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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의 역사
英鹿史

히야니루 참칭정부(영록어:ヒヤニル僭稱政府)는 1735년부터 1799년까지 존속하여 토라 지방(度羅地方) 내 츠데키 영제국(本敵令制国)과 마타나루 제도(マタナル諸島)를 세력권으로 삼던 불법 지역 정권이었다. 당시 츠데키 영제국 내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던 히야니루 타모노(ヒヤニル 絲物) 사군부령(司軍部領)[1]이 중앙 정권의 노골적인 지역 차별과 가혹한 세금 등을 이유로 봉기하면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지역 호족들과 츠데키 영제국 내 관료들과 결탁하여 조정에 대항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60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1799년에 몰락한 이후, 히야니루 참칭정부 시절을 그리워하던 이들[2][3]은 20세기 초까지 츠데키-마타나루 독립운동(本敵-マタナル獨立運動)을 이끌었으며, 간간히 살아남은 히야니루씨(ヒヤニル 氏)의 후손들을 '가네레이'(ガネレイ, 總令)[4]로 추대하는 경우가 잦았다.

독립 배경

잇타치로 남조 정권(イッ達ロ南朝政權, 1475년-1540년)의 붕괴 이후 츠데키 영제국이 설치되어 토라 지방(度羅地方)이 영록 사회에 편입되면서 점차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중앙 정청에서는 높은 세율로 매겨진 연공을 부담함으로서 이들의 불만을 가속화 했고, 이런 상황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불필요한 요구들을 지역 주민들에게 강요함으로서 잇따른 농민 반란을 야기하기 시작했고, 1688년에는 하바라시의 난(ヒバラシ エ 亂)이 그 대표적인 일이었다. 허나 주민들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중앙 관료들은 반란의 책임을 물고 더욱 착취하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츠데키 영제국의 향촌 사회를 통솔하던 향토 지식인들은 통치 이념으로서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특히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양명학(陽明學)을 받아들이면서 실천적 철학의 덕목에 초점에 맞추었으며, 덕치(德治)에 의거된 향촌 통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에 사상가였던 미나치루 타케오루(ミナチル竹可, 1632-1705)는 '다스림(治)과 덕(悳)[5]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긴 했으나, '중앙이 올바르지 못하면, 대항해도 좋다.'라는 급진적인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에 많은 향촌 지식인들이 호응하였고, 히야니루 타모노의 아버지도 그의 반정부 사상에 감화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 타모노가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나코루의 소란

나코루(夕甲)는 츠데키 영제국 북부에 위치한 향촌 행정지로서 수탈이 극심했던 츠데키 내부에서도 꽤나 부유한 곳이었다. 허나 군사적 요충 기관이었던 좌군영(左軍營)과 행정 기관인 목관부(牧官府)가 설치되면서 조세 및 연공 부담을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이 책임지게 됨과 동시에 중앙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불만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고, 가난한 지식인으로 알려진 도코다 야츠쿠(床月ヤチュク, 1699-1734)가 향촌 주민들을 대변하여 탐관오리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과 투쟁 방향을 앞장서면서 의송(議送)[6] 제출을 포기하고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츠데키 영제국 내부에서의 산발적인 봉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쉽게 사그라들 것 같았던 나코루 봉기의 열기는 츠데키 전역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향촌 지식인들을 규합하던 히야니루 타모노와 그의 아버지는 '향촌자치'(鄕村自治)를 내세운 초군(草軍)[7]을 조직하여 도코다 야츠쿠를 비롯한 봉기 주동자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봉기의 가담한 이들의 숫자가 2만 명을 넘어서자 위세에 눌린 중앙 관료들은 급히 짐을 챙겨 엔쿠소루(王城)로 도망했으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좌군영의 병력들과 목관부의 관료들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민중 봉기와 독립 정부의 수립

츠데키 영제국 내 주요 행정/군사 시설들이 점령되면서, 위해를 당할까 두려운 향촌 관료들은 히야니루 타모노의 봉기 세력에게 항복을 요청했으며, 츠데키 남부에 위치한 마타나루 제도에서도 잇따른 봉기 선언이 잇따르면서 토라 지방 전역에서 독립 물결이 수면 위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중앙 정청은 카코무 사에카타(枯水 サエ方, 1697-1754)를 진압군으로 내세워 5천 명에 달하는 중앙군을 이끌고 하네다케 현(西竹縣)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중앙군 대다수가 화승총(火繩銃)[8]으로 무장한 포수 병력이었는데, 좌군영과 마타나루 제도에서 화승총을 수입 및 제작하는 공방을 장악했던 봉기 세력 역시 철포수로 승부를 보고자 했다. 이에 히야니루 타모노는 좌군영 하급 지휘관들의 도움을 받아 하네다케 현 일대를 감싸고 있는 산 중턱에 병력을 각기 배치한 뒤 하네다케로 진입하는 중앙군을 섬멸할 계획이었고, 카코무 사에카타는 봉기군의 계획대로 그들을 크게 얕본 나머지 중앙군 병력 그대로 들고 진입하면서 봉기군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전투가 발생해버렸다. 이 전투로 봉기군의 2/3 이상이 목숨을 잃음으로서 중앙군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카코무 사에카타는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소수의 병력을 대동하여 급히 에이슈 지방(英州地方)으로 후퇴하였고, 봉기군은 사살한 중앙군의 제식 화기들을 노획하고 하네다케 일대에 견고한 토성을 쌓아 방비를 시작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카코무 사에카타는 츠에키와 마타나루 일대를 제외한 토라 지방의 봉기 소요를 잠재우고 확전을 포기하는 것으로 봉기 세력을 묵인하였다.[9]

중앙군으로부터 대승을 거둔 히야니루 타모노는 중앙 정청에 상소문을 보내 자치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고, 상소문에 대한 답문을 받기도 전에 스스로를 가네레이(總令)라 칭하며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다수의 향촌 지식인들이 대거 참칭 정부에 합류하였고, 이들은 각기 분야에서 조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60년간의 행적과 몰락

평가와 여담

츠데키 영제국마타나루 제도가 풍토적으로 농사에 적합치 않은 땅이었으며, 지속적으로 중앙 정부가 참칭 정부를 복속하기 위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60년 이상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은 향촌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지역 향촌을 유지하기 위한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류 및 참칭 정부를 지탱하는 인재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사회학자였던 미나타 츠케야루(ミナ多漬物遣, 1845-1903)는 "히야니루 (참칭)정부는 영록 자치사회의 표본이자 근대 연방 제도의 열화(劣化)"라며 극찬한 바 있다. 허나 이 발언으로 중앙 정부 공직에서 해임되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다행히 그의 노력 덕분에 단순히 반란 세력으로 매도되었던 히야니루 참칭 정부는 지역 향토사로 공부되었으며, 미국의 연방제를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향촌 자치의 당위성을 어필하는 예시로 자주 인용되었다고 한다.

참칭 정부 말기에는 양학(洋學)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많았으며, 이들 절대 다수는 향촌 사회를 떠나 중앙 정부에서 서양 열강들과의 교역 및 교류와 관련된 공직에 몸을 담갔다. 이들은 서양과의 근대적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벌어졌을 사회적 충격을 최대한 억제하는 완충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으며, 이 덕분에 '개화파'(開化派)라고 하는 정치 세력화로 진행되어 문호 개방과 서양 문명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 영록사 교과서에는 봉건적/전근대 사회의 타파를 위한 향토 민란 운동으로 묘사되었으나, 역사학계에서 이러한 해당 시각이 오래전에 논파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급하게 2009 개정 교육과정 영록사 교과서에서 해당 서술을 정정하고 체제 변혁 및 사회 모순 극복 과정에서의 향토 자치 운동이라는 서술로 변경되었다. 이 때문에 2010학년도 영록 대학능력검정시험에서는 이러한 히야니루 참칭정부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13번 문제에서의 혼동으로 복수 답안(!) 처리하는 일까지 생겨버렸다.

각주

  1. 영제국 내 하급 지휘관으로서 대략 500명에서 1,000명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다.
  2. 중앙정부의 차별에 신음을 앓던 주민들 외에도, 본래 살던 곳에서 지나치게 높은 세율을 감당할 수 없어 츠데키와 마타나루로 도망쳐 온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도 협력했다.
  3. 이주민들이 히야니루 정권을 비호했던 것은 당시 히야니루 중앙 정치를 총괄하던 관료들의 유교적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휘하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크게 낮추었기 때문이었고, 당대에도 츠데키, 마타나루로 이주하던 중 붙잡힌 이들의 사정도 이러한 경제적 이유가 컸다.
  4. 참칭정부 독립 당시 히야니루 타모노와 그 후손들이 내세운 관직 직함이었다.
  5. 주자학(朱子學)을 덕치(德治)의 예시로 하여 이를 비판했다. 이때문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함께 '동양의 마키아벨리'로도 불리고는 한다.
  6. 관부에 올리는 민원 서류를 아울러 이르는 말
  7. 일반 민중으로 이루어진 민병대를 이르는 말.
  8. 일본에서 수입한 타네가시마 철포(種子島鐵砲), 서구 열강과의 교역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구한 양이철포(洋夷鐵砲) 등으로 제식화했으며, 그 중 일부는 하누가루 철포(天步鐵砲)라는 일종의 전장식 소총으로도 무장까지 했다.
  9.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소요 사태가 여전히 유지되고 것을 알아차린 중앙 정청은 카코무 사에카타를 진압군 별장(別將, 정3위(正三位)로 다수의 병영을 통솔하고 지휘하던 고위 관직)에서 해임시키고 그가 소유하던 광작령(廣作領)을 국토로 회수하였다. 이에 큰 수모를 겪은 카코무 일가는 남아있던 재산을 들고 토라 지방에서 생계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