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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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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무총리대신 · 대한제국 부총리 · 대한제국 참의원의장 · 대한제국 민의원의장 · 대한제국 대법원장
대한제국 제4대 황제
무종 흥영제 | 武宗 興永帝
출생 1907년 11월 15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즉위 1957년 6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인정문
사망 1990년 8월 7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능묘 양릉(陽陵)
재위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55년 8월 16일 ~ 1980년 5월 31일
(9055일, 24년 9개월 15일)
대한제국 태상황
1980년 6월 1일 ~ 1990년 8월 7일
(3719일, 10년 2개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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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대한제국
미합중국 미합중국 (1907~1945)[1]
본관 전주 이씨
연(衍)
부모 부황 혜조 의화제, 모후 연원황후
형제자매 3남 5녀 중 장남
배우자 수전황후
자녀 3남 1녀
학력 미국해군사관학교 (B.S.)
평남대학교 (정치외교학 / 석사)
전북대학교 (경영학 / 석사)
스탠퍼드 대학교 (정치외교학 / 명예박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세례자 요한)
신체 173cm
아명 성길(成吉)
사강(士岡)
염석(念石)
친왕호 건친왕(義親王)
묘호 무종(武宗)
시호 자인온유덕성순수황제
(慈仁溫裕德性純粹皇帝)
연호 흥영(興永)
절일 천추경절(千秋慶節)
군사 경력
임관 미국해군사관학교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29년 ~ 1945년
대한제국 국군
1945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령 (미합중국 해군)
대원수 (대한제국 국군)
참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서울 진공 작전
경인공란
베트남 전쟁
한중전쟁
상훈 미국 동성훈장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

개요

무종 흥영제대한제국의 제4대 황제이다.

생애

1907년 당시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혜조 의화제의 장남으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황제 중 유일[2]하게 해외(미국)에서 태어난 황제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도 아버지 의화제로부터 계속 한국계라는 의식을 주입받아왔고 본인 역시 대한제국의 황족임을 자각하며 자랐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했다. 장교 임관 후 미군에 종군해 미해군 장교로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제국군에 대항하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장교로서 승리에 기여하였고 그 결과 1945년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미국 OSS 요원으로도 참가하여 광복군과 함께 서울 진공 작전을 성공시켰고 1945년 8월 20일 서울에서 조선 해방 선언을 낭독하며 광복을 선언했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경인공란 당시에는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고 대비하여 1950년 12월 25일 김일성 반군을 만주로 축출시키고 1951년 7월 27일에는 공산당 잔군까지 완전 토벌하여 북진통일을 완수하였다. 이렇게 광복과 통일이라는 엄청난 위업을 동시에 해내며 아버지 혜조대제(의화제)처럼 국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실제 이 당시엔 아버지인 혜조대제보다 더 인기가 많았을 정도였고, 불가능한 일들을 해낸 신이라고 칭송받으며 불가침적인 존재로 취급밪기 시작했다.

1955년 부황 혜조 의화제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즉위하나 총리였던 이승만과 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1960년 이승만의 최측근 인사였던 이범석을 사주하여 친위 쿠데타인 경자정변을 일으켰으며, 입헌군주정을 전복시켜 친일파를 숙청한 뒤 중앙청에서 친정을 선언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위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민족의 광복과 통일을 완수한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국민에게 불가침적인 압도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친위 쿠테타를 했어도 오히려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었다.

친정을 선언한 뒤 한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사실상의 전제군주제를 구축했고,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한 산업화와 군비 증강을 주도하였다. 산업화로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는 공업화에 성공하여 발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고 군비 증강으로 세계 10위권에 드는 강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동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경자혁명 당시 언론을 친황실 어용언론만 남기고 모두 폐간시킨데다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묵살했고 야권 정치인을 탄압함과 동시에 각종 시위를 탄압하는 등의 반민주적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1976년 발생한 한중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대신 중국의 경인공란 참전 사실을 인정하고 백두산의 영유권과 수풍댐의 모든 전력, 장산군도를 한국이 영유하는 등 내용이 담긴 평화협정을 1976년 6월 25일 체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과 한일동맹을 두고 미국과의 갈등이 1970년대 후반이후 심화되었고 그뒤로도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기도 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김대중 복권 시위를 하던 전남대생을 경찰이 발포하여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흥영제와 이범석 총리는 전남 경찰국장을 해임하며 끝내려 했으나 오히려 시민들은 내각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흥영제와 이범석 총리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으나 반작용으로 경신혁명이 발생하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불가침적 권위에도 큰 손상이 있었는데, 사실 1970년대부터 독재로 인해 서서히 불가침적 권위와 인기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이번 일로 결정타를 입어 국민들이 큰 실망을 느낀 것이다.[3] 그래서 사실상 이전과 같은 철권통치나 전제정치를 할 동력을 잃었다고 판단한 흥영제는 이범석 총리에게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겠나"는 말을 한 뒤 5월 27일 친정을 내려놓고 다시 권력을 민정에 이양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동시에 황위를 황태자 명덕제에게 양위하며 20년의 친정시대를 끝내고 생전퇴위했다.

생전퇴위 후로도 과거의 공적으로 인하여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과거의 긍정적 평가를 독재로 다 까먹어서 부정적 평가 역시 심해져 대학생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반감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경신혁명의 근원지였던 광주[4]에서는 과거에는 상상할수도 없었던 흥영제에서 유래된 욕설이나 비속어가 나돌기도 했다. 또한 민주화 이후 기존의 권위주의적 사회가 개방적인 사회로 전환되어 감에 따라 황실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식자층에게도 독재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래서 태상황이였지만 태상황다운 행보를 보이지도 못했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카리스마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퇴장해가던 시기였기에 구시대의 상징이라는 한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후 1990년 8월 7일 오후 2시 53분 운현궁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후에는 비교적 공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움직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김영삼 당시 총리는 이에 대해 공칠과삼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평가하기도 했었다.

사망 이후 묘호는 1990년 8월 7일 오후 10시 정각 연호 발표와 동시에 무종(武宗)으로 발표되었다. 미해군 장교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데다 이후로도 경인공란, 한중전쟁에서의 승전을 이끌었고 그 외 경자정변같은 군사적 사건도 뒤에서 사주했으니 참으로 어울리는 묘호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외 대한제국군을 세계적 강군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고 말이다.

기타

  1. 미국은 출생지주의이기 때문에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해군사관학교에도 진학하여 미해군에 장교로서 종군도 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대한제국 황족으로서 이중국적을 가질 수는 없었기에 미국 국적을 포기하였다.
  2. 조선으로 확대하면 조선 현종이 중국에서 태어났다.
  3. 실제로 가장 친황실·우익적인 도시인 함흥에서도 "황제 폐하를 존경하긴 하지만 이제 권력을 민간에게 이양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는 하는게 옳지 않겠나"는 여론이 주류였을 정도였다.
  4. 광주는 원래 신민당의 텃밭이였기도 하지만, 경신혁명 이후 '신민당 안찍으면 광주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의 강성 친신민당 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