(부제:可懷以德,難屈以力, 베품으로서 품을 수 있으나, 힘으로의 굴복은 어렵다)은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의 팽창주의 및 식민지 쟁탈전에 대한 비판과 식민지인들의 고통을 내용으로 담고 있어 담담하고 묵직한 음색을 띄고 있다. 제2악장(부제: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하란이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을 본받지 않도록 하며 세계 평화와 만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템포가 잔잔하며 맑은 음색으로 구성되고 있다.

역사

하란의 역사는 복잡다난하다. 이는 하란을 구성하는 수많은 도서 제도들의 통합이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으며, 주변 국가들이 중앙집권체제의 기반을 다질때 하란의 구성국(河瀾構成國)들은 자체적인 군사력과 지방 통제력을 바탕으로 중앙 정부의 개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란사(河瀾史)는 자체적인 지방국가(地方國家)들에 의해 집필되어 독자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본 문서에서는 근현대를 중점으로 서술토록 한다.

서록 막부시대의 개막과 통합의 길

성락 격돌과 서록 막부의 수립

천수태원(川需太原)의 급사로 구사오련국(臼斯烏聯國)을 중심으로 하던 하란 중앙정계가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1764년, 종관의 변(宗關之變)으로 남영국계(南英國系)를 지지하던 광종(光宗)이 참살되고 승종(昇宗)이 즉위하면서 남영국계가 몰락하고 천비리국(天卑離國)을 주축으로 한 북영국계(北英國系)가 하란 제도(河瀾諸島)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영국계의 유력 국가들도 탄령 막부(炭鈴幕府)에 대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당시 막부의 수장이었던 정승군(貞勝君) 탄령종익(炭鈴宗翼)이 남영국계, 북영국계에 대한 화합책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막정파환'(幕政破渙)을 선언하자 토막파와 근막파간의 대립이 치열해졌다. 이에 천덕주(千德州)의 영지 계승을 두고 남영국계감후국(感嗅國)과 북영국계여도국(輿道國)간의 성락 격돌(城樂激突)이 벌어지자 이에 감후국을 지지하던 근막파와 여도국을 지지하던 토막파의 직접적인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성락 격돌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흑신 전투(黑伸戰鬪)는 토막파의 승리로 끝나면서 천비리국의 국주, 소관함은(蘇管含殷)이 병력을 이끌고 향수만경(享隨萬京)을 점거하여 탄령종익의 퇴위를 종용했다. 탄령종익이 퇴위를 선언한 직후 막부 수장의 지위에 오른 탄령무청(炭鈴武靑)은 도산문화(度山文花)를 이끌며 근세 하란의 건축 및 예술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실질적인 정치는 북영국계의 군주 및 대신들에게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탄령무청이 요절하자 탄령소휘(炭鈴昭輝)는 사치에 탐낙하여 막부의 재산을 늘리는데만 급급하여 권세 정치를 바탕으로 재정 확대를 위해 남영국계의 국가들과 비밀 교섭을 하던 중 발각되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탄령충(炭鈴充)은 이후 막부를 회생시키기 위해 토막파 세력을 경계하던 군소 국가들과 연합하여 단의전쟁(團意戰爭)을 벌였으나 패배하면서 막부는 최종적으로 멸망하였다. 이에 소관함은은 1774년, 금종(昑宗)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서록덕양(誓綠悳良)을 새로운 막부의 수장으로 삼으면서 서록 막부의 개창을 알렸다.

서록 막부의 전개와 근세 발전

막부의 건립자가 된 서록덕양은 17세기 초에 명안로 대전에서 불필요한 살생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 신도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수도 인근에 신도 추방령을 폐지하여 '크리스천 해방'을 선언했다. 쇄국 정책은 폐지되었으며,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를 건실히 유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회들이 다시 설립되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각 번국(蕃國)들의 자유로운 독자 상업 교역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중앙 막부 정권과 지방 국가들간의 대립을 겪기도 했다. 북영국계가 주도하던 서록 막부는 이후 도자기와 국화(國畵)를 수출하고 통행세를 걷던 번국 관소들을 폐지시키면서 국내 경제의 걸림돌을 치우고 금, 은 화폐 보편화를 비롯해 해상 교통을 정비하는 등 상업적인 발달에 진일보적인 면모를 갖추어갔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며 서양 국가들에 의해 전달된 고구마같은 구황 작물을 대거 재배토록 각 번국과 막부가 지시하고, 지역 상인들을 통제하여 쌀값을 안정화 시키려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하란의 근세 경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근세 경제의 발달은 무가(武家) 혹은 귀족 중심적이었던 도산문화가 몰락하고 유력 상인과 중산층을 기반으로 한 서민 문화인 안상문화(眼上文化)의 도래와 부패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여과없이 비판하는 화류계벌(和流階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 불교 문화를 대신하여 하란의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의 발달에 대한 고전 연구를 중점으로 하던 대국학(大國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수주의, 통합주의의 가치를 확장시켰다. 이는 근대에 등장할 하란 통합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대국학의 거두인 안박융서(安博隆抒)는 《고사기전(古事記傳, 1797)》을 전면 집대성하여 과거 고중세인들처럼 '중화(中和) 사상을 배제하고 한화(韓和) 사상의 부활과 하란신화에 기인된 정신적 기반의 재건립'을 주장했다. 뒤를 이은 고전 연구가들과 존왕주의자들은 모두 그의 대국학 집대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시키거나 변혁하는 수준으로 다듬어갔다.

서록순(誓綠恂)은 이전 덕종(悳宗)이 장려했던 실학 정책을 적극 반영하여 양학(洋學)에 대한 대대적인 출판 간행을 지시했다. 이에 백렴(百簾)의 근대적 전국 실측지도인 《대하란평정연해지도(大河瀾平正演海地圖, 1811)》의 완성을 기점으로 양학 입문서인 《참학계제(懺學契齊, 1813)》, 네덜란드-근세 한국어 사전인 《하화란집해(河和蘭輯該, 1815)》등이 집필 및 출판되며 서양과의 교류과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전문 양서 번역기구인 탁번소(託飜所)의 설립은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서록찬삭(誓綠燦朔)은 점차 정치적 부패와 불안한 재정상황으로 중앙 정치의 혼란이 가속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정 개혁(君政改革)을 단행했다. 검약을 중앙 정부 및 번국의 국시(國示)로 삼도록 하여 대신들의 녹봉을 줄이고 국주들의 지원금을 축소시켰다. 특히 서록순 통치기의 버블경제가 꺼진 후 심각한 재정악화로 빚더미에 오른 서록 막부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후궁 배출기구였던 궁조소(宮條所)를 폐지하고 그동안 상급 의사결정 구조가 비전문화로 겪던 좌평 제도의 쇄신을 가하여 재정분야의 일원화를 반영하는 등 관료제를 재구축했다.

신해개신과 근대국가로의 발전

19세기 말의 변혁과 20세기 초의 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