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천녕 황왕 歷代 天寧 皇王 864-1281 | |||||||||||||||||||||||||||||||||||||||||||||||||||||||||||||||||||||||||||||||||||||||||||||||||
|
2대 천녕 황왕 44대 탐라군왕 효문의강대왕 孝文懿康大王 | |||
---|---|---|---|
시호 | 효문왕(孝文王), 의강대왕(懿康大王)[1] | ||
별호 | 자월대왕(遮越大王)[2] | ||
연호 | 흥우(興禑, 875~888), 인덕(仁德, 888~890), 장륭(張隆, 890~899)[3] | ||
생몰연도 | 868~899 (31세) | ||
성씨 | 장(張) | ||
휘 | 결(潔) | ||
출생지 | 천녕(天寧) 영월성(映月城) | ||
사망지 | 천녕(天寧) 영월성(映月城) | ||
탐라군왕 耽羅君王(875-899) | |||
천녕황왕 天寧皇王(875-899) | |||
효문왕(孝文王, 868 ~ 899)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이자 천녕(天寧)의 국왕이다. 처음으로 영월성(映月城)에서 태어나서 생을 마감한 왕이며, 선왕이자 아버지였던 달고왕(達暠王)처럼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 31세에 생을 마감한 청년 군주였다. 한편으로는 후사가 없었기에 익평왕-달고왕-효문왕을 잇는 적장자 계보가 단절되었으며, 그의 동생인 경강왕(景强王)과 그의 후손들이 왕위 계보를 잇게 되었다.
재위 기간
그의 별호가 불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을 의미하는 '자가월라'(遮迦越羅)[1]에서 유래된 '자월'(遮越)이었던 것처럼, 불교와 관련된 토목 공사를 크게 진행하였는데, 886년에는 원융사(元戎寺), 887년에는 도원사(島原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 ·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는 효문왕이 단순히 불교 문화를 숭상했던 것이 아닌, 여러차례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시각이 우세적이며, 기존 호족들의 땅의 큰 절을 세우면서 불교 보급과 호족 기반 지역의 민심 교화를 시도했고 또한 내부의 소요를 방지하기 위한 국방상의 기지 확보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왕권 강화와 함께, 불편한 교통 시설을 정비하고자 각 호족들의 기반 지역들을 잇는 '역'(驛)을 20여 개 이상 확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영월성(映月城)으로 향하는 가도(街道, 간선 도로)를 잇게 되었다. 이는 곧 교통의 열악함을 핑계로 상수리제도를 회피하려 했던 지방 세력들을 견제코자 한 일이었고, 호족들의 군사력 동원을 잠재우기 위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함으로서 중앙 정부에 복속하는 지방 직속부대를 운용했다.
실용적인 학문을 운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관심을 보였으며, 어의감(御醫監)이나 산수서(算數暑)같은 국립기관을 설치하여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893년에는 물시계(漏刻)를 설치하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부서를 조직하는 등 시간의 중요성을 일찍히 간파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일본에서는 총 4명에 덴노(天皇)가 바뀌었다. 우다 덴노(宇多天皇) 시기였던 894년에 견당사(遣唐使)가 폐지되었는데, 견당사의 항해를 도움으로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챙기던 천녕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스기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파견하여 직접 효문왕을 만나 해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에 따르면 그의 재위 말년 동안 신라구(新羅寇)로 불리는 이들이 893년부터 899년에 걸쳐 나가토 국(長門国), 스오 국(周防国)에 잇따른 공물 약탈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구를 사략선(私掠船)처럼 이용한게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나가토노가미(長門守)였던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45척에 이르는 함선과 수 백명에 인원으로 추정되는 신라구들과 격돌했으며, 그 군세가 막강해 나가토 성(長門城)[2]에서 방어전을 치렀어야 했다는 내용을 볼 때 신라구와 천녕 조정이 결탁했다는 사실로 유력해지고 있다. 당대에도 일본 조정에서 이를 염두하여 이의를 제기했으나, 효문왕은 자신들 역시 해적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