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明帝國
後明帝國, 東寧國
후명 정권
대명제국, 동녕국

1661년1683년
국기
표어 반청복명反淸復明
수도 타이징(臺京)
정치
공용어 근세 중국어, 대만 민남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황제(皇帝) 영력제(永曆帝, 1661-1670)
정무제(定武帝, 1670-1682)
융광제(隆光帝, 1682-1683)
동녕왕(東寧王) 정성공(鄭成功, 1655-1670)
정경(鄭經, 1670-1681)
정극장(鄭克臧, 1681-1683)
역사
 • 타이징 공방전 1661년 4월 29일
 • 삼번의 난 1673년 - 1681년
 • 천창선위 선언 1683년 7월 12일
지리
면적 35,980 km²
내수면 비율 2.8%

후명(중국어: 後明) 혹은 동녕국(중국어: 東寧國)은 1661년부터 1683년까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남명 정권(南明政權)이 몰락한 이후, 영력제(永曆帝)와 정성공(鄭成功)을 위시한 명나라 부흥 세력이 타이완 섬(臺灣島)으로 도피한 이후의 통치 정권을 일컫는다.

정성공융무제(隆武帝)가 중심이 된 부흥 세력은 절강성(浙江省)에 기반을 둔 주이해(朱以海)와 황위를 두고 마찰을 겪는 등 부흥 세력간의 혼선을 겪은 뒤에 1646년에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한 청나라(淸國) 군대에게 패배함에 따라 대륙에서의 힘을 잃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융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주유랑(朱由榔)이 광서성(廣西省)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지나 정성공의 근거지인 하문(廈門)에서 합류함에따라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부흥 세력은 단일화될 수 있었다. 이후 금문도(金門縣)까지 밀려난 명 부흥 세력은 1661년에 타이완 섬에 위치한 타이징(臺北)을 공격하여 네덜란드령 포르모사(臺灣荷蘭統治時期)를 몰아내고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황제를 대신하여 부흥 세력의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정씨 가문은 동녕왕(東寧王)이라는 세습 직함을 내세워 실질적인 통치를 시도했고, 정성공의 뒤를 이은 정경(鄭經)은 강희제(康熙帝)와의 협상을 통해 흥명멸청(興明滅靑) 기치의 포기 및 변발과 신하의 예를 다할 것을 대가로, 대만에 기초된 독립 세력임을 묵인받음으로서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三藩之亂) 당시에는 경정충(耿精忠)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가담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청나라와 함께 삼번 세력의 해상 패권을 위협함으로서 확고한 독립국가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1683년, 정경의 뒤를 이어 왕위를 차지한 정극장(鄭克藏)은 망명 황실을 유지하던 정무제(定武帝)가 사망하자, 허울뿐인 황제로서 융광제(隆光帝)를 옹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융광제에게 황위를 선양받음으로서 간신히 유지되던 명 망명 황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대만 사회는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역사

성립 배경

1644년, 청나라의 공격과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으로 명이 몰락하자 정지룡(鄭芝龍)[1]정성공은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융무제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1647년에 청나라의 지속된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남명 정권하문(廈門) 인근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 뒤 남명은 무역을 통하여 군비를 충당하는 한편, 청나라에 맹공을 퍼부어 1659년에는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진강(晋江)을 비롯한 강남 여러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과거 명나라의 수도였던 남경(南京)[2]까지 진격하였다.

허나 지속적인 북벌 과정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정성공은 남경 공략 과정에서 섣부른 판단[3]을 함으로서 청나라 군대에게 대패를 겪게 되었으며, 이후 남명 정권은 복건성 해안 지역에 위치한 금문도(金門島)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광서성(廣西省) 인근에서 청군에게 항쟁하던 영력제(永曆帝)는 명 부흥 세력을 이끌고 주산군도(舟山群島)를 거쳐 금문도에서 정성공 세력과 합류하였으며,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이들은 새로운 반청 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대만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만 정벌

네덜란드령 포르모사(荷蘭福爾摩沙)에서는 남명 정권과의 교역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입장에서는 점차 근거지를 잃게된 정성공의 세력이 대만을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 위기심도 공존하고 있었다. 1652년에는 동인도회사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곽회일(郭懷一) 등이 일으킨 한인 반란을 계기로 1653년에는 프로방시아 요새(Fort Provintia)가 건설하고 이미 이전에 세워진 질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는 보수하였으며, 당시 새롭게 부임한 프리데리크 코예트(Frederik Coyett) 총독은 동인도회사 상부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를 모으는 등 전란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동인도회사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한인 출신의 하빈(何斌)이 정성공에게 대만을 공략할 것을 제안한 계기로 남명 정권이 노골적으로 대만 진출을 시도하려하자, 프리데리크 코예트는 동인도회사의 구원을 요청하여 얀 판 데르 란(Jan van der Laan)이 이끄는 12척의 배와 600여 명에 병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얀 판 데르 란 사령관과 코예트간의 불화가 지속되었고, 결국 얀 판 데르 란 사령관이 구원 병력을 이끌고 바타비아(Batavia)로 돌아감과 동시에 정성공의 대만 경략이 시작되었다.

정성공이 중심이 된 남명 함대는 1661년 3월 23일 금문도(金門島) 항구에서 출항하였는데, 수백 척으로 구성된 정성공의 함대는 약 25,000명의 병사들과 선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항한 다음날 팽호군도(澎湖群島)에 도착하고, 이곳에 소규모의 수비병을 남겨둔 채 3월 30일에 항해를 재개했고, 4월 2일에 대원(大員)에 도착하였으며, 얕은 물길을 통해 록이문(鹿耳門)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정성공의 병력은 즉각적으로 프로방시아 요새를 공격했으며, 당시 이를 수비하던 부관, 야콥 발렌틴(Jacob Valentun)은 엄청난 수의 적군에 압도됨으로서 4월 4일 요새를 넘겨준다. 이후 정성공의 군대는 3일의 시간을 거쳐 질란디아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코예트는 동인도 회사의 지역 거점인 바타비아에 다시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요청을 듣고 찾아온 동인도 회사의 해상 병력들이 정성공 함대와의 전투에서 상당수 침몰 및 나포됨으로서 퇴각하였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네덜란드 병력이 보유하고 있던 보급 물자는 점차 감소했으며, 대만 본토를 도울 구원 병력의 소식조차 요원해지자, 프리데리크 코예트는 결국 백기를 걸라는 명령을 내리고 항복 교섭을 시작했고, 2월 1일부터 시작된 항복 과정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사람들이 2월 17일 퇴거하는 시점까지 진행되었다. 이후 18개조에 달하는 항복 문서를 체결한 코예트 총독을 비롯하여 900여 명에 달하는 네덜란드 인들은 남은 2척을 타고 바타비아로 귀국하였으며, 전쟁 중 남명 정권에 일찍히 항복했던 이들은 대만 생활에 합류하는 것으로 다민족 공생 공동체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정성공의 대만 통치

대만의 근거지를 마련한 정성공하문에 남아있던 영력제를 비롯한 망명 황실 일행을 모셔옴으로서 반청복명 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특히 영력제는 서구 열강과의 연락책의 역할을 맡던 복미격(卜弥格) 신부[4]를 크게 신임하고서 대만 전역에 가톨릭 사회를 이식코자 했다. 정성공은 처음에는 가톨릭 공인을 반대코자 했으나, 교황청과의 연락을 통해 청나라에 맞설 지원 병력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여 복미격 신부를 교황청(敎皇廳)이 위치한 바티칸으로 서신을 보냈다. 이후 1665년에 처음으로 타이징 교구(臺京敎區)가 설립되었으며, 대만 사회는 기존 유교 질서와 미신이 뒤섞인 동녕 토속신앙(東寧土俗信仰)과 예수회(Societas Iesu)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교세가 공존하게 되었다.

한편, 내륙에서 하문금문도 일대를 방비하고 있던 수군 제독 시랑(施琅)[5]을 비롯하여 풍석범(馮錫範), 진영화(陳永華), 주전빈(周全斌) 등은 복건성을 장악한 이솔태(李率太)와 정남왕(定南王) 경계무(耿繼茂)의 투항 서신을 받자, 각각 정성공의 아들과 형이었던 정경, 정태(鄭泰)과 함께 의논한 끝에 특정 조건하에 항복할 것을 표했다.[6]

이러한 항복 조건에 청나라에서는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하던 강희제를 대신하여 국권을 행사하던 감국대신(監局大臣) 겸 이부상서(吏部尙書)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 병부상서(兵部尙書)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鼇拜) 등의 실권자들의 주도아래, 남명 정권에서 항복하여 청나라로 귀순한 황오(黃梧)의 토벌 계획을 무시하고 대학사 명주(明珠)를 파견하여 해당 조건을 수락할 것임을 전달해 정씨 정권은 독립적인 세력화를 구축할 시간적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1665년에는 정경을 비롯한 대다수의 남명 정권의 장수들이 타이징으로 해안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고 근거지를 옮기려 하자, 강희제(康熙帝)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던 황오가 3차례에 걸쳐 대만 토벌 출정을 나섰으나, 연이은 해상 기후의 악화로 실패하면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대만 정벌에 대한 실효성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불안정한 국내 정세와 파멸 직전에 놓인 재정 상황으로 비밀리에 진행되던 대만 무력 토벌은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대만 사회는 정성공을 중심으로 한 통치가 진행되었는데, 이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남겨 놓은 사탕수수 농장을 재건하였으며, 반선(半線)이라고 불리던 서부 지대에서 파포살족(巴布薩族)과의 협력을 통해 곡창 지대 개간에 나섰다. 이후 대만 중부에서 거주하던 고산족(高山族)들과의 융화 정책을 실시하고 중구난방으로 유지되던 행정 및 군사 체계를 개편하는 등 내정을 정비하였다. 외교적으로는 1670년에 영국 동인도회사(不列颠东印度公司)와 무역 체결을 맺었고, 류큐국(琉球國)과는 은 거래를 하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1670년, 정씨 왕조의 전횡을 지탱하던 영력제가 풍토병으로 급사한 이후, 정성공 역시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함으로서 수십년 가량 존속한 명 부흥 정권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한인 사회가 새롭게 유지되기 시작했다.

정성공 사후 대만 통치

정성공 사후 왕위를 두고, 황소(黃昭)와 소공진(蕭拱辰)이 정습(鄭襲)을 동녕왕으로 옹립하려 하자, 하문을 방비하고 있던 정경은 이를 눈치채고 곧장 대만으로 건너가 정습 지지 세력을 제압하여 권력을 차지했다. 이후 정경은 청나라와 내통하던 정태와 그 추종자들을 타이완 남부의 낭교(瑯嶠)로 귀향 보냈으며, 영력제의 3남이자 황태자였던 주자현(朱慈炫)을 감금하고, 그 대신 주본현(朱本鉉)을 정무제(定武帝)로 옹립하였고, 주술계(朱術桂)는 '영정왕'(寧靖王)으로 추대되어 황실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정경은 청나라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팽호 제도(澎湖諸島)를 문호로 삼고 일본(日本), 필리핀(呂宋), 월남(越南), 태국(泰國), 육곤(六昆, 섬라의 속국), 대니(大泥) 등을 비롯하여 네덜란드, 영국과 자유롭게 통상 무역을 했다. 이들간의 해상 무역 루트를 확보하고 정성공 통치 시절부터 진행된 황무지 개간 정책이 성공함으로서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공급할 수 있게됨에따라 지속적으로 청나라의 남부 해상 패권을 위협했다.

1673년, 삼번의 난(三藩之乱)이 일어나면서 오삼계(吳三桂), 경정충(耿精忠), 상지신(尚之信) 등이 청 왕조에 반발하여 대항하자 정경은 사태를 관전했으나, 경정충이 대만 정권에게 천주(泉州)와 장주(漳州) 두 지역을 넘겨줄 것을 제안하여 반란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면서 유국헌(劉國軒)을 앞세워 수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편성하여 해징(海澄)에 진출하였다.

허나 경정충이 일반적으로 해당 제안을 파기해버리자, 격분한 정경복건성 연안 일대를 공격하여 위세를 떨쳤으며, 후에 경정충이 항복하자 내륙 지역에 근거지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 유국헌, 시랑을 통해 장주천주를 지키도록 했다. 이에 복건 총독으로 임명된 요계성(姚啓聖)은 강희제에게 녹기병(綠旗兵)의 병력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고, 인력 공급 및 식량 문제에 시달리던 정씨 병력은 해징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강친왕(康親王)의 회유가 이어졌으나 풍석범시랑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이에 청나라 제독, 만정색(萬正色)이 정씨 세력의 앙심을 품고 있던 네덜란드 선박의 도움을 얻어 대만을 압박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중국해(南中國海)의 해상을 붙잡고 있던 정씨 세력의 함대에 의해 연락책이 작동되지 않으리라 판단하여 무산되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를 것을 염려한 강희제해징을 정씨 세력과 청나라간의 교역 창구로 공동 관리할 것을 지시하면서 1680년 5월, 지루한 협상 끝에 전쟁이 막을 내렸다.

각주


  1. 명말청초(明末淸初)에 활약한 상인 및 세력가로서 당시 동중국해의 해상 무역을 이끌던 이단(李旦)에 밑에서 지내면서 독자적인 해상 세력을 키웠으며, 이후 반청 운동을 전개했으나 투항했다.
  2. 1356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이곳을 점령하여 응천부(應天府)라고 하였으며, 1376년에는 정식 수도가 되어 경사(京師)로 불렸으나, 1402년에는 영락제(永樂帝)가 북경(北京)으로 천도함으로서 일개 도시로 전락했다.
  3. 정성공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장수인 감휘(甘輝)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륙 깊숙히 병력을 진출시켰으며 남경 함락 과정에서 당시 남경 도독으로 부임하던 낭정좌(郞廷佐)의 거짓 항복에 속아 병력 통솔을 게을리 함으로서 청군의 습격에 우왕좌왕하였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출신의 과학자, 지도학자로서 본명은 미하우 피오트르 보임(Michal Piotr Boym)이었다.
  5.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鄭芝龍)의 시절부터 반청복명 운동을 함께한 인물이었으며, 정후(鄭侯, 정씨 가문의 제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정성공과는 군사 통솔 및 주도권을 두고 대립했으나, 영력제가 두 사이를 조율함으로서 관계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6. 반청복명(反靑復明) 기치 포기와 지배층 일부의 변발 수용을 대가로 청나라의 명목상의 신하국이 되어 조공하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