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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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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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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한성내전
漢城內戰
Hanseong civil war
날짜 1944년 12월 31일 ~ 1945년 3월 19일
장소 대한제국
원인 김창암의 정권 불안정화 및 민주주의 세력의 봉기
교전 세력 대한호국회 민주파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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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호국파 대한제국군 23000명
파일:대한호국회.png 대한호국회 백의단 7000명
충성파 대한제국군 45000명
대한제국 군내부
피해 부상자: 400명 이상
사망자: 500명 이상
부상자: 420명 이상
사망자: 564명 이상
결과 민주파의 승리, 대한호국회의 패망
영향 대한제국민주화와 세력교체, 동시베리아 전선 종료, [[해동성맹 (아침해의 원유관)|해동성맹 해체, 김창암 도주로 인한 대한 공화국정부 건국, 공종 성덕제 이영양위, 만주 독립

개요

한성 내전은 1944년 김창암의 과격행위를 기점으로 일어난 일종의 쿠데타 사건이다.

근대사에서 일어난 전쟁 중 최초로 수도에서 일어난 내전이며, 추축국 국가들 중 내전으로 추축국 지지 세력이 제거된 유일한 사건이기도 하다.

배경

사실, 김창암에 대한 불만 자체는 이미 그의 집권 당시부터 서서히 쌓여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집권으로 인해 군부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대한제국의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의회정치 또한 일당제 제도로 사실상 폐지되면서 정치 문화가 역설적으로 퇴보하였기 때문. 따라서, 이전의 선진적인 정치 문화로 돌아감과 동시에 호국회가 내세운 불평등 문제 또한 해결하고자 하는 계파, 이름하여 민주파가 대한제국에 서서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초기의 민주파는 워낙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했던지라 단합이 잘 되지 못했으며, 결국 몽골출병 직후 김창암 정권의 인기가 정점을 찍었을 당시에는 변화 이전에 내분으로 해산될 위기까지 봉착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중반 경 어떤 인물이 이들에게 접근했는데, 바로 양연군 이연을 위시한 한국 황실 내 헌정 지지자들이었다. 처음에는 황실의 큰어른인 황제의 뜻을 존중하여 호국회를 그저 바라보던 이들이였으나, 시간이 지나 호국회를 더 이상 두면 안된다고 판단하여, 겁에 질린 황제 대신 자신들이 나서기로 했던 것. 헌정파에게 있어, 정현태자의 요절 이후 유일하게 남은 융희제계 계승자인 예친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계승순위 1순위인 이연의 접근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고, 그렇게 그들은 다시 규합하여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또한 민주파는 이 외에도, 대표적인 문민 인사였으며 당시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승만과 비밀리에 연대하였다. 이를 통해 2명의 배후자를 두게 된 민주파는 머지않아 김창암 정권이 소련을 공격할 시 몰락을 거듭할것이라고 판단, 음지에서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944년 연말에 그 때가 도착했다.

전개

김창암의 폭주

이 무렵, 동시베리아 전쟁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자 김창암은 소위 '기강잡기'를 한번 더 하여 정국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마음을 품었다. 이윽고 1943년 연말에, 자신에게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국회의원들이 광화문 앞에 모여 새해를 축하하기 시작하자, 재빨리 대한백의단과 새로운 친위조직인 '청년백의단'을 동원, 그 자리에서부터 국회의원들을 나라의 앞길을 막는 역적으로 선언하며 구타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혼비백산한 의원들이 도망가기 시작하자 기세를 몰아 한성 진군 당시처럼 의회로 진격할 것을 김창암은 명령했으며, 긴급계엄령을 선언하자 이어서 이범석이 군대를 출동, 서울에 공포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편, 의회에 도착한 김창암 세력은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을 펼치며 건물을 불태우거나, 의원들을 구타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이 자리에 하필 새해 축하 인사를 전하는 황제의 칙서를 전하려던 영선군 이영이 와 있었다는 것. 난장판을 본 영선군은 당시 의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의단 앞에 서 폭력을 중지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지나칠 정도로 호국회에 광신적이던 인원 하나가 분노하여 이영에게 돌격, 그를 구타한 뒤 뒤로 밀었는데.....

하필 이영이 난간을 넘어 추락사해버렸다.

명분의 상실, 그리고 역적 지목

이제 대한호국회는, 자신들이 보호한다던 황실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를 보고 패닉에 빠진 이영의 집사가 급히 근처의 전보기로 가 타자를 입력, 곧바로 궁내부에 정부 집권자들에 의해 황족이 죽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게 되어버렸다.

이 소식이 황족들 중 황제에게 먼저 전해지자 다급하게 군부나 호국회 출신 대신들은 황제에게 애써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성덕제는 "그대들이 구국자를 두령으로 뒀던, 이 나라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이미 내 명령도 듣지 않고 황족까지 시해한 마당에 나를 배알할 자격이 있는가"라며 역정을 내며 근위대를 동원해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애써 남아서 상황을 마저 설명하려던 이범석에게는 "무슨 낯으로 그것을 내 앞에서 읽느냐." 하며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고, 심지어 화분을 던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편 민주파가 손을 쓰기 이전 이미 이로 인해 호국회 세력의 주축인 군인들 사이에서 큰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호국회에 절대 충성하는 군인들이 동시베리아나 몽골로 대부분 차출됬던지라 특히 더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호국회를 우선시하는 호국파와 황제, 정부를 우선시하는 충성파로 나뉘어 서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개중 외부 사령관들은 보고를 받자 행동양상이 2가지로 나뉘었는데, 호국파인경우 그대로 머물렀으며, 충성파에 더 가까운 경우 황제의 안전을 확보한다며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황족인 양연군이 이 정보를 받지 못할 리가 없었고, 재빠르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그는 방송국으로 친히 행차, 자신의 방송을 전국에 송출할것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황족이 호국회에 의해 죽었음을 공표함과 동시에, 이대로 가면 호국회가 난신적자나 다를 바 없는 역적들이 되어 황통을 끝낼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데, 작금의 전쟁은 목적수행 이전에 그대 신민들에게 해만 끼치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할 따름이다.

또 지난 서백리에서의 전황이 호전되지 아니하자 곳곳에서 종전과 평화를 외치는데, 구국자라 하는 김창암 도당은 지금까지 그 목소리를 듣지 않고 무엇을 하였는가?

김창암이 지난 기간동안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이 나라를 전화의 불길로 끌고 간 것은 간사한 도적을 이용하여 폐하를 협박하고, 신민들에게 자신의 헛된 욕심을 따르도록 강제한 것으로, 결코 황상이 긍종(肯從)하심이 아님을 내가 확실히 하는 바이다. 그러하니, 이를 위해 역적 김창암을 저지하고, 나아가 세계에 공포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고하자면,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一民)이라. 나는 자유로운 대한의 국민이 될지언정, 타국의 주권을 침탈하고 남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같은 나라의 황족으로서 사는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 신정부가 지하에서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한 평화에 노력하여 그대 신민들의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로 도움이 되고자 하노니, 하여 오늘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조적에 대한 응징을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전쟁의 끝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방송의 내용 일부

방송이 송출된 아침 7시 경 직후, 거대한 파동이 한성부를 덮쳤다. 신민들은 황제를 지키러 가겠다며 광화문이나 경복궁, 혹은 대한호국회의 과격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으며, 군내부는 보안을 강화하여 황궁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중 민중들의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대부분 민주파였는데, 이를 김창암이 알아차리면서 발포를 명령, 실제로 제 45사단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자 충성파에 해당하는 일부 사단들이 그에 반격면서, 마침내 모 아니면 도인 한성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호국회의 세력이 우세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전세는 민주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인들 중 절반은 민주파를 도와서 싸우기 시작한데다가, 아무리 호국회라 할지라도 황제를 건드린 상태에서 시민들의 입을 조용히 하게 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 그러나, 군사적인 싸움 자체는 민주파의 열세가 맞았기에, 개전 이후 첫 2일은 호국회의 압승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으나...

황제의 옥음, 그리고 수도 탈환

사실 이미 이연은 궁 내부에서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던 완화군 이선을 포섭하여, 황제 본인을 설득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아예 김창암을 역적으로 지목해버리면 모두가 등을 돌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결국, 애초에 김창암을 탐탁지 않아한데다가 황족 시해사건으로 인내심이 폭발한 성덕제가 동조하면서 이들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윽고 전 국민들을 상대로 최초의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다. 내용인 즉 현재 무리한 전쟁으로 국가의 존속 자체를 위험하게 만든 호국경 김창암은 역적이며, 지금 김창암을 따르는 군인들에게는 투항과 김창암에게 대항하는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과반수 이상의 군인들이 충성파로 돌아서게 되면서 김창암 세력은 문자 그대로 치명타를 맞았으며, 이 와중 군부의 거물인 이범석이 자신을 보좌하던 군인의 전향으로 하극상을 당하면서 호국회의 군 세력이 놀라울 수준으로 빈약해져 버렸다.

얼마 후, 황실 측에서 공식적인 봉칙명령이 나오면서 민주파가 호국회, 이제는 신정부가 쿠데타군을 부르는 칭호는 '점거세력'에서 '반항세력', 그리고 종국에는 '반란세력'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일어난 본격적인 격돌 끝에, 의회가 다시 탈환당하고 김창암이 한성에서 도주를 시작하며 공식적으로 수도 한성부가 파시즘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내전의 1차전이 승리로 끝나자 민주파는 폐허가 된 의회 건물로 모인 뒤, 시민들에게 추후의 국가 정상화와 파시즘 체제 폐지, 그리고 즉각적인 종전을 약속하였다. 이후 부터는 각지의 자국 군대들로부터 투항할지, 아니면 저항할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고, 최전선에 나가있는 군 일부와 김창암이 도주하여 통제권을 장악한 부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아직 김창암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였다. 이 때문에 중앙군은 다시 군을 모아 부산으로 출병을 감행해야 했고, 약 1달간의 교전 끝에 부산에서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좋은 소식은, 이 무렵 서구열강들이 공식적으로 수도를 장악한 민주파 대한제국 세력을 공식적인 대한제국의 정부로서 승인했다.

도주와 승리, 그리고 종전

결국 김창암은 기반이 사라진 한국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 호국회와 백의단 그리고 일부 충성파 군인들을 이끌고, 보호를 보증한 일본제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마도로 망명을 선택했다.

이로서, 최후의 추축국인 일본 또한 현재의 한국 정부를 적대한다는 것이 보증됨에 따라, 연합국은 최소한 한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우선적으로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

결과적으로, 3월 5일을 기점으로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만주총독부 역시 한국 중앙 정부에 투항의사를 공표하면서, 한국의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드디어 성공하였다.

영향

얼마 안 가서, 1945년 5월 3일에 공식적으로 한국 신정부와 연합국 수뇌부의 교섭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이 교섭에서 연합국은 해동성맹의 해체와 북만주 지역의 독립, 연합군 일부 주둔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 중지를 요구했고, 한국은 1947년까지의 인구 차출을 위한 만주 중립화와 남만주 보존, 황제 제도 유지를 조건으로 이 제안을 승낙하였다.

이후 성덕제가 5월 5일 옥음방송을 다시 한 번 진행, 자신의 부덕을 반성하기 위한 양위와 한국의 제국주의적 정책 방향성이었던 해동성맹의 해산과 대동아공영권 탈퇴를 선언했다.

"....부덕한 짐이 삼가 세계의 대세를 고려하여 이같이 성단을 내리니, 제국은 이 시간부로 해동성맹을 해체, 대동아공영권 회원국으로서의 활동을 멈추고, 일체의 전쟁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을 것임을 고한다. 이미 미,소,중,영과의 평화 교섭이 공식적으로 완료된 바, 그대 신민은 시류를 따르고 경거망동하지 말 것이다.
옥음방송 내용의 일부

같은 날, 김창암의 대마도 망명을 승인한 일본제국 측은 긴급담화를 거쳐, 이러한 선언을 발표했다.

" 오늘 본 대일본제국 정부는 소위 대한국 신정부 측의 일방적인 배신행위에 유감을 표한다. 우리 일한 양국이 개화 이래 수십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번영해온 세월을 그토록 저버릴수 있는가? 제국은 결단코 동양평화의 대의를 저버린 그들을 인정할수 없다. 따라서, 이 시간부로 제국 정부는 쓰시마의 김창암 정부만을 한국의 정부로 인정할 것임을 밝히며, 그들의 본토 탈환을 위한 분투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공표하는 바이다.
1944년 대일본제국 긴급 담화

얼마 뒤, 이미 순친왕과 황태자의 병사로 공석이 된 후계자 자리를 의식한 성덕제는, 공식적으로 성덕제는 차기 계승권자이자 한국 헌정 탈환을 통해 명성이 드높던 이연에게 황위를 양도한뒤, 본인은 상황의 자리에 올랐다. 약 하루 간의 논의 끝에, 정해진 연호는 태화(光德)였으며, 공식적으로 이연은 대한제국의 제 4대 황제이자 대한국의 초대 황제, 태화제가 되었다.

한편, 5월 말에는 미국에서 대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진작에 주장하며 활동했던 우남 이승만이 미군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미군 측은 한국의 자주권을 존중하여 우선 부산에만 군대를 주둔시켜 대마도와의 전투를 용이하게 하겠다고 서약, 추후 군사를 확대배치한다고 해도 8년 내로 철수하겠다는 조건을 내밀었고, 당장 해군력 부족에다 연합군의 신뢰 또한 필요했던 대한제국, 이제는 대한국 정부는 이 제안을 수락, 미국과 합동하여 대마도 공략을 시작하였다.

대중매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