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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국의 역사
이전 시대 후요
~
다음 시대
서요 신요
후요
後遙
요어:月遼國
1216년1219년
파일:200px-Northeast China.svg.png
수도 징주 (澄州)
정치
공용어 요어
정부 형태 군주제
황제
야율사불
야율함사
[[후요
後遙
의 역사|역사]]
 • 성립
•멸망
1216년
1219년
기타
국교 불교

개요

후요(後遼 , 요어:月遼國 , 달라니 랴오 울루스) 또는 대요수국(大遼收國)은 1216년 거란족 야사불(耶斯不)이 건국한 나라이다.

역사

1211년 금나라 장수였던 야율유가는 몽골의 후원 아래 요동 지방에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은 성공하고 야율유가는 칭기즈 칸에 복종하지만 야율유가를 따라 칭기즈 칸에 복종하지 않은 거란인들도 존재했다. 야사불은 이들을 규합하여 1216년 대요수국을 건국한다. 이후 고려를 침략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후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후요의 마지막 황제 야율함사(耶律喊舍)는 좌장군 이해구와 함께 8만의 잔당들을 이끌고 사할린섬으로 요족천고하여 신요를 세웠는데, 이가 현대의 요국이 되게 됀다.

고려와의 전쟁

1125년(인종 3) 거란인이 세운 요(遼)가 멸망한 후 거란의 유민들은 때때로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였다. 특히 1216년(고종 3) 걸노(乞奴)가 이끄는 9만의 거란유민군이 고려를 침범한 이후 거란의 항쟁은 극에 이르렀으나, 1219년 장군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의 활약과 몽골 장군 합진(哈眞)의 도움으로 거란유민의 3년에 걸친 항전은 종식되었다. 거란유민과의 이 마지막 싸움이 끝난 후 몽골 장군 합진은 거란의 부녀와 사내아이[童男] 700명을 거란군에 잡혀 있던 고려인 200명과 함께 고려에 넘겨주고 나머지 거란인들은 모두 몽골로 데려갔다. 고려는 넘겨받은 거란인들을 각 도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보내 사람이 살지 않고 놀고 있는 땅을 가려 살게 하고 경작할 땅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하여 귀화시켰다. 고려인들은 이들이 사는 곳을 고려인들이 사는 곳과 구별하여 ‘거란장’이라 하였으며, 거란장에 사는 귀화거란인의 신분은 천인(賤人)에 가까웠다. 몽골로 돌아가기로 했던 거란인들은 사할린 섬으로 도망쳐 신요를 세웠으며, 이것이 오늘의 요국이 되었다.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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