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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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
현대 세계적 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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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메르카바 전차
날짜1988년 1월 6일 ~ 2000년 8월 31일
장소유럽, 지중해,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아시아, 동남아시아, 호주,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시베리아 등 지구 전역
결과
교전국

제일군

  • 독일진영

독일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덴마크
미디피레네 미디피레네
스페인 스페인
이탈리아 이탈리아
유고슬로비아 유고슬로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노르웨이 노르웨이
스웨덴 스웨덴
핀란드 핀란드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이집트 이집트

  • 일본진영

일본 일본
콜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페루 페루
에콰도르 에콰도르
볼리비아 볼리비아
칠레 칠레

그 외...

평화 국제군

  • 자유진영

유엔 유엔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프랑스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캐나다 캐나다
동아연방 동아연방

  • 공산진영

소비에트 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
소비에트인도차이나 소비에트인도차이나
소비에트 인도 소비에트 인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베트남
호주인민공화국 호주인민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콩고 콩고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쿠바 쿠바
헝가리 인민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그 외...
지휘관
독일 하이덴베르크 1세
일본 이케하라 토모야스
그 외...
미국 니콜라스 워싱턴
영국 마거릿 대처
영국 데이비드 밀러
소비에트 러시아 미하일 모로조프
중화인민공화국 장웨이
그 외...
피해 규모
군인 사망
2억 65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1억 1600만 명 이상
총 3억 8100만 명 이상 사망
그 외 자료...
군인 사망
6억 2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10억 명 이상
총 16억 200만 명 이상 사망
그 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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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독일어: Heidelberg Ikehara Weltkrieg, 영어: Heidenberg Ikehara Great War 또는 World War Tolyatti, 일본어: ハイデルベルク 池原 大戦)은 1988년 1월 6일부터 2000년 8월 31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88년 1월 6일 새벽 7시 15분 하이덴베르크 1세[2]가 다스리는 도이치 국방군을 포함한 다국적군(1988)의 공군이 동독의 서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87년 11월 29일 대동아 일본 제국중화인민공화국 침략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95년 2월 2일, 파나마 운하멕시코 시티평화 국제군원자폭탄 20 개 투하 이후 1995년 3월 17일 독-일 추축이 해체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대동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 3월 18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세계에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의 전사자는 약 8억 6,8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11억 2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대도시 폭격이나 사회주의자 학살, 대규모 원자폭탄 투하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전쟁은 크게 독일 전선일본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외에도 유럽, 지중해,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아시아, 동남아시아, 호주,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시베리아 등 기타 하위 전선도 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의 전역에 포함된다.

명칭과 연표

명칭

명칭은 전쟁의 주축을 이룬 도이치 정부의 수장인 하이덴베르크 1세대동아 일본 제국의 수장인 이케하라 토모야스를 따온 것이다. 서양권에서는 하이덴베르크를 먼저 표기하며, 동양권에서는 이케하라를 먼저 표기한다. 그 외에도 톨리야티라는 단어가 포함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당시 소련에 위치한 톨리야티독일 일본 연합령이 결성된 곳이다. 그것 때문에 두 국가를 통칭하는 용어로 톨리야티가 쓰이기도 한다. 보통 톨리야티를 쓰는 국가는 러시아, 영국 등이 있다.

연표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88년 1월 6일 새벽 7시 15분 하이덴베르크 1세가 다스리는 도이치 국방군을 포함한 다국적군(1988)의 공군이 동독의 서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87년 11월 29일 대동아 일본 제국중화인민공화국 침략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95년 2월 2일, 파나마 운하멕시코 시티평화 국제군원자폭탄 20 개 투하 이후 1995년 3월 17일 독-일 추축이 해체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대동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 3월 18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종전일은 세계 모든 국가에서 동일한 날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개전일은 매우 난해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비그리드 작전[3] 개시일, 훗키 작전[4] 개시일, 영국프랑스독일에 선전포고한 날, 미국독일에 선전포고한 날, 미국일본에 선전포고한 날로 보는 의견이 있다. 이 중에서 미국이 선전포고한 날을 전쟁의 시작으로 보는 국가는 미국에 국한된다.

배경

전쟁 전의 사건

한국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영어: Korean War, 중국어: 朝鲜战争/抗美援朝, 일본어: 朝鮮戦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월 4일 평성함흥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월 15일에 탈환하였다.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5월 3일에 미국이 일본의 자치 군대를 허용시키고, 6월에 일본 군이 직접적으로 참전하면서 다시 전세가 연합군으로 넘어왔고, 1953년 9월 22일까지 청진, 강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신의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로 마쳤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더글라스 맥아더가 참석한 가운데 1953년 5월 15일 단둥에서 전쟁의 종결을 다룬 랴오닝 조약이 체결되었다. 종전의 대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엄청난 양의 배상금을 미국과 일본, 한국 등의 연합군에 지급해야 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사회주의 국가가 축소되는 기미가 보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과 내부 자본주의 운동가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랍 전쟁

서인도 전쟁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군대가 카슈미르 지구를 무단 점거하고, 티베트 반군과 접촉하여 티베트와 북 인도로 진격하자, 인도와 중국은 급히 전쟁을 선포했다. 중국은 경제위기로 간신히 티베트 반군의 진격을 막은 정도였지만, 인도는 전 군을 서-인도로 진격시켰다. 카슈미르 지대까지 인도가 차지했지만, 인도의 중동 진출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란이 인도에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의 원군마저 참전하며, 서-인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인도 전쟁은 후에 중동 전쟁과 묶여져 다루어진다.

중동 전쟁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분노에 들끓은 아랍 연맹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펼쳤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북부로 이스라엘 군이 진격해오자,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아랍 연맹에서 탈퇴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다른 아랍 연맹-국은 그들을 비난하며, 이스라엘을 몰아내기 위해 아라비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를 국토 침범으로 오인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연맹의 이란이집트에 전쟁을 선포하며,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 사이 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점령하고 선전포고한 이란을 향해 진격했다. 이란이 공격 받자, 이란은 소련에 원군을 요청하고 아랍 연맹은 아라비아 전쟁을 멈추고 인도에 대항했다. 이 동안 이스라엘은 전열을 다듬으며, 이집트 전선에서 멈춰있었다.

인도의 중동 진격으로 모두 혼란에 빠진 사이, 인도 군은 선전포고를 한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아랍 연맹의 공격에 주춤했지만,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을 장악했다. 인도는 아랍 연맹에 반격을 하기 위해, 아라비아 반도로 상륙하여 적의 후방을 공략했다. 하지만, 인도도 서서히 지쳐 소모전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미국이 참전할 기미가 보이자, 소련은 미국이 인도 측에 참전해 승리할 것을 염려해서, 인도 측으로 편을 바꾸었다. 인도도 이미 크게 지친 상황이여서 소련의 동맹 요청을 승낙했다. 아랍 연맹은 크게 분노했다.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의 동맹으로 원군을 파견했다. 그러자 아랍 연맹의 앞날은 불 보듯 뻔했다. 이를 알아챈 이집트는 아랍 연맹에서 탈퇴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러기도 전에 인도와 이스라엘에 분할 점령되었고, 소련과 인도의 연합군은 터키 동부까지 진격했다. 터키는 바로 소련과 인도에 항복했고, 소련에 합병되었다. 인도 군의 앞에는 이제 이스라엘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아랍 연맹이 붕괴되고 인도에 거의 다 점령 되자, 이스라엘은 크게 불안해졌다. 미국은 더 많은 원군을 파견하길 꺼렸고, 다수의 원군이 후퇴했다. 인도는 아랍-연맹의 최고 지휘자를 이용해 아랍 연맹을 완전히 인도의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도는 그들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도 미국을 견제하기위해 계속 참전했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파멸을 맞이한다.

중동 전쟁의 결과로 아랍 동맹이 와해되어 세 개의 독자적인 연합으로 나뉘어졌으며, 인도는 공산화되었다. 공산권 국가의 승리로 끝나며, 미국 내부가 매우 혼란해졌다.

아랍 전쟁

이집트의 국력이 약해지고, 이집트가 아랍 연맹에서 탈퇴하자, 이에 살아남은 아람 연맹 국가 (리비아, 알제리 등)은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이집트는 다른 국가의 원조가 필요했는데, 미국, 소련과의 관계는 극도로 안 좋았다. 다행히 아랍 혐오 현상이 발생했음에도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원군이 파견되었다. 사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참전했다. 그들의 원조로 이집트는 리비아를 넘어 튀니지, 알제리까지 점령하고 수단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서 사하라는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프리카 반 외세 주의가 다시금 퍼지며, 서양의 힘을 빌린 이집트를 배척하기 시작했고, 이집트가 석유 파동과 크게 연관있다는 소문이 일어나자, 콩고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연맹하여 이집트와의 장기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 전쟁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며, 이집트와의 관계가 매우 친밀해졌다. 후에 대전 기간 동안, 이집트가 독일의 동맹국이 된 것 또한, 이 시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독일 이집트 석유 상호거래 조약(German Egyptian Petroleum mutual trade agreements, GEPMTA)으로 계속 우호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중화 인민 정변

각지의 반군으로 몸살 알던 중화민국의 정부는 경제 정책에 대한 대립으로 2개로 나뉘어버렸고, 결국 남부와 북부의 의견 대립으로 커졌다. 반군들이 남부를 지지하자, 북부는 중화백군을 동원하여 제압을 시작했다. 남부의 공산주의 민병대(장웨이 의용단[5])는 남부를 모조리 통합하고, 북부로 진격하다가 결국 정체되었다. 소련은 중화민국이 미국에 군사, 물자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아챘고, 중국에 영향력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한 이유로 남부-군과 동맹을 맺고, 중국으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몽골을 지나서 베이징으로 진격했고, 남부 군은 남쪽에서 정부군의 참호를 타개하며 진격했다. 동쪽에서도 소련의 지원을 받은 헤이룽장 인민군이 베이징을 향해 진군했다. 정부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받다가 결국 소련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낙당했다. 남부 군은 정권을 차지하고, 대신 소련과 동맹이 유지되었다.

중화 인민 정변으로 중국은 다시 공산권 국가로 탈바꿈되었고, 이는 동남아시아에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Q-MOT 사태[6]

미합중국자본주의 국가를 확실히 지킬 수 없음이 확고해지고, 미국이 동맹국마저 수 많이 잃으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지위도 크게 하락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이 나토 탈퇴를 고려하자, 캐나다와 프랑스, 영국이 주축으로 미국을 비난했고, 그 사이에 서유럽과 미국의 교류가 단절되었고, 군사 지원마저 시들해졌다. 그러던 중 캐나다 국경 사이에서 미국인의 테러가 일어나자, 캐나다와 미국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이후에 미국이 캐나다에 경제 봉쇄를 실시하자, 캐나다 정부와 국민은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고 나서, 국경 지대의 총기 오발로 미군 한 명이 죽자, 이를 시작으로 미국은 대대적으로 캐나다를 침공했다. 이에 나토 군이 캐나다에 모조리 투입되고 프랑스, 영국, 독일, 호주 등 큰 나라들이 모조리 원조했으나, 주요 지역만 지키고 대부분의 지역이 점령 당했고, 전범이 사망하며 정전이 선언되었다.

이 사태 동안, 미사일이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백악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프랑스의 보르도와 같은 해안 도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의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아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인 클라우드 존슨이 사망하여, 자본주의 국가 기틀이 다시 잡혔다. 그럼에도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미국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미국이 항공모함 전대 2개를 포함한 주요 전력이 괴멸되면서, 미국과 나토의 국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사일의 사용을 규제하는 국제 조약이 체결되었다.

호주 내전

Q-MOT 사태로 수 많은 병력을 잃고, 동남아시아공산화 되어서 주변의 동맹국이 없어지자, 오스트레일리아도 공산화 되는 것이 국방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결국 호주 정부와 의회 내부가 크게 대립했고, 내부 공산주의 단체가 동남아시아 용병을 끌어들여서 캠버라에 무력시위를 일으키자, 국가 전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소비에트 정권인터네셔널의 지원에 호주 대륙의 서부 전체가 공산군에 장악당하면서 휴전되었다. 호주는 결국 두 갈래로 나뉘어졌으며, 구대륙 대다수 국가가 공산권에 포함되며, 자본주의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동유럽 분쟁

미국이 혼란기인 틈을 타서 소련은 동유럽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동유럽의 루마니아폴란드, 유고슬라비아를 기점으로 불가리아, 그리스, 서독을 굴복시키고, 핀란드2차 겨울전쟁을 일으켜 파괴시켰다.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작용하던 방어력은 손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또 그렇게 되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편에 참가했다.

특히, 게르마니아 파르티잔도나우 파르티잔, 헝가리의 활약이 컸다. 이들은 대규모 무력 시위를 일으켜서 옛 친 러시아 국가인 불가리아의 정권을 몰락시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터키소비에트 인도에 흡수되면서 인근의 영향을 받아, 결국 자체적으로 정권의 성향을 교체했다. 서독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과 함께 게르마니아 자유 동맹(1988)을 통해 완강히 저항했으나, 소련의 지원을 받은 동독서독과 전쟁을 일으켜서 승리하며, 바이에른 주를 제외한 독일 지역을 모두 차지했다.

이 전쟁은 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의 직접적인 트리거로 작용되었으며, 후에 도이치 정부의 동맹국들이 많아지게 한 사건이다.[7]

레티시아 전쟁

브라질은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 미국이 크게 흔들리자, 소련의 동맹국으로 바뀌었고, 반면 일부 국가는 미국의 압박 속에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아있었다. 콜롬비아일본과의 동맹으로 미국과는 직접적인 동맹은 아니었다. 그 둘을 주축으로 남아메리카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브라질은 쿠바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병합하고, 쿠바와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콜롬비아의 동맹국인 베네수엘라를 침략했다. 이로서 일본과 미국도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번져나갔다. 미국은 그 사이 나토를 등에 업은 시민 혁명으로 정부가 바뀌었고,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일본은 참전 준비로 바빴고, 그 동안 콜롬비아와 동맹국은 베네수엘라로 투입되어 정체 전선을 형성했다.

이 전쟁은 하이덴베르크 이케하라 대전 기간 동안 남아메리카 전구(1988)을 이루었으며, 사회주의 정부들이 소비에트 휘하로 통합되는 데 기여했고, 공산권 국가의 독재가 강화되어 공산권 국가에서 자유권 국가로 탈출하는 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에 일조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 독일로 피난가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전쟁의 경과

유럽

유럽 전구(1988)아프리카 전구(1988), 중동 전구(1988)와 함께 도이칠란트가 활약한 지역이다. 유럽 통일과 함께, 최대 산유국인 중동을 장악한 소비에트 정권과의 전쟁이다.

반 공산주의 전쟁(서막)

최초에는 독일과 다국적군(1988)이 연합하여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헝가리, 소련, 동독에 맞서는 전쟁이다. 자세한 배경은 아래의 본문을 참고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자본주의 국가의 세력 축소와 함께 동유럽에서 발현된 도미노 효과에 의한 안보 위기로부터 서유럽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하여, 비그리드 작전에 의해 직접접으로 발발하였으며, 아시아 전구(1988)보다 뒤에 발발하여 공산권 국가의 전력이 아시아로 배치된 상황에서 일어나 여러 이득을 본 전쟁이다.

이 계획을 처음 내세운 것은 미국의 해군 장성이자 참모인 에드워드 메튜였으나, 실제로 받아들인 것은 토비아스 슈뢰더하이덴베르크 1세이다. 그들을 주체로 독일부터 뿌리내렸다. 이후에 동유럽이 모두 공산화되고, 서독 자신들 마저 침공 당하자, 더욱 극단적인 반 공산주의 전쟁을 계획했고, 이들은 위에서 말한 자본국가의 당대 상황에 의해 승낙되어져 시행되었다. 이는 후에 세계 대전으로 발달할 도화선이 되었고, 이것은 결국 독일의 계획대로 였다.

독일이 내세운 반 공산주의 전쟁은 극단적인 경우이다. 독일군의 반공 전쟁을 막는 어떤 힘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었다. 1차적인 목표인 독일 통일은 후에 비그리드 작전, 코뢴옹스타크 작전을 통해 성취했으며, 극단적 반공주의의 확산은 이탈리아의 독일 침공에 의해 거의 완결되었다.

독일에서는 반공 전쟁의 끝이 이탈리아의 독일 침공이거나, 아예 본 대전의 끝이라고 규정짓지만, 국제적으로는 아래의 단락과 같이 코뢴옹스타크 작전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비그리드 작전
1988년 지즈공세 작전안 한국어 버전[8]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동독서독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유럽에 빠른 공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다. 또한, 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는 공산권 국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되면서 안보의 위기가 발생했다. 그들은 독일의 지리적 중요함을 강조했으며, 그것의 회복을 회의에서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87년 1월 3일, 독일 국가 첩보 기관(NIA)는 소련에서 동독으로 전달되는 기밀 문서를 가로채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가로챈 문서는 0급 군사 문서로서 소련이 계획하던 ‘카토비세 공세’의 작전 안이었다. 그것은 동독과 소련의 군대체코슬로바키아로의 진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 내부에서 최고 기밀 사항으로 붙여졌고, 정보부 장관이자, 국방부 장관토비아스의 발표에 언뜻 언급되었다. 그는 이 자료를 살펴보고 기밀로 치부한 다음 한 연설에서 나토의 안보적 위협과 함께 동유럽의 도미노 현상에 대응해야 함을 독일의 통일로 설명했다. 특히, 그는 체코와 같은 독일과 인접한 반공 국가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행동이 진행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설로 나토의 안트베르펜 회담이 개최가 확정되었다. 독일은 그 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군사적인 국토 회복 방안을 모색했다. 독일의 지도자인 하이덴베르크 1세는 왕권이 강화된 직후 지도자 지령 1호를 발령하여,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에 작전을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전술부에서는 크게 두가지 안이 채택되어 상위 기관으로 올라갔다. 그 중 하나는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이었고, 또 다른 안은 하인츠 클라인의 안이었다.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은 북부의 평야를 통과하여 베를린을 주요 목표로하여 기동하여 적에게 정신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었다면, 하인츠 클라인의 안은 두 개의 방면에서 공격을 감행하여서 적에게 양면 전쟁을 강요하게하면서 베를린에 중심으로 주변부를 우선적으로 공격하여 주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와 토비아스는 후자를 채택했고, 지도자 지령 2호를 발령하여 국내의 군장비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가자, 그 쯤이 1987년 6월 15일, 안트베르펜 회담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개최되었으며, 서독은 이 회의에서 비밀스럽게 하인츠 클라인의 작전을 소개했다. 소련의 공세에 초조하던 미국은 이를 승인했고, 지원을 약속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더 나아가 항공모함 전대의 지원과 대규모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는 자국의 안보문제라는 것을 역설하며, 육군 지원을 부탁했다. 이는 덴마크에도 요청했다. 대부분은 내부 공산화가 시작되었다는 위협감과 소련의 추가 군사행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대부분의 요청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오직 8개의 병력만이 투입되었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는 프랑스가 독일을 믿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대신, 영국과 미국이 각각 2개씩의 항공모함 전대 지원이 확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의 공군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전차 지원을 약속받았다.

1987년 11월 동안, 미국에게 M-1 에이브람스 전차 4,000대를 지원받았고, M-16 소총 80,000필을 지원받았다. 또한 다량의 석유 또한 지원받았다. 프랑스는 11월 20일에 도이치 정부에 8만 여명의 병사들만 지원함을 정식적으로 통보했고, 영국은 12월까지 HMS 인빈시블을 중심으로 구성된 R-6 해상 타격대HMS 아크로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R-7 해상 타격대북해 함대에 배치했으며, 미국도 1월 중에 2개의 항모 전대가 도착할 것임을 알렸다. 이렇게 독일의 전력이 강화되는 기간동안, 소련은 일본이 일으킨 도발에 대응하면서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 전구(1988)로 군대를 계속해서 파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소련은 동독을 지원하면서 ‘카토비세 공세’를 진행할 폴란드 주둔군의 일부를 아시아로 이전 배치했으며, 동독 군도 일부 차출하여 아시아로 파견보내며 전력이 약화되고 분산되었다. 그럼에도 서부방벽(1988)이 독일 남부에서부터 룩셈부르크까지 국경을 따라 대부분 건설된 상태였으며, 에센뒤셀도르프 일대에도 서부 방벽 공사가 완료되어갔다. 또한, 동독의 당시 병력은 총 104만 명이었다.

독일의 NIA는 공산군의 규모가 축소됨을 알아차리고 1988년 1월 중에 작전을 시행할 것을 확정했다. 그 기점은 미국의 항모 전대의 북해 배치일로 정해졌다. 지도자는 작전의 구체화를 위해 지도자 지령 3호를 발령하여 하인츠 클라인의 안을 거의 공식적으로 ‘비그리드 작전’으로 명명했다. 또한, 정규군을 동부 집단군(비그리드)서부 집단군(비그리드)으로 나누었다. 서부 집단군의 지휘관으로 하인츠를 배정했고, 기동전의 주된 역할이 수행될 예정이었다. 그 만큼 많은 88만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부 집단군은 지휘관으로 겐트너를 배정했고, 동부 전선의 소모-전지연-전을 담당했다. 80만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은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군이 국경에 배치되자, 항공작전을 시행할 일짜를 정해야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긴급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독일 자체 항공력을 공개하지 않고, 동맹의 항공력만을 이용하여 본국의 직접적인 피해를 줄이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항공 작전이 작전에 포함됨이 확정되면서, 작전 자체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그들은 폭격해야 할 곳을 정해야했고, 3차례의 회의를 통해 8개의 주요 지역을 결정하였다. 그 중 여럿은 서부 집단군이 처음으로 돌파해야하는 도르트문트부터 까지에 이르는 도시 장벽(1988)에 위치한 6개의 대도시이며, 또 다른 곳은 적의 주력이 있는 라이프치히 방어선(1988) 일대, 또한, 베를린으로 향하는 군이 지나가는 올덴베르크함부르크도 폭격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 다음 회의에서는 공군 대장 에리히 폰 라이닝겐에 건의로 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도 폭격대상에 포함되었다. 이 사안은 1987년 12월 15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군사 고위급 장성 회의에서 각 공군에게 목표가 배정되었다. 프랑스는 본국과 가까운 독일 남부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과 뷔르츠부르크를 담당하게 되었고, 영국도 본국과 가까운 도시장벽을 폭격하기로 했다. 미국은 에드워드 메튜 제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이프치히와 독일 북부의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를 맡게되었다. 2일 뒤, 미 정보국에 의해 라이프치히가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는 영국에게 모조리 책임이 넘어갔다. 프랑스 군은 뷔르츠부르크의 폭격이 너무 멀어 공중 작전의 효율이 떨어짐을 독일에게 제시했고, 22일부터 뮌헨 공군 비행장으로 프랑스 공군의 이전 배치를 허락했다.

1988년 지즈공세를 위해 기동하는 CVN-68 니미츠 항공모함 (출처: 위키백과)

12월 말 쯤에 미국 해군은 각각 USS 니미츠USS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구성된 제68기습전단제69기습전단을 구성하여 북대서양을 거쳐서 북해로 파견했다. 독일 공군의 제의로 공군력이 부족함이 작전에 큰 공백이 될 수 있음이 시사되자, 미국이 파견을 결정해주었다. 이들이 작전 위치에 도착하면 그 즉시 독일 군부에 의해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그것은 1월 초일 것이며, 다수의 다국적 공군의 도움에 힘입어, 계획의 작성자인 하인츠는 승전을 확신했다.

1988년 1월 5일 21시, 미국 2개의 기습전단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자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는 작전 일짜를 1월 6일로 결정짓고, 새벽 7시부터 총공세를 펼치기로 모든 동맹에 알렸고, 밤동안 모든 독일 병사들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었고, 북해의 항공모함 4기를 지키기 위해, 북해 정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 밤동안 동독의 초계기가 함부르크에서 북해 정찰을 시행했고, 가까스로 이를 저지하여 공해상에서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자, 작전이 시행되었다. ‘지즈 공세(Ziz Offensive)’로 후일에 명명된 지역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차 공세동안 1,100대의 전투기가 독일 상공에서 폭격을 했으며, 영국의 R-7 해상 타격대는 60대의 전투기를 올덴베르크 일대와 브레멘 서부 방어선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고, 그 과정에서 소련 제 12군의 군 사령부가 무너지며, 고위급 인사들이 사망하고,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또한 나머지 영국 공군은 600대의 공중 병력을 투입하여 도시방벽의 도시인 에센과 뒤스부르크의 외곽지를 폭격했고, 후방의 아우토반을 제외한 도로를 파괴하고, 주둔지를 붕괴시켰다. 이 공격으로 주둔지에 있던 제 8군의 고위 장교와 상당수의 병력을 붕괴시켰다. 그 동안 프랑스는 240대의 군용기를 통해 뷔르츠부르크를 폭격하여 앞선 군과 같이 지휘체계와 보급체계를 무너뜨려 제 2군의 붕괴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대신 미국은 더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전투를 맞이했다. 160대의 전투기와 10대의 전략폭격기로 라이프치히 방어선을 폭격을 맡은 이들은 동독의 공중 전투 부대와 격돌했고, 공중전동안 8기의 전략폭격기를 잃고, 10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지상 공중 방어 체계로 접근 자체가 위험해졌다. 폭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미국은 2차 폭격을 제의했다. 이를 승인한 다국적군 최고 사령부(1988)다국적군(1988)의 공중 전력의 절반을 라이프치히로 투입시키며, 푸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또다른 폭격을 시행되었다. 이들 폭격은 앞선 폭격보다 준비된 군과의 대면이기 때문에 효율이 낮았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라이프치히에서만 공중전이 다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공중전에서 동독의 제 8군은 라이프치히 방어선에 건설된 방공호로 모두 숨어들어서 지상 피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2차 폭격 공세의 취지와 어긋나게 공중전이 펼쳐졌다. 450대의 동독 국적의 전투기 출격하여 그들과 교전을 벌였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다국적군이 우월했으나, 이는 동독의 지상군의 엄호가 없다는 가정이었다. 실제로는 둘다 모두 고전을 면치못했다. 약 30분도 채 안되는 동안, 425대의 동독 전투기가 격추되었고, 다국적군도 318대의 전투기를 잃고, 92대의 전투기가 피해를 입었다. 기지로 무사히 돌아온 다국적 군의 전투기는 총 140대였고, 동독 전투기는 3대에 불과했다. 이 공중전에서 승리한 다국적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3차 폭격도 예정했다. 동독은 제공권을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즉시 동독 군부는 소련에 공중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승낙했다. 폴란드러시아 일대에서 약 2,000대의 전투기를 모아 파견했고, 이 시간은 약 3시간 뒤였다.

1988년 비그리드 작전안(하인츠) 한국어 버전[9]

다국적군은 2차 공세가 끝나자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아침 8시 8분 모든 독일 군은 동독의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다. 약 144만명의 대병력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즈 공세’간에 붕괴된 군을 제외하면 72만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막아야했다. 동독의 최고 군사 사령관이었던 슈나이더 폰 바덴부르크은 전황을 파악하는데 열중하라고 명령했다. 동독은 당시 전황파악부터가 우선이었다. 동독의 전황판단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하루가 지나서 서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서야 판단이 가능했다.

하인츠는 서부 전선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또한, 독일이 덴마크바이에른과 이어지는 회랑을 개척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강조해왔다. 또한, 2개의 군을 북부로 진격하여 덴마크에 이르게 준비했다. 덴마크 또한, 진격 준비를 했다. 덴마크까지 진격할 제 1군제 9군은 2차 공세 동안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동을 실시했다. 특히 기갑부대는 12시간 동안, 아무런 피해없이 브레멘까지 진격해 나아갔다. 보병부대는 뒤이어 오면서 붕괴된 동독 제 12군의 패잔병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가 저항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덴마크 군은 동독 제 13군과 교전을 하여 을 점령해내었다. 제 13군도 공세에 큰 피해를 입어서 덴마크 군에게 쉽게 무너졌고, 이 또한, 대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13군의 병력은 동독 제 103사단에 흡수되었다. 이 2만 여명은 함부르크에서 항전을 준비했으나, 곧 큰 피해를 입고 파괴된다. 작전이 시작된지 20시, 함부르크가 서독에 의해 함부르크가 포위되었고, 1시간동안 항공 폭격이 시작되었다. 103사단은 도심 속에서 항전을 이었다. 약 4시간동안 덴마크 보병들과 서독의 기갑부대가 시가지로 진입했고, 그들은 의미없는 항전 이후, 모조리 사살되었다. 그 시간에도 덴마크의 기계화 보병사단은 슈베린로스토크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작전이 시작한지 32시간이 지나 덴마크 군과 합류했으며, 로스토크까지 210마일을 진격했다. 제 2군은 북부 공세를 하는 제 1군과 제 9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로 하노버까지 아무 방해없이 진군했고, 베를린 외곽 방어선(1988), 노이루빈에서 50킬로미터 거리의 엘베 강까지 진군하였고, 페를레베르크에서 덴마크 군과 합류하면서 진군을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 도시방벽 지역에서는 대규모 포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 10군이 도시방벽의 중간부분을 타개하고 들어가서 뒤셀도르프를 점령하고, 그 북부를 내달려서 제 8군의 절반과 도르트문트에서 만나면서 에센뒤스부르크포위망에 갇혔고, 그 안의 동독 제 5군의 패잔병들도 갇혔다. 이들을 제 3군이 처리하는 동안, 제 8군과 제 10군은 계속 진군하여서 뮌스터, 빌레펠트를 거치고 괴팅겐에서 다시 만나면서 아직 멀쩡한 제 11군을 포위했고 그 즈음이 작전이 시작된지 20시간이었다. 더 남쪽에서는 뒤셀도르프에서 나뉜 제 10군의 절반이 쾰른을 거쳐 제 4군의 기동부대와 옛 수도 외곽에서 만나 폭격으로 혼비백산한 제 4군을 가두었다. 제 4군은 지도부의 명령으로 본에 집결하여 후퇴를 준비했지만,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하인츠는 포위망에 본만 들어가면 되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여분의 제 4군의 병력을 남쪽으로 진군시켰다. 작전 시작 약 48시간 즈음 포위망 3개가 모두 섬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독 제 4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부 병력이 포위망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부대는 루트비히 바그너 부 사령관이 직접 관할하고 있는 군이었기에 투항하는 인원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포위망을 열어제치고 슈투트가르트로 후퇴했다. 남쪽으로 진군하던 제 4군과 약간의 교전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사히 탈출했다. 제 4군은 남쪽으로 진군한지 약 20시간쯤 룩셈베르크의 동독 제 3군을 제 5군과 함꼐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포위 전을 진행하는 동안 동독 제 3군이 제 5군을 집중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입었다.

동독으로의 침공이 시작된 지 3일째인 9일이 되자, 동독 최고 군사 사령부는 전황 판단을 끝내었다. 제공권이 마비되어서 전황 판단이 힘들었고, 모든 곳의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명령을 따리지 않았다. 2일 동안 동독은 6개의 군이 무너져내렸고, 총 48만명의 전력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반면, 다국적 군은 항공피해를 제외하면 한 전투에서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한 번을 제외하고 발생하지 않았다. 룩셈베르크 포위전에서 약 1,6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피해는 미약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덴마크 군의 피해였다. 또한, 동독은 슈베린, 페를레부르크, 하노버까지의 영토를 잃었고, 서부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다.

독일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2일 동안 거둔 승리에 매우 감탄했다. 기습이 제대로 통한 것이었다. 사령관인 하인츠는 ‘적들이 이제 공격의 방향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동부 집단군이 할 차례다.’라는 것을 통해 겐트너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겐트너는 바이에른 동부에 배치된 제 19, 20, 21군을 움직여 동부 방벽(1988)의 모든 부분을 공격했고, 19군과 21군의 대다수는 이를 우회하여 슈투트가르트로 진격했다. 이 동시에 제 4군도 서쪽에서 슈투트가르트를 향해 오고있었다. 9일 12시가 되자, 제 19군은 텅빈 뷔르츠부르크를 점령하고 나머지 3개의 군이 슈투트가르트를 포위했다. 슈투트가르트에는 본 포위전에서 탈출한 동독 제 4군과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제 10군이 함께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약 16만 명의 군이 모여있는 곳이였기에 겐트너와 하인츠 모두 직접적인 공격말고, 고립을 하게했다. 그 대신 안전장치로 제 10군을 프랑크푸르트에 암마인에 진주시키며 나머지 군들과 완전히 분리시켰다. 제 19군의 북부에 동독 제 1군이 압박을 가하자, 오후 5시, 제 22군이 제 1군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겐트너의 억지로 후퇴하는 제 1군과 격렬한 전투가 펼쳐졌다. 이들 북쪽으로 제 8군이 괴팅겐에서 잘레강까지 진격하면서 동독 사령부는 남은 군대가 후퇴해야 할 지역으로 폰 방어선(비그리드)을 지칭했다. 마그데부르크라이프치히를 이은 선인 폰 방어선은 막 공사가 끝난 상태로 병사들로 채워져야했다. 후퇴한 대부분의 병력은 그 곳으로 가게되었다. 하지만, 후퇴한 병력이 별로 없었고, 라이프치히 남부의 로닌 방어선도 지켜야했기에 항상 병사들이 부족했다.

10일 새벽 5시, 동독 제 1군은 전면전에서 패배하고 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제 22군은 큰 피해를 안은 채로 예나 서부로 진격했다. 예나는 로닌 방어선(1988)을 압박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꼭 차지해야할 곳이었다. 서쪽 포위망을 맡은 병력이 전면전으로 크게 약해지자, 프랑스 파견군(1988)이 투입되었다. 또한, 제 23군이 예나의 동부와 북부에 정렬하면서 예나와 그 안의 동독 제 9군은 포위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파견군이 양단한 뒤, 23군에 의해 분해되었다. 11일 오후 2시, 예나의 제 9군과 슈투트가르트의 제 4군과 제 10군이 모두 항복하면서, 서독은 거의 목표를 완수했다. 하지만, 소련이 직접적으로 참전을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련은 약 2,000대의 항공기를 파견하여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또한, 독일의 폴란드 공세(비그리드)에 내부 혼란이 가중되면서,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STAVKA)는 공중 작전을 수립했고, 15일에 출격을 결정했다. 이 문서 또한, 동독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NIA에 의해 탈로나면서, 다국적군도 만만의 준비를 했다. 소련의 ‘노비코프 공세’는 쾰른을 타격하는 작전이었고, 라이프치히의 상공을 지나갈 예정이었다. 다국적군은 지난 2차 공세때, 92대의 전투기의 수리를 마치고, 총 780대의 전투기를 곧장 라이프치히로 출격할 작정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라이프치히가 다국적군의 치하여야했다. 일단 하인츠는 로닌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라이프치히의 공중 방어시설의 대다수가 로닌 방어선에 놓여있었다. 일단 폰 방어선의 동부를 압박하던 제 15군과 17군은 로닌 방어선의 동부를 공략하게 했고, 제 8군과 10군을 라이프치히 북서부에 배치했다. 또, 피해를 복구한, 제 22군을 포함한 19에서 23군까지 모든 병력을 로닌 방어선 서부에 집중시켰다. 중간에는 제 16군이 맡아서 돌파하게 되어있었다. 방어를 맡은 적은 제 8군으로 동독의 최정예 군 8만 명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13일 먼저 제 8군과 10군은 북부에서 로닌 선의 뒤를 공격하여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폰 방어선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직후로 5개의 군이 서부에 공격을 집중하여 돌파해내고, 로닌 방어선의 절반을 무력화했다. 나머지 3개의 군이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에 제 8군과 제 10군이 후방에서 남은 방어선을 덮쳐서 붕괴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에 7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이들의 공백은 금방 채워질 예정이었지만, 독일 측에서는 작전 중 전례없던 사상자 기록에 꽤 놀랐다. 이제 이 작전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라이프치히 공중전(1988)이다. 15일 아침 6시부터 780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라이프치히 상공을 정찰했으며, 붕괴된 로닌 방어선에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방공장비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동안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슈투트가르트 반군(비그리드)이 시가지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이 반군은 다름 아닌 항복한 제 4군의 잔병들이었다. 그들은 1만 명조차 되지않는 규모였지만, 충분히 방공 장비의 운송을 지체시켰다. 이들을 하인츠는 남부를 담당하던 독일 제 4군에게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5일 오후 1시, 시가지를 포위한 독일 군은 시가지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라이프치히의 상공에 적기들이 출현했다. 수적으로 다국적군이 매우 불리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었다. 약 20분 동안 그들의 폭격기를 주 목표로 작전을 진행했다. 8일동안 이 전투에서 동독의 공군 전력이 전멸했으며, 약 300대의 폭격기를 파괴했으며, 80대의 미그기또한 격추시켰으나, 다국적군도 580여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양측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남은 적들도 연료 부족으로 후퇴해야 했고, 일본 공격으로 항공기를 아시아로 옮기면서 소련의 공세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국적군의 공군이 거의 전멸되면서 제공권은 잠시 소련으로 기울었다.

8일 동안 연일 공중전이 펼쳐지는 동안에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피의 시가전(슈투트가르크)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난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생긴 잔해들과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서 독일 군을 겨냥했으며, 이들 대다수가 저격병이어서 많은 수의 병력이 이 곳에서 고전을 면치못했다. 제 4군의 사상이유 1위는 저격이었고, 2위가 지뢰였을 만큼 저격의 위력이 상당했다. 4일 동안 밤낮으로, 건물을 수색해 나아가며 결국 적들의 숨을 건물이 없어졌고, 적들은 모두 투항했다. 하인츠 원수는 1988년 2월 23일, 라이프치히 공중전의 끝으로 작전의 종료를 알렸고, 17일간의 혈투의 끝을 알렸다. 살아남은 동독의 고위장교는 그대로 서독의 하급장교로 임명되었고, 독일 지역을 서독의 땅으로 선포했다. 소련도 제네바 UN회의에서 이를 인정했고, 다음 분쟁이 없을 것을 당부했다. 안타갑게도, 소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미 에른스트 1세[10]는 TS에 새로운 지령을 하달했다.

코뢴옹스타크 작전

비그리드 작전 동안의 대패를 이유로 동독의 최고 군사 사령관인 슈나이더 폰 바덴부르크 대장은 중장으로 강등당했고, 소련 군부에 의해서 살아남은 고위직의 일부가 해고당했다. 루트비히 바그너를 선두로 일부 장교들은 자신의 군부대를 이끌고, 서독에 항복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투항 장교는 그대로 2선급 장교로 채용되었다. 꽤 위험했지만, 그 판단은 매우 옳았음이 후에 밝혀졌다. 물론 이는 지도자 명령 4호로써 다루어졌다. 지도자 명령 4호는 지도자 명령 5호의 전투 지시 사항과 함께 이루어졌다. 목적은 바로 동독의 뿌리마저 제거하는 것이었다. 적의 중심부이자 독일 문화를 지탱하는 주축인 베를린을 다시 우리 손아귀로 얻어야했다. 소련의 서독 침공 당시에 힘없이 붕괴된 곳이었다. 이를 제의한 것은 비그리드 안을 작성한 하인츠 클라인이였다. 사실 이 것은 에른스트 1세의 생각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의 비그리드 작전의 다른 안들도 베를린을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에른스트 1세는 지령을 내려 다시 TS의 참모들을 소집했다.

적들을 보호하는 폰 방어선(비그리드)종심 방어와 급하게 완공했으나, NIA의 조사로는 꽤 뚫기 어려운 요새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인츠 클라인은 이 것을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벙커버스터미사일을 쏟아부으면, 큰 손실없이 돌파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큰 문제가 있었다. 1988년 2월 28일, 제 3차 국제 살상무기 제한 및 군축 조약이 맺어졌기 때문인데, 이에는 벙커버스터, 일부 사거리가 긴 미사일, 모든 독가스류가 대표적으로 포함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러한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지만 이는 동맹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에른스트 1세토비아스가 반대했다. 하인츠도 독일이 아직 양면전쟁을 벌이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하긴 했다. 어떻든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그 돌파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낫질 작전이 열쇠였다. 현대적인 무기가 제한된 상황에서 마지노와 같은 엄청난 요새를 돌파한다는 점에서 이 두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문제가 있다면, 폴란드였다. 폴란드의 소련군 사령부는 그들이 폴란드와 동독 사이를 점거하고 동독을 포위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 그들은 작전의 바탕을 확정하고 에른스트 1세의 일시적인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낫질 작전의 계획도를 보며 자세한 구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1988년 3월 2일, 비보가 들려왔다. 미국영국은 독일을 지원하는 항공병력을 대폭 줄이고, 프랑스는 완전히 지원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음으로 더 이상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사태로 독일은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하루 아침에 독일 공군을 감추던 베일이 벗겨질 상황에 빠지고, 그들의 물자를 지원할 국가가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작전도 역시 완전 개편되었다. 토비아스는 공군의 노출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공군의 기대 능력을 대폭 하향 측정하여, 공군을 작전에서 거의 배제시켜내었다. 이는 곧 육군 단독 작전이라는 소리였다. 하인츠는 납득할 수 없었고, 겐트너로서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인츠는 TS의 상급 참모들에게 ‘우리에게는 시간이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은 최대한 빨라야하고 생략해야한다.’라며 작전 개편을 지휘했다. 그는 폴란드의 소련군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서 폴란드 북부의 슈체친을 완전히 붕괴시켜야 했고, 전 방향에서 내부가 무너지는 순간 동시에 쏟아져 들어가야 했다. 독일은 이 작전을 위해서 남은 동맹국의 항공력을 모두 끌어모아서 슈체친 파괴에 배치했고, 10개의 독일 야전군프랑스 파견군(1988), 덴마크의 1개의 야전군을 배치했다. 그리고 2선급의 2개의 야전군도 배치되었다. 작전의 간단한 전개는 다음과 같다. 독일의 압도적인 기동집단으로 드레스덴을 굴복시키고 적의 진지 깊숙이 진격한다. 그 동안 덴마크의 공병들이 슈체친과 기타 폴란드 도로망을 붕괴시키며, 에베르스 발데를 비집고 들어간다. 덴마크 군과 독일의 기동집단이 에베르스 발데를 포위하고 점령한다. 드레스덴과 에베르스 발데로 추가로 5개의 야전군이 진입하여 폰 방어선의 주요 지점을 후방에서 공격하고, 주요 군이 전방에서도 공격을 감행하여서 붕괴시킨다. 이 때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는다. 폴란드 국경지대의 독일의 병력은 소련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독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러 서쪽으로 이동한다. 베를린을 점령하여 작전을 종결짓는다. 낫질 작전과 같이 적의 방어망의 비약한 곳을 뚫고 그 곳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1988년 코뢴옹스타크 작전안 한국어 버전[11]

게브하르트 겐트너막시밀리안 하인스트 폰 바덴, 루트비히 바그너, 하이덴베르크 1세, 토비아스 슈뢰더는 작전을 승인하고 군대의 이동과 전진배치를 허가했다. 1988년 3월 13일, 모든 부대가 배치되었고, 최상위 보안 상태를 유지했다. TS는 즉시 작전 개시일을 3월 15일로 정하고 가장 중요한 기동력을 정비했다. 또한, 에른스트 1세는 이 작전을 ‘프리드리히의 대관식’ 즉, ‘대관식[12] 작전’이라고 정식적으로 명명했다.

예기치 않은 좋은 일이 들려왔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가 공군 지원을 허용했고, 미국도 허용했다. 프랑스는 해외파견군에 장갑차를 대량 배치시켰고, 폴란드의 소련군의 일부가 몽골로 파견되었다. 그러는가 하면, 동독은 즉시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서독으로 간 상황이었지만 소련의 지원하에 (극소수만이 기계화 되었지만) 제 1, 2, 3, 4, 5, 6 야전군을 재건했고, 향토 예비군인 제 8군을 배치했다. 역시나 주력은 전쟁동안 피해를 거의 입지않은 제 7군이었고, 유일하게 기계화가 된 야전군이었다.

슈나이더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언제 다시 공격이 시작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공군은 삭제되었으며, 해군은 기지가 모두 빼앗겨서 오히려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육군마저 전술한 것과 같이 온통 노인과 청소년들이었다. 그 많던 전차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고, 대포도 폰 방어선에 배치될 대포가 부족해질 만큼 적었다. 미사일 기지는 독일 중부로 이전 배치 했었기에 모두 빼앗기거나 파괴되었다. 허물 뿐인 군대였다. 그들을 복구시킬 방법도 마당치 않았다. 국가 공업 전반이 파괴되었고, 도로망조차 복구가 되지 않았다. 소련마저 원조를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고, 14일 오전에 정식적으로 원조가 어렵다는 외교 문서가 도착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1988년 3월 14일, 작전 시작 예정일 1일 전, 슈나이더 첩보팀이라 불리는 동독 최고 감청 A반이 작전 3시간 전에 독일 군이 전면적인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는 문서를 손에 넣었다. 사실, 이는 NIA 산하의 안네르부르크 독일 최고 정보부가 흘린 거짓 정보였다. 이도 모르고 동독군은 안 그래도 적은 장비를 공격이 없는, 공격 받을 곳으로부터 먼 노이루빈라이프치히로 이동시켰고,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의 공군을 이 두 곳을 붕괴시키기를 요청했고, 당일 바로 승인되었다. 1988년 3월 15일 오전 2시, 새벽에 덴마크의 잠입 공병대와 미국 폭격대가 슈체친을 완전 폐허로 만든 것을 시작으로 독일의 모든 기동집단이 기습을 감행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야간 항공 작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2시를 기점으로 전체적인 공격을 감했다. 드레스덴의 1달간의 훈련만 받은 최소한의 노인들과 청소년들은 새벽부터 악몽을 맞이했다. 이 동독 제 5군은 서독의 제 13, 14, 15, 16, 17, 22, 23 야전군을 투입했다. 56만명의 병력은 순차적으로 드레스덴의 외곽에 도달하여 종심작전을 하던 제 5군의 참호들을 넘어 종심 방어부까지 단지 3시간만에 도달했다. 그들은 종심 방어부의 정예군들은 제 5군과는 달리 꽤 오랫동안 버텼으나, 독일 군의 자주포, 박격포의 포격으로 무력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북부 에베르스 발데의 동독 제 4군도 서독 최정예 기갑 야전군인 제 12군의 노련한 움직임과 포격으로 압도적으로 단 2시간만에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5시간 만에 폰 방어선은 무력화되었다. 드레스덴, 에베르스 발데에서 15만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노이루핀과 라이프치히의 폭격으로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추가로 나왔다. 사망자가 추산되는 동안에도 드레스덴의 56만명은 두 개의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 이동했다. 제 14, 15군은 북부로 진격하여 베를린 남부로 진격했고, 나머지는 동독의 제 6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제 7군마저 압도했다. 제 12군은 슈트라우스베르크를 점령했다. 이제 막 8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침 10시에 다다르자, 견제 임무를 받은 독일 제 2군이 독자적으로 폰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독 제 2군의 대다수로 포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동독 제 3군은 서독 제 2군의 갑작스러운 돌파로 고립당하게 되었고, 곧바로 투항했다. 남은 동독의 향토예비군과 제 1군은 베를린으로 급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제 1군은 영국의 제 11 공수군단의 4만명에 가로 막혀서 후퇴가 힘들었다. 향토 예비군마저 독일 기동집단에 의해 교전에 들어가며,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동독 전역에서 총 21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후퇴에 성공했다. 반대로, 총 43만명은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3월 15일, 작전 1일 경과 후, STAVKA는 급히 폴란드 주둔군(1988)을 이동시키려 했으나, 이미 독일로 통하는 주요 도로망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소련의 세르게이 파블로스 장군은 폴란드 전역의 모든 공병을 동원하여서 도로를 복구하라고 했고, 약 5일 정도면 주요 도로가 복구될 것이라고 베를린의 동독 정부에 전했다. 또한, 소련은 발틱 함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서 영국의 전진 항모전단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3월 16일, 작전 2일 경과 후, 베를린을 제외한 모든 동독이 서독의 수중에 떨어졌다. 시민들은 도시로 진주하는 서독군을 환영했고, 그 간의 독재의 압박과 소련 군대에 의한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서독군에게 식량을 주었고, 식수와 기타 생필품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폭격을 받은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베를린 내부에서는 분란이 지속되었다. 갈등은 극에 치달았고,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남자를 동원하여서 32만명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군량을 소비했지만,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베를린에는 가망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하인츠 장군이 베를린 진입하는 동안에 강렬한 저항으로 전차 12대를 잃으며, 그들의 자멸을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며,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계속해서 압박했고, 하펠 강을 넘는데 성공했고, 그 뒤로 6시간 동안, 거의 계속 정밀 폭격이 이루어졌다. 동독 정부 청사는 폐허가 되었고, 베를린 시청, 군부의 건물들이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지하철 입구마저 붕괴되었다. 오후 8시에는 노이쾰른 지역을 점령하고, 베를린 공항을 장악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저항은 작전 8일 경과 후인 3월 23일까지 진행되었다. 시가지에는 시체가 가득이 쌓여 4개의 베를린 주둔 야전군은 모두 사단급으로 줄어들어서 총 32만명에서 8만명으로 줄었다. 23일 오전에 베를린 동물원이 서독군에 넘어가는 동안 전황이 뒤바뀌었다. 폴란드 주둔 소련군이 도로 복구를 끝내고 슈트라우스베르크로 진격한 것이었다.

'악몽의 전주곡'의 악보라 불리는 슈트라우스부르크의 전황도 한국어 버전

세르게이 장군은 도로가 복구되자 마자, 진격을 명령했다. 제 20, 21, 24, 25 야전군을 이 도로로 밀어넣었다. (공격에 취약하게) 일렬로 쭉 늘어서서 그들은 작은 도로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서독은 베를린 시가전(1988)에 눈이 팔려있었고, 알아채지 못했다. 제일 처음 그들을 맞이한 군은 덴마크 군과 제 12군이었다. 제 12군은 전술한 듯 독일 최정예 군이었다. 12군의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는 소련이 기동하지 못하게 막을 것을 지휘했고, 성공했다. 일렬로 이동하는 소련군은 앞길이 막히자 모두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 동안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전투기들이 접근했고, 소련도 일부 요격기를 출격시켰다. 지상에서도 총 6개의 군을 이동시켰다. 그 중 2개의 군은 베를린을 전력을 다해 점령했다. 그러나, 베를린 주둔군(1988)도 이미 슈트라우스베르크의 격전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그 좁은 지역에 전황이 걸리게 되었다. 포위를 탈출하려는 공산군 40만명과 다국적군 64만명이 이 곳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하인츠 클라인,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 게브하르트 겐트너, 슈테펜 슈미트와 같은 독일군 장성들이 모두 이 전투에 뛰어들었던 최초의 전투였다. 양측의 전력이 부딪히는 듯한 전투가 하루를 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슈트라우스베르크의 혈전’ 또는, ‘악몽의 전주곡’이라고 명명했다. 시가전에는 몰트케의 병력을 압도하는 물량으로 소련군이 비집고 들어오며, 도시가 양분되었다. 후방의 적을 발견한 그는 급히 샌드위치에서 탈출하려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들은 폭격으로 생긴 천연 참호를 중심으로 지뢰와 장애물을 두르고 방어전을 시작했다. 외곽에서는 베를린 주둔군이 샌드위치가 되는 상황이었다. 대군이 ‘허약한’ 베를린 주둔군을 양단하고 시가지와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베를린 주둔군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최선을 다해 발악했다. 하인츠는 제 14군을 이끌고 소련군 대열의 중간인 젤로를 공격하여 허리를 끊어내고, 게브하르너는 제 17군을 진두지휘하여 격전지의 남부로 진입했고, 슈미트는 제 9군을 이끌고 북부에서 돌진해왔다. 소련군은 강력한 저항을 하는 몰트케의 부하들을 부술 수도 하인츠가 점령한 젤로를 통해 탈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베를린 주둔군은 오후 늦게 즈음 시가전과 외곽 독일군의 물량에 못이겨 분해되었다. 이로써 몰트케의 군대는 후방으로 이동하여 회복기간을 가질 수 있게되었다. 이와 상반되게 소련은 파견 군인 32만명 중, 20만명이 고립되는 전술적 대재앙이 일어나고 말았다. 급히 포위망 밖의 12만명에게 포위되기 전에 후퇴를 시작하라고 지시했고, 소련군 20만명의 앞날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의 포위된 군대는 29일 오전, 차지한 도시의 2/3를 다시 빼앗기고 다수의 중장비를 폭격으로 잃었다. 공중전 동안에도 일부 보급품 공급도 힘들만큼 제공력에서도 밀렸다. 이에 소련의 STAVKA는 발틱함대를 모항에 정박시키고, 포위된 군대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1988년 3월 30일, 포위된 소련군이 모두 군장비를 버리고 투항함으로서 대관식 작전이 끝을 맺었다.

1988년 4월 5일, 소련 정부는 정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했고, 더 이상의 양면전쟁은 힘들다고 판단하여, 범유럽 평화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 조건으로 서독은 폴란드의 일부 지역을 자신의 땅으로 인정해주고, 포즈난을 소련과 독일의 자유도시로 할 것을 제의했고, 소련은 급한 마음에 승인했다. 독일은 이 작전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그단스크, 그러니까, 단치히까지의 회랑을 확보했으며, 바우브지흐자코파네를 얻어냈다.

1988년 4월 6일, 독일 외교부의 토비아스 슈뢰더덴마크,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헝가리 자유 반군(1988)의 대표들을 안네르부르크로 불러서 외교적인 동맹을 제안했다. 덴마크는 독일이 그 간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한다는 점과 내부 언론의 찬성으로 노르웨이와 오스트리아와 함께 승인했고, 스웨덴은 NIA와 연결된 주요 반군조직의 활동으로 압박하여 승인하게 했다. 헝가리 자유파는 소련의 주요 군대와 연결이 끊기자, 헝가리 사회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릴 기회라는 생각으로 군수물자와 군 지원을 약속받고 승인했다. 아이슬란드에는 내부 언론 조작으로 괴뢰정부가 들어서고, 독일에 합병되었다. 4월 12일, 통일 독일 연방 제국 (제 4제국)을 국제 연합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서막)

반 공산주의 전쟁과 서유럽의 국가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중간의 과정이다. 독일 역사에서는 잘 다루지 않거나, 다음 과정에 모두 포함시키지만, 일본을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는 과정이다.

기본적인 개요는 이탈리아폴란드로의 전쟁으로 인해 서유럽 국가인 프랑스, 영국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흐름으로, 폴란드는 소련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가 독일에 경고를 했으나, 독일이 무시하여 일어났으며, 프랑스는 그 전에 이탈리아와 함께 반 독일 체제를 구성했었다.

이탈리아의 독일 침공(1988)

토비아스 슈뢰더 장관은 육군 참모총장에서 사퇴하였으나, NIA의 장관까지 겸하였다. 그는 NIA에 몸을 담은 매우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정보를 손에 얻게되었다. 유럽 전역뿐 아니라 일본중국 만주에 진입하고 미군시베리아로의 진격을 실시한다는 여러 군사적인 내용,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극단적인 반공세력들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다. 민간 반군 조직인 이탈리아의 블랙 프린키페스(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자유 프랑스 군사 집단이 대표적이었다. 스페인은 이미 쿠바의 잦은 스페인 영해 침범으로 극단적인 반공 주의자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토비아스는 북유럽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과 같이 독일의 수하에 두기를 바랬다. 이미 그러한 방법으로 아이슬란드를 합병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한 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또한, 독일에 평화적으로 합류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고, 스페인과는 다르게 사회의 소수였다. 독일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이 일은 너무나 위험했다. 이는 프랑스와 같은 대다수 국가에 대한 전쟁선포와 같았다. 수 많은 동맹군과 소련의 침공에 대응할 자원도 한 순간에 사라질 터였다. 이는 에른스트 1세의 생각과 같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에른스트와 군부의 반대로 일이 무산되자, 그는 그 계획을 마음에 품고 NIA에서 짧은 장관을 마치고 사퇴했다. 그는 그럼에도 사회적인 지위에서 높았다. 독일 정치-군사 복합 기관(도이치 정부)의 장관으로써 군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군부를 압박하고 자신의 권력을 대폭 상승시키기 위해서, 비밀 결사 관리 기관(도이치 정부) 일명, 사마라는 기관과 독일 지역 전략 전술 부서인 RTS, 데레츠를 설립하였다. 독일의 노련한 명장들과 능력이 뛰어난 신참 장교들이 모여들었고, 아직까지 경직되고 보수적인 TS를 견제하면서 보완했다.

1988년 4월 5일, 짧은 휴식기를 끝으로 토비아스가 수하에 두려했던 이탈리아의 내전이 터지게 되었다. 밀라노 사태(1988)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서 20만명의 프린키페스 집단이 폭동을 일으켰다. 수 많은 시민과 이탈리아 군, 경찰이 피해를 보았고, 이탈리아 외교부는 이상하게도 독일이 배후에 있다고 판단했다. 12일에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독일을 비방하며, 독일에 대한 교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외교적으로 표명했으나, 오히려 이탈리아 언론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 급진파는 옛날부터 독일과 좋지 못했던 프랑스로부터 뒤로 많은 지원을 약속받고,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인터네셔널에 도움을 받는 오스트리아의 공산주의 단체들의 청산을 요구했고, 독일로써 이를 오스트리아에 일방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완전한 병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오스트리아는 독자적인 경찰체계로 일을 수습해야했다. 이탈리아는 이러한 상황을 독일이 발언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허약한 반공능력을 들며, 자신들이 그들을 청산하겠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대표가 거부했지만, 이탈리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 언론이 그들을 허락하려하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독일에 할양한 트란티노알토아디제 주의 위치 (출처: 위키백과)

토비아스는 1988년 4얼 12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어서 을 향해 이동한다는 것을 듣고, NIA를 통해 이를 침략행위로 국제적으로 규명하고, 대응에 나섰다. 처음에는 외교적 수칙에 따라서, 군대를 물리라고 했으나, 이탈리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1개의 기계화 보병 사단이 빈에 도착했고, 독일의 군사적인 기관과 도시의 지하실이란 지하실을 무단으로 침입했다. 독일은 영국과 미국과 함께 이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고, 독일은 토비아스의 예상대로 전쟁의 명분를 잡아채었다. 독일은 무자비한 이탈리아 군대의 약탈을 빌미로 오스트리아 군과 오스트리아의 총리의 요청을 받아서 독일도 남부에 주둔하는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저지하러 했다. 오스트리아의 특수 경찰들은 즉시 이탈리아의 한 개의 사단 병력을 시가지에 몰아붙이고, 시가지를 봉쇄했다. 오스트리아 전역에 비상경보가 발령되었고, 즉시 데프콘이 발령되어 전쟁상태에 놓였다. 국민들은 빈을 떠나 대피했고, 여러 지역의 주민들도 그러했다.1988년 4월 13일이 되어서 이탈리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에 3만 여명과 전차들을 동원하여 침략을 시작했다. 그들은 인스부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이 말은 이 침공은 뮌헨이 목표라는 것이었다. 뮌헨은 독일의 주요도시 중 3번째로 큰 도시로 독일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막아야했다. 즉시 몰트케가 지령을 받고 복구가 막 끝난 제 12군을 데리고 잘츠부르크에서 서쪽으로 움직였다. 제 12군은 전속력으로 인스부르크로 달려갔다. 13일 오후 3시, 양측의 군대는 갑작스레 전개된 상황에서 인스부르크을 폐허로 만들거나 그것을 막기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주민들은 이탈리아 군의 기관총에 갈갈이 찢기거나 독일군의 도움으로 빠져나갔다. 독일군은 최정예인 제 12군의 훈련양을 자랑하듯이 능숙하게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탈리아의 독일 침공군이 양단되고 절반은 갈갈이 흩어졌고, 빈의 이탈리아 헌병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특수경찰들에 의해 포위되어 무장해제되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주 침공군(이탈리아)은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독일이 잇단 두 전쟁으로 국방력이 크게 약해졌다고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그들은 더 숙련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주 침공군이 인스부르크를 지원하기위해 국경을 넘었으나, 즉시 독일의 오스트리아 현지군인 제 1 제국군단에 의해 이 또한 양단되었다. 독일은 레오파르트 계열 무기를 선보이며, 이탈리아 주 침공군의 인스부르크의 접근을 제한해냈다. 순식간에 이탈리아의 26만명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에 포위되어 붙잡혀있게 되자, 이탈리아는 2개의 2선급 사단을 추가로 투입해서 해결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뿔뿔이 흩어진 이탈리아 군은 부대단위로 항복해왔고, 포위된 이탈리아 군은 독일의 현대적인 군대에 절망하였고 지휘관들이 항복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주 침공군은 여전히 저항했다. 그들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이탈리아 국경 일대까지 후퇴해내었다. 그즈음이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몰트케는 이탈리아 포로들을 특수 경찰에게 넘기고, 즉시 기동군을 전속력으로 우회시켜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게했다. 그와 동시에 산악 보병들을 투입해서 훈련 겸으로 브루니코로 침공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 두 부대 모두 14일 아침 9시까지 메라노브루니코를 장악했다. 이탈리아는 독일이 오히려 자신들을 침공하자, 모든 이탈리아 군은 이 곳에 집중시켰다. 추가로 끌어모은 10만명을 볼차노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후퇴하는 주 침공군과 합류하여 독일에 반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그렇게 둘 리가 없었다. 제 12군의 기동집단은 볼차노의 막강한 독일제 포탄을 퍼부었다. 동시에 제 1 제국군단은 제 2 제국군단과 함께 이탈리아 주 침공군을 다시 양단하여 항복을 받아내었고, 볼차노로 진격했다. 그들이 도착한 오후 4시에는 제 12군은 도시를 우회해서 트렌트를 점거하면서 퇴로를 장악했다. 이탈리아 사령부는 이들을 포위섬멸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최정예의 독일군은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르다 호수까지 진격하여 적의 공격로를 제한하고 그 곳에 접근하는 모든 군대를 갈아버렸다. 그 동안에, 16만명의 제국군단은 10만명의 이탈리아 후방군을 상대로 볼차노를 압박해갔다. 이탈리아는 급히 항공지원을 이용하라고 했으나, 미국의 지원으로 받은 공군대로 그들을 제압하며, 제공권까지 가져갔다. 그들의 2차 공습도 독일의 뛰어난 미사일 방공체계에 무너졌다. 오직 백 여명만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곧 이탈리아 후방군은 이탈리아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독일이 일부로 열어둔 트렌트행 도로를 따라 후퇴했다. 그들은 트렌트에서 또 다른 공포를 체험했다. 독일의 최정예 군에 순식간에 군대는 분해되어 뿔뿔이 흩어져서 산지의 산악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대다수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독일에 투항했으며, 일부만이 산에서 독일 산악부대를 피해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의 명장 조르지오 모로는 독일 침공에 반대해서 은퇴되었지만, 전쟁이 본국으로 돌아오자 급히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기회를 잡아다는 듯이 동쪽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상황마저 초래되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조르지오 모로는 독일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변이고, 소련을 물리치는 것이 더 옳다고 군부에서 말했다. 그의 의견은 정확했지만, 언론을 조작한 군부의 입장에서는 패배의 인정은 매우 큰 불명예이자 오점을 넘어선 붕괴였다. 군부는 답변을 회피하는 동안, 이탈리아는 모든 육군이 정상적인 작전을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서 독일과 소련의 공격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 독일은 만토바를 돌아 소련군을 물리치기 위해 베니스로 방향을 돌렸다. 4월 16일,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이탈리아 군대없는 전쟁이 펼쳐졌다. 트레비소의 전투는 꽤 쉽게 흘러갔다. 대다수가 이탈리아의 전쟁능력 상실을 틈타 사방으로 퍼져서 점령지만 늘리고 있었기에 그저 각개격파를 진행했다. 그들은 다시 뭉치기에는 서로 멀었고, 그대로 우디네까지 밀려서야 대항할 수 있었다. 파견된 8만명 중 2만명이 그 곳에 모여 독일과의 협상을 통해서 19일, 모두 소련으로 후퇴했다. 이탈리아는 그들이 싸우는 동안 15만명의 민병대를 구성하여서 대항할 작전을 구상했다. 4월 22일, 그들은 독일이 너무 깊이 들어왔음을 인지했다. 그들은 이들을 포위할 수 있다고 다시금 오판했다. 그들의 외곽 방어선은 베니스에서 베로나까지 일자로 매우 균일하며 완강했다. 또한, 베로나 북부로 뻗은 산간 도로를 따라 방어선이 건설되어 방어했음에도 비교적 허술했지만, 이탈리아 군이 노릴 만한 곳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베로나와 베니스 두 개의 거점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산악지역에서 흩어진 이탈리아 주력군을 수색하는 이탈리아 정예 산악군 알피니 (출처: 위키백과)

이탈리아 군은 개인 화기도 부족하고, 중장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항공지원도 포기한 상황이었다. 반면, 독일은 수 많은 전차와 견인포, 지뢰들을 장비하고 개인 화기는 독일에서 직접만든 최고급 최신예 화기였다. 그들은 제공권을 장악한 공군과 걱정 없어보이는 보급선도 있었다. 결과는 확연했으나, 모로를 제외한 고지식하고 앞뒤가 막힌 보수주의자 이탈리안 장교들은 이를 보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를 하지말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들은 가장 방어가 단단한 베니스와 베로나에서 거의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막 훈련받은 신참들은 지뢰에 대부분 전사했고, 향토예비군은 독일의 직접적인 포화를 보고는 전사했다. 독일은 이 전선을 지키는 5일동안 20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그 중 12명은 사고사였으니, 이 공세는 독일에 어떠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반대로 이탈리아는 뼈저린 패배를 보았다. 많은 청년들을 전쟁에 밀어넣은 군부와 정부가 질타를 받았고, 언론도 항복쪽으로 기를 돌렸다. 개전과는 정반대로, 독일의 인상은 소련의 붉은 손아귀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줄 수 있고, 이탈리아의 재건도 도와줄 나라로 바뀌어서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분열되었고, 군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이탈리아 무역선이 소련의 잠수함의 오발로 침몰당하자, 정부는 확실히 항복으로 편을 갈아탔고, 군부가 사건의 진상을 모두 밝힌다는 조건하에 이탈리아는 독일 연방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주를 독일에 할양했다. 이탈리아가 독일의 일원이 되자, 스페인도 독일의 영원한 동맹국이라고 30일에 공식선언했고, 독일이 이를 승인했다. 독일은 벌써 유럽을 북쪽에서 남쪽까지 장악했고, 이탈리아의 지리적 위치로 이집트에 아랍전쟁 때의 일로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바로 이집트 국토에서 채굴되는 석유의 30%를 독일에게 수출한다는 것이었다. 이집트는 하루에 400만배럴의 석유를 얻는 소련을 제외한 가장 큰 산유국이었다. 독일은 이집트와 친선관계와 동맹을 선언하고 독일-이집트 석유 관리 조약을 통해서 하루에 약 120만 배럴의 석유를 얻게 되었다. (한국은 2014년 기준 년간 360만 배럴을 소비한다.) 독일은 이로써 유럽의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게 되었고, 그들은 국가의 안정을 찾는데 얼마 걸리지 않게 되었다. 그건 소련의 덕이었다. 에른스트 1세는 이 사태를 더 상세히 조사하라고 NIA에 명령했고, 지도자 명령 6, 7호를 내려서 TS와 RTS에 폴란드 침공네덜란드 방어 전략을 준비하라고 했다.

바이크셀 작전
1988년 바이크셀 작전안

에른스트 1세는 다국적군으로부터 더 이상의 진격은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반하는 일이라며 경고했고, 범유럽 평화 불가침 조약의 반하는 이탈리아 사태에 연합군은 즉시 그들에게 경고를 가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주둔하는 모든 다국적군의 지휘를 각각 프랑스와 영국 직속으로 바꾸어버렸고, 4월 29일에 이르러 일부 독일군의 지휘를 독일 사령부에서 다국적군 최고 사령부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독일은 특히, 토비아스는 이 요구를 완전히 무시했다. 토비아스는 즉시, 다국적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에른스트 1세는 이 요구을 승인했고, 5월 1일에 프랑스의 바람에 맞추어 프랑스 국경에 배치된 독일 제5군의 지휘권을 파리 다국적군 사령부로 이전했다. 토비아스는 역시 탐탁치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토비아스는 이탈리아 사태의 책임으로 핀란드로 향했다. NIA의 보고로 이탈리아 사태가 토비아스가 일으킨 사태라는 것이 확정되며, 에른스트 1세는 직접 그를 파하고, 핀란드로 보내었다. 이 일은 즉시 다국적군의 귀에도 들어가서 많은 비난을 샀다.

유럽 전역은 허울 뿐인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었다. 5월 11일, 독일은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 오스트리아를 완전 합병 상태로 끌어냈고, 체제 정비가 끝나갔다. 곳곳에 독일 군사 시설과 군수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구 정부 청사에는 독일 깃발이 휘날렸다. 병합된 국가의 국민들은 독일의 보호망 아래 사회주의로부터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5월 17일, 스웨덴에서 대규모 합병 반대 운동이 벌어졌지만, 독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에른스트 1세의 명령으로 5월 19일, 운동을 해산시키고, 각국의 정부 청사를 주 청사로 지위를 바꾸었다. 그리고 외교권, 군사권, 범죄 처벌에 관한 권리를 제외한 모든 권리를 주 정부에 허용해주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그리고, 소련과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프랑스는 주 함대를 아시아로 파견했고, 영국도 1개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미국은 모든 전력을 태평양으로 배치했다. 중국은 한 차례 반격에 성공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으나, 다시 밀려오는 일본군과 그들의 항공 지원에 무너져 충칭 외곽 경계선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독일은 소련이 중국 전역에 막대한 자원과 자본을 집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NIA는 포즈난에 1개의 첩부팀을 전부 투입하였고, 바르샤바 지구와 소련군의 현황을 몇 일간 계속해서 보고했다. 6월에 이르러 야전군 16개로 이루어졌던 폴란드 군관부는 20개 어쩌면 그 이상의 야전군으로 증강되어 있었다. 에른스트는 폴란드 침공을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철도 체계가 복구된 일러도 6월 말에 가서야 가능했다.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노리고 있음을 알아채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30만의 대군을 추가로 배치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하여 군사적 행동을 준비했다. STAVKA는 즉시 수복 작전을 수립하고 군사 서열을 정리 배치했다. 작전 개요는 독일군의 국경 침공을 전제로 하여 3개의 군으로 폴란드 회랑을 봉쇄하고 나머지 2개의 군으로 슈체친과 그단스크 사이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폴란드의 진지선에서 어느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6월 18일, 에른스트는 TS와 독일 최고 군사사령부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이미 5월 중순에 이르러서 지도자 지령 5호로 군사 작전이 수립된 상태였다. 이번에는 게브하르트 겐트너가 안을 완성하여 제출했다. 에른스트는 1차 검토를 마친 뒤에 비스와 강의 이름을 빌려 비스와 작전, 독일어로는 바이크셀 작전이라 명명했다. 바이크셀 작전은 쾨니히스 작전이 동반되었는데, 이 작전은 독일 해군을 동원하여서 칼리닌그라드 항에 정박하고 있는 발트 함대 소속의 순양함 2척, 구축함 12척, 구식 전함 1척을 제압한 다음에 칼리닌그라드에 상륙을 시도하는 작전이다. 바이크셀 작전은 이 쾨니히스 작전이 완료되면, 대구경 자주박격포와 대량의 자주포와 박격포로 폴란드 진지선에 사전 포격을 가한 다음, 진격할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부에서는 빠른 기동 전으로 바르샤바를 먼저 차지하고 퇴로를 장악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있으려면, 제공권 장악이 필수였다. 하지만, 미국의 제외한 다국적군은 더 이상의 대독 지원을 거절했고, 미국마저 물자 원조만 해왔다. 공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독일 해군은 그 세력이 미비했다. 당시 독일 해군 전력은 구축함 25척, 순양함 4척, 항공모함 1척, 잠수함 22척 정도였는데, 이후 영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겨두어야 했다. 또한, 4월과 5월 사이에 두 차례 있었던 소련의 공습으로 순양함 2척이 큰 피해를 입어 수리 중이었다, 반면 발트 함대는 오랜 냉전 끝에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공군도 이제 막 -소련 공군에 턱 없이 모자란- 공격기 2,000기를 넘기고 있었다.

참모회의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었지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일 최고 군사 사령부는 육군 46개 중 32개의 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해군도 전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대신 독일 공군도 전력 투입하였고, 그 절반이 해군력 보호에 쓰이게 되었다. 또한, 정예군인 제국 군단 4개 군이 추가로 작전을 배정받았고, 소련의 수복 작전에 맞서 시간을 끌 동 프로이센 야전군을 추가로 창설했다. 작전은 20일까지 검토를 거쳐 구체화되었고, 25일에 실행되기로 결정되었다.

21일까지 각 육군은 전투 서열을 배정받았다. 크게 3개의 집단군과 1개의 개별 집단군으로 이루어졌는데, 폴란드 회랑과 칼리닌 작전을 담당하는 북부 집단군은 게브하르너 겐트너 대장이, 정면에서 폴란드 군관부로 진입할 중부 집단군은 하인츠 클라인이, 남부에서 폴란드 진지선을 견제할 남부 집단군은 슈테펜 슈미트 장군이 배정되었으며, 북부 집단군 예하의 쾨니히스 작전을 수행할 쾨니히스 기갑군은 오토 폰 클루게 소장이 담당했다. 해군은 폰 헤센 제독이 총괄했으며, 공군은 크게 해군 엄호와 육군 엄호로 나뉘어 각각 폰 라이닝겐 대장과 폰 비드 소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23일이면, 해군이 로스토크 항을 나와 칼리닌그라드로 향했고, 공군은 베를린과 그단스크, 오스트라바, 프라하 등지로 전투기를 옮겼다. 육군은 그단스크부터 시작해서 베를린을 거쳐 프라하, 프레쇼브까지 나열되었다. 그 다음 날, 그단스크 항에서 1개의 야전군이 수송선을 올랐다. 이후 저녁에는 1개의 야전군이 추가로 수송선에 올랐고, 5개의 공수사단이 수송기에 탔다. 25일, 소련 정보부는 새벽 2시에 급하게 폴란드 군관부의 세르게이 대장에게 독일이 오늘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세르게이 대장은 급히 전시체제를 선포하려 했으나, 그는 포즈난 사령부에서 NIA 소속 독일 첩보부에 사로잡혔다. 여하튼 부관에 의해 폴란드 전역에 전시상황이 선포되기 30분 전인 새벽 3시에 쾨니히스 작전이 실행되었고, 폴란드-독일 국경에서는 사전 포격이 이루어졌다. 독일 11개 야전군과 3개의 제국 군단의 일선 포격 부대는 폴란드 진지선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여기에 독일 공군이 진지선의 주요 시설과 상륙 지점, 후방 진지를 폭격했고, 주기 중인 소련 전술기 200여 기를 파손시켰다.

포격이 시작되기 전인 25일 새벽 2시 30분에, 발티스크 앞바다에 독일 함대가 정렬했다. 구축함 12척이 가장 선두에서 배치되어 함포와 미사일을 항구에 정박한 각 함선에 조준했다. 그 뒤로 순양함 3척이 공격 명령을 대기 중이었고, 항공모함은 후방에서 구축함 8척과 순양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며 함재기를 이륙시켰다. 함재기 30개가 항구 위를 순회하며 공격을 대기하고 있었고, 잠수함은 그 북쪽에 발트 함대 저지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3시에 이르러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칼리닌그라드 전역에 사이렌이 울렸고, 즉시 전투태세로 돌변했다. 10분내에 해안포가 가동될 것이었고, 소련 수상함도 전투를 시작할 것이었다. 폰 헤센 제독은 그렇게 되기 전에 바로 공격,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 즉시 미사일 20기가 발사 플랫폼 위로 날아올라 항구를 타격했고, 함포가 불을 뿜었다. 발티스크의 해안포가 곧 작동을 시작했으나, 대부분이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독일 전투기는 적 수상함에 미사일을 꽂고 인근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구축함은 선회하여 석호 내부로 진입했고, 계속해서 항구의 수상선을 두들겼다. 공격 명령이 하달된 지 3분만에 소련 순양함 1척과 구축함 6척, 구식 전함 1척이 피격되었다. 특히, 구식 전함으로 보고되었던,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의 정체가 드러나며, 집중 공격이 가해졌다. 3시 50분, 소련 구축함 8척과 순양함 1척이 전투불능에 빠지고 해안포 1기만이 가동되고 있을 때, 소련 해군은 반격에 나섰다.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이 기동하기 시작한 4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고, 항구를 봉쇄 중인 독일 해군에 대한 포격을 실시했다. 해안포와 칼리닌그라드 공군 기지에서 지원하러 온 소련 전투기의 엄호로 항구 봉쇄를 풀고 칼리닌그라드 앞바다로 탈출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소련 전투기는 독일의 수상함과 마주하기 전에 그단스크 소속 독일 공군에게 휘둘렸다. 수적으로 독일 공군이 우세했고, 요격 명령에 더 많은 공군기가 이 지역으로 몰려올 것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곧 함재기 급유가 끝나 재발진할 예정이었다. 독일 해군은 구축함 1대가 소련 수상함 포격에 탄약고가 폭발하며 침몰했다. 폰 헤센 제독은 잠수함 2척의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 군함을 뒤쫒아 칼리닌그라드 앞바다로 진입했다. 이미 칼리닌그라드는 독일 공군의 전략폭격에 해안의 주요시설은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새벽 4시, 폴란드 전역에 최고 등급의 전시상황이 공표되었고, 독일도 발티스크에 5개의 사단이 상륙을 시작했고, 칼리닌그라드에서도 2개의 공수사단이 주요시설에 강하하여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칼리닌그라드 항에 정박 중인 구축함 5척이 불이 붙어 연기로 자욱한 채로 추가 발견되었다. 독일 해군은 4시 18분, 소련 최신예 소련 순양함에 미사일 2개와 포탄 5개, 어뢰 3발을 순차적으로 맞으며, 독일 순양함 1척과 명을 같이했다. 이후 소련 구축함 3기가 합동으로 기동하여 독일 잠수함을 몰아쳤으나, 함재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항전하던 소련 구축함 한 척은 4시 23분, 미사일 2발을 얻어맞고 상부 구조물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며, 제어권을 잃고 항만 구조물에 부딛혀 침몰했다. 4시 30분, 독일은 구축함 3척과 순양함 1척, 잠수함 1척이 파손되었고,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이 침몰된 함대로 연안 폭격을 실시했고, 그 후 예정보다 늦은 새벽 5시에 상륙정이 연안에 도달했다. 새벽 6시까지 총 5개의 야전군 규모의 상륙군이 연안에 그리고 주요 시설에 모여 다음 기동을 준비했다. 이 소식은 즉시 총 사령부에 보고됐고, 곧 3개의 집단군에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소련은 새벽 4시부터 반격 준비를 하였다. 즉시 수복 작전에 착수하여서 소련 제14, 13군과 새로 설립된 비엘코폴스카 전선군을 슈체친으로 진격시켰다. 하지만, 곧 독일 정예 부대가 포함된 제42, 45군의 저항에 저지되었다. 폴란드 회랑으로 진입한 제27, 30군 또한, 동 프로이센과 독일 제14군에 저지당했다. 반면 폴란드 남부에서는 새벽 6시까지 계속해서 포격과 폭격이 진행되어 소련의 진지선을 갈아엎는데 성공했다. 국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이 연기로 자욱했다.

새벽 6시를 기점으로 독일은 총 진격을 시작했다. 먼저 제1, 9, 10, 22, 23, 38군으로 이루어진 A기동군은 제45군이 타개해 놓은 코스트신나트오드롱 지역의 저지선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앞에는 오데르 강이 놓여있었다. 더 남쪽으로는 제3, 16군으로 이루어진 B기동군은 그 지류의 나이세 강을 도하해야 했다. 보병을 앞세워서 도하를 시작했지만, 일부에서 지속적이진 않지만, 진지선의 마지막 발악이 계속되고 있었다. 초기 도하에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2시간 동안, 교량 전차의 도움으로 전차를 포함한 주요 장비까지 도하가 가능했다. 폴란드 진지는 9시에 A기동군이 처음으로 넘어섰다. 5분 정도 격차를 두고 제2제국 군단을 선두로한 남부 기동군이 진지선을 넘어 오폴레로 진입했다.

포즈난에서 세르게이 장군을 감금한 독일 첩보부는 새벽 8시에 이르러, 사령부 건물에서 항전하다 작렬히 전사했다. 소련 경찰을 비롯한 군은 사령부 건물로 진입했지만, 다수가 첩보부의 총격에 사망했고, 뒤에는 건물이 폭파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매몰되었다. 사령부가 폭파된 지 30분이 되어, 예정보다 느려졌지만, 공수부대가 포즈난과 크라쿠프, 코닌 등지에 강하했다. 이들은 하루 안에 그곳에 도달한 기동군을 위해 도시를 정리해야했다.

A기동군은 진지선을 넘어 소련 제13군과 제24군의 연결을 끊어냈고, 멀리로는 비엘코폴스카 군의 남부를 견제했다. 오후 1시까지 A기동군의 좌측을 보호할 제45군과 제22, 42군이 합세하며, 수복 작전을 수행하던 소련 제13, 14군과 비엘코폴스카 군을 그들의 사수 위치에서 밀어내고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우측은 독일 제39군이 폴란드 진지선을 돌파하고 소련 제24군과 교전하며 시간을 끌고있었다. 중부 집단군 사령관, 하인츠는 A기동군을 더 깊게 진군시켜 오후 2시에 소련 제24군마저 포위했다.

북부에서는 적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해 곧바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륙한지 3시간 즈음인 9시에 2개의 야전군(쾨니히스 기동군)은 옐블라크를 향해 남진했고, 제35군은 소련이 급히 파견한 제89군을 피해 오스트로다로 진군했다. 그 동안, 남은 두 야전군은 칼리닌그라드 수비군과 소련 제89군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오후 2시까지 쾨니히스 기동군은 예블라크를 돌파하고 소련 제27군과 제30군을 독일 제14군과 동 프로이센군과 만든 포위망에 몰아붙여 가두었다. 오후 6시, 푸오츠크에서 독일 제35군의 선두 그룹과 쾨니히스 기동군의 선두 그룹이 합류하여 바르샤바를 수호하는 소련 제6군과 대치했다.

남부에서는 제3군과 제16군이 9시에 진지선을 열어제치고 소련의 19군과 20군의 연결 고리를 차단했고, 독일 정예군인 제13군은 제39군이 타개한 진지선을 지나 소련 제20군과 지엘로나구라에서 맞붙었다. 독일 제15군과 제46군은 진지선의 제19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오후 5시에 레그니차에 진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되어 있었던 독일군은 상당히 고전했다. 체코방위군이었던 제1제국 군단은 제17군과 함께 진지선을 넘어 브로츠와프에서 소련 제17군 예하의 보병사단과 교전을 벌여 오후 10시에 이르러 저항을 짓누르며 도시를 차지했다. 남부 기동군은 오폴레의 저항을 뚫고 제17군의 배후를 차단하고 선두그룹은 체스토호바 인근에서 소련 제22군과 제28군의 강력한 저항에 저지되어 고착된 상태였다. 남부 기동군 우측으로는 제3제국 군단이 오후 3시에야 소련 제15군의 저항이 종식되어 진지선을 넘어 카토비세 남부와 크라쿠프에서 제16군의 저항을 받았다. 그보다 더 우측은 제24, 41군과 제4제국 군단이 진지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제4제국 군단이 진지를 우회하여 크로스노에 접근한 것을 제외하면 소련 제29군의 완강한 기세에 눌려 진격하지 못했다. 독일의 급습은 어느 정도 통했지만, 완전하진 못했다. 오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진격이 거센 저항에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결국 오후 10시의 전선이 고착화되었고, 다음 날을 기다려야 했다. 새로운 날을 기다리면서도 모두는 바빴다. 폴란드 시민들은 모두 바르샤바로 모여들고 있었고, 그런 뒤에 제6군 예하 보병사단과 경찰, 제102군의 보호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대피했다. 공중에서는 독일 공군의 야간 폭격과 함께 공중전이 수 놓았고, 해상에서는 발트 함대의 출현으로 독일 해군이 급히 그단스크로 향하고 있었다.

하루 만에 폴란드 전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쾨니히스 작전에 소련 해군은 하루 만에 순양함 3척과 구축함 17척이 침몰했다. 반면 독일의 해군 손실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침몰되었고, 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잠수함 1척이 피해를 입었다. 그 잠수함은 그단스크 항에 정박하기 전, 소련 공군의 공습에 침몰했다. 독일 공군은 약 50여기가 격추되었고, 80여기가 피해를 입었다. 그 대신, 소련 공군기 250여기를 파괴했다. 땅에서는 전역 전체에 배치되어 있던 소련 19개 야전군 중에서 포위된 야전군은 7개에 달했고, 야전군 2개는 제압당했으며, 칼리닌그라드 수비대와 그 외의 2개의 군이 무력화되었다. 전선에서 자유로운 소련 야전군은 오직 제18, 21군, 2개 뿐이었다. 또한, 독일의 공수작전으로 포즈난, 코닌, 크라쿠프가 독일 수중으로 ᄄᅠᆯ어진 상태였다.

새로운 날의 새벽을 연 것은 야간 공습에 뒤이은 독일 3차 공습이었다. 특히, 포위된 소련군에 대해 막강한 포격과 폭격이 이어졌다. 아침 8시, 독일은 다시 진격을 개시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아니었지만, 소련의 저항은 더욱 치밀해졌다. 조직체계가 완전 복구되었다. 새벽 3시, 포즈난을 소련이 재점령하며 구출되어 포로로 시청에 감금되어 있던 세르게이 대장을 찾아서, 바르샤바로 몰래 후송했다. 그는 아침 10시에 깨어나 일선으로 복귀했다. 독일 남부 집단군도 슈미트와 에른스트의 압박으로 더 분발했다. 독일 제 41, 24군은 차례로 10시에 진지선을 마지막으로 돌파하여 노비사치에서 소련 제29군의 발을 묶었다. 그 틈에 전 날 진지선을 우회하여 돌격한 제4제국 군단에 의해 배후가 차단되며 포위되었다. 또, 중부에서도 독일 제16군이 소련 제20군 배후를 지키는 제25군을 밀어붙여서 두 야전군을 모두 포위시켰다. A기동군은 오후 3시에 포즈난에 입성했으며, 선두 그룹은 코닌에 도달했다. 포츠난과 노비사치에 대해 보고받은 폴란드 군관부 사령관인 세르게이는 푸오츠크, 코닌, 칼리슈, 체스토호바, 크라쿠프를 최종 방어선으로 지정하고 아직까지는 자유로운 제21군을 기동하여 제25군의 포위를 해제하고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부에서는 소련 제6군이 후방이 부실한 쾨니히스 기동군을 몰아내고 푸오츠크 일대를 수복했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제89군은 칼리닌그라드에 입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밀려나고 있었고,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던, 13개 야전군은 포위되어 있었다. 오후 7시에 다다라서, 남부 기동군이 제28군을 무력화시키고 체스토호바를 완전히 장악했다. 오후 7시 30분에는 키엘체가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굳히기 단계에 들어갔다. 반격에 나서는 소련 제6, 21, 22군의 공격으로부터 현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실제로 그 상태에서 밤이 찾아왔다. STAVKA와 TS모두 그날 밤을 지새웠다. 해전은 이 날을 기점으로 없어졌고, 공군도 큰 공중전 없이 넘겼다. 대신 육군의 싸움은 더 치열해졌다. 독일은 밤 사이에 포위망을 개선했다. 소련 제13, 14, 20, 24, 25, , 27, 30군과 비엘코폴스카 군을 한 곳으로 몰아야했다. 또한, 소련 제15, 16, 28, 29군도 묶어서 관리해야했다. 그러면서 푸오츠크 일대를 수복해야했고, 일주일 안에 우쯔로 진출해야 했다. 소련군은 더 골치가 아팠다. 최종 진지선을 이동해야 했으며, 포위당한 주력을 구출해야 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날부터 공군의 손실을 무릅쓰고 보급품 강하를 해야했다. 세르게이 장군은 그 날, 소비에트 러시아에 증원을 요청했지만, 오직 8개의 사단으로 제6군의 손실을 메우고 제18군의 일부를 증원할 정도였지 전세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1988년 6월 30일, 소련 정부는 독일과 소련의 분쟁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범유럽 평화 불가침 조약이 독일에 의해 파기되었음을 추가로 언급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즉시, 독일에 경제적 압박을 실시했고, 7월 1일, 해외 자산을 동결시켰다. 이집트를 압박하여 대독 석유 수출의 8할이 감축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5일, 전선을 독일이 완강히 상태를 유지했고, 푸오츠크의 독일군의 후속 부대가 줄줄이 도착하며, 푸오츠크는 독일의 차지가 되었다. 소련은 바르샤바 후방에 50개의 예비 사단을 배치했지만, 전선에 투입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웠다.

7월 8일, 독일은 작전을 시작한지 13일 째에 접어들었다. 독일군 참모들은 어서 포위망의 소련군을 정리해야했다. 13일 동안, 항전하고 있는 적들은 이미 분열되고 그 간의 전투로 기세가 꺾여 있었지만, 여전히 3개의 군 38만 명의 규모였다. 식수 공급이 어려워 진지는 통상 4일 내외였다. 이 날 오전에 20만 명은 항복하고, 11만 명은 전투불능이 되었지만, 이 날 저녁까지 7만의 소련군이 포위망에서 작렬히 전사했다. 다음 날, 포위망이 정리되었다는 보고에 독일 지휘부는 즉시 맹공을 개시할 시간을 정해야 했다. 그들은 또 다시 독일군을 A, B, C기동군으로 나뉘었는데, A기동군은 독일 제1, 9, 10, 22, 23, 38, 39, 42, 45야전군으로 증편되었고, B기동군은 독일 제3, 13, 16, 15, 46야전군으로 편성되었다. C기동군은 독일 제12, 17, 18야전군과 제1, 2, 3제국 군단으로 편성되었다. 쾨니히스 기동군도 제14군과 동 프로이센 군이 합류하면서 개편되었다. 각각의 주둔지는 포즈난, 지엘로나구라, 체스토호바, 푸오츠크였다. A, B, C기동군은 남은 소련 제18, 21, 22군을 제압하고 우쯔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쾨니히스 기동군 즉, 북부 집단군은 제6군을 제압하고 바르샤바를 공략해야 했다.

소련은 긴 고착 상태 동안, 코닌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허울뿐인 수복이었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뿐 아니라, 제89군은 포위를 피해 후방으로 퇴각해야 했다. 또한, 키엘체에서도 패배하였다. 폴란드 군관부는 이미 4개의 야전군만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후방의 제102군과 퇴각한 제89군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직속으로 변경되었다.

독일은 공세를 시작하기에 앞써서 피해를 수복했다. 사상자 12만여 명을 추가로 파견했으며, 코닌에 추가적인 공수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7월 12일, 독일은 행동을 개시했다. 독일은 피로도 높은 일선을 뒤로 물리고 이선을 앞세워 진격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전선에 있었던, 소련 제21군과 제22군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수적으로도 상대가 되질 못했다. 곧 이 공포는 소련 제18군에도 전해질 것이었다. 쾨니히스 기동군은 중부 집단군이 소련 2개의 소련군을 제압하고 우쯔 외곽에 다다랐을 즈음에 제6군을 바르샤바 외곽 방어선에서 몰아낸 뒤, 나레브 강을 도하했다. 오후 3시, 소련 제18군은 우쯔에서 21개의 독일 야전군에 의해 두들겨 맞았다. 물론 그 중에서 16개의 야전군은 우쯔를 우회해서 바르샤바와 라돔으로 진격했다. 오후 6시, 소련 제18군은 압도적인 화력에 항복을 선언했다. 오후 8시부터 본격적으로 바르샤바 시가전이 펼쳐졌다. 소련은 이제야 50개의 예비사단을 투입할 준비를 했다. 세르게이를 포함한 폴란드 군관부 참모들은 툴툴거리며, 퇴각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은 폴스카 지방과 백러시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바르샤바를 쉽사리 내줄 생각이 없었다. 소련은 즉시 바르샤바 외곽으로 새로 창설된 폴스카 방면군 6개의 야전군을 투입하려 했으나, 소련 최고 사령부의 의견 대립으로 지연되고 있었다.

독일은 전역 재정립에 나섰다. 전역에 투입된 32개의 야전군 중, 오직 5개의 야전군, 총 42개의 사단, 48만 명을 바르샤바에 투입했고, 나머지 군은 에우크, 윔자. 치에하누프, 라돔, 키엘체, 타르누프, 크로스노와 같은 새로 만들어진 전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2킬로미터에 한 연대 단위로 배치될 수 있었지만, 주요 거점에 군단 단위로 배치하면서 6킬로미터에 한 연대로 배치되었다. 특히, 바르샤바 위 아래로 병력이 증강되었다. TS와 NIA는 소련군의 행동을 시시각각 포착하고 있었다. 작전 시작일로부터 25일 후인 7월 20일, 독일군의 재배치가 끝났고, 바르샤바 외곽에 자주포 500문이 배치되었다. 우쯔 공장에도 독일 공군기가 배치되었다. 22일, 전역동안 28회의 공습 또는, 폭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오전 3시에 29번째 폭격이 바르샤바를 덮쳤다. 소련군의 요격이 있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오전 3시 12분, 독일 폭격기 한 대가 소련의 요격에 날개 하나를 잃고 바르샤바 동물원에 추락하고 대폭발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던, 방공병 천 여명이 즉사하고, 세르게이 장군은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에는 30번째 폭격이 이루어져 비스와 강에 놓인 3개의 철교를 폭파시켰다. 오후에는 남은 철교를 모두 폭파시키며, 바르샤바를 반으로 나누었다. 시가전 상황은 암담했다. 매일 포격이 이어졌다. 자주포는 그 화망을 시가지로 좁혀갔다. 그럼에도 스타레미아스토와 각종 미술관, 박물관은 피했다. 독일은 11일 동안 이어진 시가전에 추가적인 방안을 모색해야했다. 그들은 스타레미아스토와 프레드릭 쇼팽 박물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국립 미술관, 국립 박물관, 국립 도서관, 폴란드 유대인 역사 박물관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정확도를 위해 수송 헬기가 정지된 상태에서 강하해야 했다. 작전 준비에 2일이 걸렸다. 그 동안, 독일 육군은 바르샤바 외곽의 공항 2개를 장악했고, 빌라누프 궁전을 온전히 점령했다. 사상자는 여전히 속출하고 있었다. 1개의 야전군이 바르샤바에 추가로 배치되어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곳곳에서 저격이 난무했다. 다음 날, 공수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전 10시에 주요 지점에 대한 강하가 시작되어 집중적인 요격을 받았다. 강하부터 심각한 손실을 맛보았다. 봉기 박물관과 유대인 박물관은 10분도 안되서 강하 병력이 괴멸되었다. 스타레미아스토에서는 50여 명이 항전하다 작렬히 전사했다. 독일은 즉시 실패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재시도가 필요했다. 육군의 진격은 매우 느렸다. 그렇다고 포격을 문화재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소련에게 이미 권고한 상황이었지만, 소련은 후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7월 28일, 독일 육군은 진격하여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장악했다. 역시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미술품에는 화약가루가 끼여 훼손된 것만 해도 5정이 넘었다. 30정은 소련군이 백러시아로 옮겼고, 나머지는 독일령 자유 폴란드 정부의 스웁스크 지하 시설로 옮겨졌다.

7월 31일, 독일은 3개의 기갑사단을 동원하여 보워민을 급습하여서 소련 예비군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독일 공군도 즉시 합세하여서 괴멸적인 피해를 안겨주며, 배후를 차단하려 했으나, 강력한 저항으로 다시 밀려났다. 소련은 3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후방으로 옮겨야했다. 세르게이는 곧 포위되어 옴짝달싹 못하리란 걸 알았다. 상부에서도 알고있었지만, 퇴각을 용서치 않았다. 8월 2일, 스타레미아스토 역사 지구를 제외한 바르샤바 일대가 독일의 권역에 들어갔고, 후방을 지키던 폴스카 집단군도 퇴작한 상태였다. 세르게이는 참모들에게 독일군에 항복하자며 권유했지만, 3일 아침, 그가 항복을 결심하고 방어선을 나가려는 그 때, 소련 헌병대에 참모들과 함께 포박되었다. 그 날 오후, 소련은 범죄자 수송이란 명분으로 일시 휴전을 일반적으로 선언했고, 3대의 MI-8 헬기를 파견했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서, 바르샤바에서도 방공장비를 재가동시켰고, 전략기 5기가 엄호를 위해 출동했다. 저녁 10시, 독일 점령지로 전락한 보워민 상공에서 한 차례 독일의 대공사격을 받았지만, 큰 피해없이 바르샤바의 소련군 영역에 착륙했다. 독일 공군은 즉시 3대의 제공 전투기를 우쯔에서 발진시켰고, 20분 간격이 있은 뒤 5대를 추가로 발진시켰다. 그 사이에 세르게이 장군과 참모들은 헬기에 강제로 올랐다. 곧 이륙했지만, 불운하게도 독일 공군의 교전으로 헬기 3기 중 2기가 격추되면서, 일부는 보워민 일대에 낙하산에 의지해 긴급 탈출했지만, 다수가 사망했고, 살아남았더라도 독일군의 포로로 오폴레의 포로수용소까지 걸어가야 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독일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은 헬기는 모스크바 외곽에 착륙하여 세르비아를 내려놓았다. 그는 모스크바 군사 재판소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소련군 점령 바르샤바 지역은 8월 4일 정오까지 항전했지만, 정오를 기점으로 소련 헌병대와 남은 참모부 소속 소련군의 내전으로 번지면서 자멸했다. 이 사건으로 STAVKA는 보워민 탈환 시도를 완전히 포기했고, 폴란드의 복수를 후일로 기약하게 되었다.

자유진영 양분

프랑스 전역(1988)


전쟁의 세계화

제일군 전성기

평화군의 반격

소모전

아시아

반 공산주의 전쟁(서막)

아시아에서의 전쟁 발발(서막)

자유진영 양분

전쟁의 세계화

제일군 전성기

평화군의 반격

일본 패망

독일과의 협상

종전

유럽

아시아

결과

소비에트 인도, 동아연방,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활약 끝에 도이치 정부대독일 일본 제국을 붕괴시킨 계기로 이들은 자국으로 일본으로부터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과 함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졌을 뿐아니라,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평화 국제군에 무조건 항복한 일본은 동아연방에 의해 그린란드 정부를 인도하여 도쿄에 정착시키고 제2차 도쿄 재판을 열었다. 독일은 협상으로 종전시킨 만큼 자체적으로 파리 재판을 열었다. 일본은 전쟁의 책임으로 동아연방에 규슈를 할양하게 되고, 사할린과 북방 제도에서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오키나와는 평화 국제군에 의해 관리되었다. 독일은 발트 3국과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의 지배권을 포기했고, 이탈리아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소비에트 정부의 핵심이었던 소비에트 러시아가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자, 공산주의의 근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소비에트 해방을 선언하여 독립국가연합(CIS)가 탄생했다. 호주인민공화국은 호주 정부에 의해 무너졌으며, 동남아시아는 항복하게된 이유에 기초하여 전쟁 배상금과 같은 문제는 겪지 않았지만, 소비에트 정권이 거의 없어지는 무정부 상태에 놓였다가 CIS의 도움에 의해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인도 또한, 아랍 국가의 독립 전쟁에 쇠퇴하였다가, 바티칸 선언에 의해서 현대적 세계 분쟁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갔다. 아프리카 또한, 바티칸 선언에 의해 이전의 국경으로 회귀하였다. 남아메리카는 미국의 중재로 종전되었으며, 브라질의 독재 정권이 몰락하면서 바티칸 선언이 적용되었다. 전쟁에 의해 불가침성이 침해된 남극의 불가침성을 다시 확고히 했으며, 이스라엘의 독립 문제는 국제 연합의 투표를 통해서 승인되어 중동전쟁 이전의 영토에 돌아왔다. 캐나다 또한 Q-MOT 사태 이전의 국경으로 복귀했다.

파나마에서 입증한 핵무기의 위험성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에 의해서 소비에트 러시아미국, 프랑스, 영국등의 국가에서 핵무기를 회수하였으며, 독일의 핵은 100개를 제외하고 모두 폐기 처분했다. 남겨진 핵무기 100개는 국제연합 제네바 지부로 옮겨져서 보관되었다. 2002년에 이르러서 독일이 핵무기를 포기하자, 완전히 국제연합에 의해 통제되었다. 또한, 국제 분쟁을 보다 엄격히 제한하기 위해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2005년 기준으로 영국군의 규모를 넘어섰다.

세계 경제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미국의 산업 전반이 파괴되면서 미국 경제가 무너졌으나 대신, 독일인도, 중국, 동아연방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전쟁 이전의 경제규모를 아직까지 복구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20억 명이라는 막대한 인구가 사망한 것에 있다. 10년 동안, 인구 증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서 약 12억 명이 늘었으나, 아직 8억 명이란 격차가 있으며, 2010년에 들어서 세계의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문제가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

영향

사상자와 전쟁범죄

강제 노동

점령지 수탈

전투 및 기술 발전

경제

사용된 무기

제일군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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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이델베르크 1세 또는, 에른스트 1세라고도 표기한다.
  3. Vigrid(비그리드)는 게르만 전설에 내려오는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는 들판을 의미한다.
  4. ふっき(復歸)의 발음은 훗키, 뜻은 복귀로 만주에 일본인이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여담으로 장웨이 의용단의 대장은 세 명으로 삼 대장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가장 유명한 장웨이(张伟) 그리고, 창위程瑜, 페이위飞玉
  6. Q-MOT는 Quebec-Montreal, Ottawa, Toront의 약자로 Q뒤에 '-'가 있는 이유는 사태가 있는 동안 Q만은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7. 만악의 근원
  8. 원본으로 볼 때 더 나은 사진은 파일:1988year operation vigrid operatingmap first shot.GIF
  9. 원본으로 볼 때 더 나은 사진은 파일:1988year operation vigrid operatingmap third shot.GIF
  10. 하이덴베르크 1세의 다른 명칭으로 본명은 에른스트 폰 하이덴베르크이다. 풀네임은 문서를 참고
  11. 더 선명한 사진은 파일:1988year operation Kroinungstag operatingmap first shot.GIF참고
  12. Krönungstag; 코뢴옹스타크
  13. 독일어: Weichsel, 폴란드어로는 비스와로 폴란드 중부를 흐르는 비스와 강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