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

하진
카모이 모시르, 푸하이 구룬
河震
Хациен, カムイモシ
Бохай улс, ᡦᡠᡥᠠᡳ ᡤᡠᡵᡠᠨ, AKS-h.pngAKS-a.pngAKS-j.pngAKS-i.pngAKS-n.pngAKS-a.png
Hadin(Kasandres Bohainae)
Flag of Hadin.png
국기
표어 “一個極東"
하나의 극동
Map of Hadin.png
수도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
최대 도시 천경용천부川京龍泉府
 

하진(중국어: 河震, 아이누어: カムイモシ)은 북해도(北海道), 사할린 섬(庫頁島), 쿠릴 열도(千島列島) 등을 영토로 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위시한 다민족 영토 복합체이며, 이러한 영토 복합체는 수많은 영방정치체(領邦政治體)로 구성된다. 수도는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이다.[1] 수많은 봉읍국가(封邑國家)들이 발해-마츠마에(渤海-松前) 계통의 황제를 상위 군주로 삼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결집해 있으며, 또 황제는 형식상으로 이들 국가의 지도자에게 각각의 영토를 분봉하기에 봉건제적 정치 성격도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명

하진의 국명은 15세기~16세기에 《관판북국지승람(官版北國地勝覽, 1498)》에 '가신'(河震, がしん)으로 불리던 것이 현재의 한자 명칭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당나라(唐國)와 한반도계 국가에서 '유귀국(流鬼國)'으로 불렸으며, 발해(渤海)의 후신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후발해'(後渤海)와 '북발해'(北渤海)로 스스로를 칭하기도 했다.[주 1] 16세기 이전까지 일본은 주로 에조(蝦夷)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기타에조'(北蝦夷, きたえぞ) 등으로 불렸다.[주 2]

아이누인(アイヌ)들은 아이누어(アイヌ・イタㇰ)로는 '신의 땅'(神の地)이라는 뜻의 '카모이 모시르'(カムイモシ)라고 부르며, 만주인(滿洲人)들은 '발해국'(渤海國)이라는 의미의 '푸하이 구룬'(ᡦᡠᡥᠠᡳ ᡤᡠᡵᡠᠨ)이라고 칭하고 있다.

역사

북방 문명의 성립

북해도(北海道) 북부 예문도(禮文島)에 있는 향심정(香深井) 유적에서 수많은 개 뼈가 발견되었던 점, 아피시리시(ア・パ・シリ市)[2]의 모요로 패총(貝塚)에서도 300여 개가 넘는 뼈를 비롯해 오호츠크 해(オホーツク海) 연안에서도 가축의 뼈가 발견되었던 점은 사할린 섬북해도 전역에서 개와 돼지 등이 사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가축 사육의 흔적들은 오직 오호츠크 해 연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내륙과 연안간의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러한 연안 지대에서 발전했던 수렵적 형태의 원시 문명을 오호츠크해 문화(オホーツク海文化)로 명명하게 되었다. 사할린 연안에서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북해도에서는 10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이 문화는 유빙(流氷)이 흘러나오는 지역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오호츠크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대 유적에서는 이른바 '오호츠크식 토기'로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원통식 토기를 비롯하여 바다짐승과 어류들의 뼈, 이들을 잡기 위한 창의 촉과 낚시바늘이 발견되었고 이것은 오호츠크해 문화가 어로(漁撈) 활동과 가축 사육 및 수렵 활동을 병행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주 3]

오호츠크해 문화를 열었다고 추측되는 고대 니브흐인(ニヴフ)들은 사할린에 주로 거주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말갈(靺鞨)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융성시켰다고 한다. 이들은 점차 북해도 북부와 동부에 정착하여 그 문화를 아이누인(アイヌ)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허나 사할린은 동부여(東夫餘)에서 유입된 예맥인(濊貊人)들의 정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고, 북해도에서도 일본 북부와 유귀국(流鬼國)간의 교류를 통해 중세 즈음에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북해도 북부와 동부, 그리고 사할린 일대에 오호츠크해 문화가 널리 퍼져갈 무렵, 북해도 중부와 남부에 걸친 내륙 지역에서는 찰문 문화(擦文文化)가 전파되어 발전하였다. 이러한 명칭은 솔로 쓸어내는 듯한 무늬를 가진 '찰문 토기'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이전에 북해도 전역에 존재했던 속승문 문화(續縄文文化)가 혼슈(本州) 지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찰문 토기는 북해도는 물론이며, 일본(日本) 동북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기에 찰문 문화가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넘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찰문 문화의 사람들은 하천의 하구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여 연어(鰱魚)와 송어(松魚)를 중심으로 한 어로 활동을 비롯하여 수렵, 채집, 농경을 생업으로 삼았으리라고 학계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찰문 문화의 사람들이 중근세의 아이누인들의 후손이 아닌가하는 학설도 연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한편으로, 찰문 문화오호츠크해 문화 사이에서의 사람들간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이누인들의 구비서사시인 「유카라(ユ-カテ)」에서 '내륙인'과 '해양인' 갈등을 고조시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양측 문화의 사람들의 싸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주 4]

이들 상반되는 문화의 사람들은 점차 민족공동체로서의 의식을 자각하여 '아이누'로 불리는 촌락연합체를 형성해가게 되었다고 한다. 찰문 문화가 몰락하고 북발해(北渤海)를 건립하는 유민들과의 융화 과정이 시작되는 10세기 무렵에 '수혈식주거'(竪穴住居)에서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으며 벽 외부에 흙을 쌓아 열 손실을 줄이고 실내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복토식주거'가 자리를 잡는 등 주거 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전의 토기들을 대신하여 철제품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맥인들의 도래

본래 동부여(東夫餘)는 해부루(解夫婁)가 건국하여 두만강 유역에 존속했던 예맥계의 나라였다. 고구려(高句麗)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속국(屬國)이었으나 도중에 반(叛)했기에 광개토대왕의 정벌을 받게 되었으며, 410년에 동부여의 수도였던 여성(餘城)이 함락되자 말례왕(末禮王)[3]은 수만 명의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해 해협을 건너 섬으로 건너간 후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주 5]

사할린 섬(庫頁島)의 토착민족들은 점차 예맥계 유민들의 정주 문화로 흡수되었으며,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와 같은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부여 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움무덤(土壙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이 이 시기에 대거 조성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들이 치레걸이(裝身具)와 같은 치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청동도끼(銅斧)와 청동끌(銅鑿)같은 청동기 유물을 포함하여 동북 지역의 특성을 지닌 굽은날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의 출토가 이를 반증했다. 이에따라 문화적/산업적 우위를 갖추었던 예맥계 유민들은 점차 지배층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으며, 영고(迎鼓)의 제천행사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며 부여 법률의 영향을 받은 책법을 통한 처벌의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이전의 오호츠크해 문화가 빠른 속도로 사멸하고 예맥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음을 추정하게 되었다.[주 6]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계는 이들의 나라를 '유귀국(流鬼國)'이라고 부르며 존재를 인식했으며, 특히 고구려문자명왕(文咨明王)은 만주 지방에 남아있던 잔왕(孱王)의 북부여 세력을 멸망시킨 후, 부여의 실질적인 후신이 된 유귀국을 정벌하려고도 했다.[주 7] 다행히 당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통한 한반도 세력의 위협과 물길(勿吉), 거란(契丹) 등의 주변 세력에 대한 종속력이 약화됨에 따라 무산됨으로서 예맥 문화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주 8]

유귀국은 7세기 경에 당나라(唐國)에 조공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을 시도하였으며, 예맥 문화를 바탕으로 북방 발해(渤海)와 일본(日本), 통일신라(統一新羅)와의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했다고 한다.[주 9] 덕무왕(德武王) 시기의 목간에 따르면 '대부여(大夫餘)는 수천 리에 이르는 땅을 확보하여 칠천 호(戶)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상당히 융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때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유귀국과의 교류를 시도했고, 덕무왕에게 '유귀국공'(流鬼國公)을 수여했다.[주 10][주 11]

북발해의 수립과 봉건 사회의 발달

916년, 거란(契丹)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분열되었던 부족을 통합하고 요나라(大遼國)를 세웠다. 925년 음력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渤海)를 공격하였고 이 당시 발해는 내부에 쌓여진 모순과 지배층의 내분[4]이 다분했던 가운데, 야율요골(耶律堯骨)의 상경(上京) 함락으로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함으로서 926년에 발해는 급작스럽게 멸망하였다. 다수의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동단국(東丹國)의 거주하게 되었으나, 지속적인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이 전개되면서 정안국(定安國), 후발해(後渤海)와 같은 후계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956년, 정안국을 세운 열만화(烈萬華)의 아들, 열안림(烈安林)과 대인선의 아들로 추정되는 대광혜(大光暳)는 압록강(鴨綠江) 일대와 만주(滿洲) 지역에서 지속적인 독립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 이천여 호(戶)[5]에 이르는 유민들을 이끌고 사할린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예맥 문화와 대립이 발생하면서 완흥전투(完興戰鬪)[6]가 발발하였고, 이에 발해 유민 세력이 승리함에 따라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유민들을 이끌고 온 대광혜열안림을 비롯한 발해 왕족 및 귀족 출신 유민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대광혜는 수도를 덕안 용천부(德安龍泉府)로 하여 이전 예맥 지배층이 쌓은 관릉성(館陵城)을 정비하여 사할린 남부의 도시화를 꾀하였다.

학계에서는 이를 '북발해'(北渤海)라고 부르며, 12세기~14세기에 이르는 거란, 여진 유민들의 이주로 인한 혼란까지 가독부(可毒夫)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전 사할린 지역을 통치하던 예맥 민족들은 북발해의 귀족 사회로 편입되었으며, 대광혜의 뒤를 이은 민왕(悶王, 959?~970)은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발해를 잇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제시했다. 외교면에서는 사할린 남부의 아이누 문화와 융화되었던 이전 예맥 유민들과는 달리, 발해계 지배층은 사할린 아이누를 확고하게 복속시켰으며, 북해도를 통한 일본(日本)과의 교역 루트를 개척하였고, 동해 바다를 관통하여 고려(高麗)과 접촉하기도 했다.[주 12]

유왕(流王, 1023?~1039?)은 사할린 중부와 북부에 넓게 포진된 니브흐인, 오로크인(ウィルタ)들의 세력권을 복속시키기 위해 여러번 정벌을 하였고, 재위 말기에 이르러 이들이 조공을 바치고 복속할 것을 선언함에 따라 목거주(木居州), 북화주(北和州)와 같은 지방 예속 통치체계를 확립하였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덕안 용천부관릉성 일대를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가 정비되어 '견려로'(遣麗路), '견일로(遣日路)' 등이 개설되는 등 대외 무역이 원활해졌으며, 「국조서기(國趙書紀)」와 같은 사서를 편찬하여 발해 왕실에 대한 정당성과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허나 유왕을 이후로 왕권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가혹한 조세 제도[7]까지 겹치면서 농민 및 소수민족의 봉기 등의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헌왕(憲王, 1087?~1103)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민사재법'(田民私財法)을 공포하여 개간 토지에 대한 무제한 사유권을 공인하였다.[8][주 13]

재력을 가지게 된 귀족들과 방계 왕족 그리고 대대적인 후원을 받은 사찰회(寺刹會)는 사할린 중부, 북부를 향한 개척을 시도했다. 이들이 개척하게 된 사유 토지들을 '장원'(莊園)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장원 체제는 점차 토지의 소유자인 영주(領主)와 해당 토지를 경작하는 작인(作人)과 야민(野民)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자급자족 경제 공동체가 구상되었다. 탁왕(卓王, 1103~1136)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국사(國司)를 파견했으나, 이미 중앙 통제력을 벗어난 영주들은 '불입권'(不入權)과 '불수권'(不輸權)[9]을 내세워 중앙 통치를 거부하고 조세 면제를 선언했다. 이로서 150년간 이어진 중앙집권체제가 붕괴되고 중세 봉건 사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주 14]

봉건 사회가 도래하면서, 중앙정부 주도의 무역이 쇠퇴하고 각각의 장원에 속한 민간 상인들의 주도로 교역로를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사할린 최남단에 위치한 병서항(炳逝港)을 차지한 오치욱(烏治昱)은 일본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10] 이들 민간 상인들은 남송(南宋)의 도자기와 서적 등을 포함하여 동전까지 일본을 통해 수입하면서 선진 문화를 습득하고 화폐경제의 성황을 이룩했다. 이렇게 무역을 독점하게 된 항구들은 점차 재력을 갖춘 상인들과 일부 토호(土豪)들을 주축으로 영주들의 불간섭을 선언하고서 이들의 자치를 바탕으로 한 자유도시(自由都市)로 성장하게 되었다.

1117년, 대륙 내 최후의 발해계 국가인 대발해(大渤海)의 건립자인 고영창(高永昌)이 수백여 호(戶)를 이끌고 귀순하였으며, 이에 탁왕은 그에게 수백 리의 땅을 주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땅을 수여받은 고영창은 곧장 장읍성(長邑城)을 세우고서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고 스스로를 '진정한 발해의 후예'임을 자청하여 흥원국(興元國)을 세웠다. 봉건 사회의 도래로 결집력이 약화되었던 중앙정부는 여릉전투(餘陵戰鬪)에서 패배하였으며, 탁왕오소천(烏昭川)의 장경부(杖硬府)로 피난하였다. 고영창은 '대가독부'(大可毒夫)를 칭하여 황제와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며 장원을 통제하려했으나, 이에 반발하던 장원들이 일제히 덕안 용천부장읍성을 함락시킴으로서 고영창은 몰락하고 그를 따르던 유민들은 장원의 작인(作人)이 되었다. 탁왕을 보필하던 오소천은 이를 계기로 발해 황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주 15]

유민 이주와 북방전국시대

북발해사할린북해도 북부 일대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 장원(莊園)의 영주들에 의해 통치되는 지방 봉건 사회로서 결집력은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탁왕을 보필했던 오소천은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조정의 국성부(國省府)를 설치하여 황실 직할의 토지와 남부 일대의 장원들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을 갖춤으로서 강대한 세력권을 유지했다.

1125년, 요나라(大遼)의 천조제(天祚帝)가 정무를 돌아보지 않고 가신의 간언에 대해서는 처벌로 임하는 등 민심의 배반을 야기했으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금나라(大金)와 북송(北宋)의 협공으로 항복함으로서 멸망하게 되자,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로 건너가 서요(西遼) 정권을 세웠으며, 야율안량(耶律安良)은 만여 명에 이르는 유민들을 이끌고 흑룡강(黑龙江)을 건너 사할린에 정착하게 되었다.[11] 과거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의 황족이 유민을 이끌고 건너온 것을 탐탐치 않게 여긴 발해 황실과 일부 영주들은 그들을 금나라의 포로로 생포하여 새로운 친선 관계를 만들자는 노력이 있었으나, 오소천은 야율안량 세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반발하는 영주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거란 유민 출신이었던 야승화구(夜昇和具)의 귀흥성(歸興城) 전투를 시작으로 제1차 북방전쟁(第一次 北方戰爭, 1129~1131)이 발발했다. 급작스런 전란에 대비하지 못한 발해계 장원들은 일제히 연합하여 탄광령(炭廣嶺)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거란 유민들에 의해 대거 패배하였으며, 야율안량은 사할린 일대에 억압받던 니브흐인, 오로크인들을 규합하여 일제히 봉기를 선언하여 사할린 중부의 독립 정권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1130년에 오소천의 급사로 인해 오씨 정권(烏氏正權)은 흔들리게 되었지만, 야율안량의 무모한 거란 유민들의 활용과 함께 일부 사찰회를 공격함에 따라 그를 지지하던 발해계 장원들의 반발을 삼게 되면서[12] 정세는 급격히 뒤바뀌었으며, 오로크인을 규합하던 안덕찰과부(安悳察過夫)[13]를 중심으로 하여 야율안량에 대한 봉기를 선언하면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결국, 1131년에 남부도의 맹(南芙道之盟)을 체결하여 세력 균형을 시도했으며, 이들은 발해 황실에 대한 예우를 형식상으로 인정하는 한편,[14]장원에 대한 독립성과 불간섭을 선언함으로서 1차 북방전쟁은 마무리되었다.[주 16]

(작성중)

북해도 진출과 서구와의 접촉

북방전국시대(北方戰國時代)가 마무리되던 시기는 일본센고쿠 시대(戰國時代)보다 조금 늦게 막을 내렸다. 이미 몰락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뒤를 이어 일본의 권력자로 등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하진국(河震國)에게 친서를 보내 친히 정벌할 것임을 천명했고, 이에 지광제(至光帝, 1578~1599)는 "공상필패(空想必敗, 헛된 생각은 필히 패배할 것이다.)"라는 답서를 보내었으며, 혹시모를 전쟁을 대비했다. 이에 각 영주들은 성을 쌓고 병력을 기르는 등 침략에 대비하였으며,[15] 이 과정에서 북해도 정벌운동(北海道 征伐運動)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1592년에 조직된 북해결사군(北海決死軍)은 '왜국(倭國)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 건설'을 명목으로 수차례의 북해도 침략을 감행하였고, 이미 복속된 북부 지방에 대해서는 개척사(開拓使)를 설치하였으며, 중부 일대에 대해 발해 황실을 따르는 결사 국가(決死國家)라는 괴뢰국 체제를 성립시키기도 했다.[주 17]

이들, 결사 국가들 중에서도 작릉공(作凌公) 부엽(夫燁)이 세운 염로번국(冉路蕃國)은 테시르오펫 강(テシオペッ川)[16] 일대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아이누와의 무역 권리와 일본 교역을 독점하여 북해도 내에 강대한 세력을 유지코자 했고, 이 과정에서 아이누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북방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던 마쓰마에 번(松前藩)과 대립하면서 에조치 전쟁(蝦夷地戰爭, 1600~1605)이 벌어지게 되었다. 에조치 전쟁은 아사히카와-카무이 코탄 전투(旭川-カムイコタン 戰鬪. 1604)에서의 충돌 이후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가 1605년, 신정의 맹(新政之盟)을 체결하여 북해도 일대에 대한 공동 관리를 선언했다.[주 18]

한편, 북방 무역(北方貿易)의 과정에서 모피 교역을 주도하던 시비리 칸국(Себер ханлыгы)의 몰락[17]러시아 차르국(Царство Русское)의 진출에 대한 소식은 북방 무역에 대한 주도권이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표정제(表正帝, 1599~1635)에 의해 1623년, 북방 개척단(北方開拓團)의 조직으로 이어져 서국(西國)에 대한 조사 및 북방 무역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친 동시베리아 진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북방 개척단외흥안령(外兴安岭)을 건너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이 당시 건설된 안령주(安逞州)는 (淸國)과 러시아 제국간의 네르친스크 조약(尼布楚條約) 이후 자유 교역 도시로 인정받아 1858년, 아이훈 조약(愛琿條約)의 체결까지 존속하였다. 이외에도 안령주를 제외한 수많은 정착촌이 건설되기는 했으나, 청-러시아 국경 분쟁 과정에서 봄보고르(博木博果尔)가 이끄는 에벤크족(鄂温克族)과의 대립, 아르바시(阿尔巴西)가 이끄는 다우르족(达斡尔族)과의 충돌로 지속적인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되면서 실질적인 시베리아 경략은 1660년대 이후 사실상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주 19]

북방 개척단의 몰락 이후 서구 열강과의 교류 추진은 붕괴되었으나, 1640년대에 들어 서양 탐험가들에 의해 베일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공화국(Republiek der Zeven) 출신의 지도학자이자 탐험가였던 마르틴 게리츠 프리스(Maarten Gerritsz Vries)는 처음으로 사할린 섬을 방문한 서구인으로서 '카스트리쿰'(Castricum)으로 불리는 함선을 이끌고 쿠릴 열도에 위치한 쿠나시르 섬(クナシリ島)을 방문하여 아이누인과 접촉한 뒤 네덜란드 회사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에투워로프 시르 섬(エトゥオロプシリ島)과 에토로후 섬(択捉島) 사이를 지나가 오호츠크 해로 진입한 뒤 남부 사할린에 위치한 광효항(光曉港)을 방문하여 서구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차르국(Царство Русское) 출신의 바실리 폴랴코프(Vassili Poyarkov)가 이끄는 코사크(каза́ки) 기병대가 제야 강(Зе́я) 일대의 지류를 탐사하던 중 북방 개척단이 세운 정착촌인 담원주(淡原州)와의 정식적인 교역을 기도하기도 했다.[주 20]

18세기 초에 들어서 사비에르 에렌베르트 프리델리(Xavier Ehrenbert Fridelli)와 장-밥티스트 레지스(Jean-Baptiste Régis), 피에르 자르투(Pierre Jartoux) 등의 청나라에 거주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강희제(康熙帝)의 명에 따라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제작에 참가함으로서 사할린 섬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예수회 선교사들이 하진에 정착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중국에 팽배했던 유교 문화와 달리 일본과 같이 독자적인 북방불교(北方佛敎) 문화[18]가 싹을 틔우고 있던 시기였기에 내세관을 갖추고 있던 기독교(基督敎) 전래에 대한 호의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해 훨씬 개방적이고 수월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남만사(南蠻寺)라는 이름으로 교회 설립을 인정하였으며, 일본에 이미 전래되었던 여러 작물과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후 예수회의 활동은 19세기 초반에 들어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가 대신하면서 근세 신학 발전과 서구 지식을 전문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근세 다민족 사회와 제국의 성립

나선 정벌(羅禪征伐)은 청-러시아 국경 분쟁(雅克薩戰役)의 직접적인 충돌이었다. 1650년대 말, 청나라를 다녀온 어사(御使), 점합거원(粘合巨遠)은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받아 각 영지에서 조총병을 차출할 것을 형천제(亨天帝, 1647~1680)에게 전달했다. 이후 조직된 북용군(北勇軍)은 영고탑(寧古塔)으로 향해 러시아군과 조우하여 변급(邊岌)이 이끄는 조선군과 협력하여 포병 지원사격을 맡게 되었다. 이후 북용군의 지휘를 맡던 대렴(大廉)은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쓰며 당시 상황을 묘사했으며, 네르친스크 조약 과정에 참관하여 안령주의 존속을 요청함으로서 북방 교역의 큰 성과를 이룩했다.

한편으로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태평 무드가 지속적인 상황에서도 하진은 여러 영방 국가(領邦國家)들로 구성된 분권화된 제한적 전제군주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형천제천개제(天開帝, 1680~1696)는 황실의 권위를 세우고 실권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차례 친정을 선언했으나, 이미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영주들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었다. 한편으로, 북방 무역과 일본 교역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일부 항구와 어촌들은 전례없는 서구 열강과의 교역과 일본 열도를 경유하는 남만 무역(南蠻貿易)에도 진출하여 류큐(琉球國), 안남(安南), 루손(ルソン島)과의 대규모 해상 교역 사회가 이룩했다. 이들 항구 및 어촌 상인들은 강력한 영향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자유도시(自由都市)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낭인(浪人)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자치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항구와 어촌 사회의 독립을 기점으로 근세 도시들은 영주와 황실로부터 자유와 정치 독립권을 획득한 뒤 자체적인 독립 정부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고, 자치 법률과 행정 체제를 고안하여 도시 운용과 상업적 이익 발달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도시 왕국(都市王國) 혹은 도시 공화국(都市共和國)으로 불리며, 각 지방 영주 혹은 황실의 상납금을 내는 것으로 존속하였다.[19][주 21]

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근세 화폐 경제가 성립되면서 안누 카무이(アンヌカムイ)[20], 사하랸 우라 쿠예(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 ᡴᡠᠶᡝ)[21]와 같은 민족 지방 사회가 촉진되었다. 민족 지방 사회는 각 영지의 제후들과 협력하여 지방 사회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중앙 황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분권 및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바탕으로 한 제후들의 장원 경영은 점차 일원화된 통합 관리 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제후 연맹(諸侯聯盟)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제후 연맹은 그동안 느슨한 형태로 유지되던 자급자족 경제 체제에 대한 쇄신을 가하여 각 영지에 대한 자유로운 상업 교역 및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오랜기간 이어졌던 제후 대립 체제의 막을 내리고 중앙 집권 사회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사회 개혁에 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공극의 개혁, 功極之改革) 허나 이민족간의 분쟁 요소는 산재되어 있었으며, 국민국가(國民國家)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장원 체제의 붕괴와 국민 사회의 도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욱 적극적인 개혁책을 펼치지는 못한 채 허울뿐인 국토 통합 기구 및 개혁 기구로 이름만 남게 되었다.[주 22]

(작성중)

근대 사회로의 진입과 열강과의 충돌

정치

하진의 중앙 정부는 황제를 국가 원수로 삼는 의원내각제(단원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의회의원은 각 영방정치체에서 선출하며, 주로 다수당의 당수가 중앙 의회에서 행정 수반으로 선출된다. 이 행정 수반은 내각대내상(内閣大内相)이라고 부른다.

행정

경제

사회

국방

각주

  1. 아이누어(アィヌイタㇰ)로 '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예맥계에서는 이곳을 '흥안부'(興安部)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아이누어(アイヌ・イタㇰ)로 '우리가 찾은 땅'을 의미한다.
  3. '말례'(末禮)는 시호가 아닌 이름이다. 시호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여 이름으로 기재한다.
  4. 이것은 학계에서 추측하고 있는 부분이며, 이외에도 백두산(白頭山) 분화설, 농민 반란과 종속하고 있던 말갈 부족들의 봉기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따지려고 시도하고 있다.
  5. 대략 1만명에서 2만명에 이르는 인구로 추정하고 있다.
  6. 실제로 전투가 있었는지는 학계에서도 분분하다. 전쟁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갈주사기(鞨州史記)》와 같은 고서 기록에 집중하는 한편, 전쟁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기존 예맥 문화 유물을 바탕으로 한 실증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7. 양민(良民)에게 땅을 빌려주고 조·용·조를 거두었는데, 이중에서 토지 수확량의 절반에 가까운 양을 수탈하던 토지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8. 이전까지 토지 제도는 '국공토지법'(國公土地法)을 바탕으로 개간된 토지는 국가 소유로 귀속되어 땅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토지세를 취했다.
  9. '불입권'은 국사(國司)의 출입권을 제한하는 권리, '불수권'은 장원에서의 생산물에 대한 조세 면제의 권리를 말한다.
  10. 오치욱은 이후 대호족(大豪族)으로 성장하였으며, 훗날 오씨 정권(烏氏政權)의 중심지가 되는 장경부(杖硬府)를 세우게 되었다.
  11. 여진족의 발흥지로 볼 수 있는 연해주 혹은 하바롭스크를 어떻게 경유했냐는 문제로 오랫동안 12세기 거란유민 이주설을 부정했으나, 여러 고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던 점, 그가 요나라 동북지역에 주둔하여 여진족을 견제하던 오외부(烏隗部)의 수장이었다는 점이 대두되면서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는 추세다.
  12. 이들 다수는 오씨 정권의 미움을 받았던 영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거란 유민들의 지리적 지원 및 전략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3. 실제 불렸던 이름인지는 미지수. 「속하진기(續河震紀, 1697)」에 등장하나 속하진기에서는 러시아인들도 한자 명칭으로 표기하였기에 실제 명칭은 다르게 불렸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14. 이것은 야율안량이 결단코 거절했으나, 그를 지지하던 사찰회와 발해계 장원들의 압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15. 이 시기에 쌓아진 것으로 알려진 성들은 명응성(明應城, 1590년), 병의성(秉義城, 1593년)이 있다.
  16. 아이누어로 '물고기를 잡는 장치'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7. 시비리 칸국과 하진은 직접적인 교역을 이루기에는 거리상의 문제로 인해 야쿠트족(Сахалар)을 통한 간접 무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18. 당나라선도대사(善導大師)에서 시작된 대승불교의 세부 갈래로서 다른 불교 종파에 비해서도 대중 친화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이 강한 모습을 보인다.
  19. 대표적으로 병서항(炳逝港)으로 불렸던 상업도시, 광안시(廣安市, 1687)와 황실 직할지와 지방 영지로 물류를 공급하던 유통 도시인 개명시(開明市, 1695) 등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20. 아이누어로 '승리의 신'이라는 의미다.
  21. 만주어(滿洲語)로 '흑룡강에 있는 사할린 섬'이라는 의미다.

주해

  1. 「河震 名稱의 由來」(2012, 하진교육위원회)
  2. 「中世日本과의 交流」(2008) 126p~128p
  3. 「북해 지식인들이 쓴 동아시아 역사와 하진」(東亞細亞史-河震史, 2005)
  4. 「북해도의 농업사회와 종교문화」(北海道 農業史-宗敎史, 1997.) 대설헌(大雪憲) 옮김.
  5. 방현령(房玄齡), 이연수(李延壽) 등 648년,「진서(晉書)」列傳第67 四夷
  6. 「고고학 사전」(考古學事典, 2001. 씨투안싸안문화 단락)
  7.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8. 갈주사기(鞨州史記)》-유귀본기(流鬼本記) 27冊.
  9. 《신당서(新唐書)》列傳 145 流鬼傳
  10. 갈주사기(鞨州史記)》-유귀본기(流鬼本記) 135冊
  11. 「7~8세기경 목간 발견, '덕무왕'의 연대기」(2005, 하진사종합연구회)
  12. 정석배, 《아무르ㆍ연해주ㆍ사할린 지역의 하진 - 연구현황과 과제》, 고구려발해학회
  13. 자윤휘(2008), 「河震 莊園의 성립 배경과 의미」 『河震史硏究』132쪽
  14. 「河震의 封建구조」화태백과(樺太百科)
  15. 나영렴(2018), 「요·금 유민들의 이주와 하진인(河震人)」, 『황대(皇大) 역사문화 연구총서 20』 , 신청륜, 155쪽
  16. 『耶律安良으로 시작된 北方危機』(완역륜, 靑史, 2012)
  17. 「北海道 決死軍의 歷史」(덕선회, 2003)
  18. 「蝦夷地戰爭에 대한 斷想」(彈革典, 1935)
  19. Patrick March, Eastern Destiny: the Russians in Asia and the North Pacific, 1996
  20. Ravenstein, The Hadians on the Amur, 1860(sic), Google Books
  21. 하진문화대학교, 『近世自由都市들의 登場』(1998)
  22. 장희련, 『근세 사회는 어떻게 통합 의식을 받아들였는가.(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