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쿠라 신지
(일본어: 支倉真司)
파일:支倉真司.jpg
하세쿠라 신지의 초상화
인물 정보
본명 하세쿠라 신지
(支倉真司)
직책 개척관(開拓官)
생몰연도 1595년 6월 9일 ~ 1645년 1월 2일
임기 기간 타이난 개척청카이토쿠칸
(1634 ~ 1645)

하세쿠라 신지(일본어: 支倉真司)는 타이난 개척청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서, 하세쿠라 가문의 초대 가주이다. 그는 에도 막부 시기에 에타(穢多)[1]로서 구분되어 멸시받다가 몰래 슈인센(朱印船)을 타고 태국으로 건너와서 니혼마치(日本村)의 거주민이 되었다가 야마다 나가마사를 따라 보르네오 섬으로 이주하였고, 타이난 개척청의 카이타쿠칸(開拓官)이 되어 초기 정착 사회를 성립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초기 이력

하세쿠라 신지는 일본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다스리던 센다이 번(仙台藩)에서 태어났다. 그외에 자세히 알려진 이력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의 출신을 보아 부모님들도 사회에 최하위 계층을 차지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자라면서 피혁 제품을 만드는 수공업자가 되었으나, 이러한 일은 당대 사회에서 천하게 여겨지던 하층민들이 종사하던 행위였다. 그는 차별과 핍박을 피하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하고서는 몰래 주인선을 타고 태국으로 건너갔다.

태국으로 건너간 그는 수도인 아유타야에 성립된 니혼마치(日本村)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상인으로서 높은 자질을 갖추어 무역 상인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야마다 나가마사와 버금가는 당시 동남아 일본 이주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중, 1628년에 동도전출을 통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자 그는 야마다 나가마사를 따라 보르네오 섬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보르네오 섬의 정착지에서 스스로의 성(姓)을 "하세쿠라"(支倉)라 하고는 신분 상승을 기대하였다.

카이토쿠칸으로서

야마다 나가마사는 초기의 불안정한 일본인 이주 사회를 통솔하기 위하여 타이난 개척청을 설립하였으며, 당시 일본 이주 사회에 연장자 혹은 영향력을 가진 이들에게 관직을 임의로 부여했다. 신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카이토쿠칸"(開拓官)이 되어 휘하의 개척민들을 통솔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개척지를 넓히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보르네오 섬의 탐험을 주도했다. 그는 이러한 탐험을 통해 보르네오 섬의 생태계와 지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하였고,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이후에 타이난 개척청이 개척지를 확보해 나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필리핀 총독이었던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임기가 만료되어 본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되어 타이난 개척청의 도카이 카이타쿠치(東海 開拓地)로 표류하였다. 이미 서양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타이난 개척청의 2대 칸쵸(館長) 야마다 미나마사는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하세쿠라 신지에게 서양식 갤리온 한 척을 건조하여 그를 돌려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과 정식 교류를 시작하게되자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던 야마다 미나마사는 1637년, 유럽에 무역 허가서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미나마사는 스페인인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타이난 개척청의 영구 정착할 것을 선언한 선교사 "미네츠와 소테로"(본명은 루이스 바우티스타)의 도움으로 유럽의 갤리온을 모방한 "이요센"(異洋船)을 건조한 후 하세쿠라 신지와 미나츠와 소테로를 사절단의 단장으로 삼아 유럽에 보냈다.

1639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도착한 하세쿠라와 미나츠와 일행은 스페인 왕을 알현하고 이어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교황을 알현했다. 그는 유럽에서 귀족급의 대우를 받으며 스페인에서 세례도 받고 교황청에서는 로마 시민증서도 받았다. 또 몇가지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현 이탈리아 총리 관저인 퀴리날레 궁에 그려진 벽화도 있다.

그러던 중 1645년에 그의 점점 커지는 위세를 두려워 하던 야마다 미나마사는 그와 그를 따르는 측근들 일부를 반역으로 치부하고서는 처형을 선언했다. 그는 실의에 빠졌고 당시의 수도의 역할을 행하던 도카이켄(東海縣)의 압송되어 화형을 당하면서 순교하였다. 그의 가족들과 일부 정착민들은 기존의 정착지에서 벗어나 지금의 메이슈켄(明珠縣)에 정착하여 독립적인 세력권을 유지하였다.

여담

그가 남겼던 "南方の自由、新土の歩み"(남방의 자유, 새로운 땅으로의 발걸음)은 그가 보르네오 섬을 처음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던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세에는 그가 당시 정착지 건설을 돋기 위해 했던 발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후 이 발언은 현재의 타이난의 국가 표어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는 본인이 늘 에타(穢多) 출신인것에 대해 전전긍긍하였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서 자신을 늘 지유닌(自由人)이라며 스스로를 지칭했다. 그는 또한 "모든 타이난의 거주민들은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침해 받을 수 없다"라는 자가침부(自可侵不)를 내세웠다. 이러한 그의 근대적 사상은 당시에도 팽배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혁명에 가까운 발언들이었고, 이는 타이난인들이 더욱 더 본토와 자신들을 구별 짓는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각주

  1. 에도 막부 시기 사농공상의 입각한 신분제 밑에 히닌(非人)과 함께 최하위 계층을 이루던 이들로서 피혁 제품을 생산하던 일에 종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