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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내전
Deutscher Bürgerkrieg

반나치 시위
날짜1939년 9월 1일 ~ 1940년 5월 7일
장소독일 제 2제국
결과

독일 제 2제국의 승리

  • 오토 벨스 총리 사임
  •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해산
  • 독일 공산주의 운동 활성화
교전국

독일 제 2제국

오를레앙 공화국
나치당
지휘관

쿠르트 슈마허

파울 요제프 괴벨스

병력
103,822명 19,727명
피해 규모
943명 사망
1,102명 부상
2,019명 사망
1,784명 부상

1939년 독일 내전(독일어: Deutscher Bürgerkrieg 도이체어 뷔르게어크리그[*])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그레고어 슈트라서 주도의 국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오토 벨스, 쿠르트 슈마허독일 제 2제국이 벌인 내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20년대 이후 확산된 파시즘 운동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으며, 국제 정치사에서도 중요한 전쟁으로 꼽힌다.

진행

배경

1921년 4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나폴리 공화국을 장악하여 이탈리아 파시스트제국을 건국하면서 전 유럽에서 파시즘 광풍이 몰아닥쳤다. 오를레앙 공화국에서는 국가 민족주의 운동필리프 페탱이, 스페인에서는 팔랑헤당프랑시스 프랑코가 파시즘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 6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새 당수로 취임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국민 선동을 통해 당세를 급격히 불려나갔다. 이로 인해 뮌헨을 중심으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지하조직이 뻗어나갔고,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에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발단

1939년 1월 2일 독일 사회민주당의 오토 벨스는 반민주적 정당에 대한 비난 연설을 하였고, 이에 반발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당원 몇명이 폭탄테러를 일으켜 총리 살해 미수사건이 터지게 된다. 독일 사민당과 사민당과 함께 연립내각을 구성하던 중앙당, 자민당은 파시스트정당을 때려 잡아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와중에 안톤 드렉슬러 주도의 나치당 뮌헨 지구당은 폭동을 일으켜 뮌헨시 시민들을 위협하였고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 바이에른주 총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터지자 오토 벨스는 더이상 내각을 꾸리기 어렵다면서 쿠르트 슈마허에 자리를 양보하고 총리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마침내 9월 1일 프라이부르크뮌헨,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에서 반-사민당 시위가 터지면서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전개

1939년 9월 1일 뮌헨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 내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 5월 7일 뮌헨 2차전투를 끝으로 내전은 종료된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주로 기록한다. 초반에는 나치당이 치고들어갔으나 나치당의 물자 부족으로 인해 독일제국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뮌헨 전투

뮌헨 전투
Schlacht von münchen
일시
1939년 9월 1일 - 1939년 9월 4일
병력
진압국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내전군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독일제국 오토 폰 로소 2,737명 3대 12대 1대 나치당 요제프 괴벨스 3,055명 0대 18대 2대
오를레앙 모흐벙 디종 192명 1대 1대 0대 돌격대 에른스트 룀 4,930명 1대 15대 1대
국기단 쿠르트 슈마허 127명 0대 1대 0대 친위대 에른스트 룀 102명 0대 1대 0대
진압군 오토 폰 로소 3,056명 4대 14대 1대 내전군 에른스트 룀 8,087명 1대 34대 3대
결과
진압군 패배, 뮌헨 내전군 장악

1939년 9월 1일 돌격대는 뮌헨 시가지에서 행진을 벌였고 유대인, 프랑스인, 체코인 상점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유대인들과 프랑스인들을 폭행했다. 프랑스인들의 신고를 받은 뮌헨 주둔 오를레앙 공화국 치안부대가 출동하였으나 이들 역시 돌격대에 의해 폭행당했다. 이 과정에서 오를레앙 공화국 치안대와 돌격대간 총격전이 일어났다. 곧이어서 독일 제국군도 출동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인하여 밀려났다. 또한 나치당에 대한 지지율이 압도적이었던 뮌헨시의 시민들이 돌격대원들을 간접적으로 도와, 독일 제국군과 오를레앙 치안부대는 뮌헨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바이에른 임시 총독이었던 오토 폰 로소는 탈출하려다가 폭탄테러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200여명의 독일제국군들이 사망했다. 총리 쿠르트 슈마허는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의 전투를 시작한다.

프라이부르크 전투

프라이부르크 전투
Schlacht von Freiburg
일시
1939년 10월 7일 - 1939년 10월 12일
병력
진압국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내전군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독일제국 에르빈 롬멜 1,048명 2대 17대 3대 나치당 요제프 괴벨스 2,596명 5대 18대 10대
오를레앙 게르트 룬트슈테트 4,021명 4대 26대 1대 돌격대 에른스트 룀 2,235명 6대 23대 2대
국기단 쿠르트 슈마허 203명 0대 0대 0대 친위대 에른스트 룀 400명 0대 1대 1대
진압군 에르빈 롬멜 5,272명 6대 43대 4대 내전군 에른스트 룀 5,231명 11대 41대 13대
결과
내전군 작전상 후퇴, 프라이부르크 사수

바이에른 남부를 장악한 나치당과 돌격대는 슈바르츠발트 산맥을 장악한 후 오를레앙 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차단하려고 하였으며, 오를레앙 공화국 파병군의 거점인 프라이부르크스트라스부르크를 점령하는것은 중요하였다. 때문에 나치당, 돌격대, 친위대 단원 5000여명은 바덴주로 이동하여 산맥을 따라 프라이부르크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때 바덴주 총사령관이자 독일 제국군 전차부대 사령관이었던 에르빈 롬멜 장군은 산악지대를 먼저 장악하여 골짜기를 따라 진군하는 파시스트 군대를 쳐부수자는 작전을 세웠다. 1939년 10월 7일 에르빈 롬엘 휘하의 진압군은 돌격대 사단을 공격하였고 순식간에 전열을 붕괴시켰다. 에른스트 룀 돌격대 대장은 프라이부르크로 진격해 시가전을 벌이자 하였으나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 달리 할수 있는일이 없었고, 5일간의 게릴라전 끝에 돌격대는 포위 형세를 끊고 슈투트가르트를 치기 위해 뮌헨으로 작전상 후퇴를하였다.

슈투트가르트 전투

슈투트가르트 전투
Schlacht von Stuttgart
일시
1939년 12월 23일 - 1939년 12월 31일
병력
진압국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내전군 참여국 지휘관 군인 전차 차량 대포
독일제국 에르빈 롬멜 10,832명 9대 23대 11대 나치당 요제프 괴벨스 1,948명 2대 3대 1대
오를레앙 발터 모델 2,948명 5대 26대 7대 돌격대 에른스트 룀 1,003명 0대 3대 0대
국기단 쿠르트 슈마허 495명 0대 0대 0대 친위대 에른스트 룀 555명 0대 1대 0대
진압군 에르빈 롬멜 14,275명 20대 49대 18대 내전군 에른스트 룀 5,231명 2대 7대 1대
결과
내전군 괴멸

제 2차 뮌헨 전투

종료

후속 조치

주동자들은 모두 재판으로 넘겨졌으며,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해산당했다. 빌헬름 2세쿠르트 슈마허 총리는 담화로 다시는 이 독일 땅에서 독재적 파시스트들의 난동이 없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후 독일 공산당의 발의로 파시즘적 사상을 갖고있다고 판단되는 정당들을 해산시킨다는 헌법 보호법이 1942년 7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이후 1965년 독일 가톨릭중앙당의 건의로 반민주적 사상을 갖고있는 정당을 해산시킨다는 식으로 법이 바뀌게 된다.

독일 공산당이 장악하고있었던 베를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하노버에어푸르트 역시 무사했다. 쾰른에서는 총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브레멘에서는 10명, 함부르크에서는 34명, 뒤셀도르프에서는 2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제국의 요청에 따라 자르브뤼켄스트라스부르는 내전 기간동안 오를레앙 공화국 육군이 주둔하여 도시를 보호했다. 뮌헨은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민간인 포함 1500여명이 사망한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뉘른베르크프라이부르크, 슈투트가르트는 공방전으로 인해 도시가 초토화되었다.

에어푸르트 재판

1940년 7월 1일 베를린 자유시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공산당의 폭탄테러 위협으로 인해 1달 뒤, 독일 제 2제국 튀링엔주 에어푸르트시에서 나치당 인사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기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1983년까지 금지되었다가 법에서 풀려나 1985년 1월에 재창당되었다.

프라이부르크와 슈투트가르트, 뮌헨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때의 전투를 기리고있다. 2018년 나치당 당원 몇명이 추모 행사도중 테러를 일으켰으나 미수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