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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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7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코널리 266인 (49.4%) 256인 (47.5%) 월리스
1976년 11월 2일
1976년 대선
선거일시 11월 2일 5시 ~ 11월 3일 6시 (UTC)
투표율 54.1%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
대통령 존 코널리
부통령 하워드 베이커
민주당
대통령 조지 월리스
부통령 로버트 버드
공산당
대통령 거스 홀
부통령 톰 헤이든
기반 주 텍사스 앨라배마 뉴욕
승리 주 26개 주 24개 주 워싱턴 D.C.
선거인단
266인[1] 256인[2] 16인[3]
전국득표
37,040,452
45.8%
37,109,622
45.9%
6,025,705
7.5%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교착 상태
미국 의회에서 당선자 결정

개요

미국의 제38대 대통령과 제40대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76년 11월 2일~11월 3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이다. 선거 결과, 그 어떠한 후보도 과반 득표를 확보하지 못하여 하원에서 대통령을, 상원에서 부통령을 선출하였다.

미국 건국 200주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대통령 선거이다. 공화당 소속의 존 코널리 후보와 민주당 소속의 조지 월리스 후보 모두가 보수 성향을 띄었기 때문에 진보 유권자들이 소외되었으며, 특히 리처드 닉슨의 8년 임기를 거치며 후퇴된 흑인 민권, 여성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논쟁적인 논의가 오갔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경선이 분열된 양상을 띄었으며, 양당과 워싱턴 중앙 정치에 대한 반감 속에서 탈기성정치를 내세운 미국공산당이 전례 없이 선전했다.

선거 결과 존 코널리 후보가 269인의 선거인단을, 조지 월리스 후보가 266인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어떠한 후보도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했다. 어느 후보도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152년만의 일이며, 수정헌법 12조에 따라 1977년 미국 하원은 총원 435석의 투표 중 226석의 동의로 제럴드 포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같은 날 미국 상원은 총원 100명 중 73석의 동의로 로버트 버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배경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대중 지지율은 1975년까지 약 5~60%대로 높게 유지되었다.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긴 했지만 좌익 후보 조지 맥거번의 참패로 인해 당내 자유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1973년부터 오일쇼크의 여파로 경제가 악화되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린 일련의 정치 스캔들로 닉슨 행정부의 지지율이 잠시 악화되었으나, 이내 워터게이트 사건이 무혐의 처리되고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닉슨의 지지율 역시 상승 기조를 보이게 된다.

동시에 미국은 볼티모어 경찰 파업 사건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의 강력한 진압, 대학생 운동권 탄압, 흑인민권운동 쇠퇴 등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등이 눈에 띄게 후퇴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불만 속에서 대학교 저항 세력은 사그라들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닉슨 행정부에 계속 대항하였다. 특히 1974년 칠레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며 일어난 1974년 동맹 휴학오하이오주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으로 일어난 1970년 동맹휴학 사건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학생 저항운동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불만은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후 경직된 미국 경제 침체와 맞물려 강화되었다.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미국은 상당한 경기 침체를 겪었는데, 이는 1929년 대공황과 1958년 단기 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침체였으며 OPEC의 석유 금수조치(오일쇼크), 고 인플레이션, 통화정책 결정(닉슨쇼크) 등의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6분기 연속 미국의 1인당 GDP가 하락했고, 실업률은 최대 9%를 기록했다. 또한 인플레이션률은 이 시기 평균 12%에 달했다. 다우 존스 산업 형균(DJIA) 및 기타 주가 지수는 이 시기 45% 하락해,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입혔다. 특히 뉴욕시의 피해가 상당했으며 존 린지(John Linsay) 뉴욕시장은 뉴욕의 파산을 선언하고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닉슨 행정부가 이를 거절하면서 경제적 불안이 극대화되었다. 결국, 197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석을 늘리며 승리한다.

그러나 1975년 3월 이후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조정과 연방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미국이 공황에서 빠져나오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 미국 경제는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특히 닉슨 행정부의 광범위한 감세 정책은 대중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배경 하에서, 공화당의 1976년 대선 승리가 유력해졌고 민주당은 맥거번의 참패 이후 마땅한 대권주자를 찾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있었다.

정당 별 상황

공화당

민주당

미국 공산당

최종 후보

공화당: 존 코널리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존 보든 코널리 주니어
제69대 미국 법무부장관
하워드 헨리 베이커 주니어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
America's Favorite Son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아들[4]

1976년 코널리-베이커 티켓 슬로건

민주당: 조지 월리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조지 콜리 월리스 주니어
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로버트 칼라일 버드
웨스트버지니아 주 연방 상원의원
Stand Up for America
미국을 위해 궐기하라

1976년 월리스-버드 티켓 슬로건

미국 공산당: 거스 홀

기타 후보

  • 자유당 - 로저 맥브라이드(Roger MacBride)
  • 사회주의노동자당 - 피터 카메조(Peter Camejo)
  • 미국독립당 - 레스터 매독스(Lester Maddox)
  • 미국 노동자당 - 린든 라로슈(Lyndon LaRouche)

선거 과정

여론조사

기관 조사일 표본수 오차범위 존 코널리
(공화당)
조지 월리스
(민주당)
거스 홀
(공산당)
미정
New York Times/
CBS News
5월 9–12일 1,056 RV ± % 55% 40%
Gallup 6월 24–26일 1,056 RV ± 3% 57% 39%
New York Times/
CBS News
7월 8–10일 1,002 RV ± % 56% 35%
7월 14일: 공화당 전당대회
Gallup 7월 21–22일 948 RV ± 4% 58% 34% 1%
8월 12일: 민주당 전당대회
NBC News/
Wall Street Journal
8월 20–22일 1,762 RV ± 3% 54% 40%
Gallup 9월 12–14일 1,020 RV ± 3% 56% 39% 2%
9월 14일: 대통령 후보 토론회
ABC News/
Washington Post
9월 14–19일 1,247 LV ± 3% 52% 43% 3%
NBC News/
Wall Street Journal
10월 4–6일 1,378 LV ± 3% 45% 46% 5%
NBC News/
Wall Street Journal
10월 23–26일 1,285 LV ± 4% 45% 45% 4%

선거 결과

지역별 결과

사건사고

여담

  • 2022년 방영된 HBO의 대체역사 드라마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All the President's Men)[5]에서 1976년 대선은 닉슨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가 현실 역사보다 2년 일찍 대통령이 되어 재선을 도전한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상대 민주당 후보는지미 카터(Jimmy Carter)[6]인데,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 사면권 발동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결국 카터에게 대권을 내어주게 된다.

  1. 본래 269인이었으나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알래스카 주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3인 이탈.
  2. 본래 266인이었으나 워싱턴, 미네소타, 펜실베이니아, 뉴욕 주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10인 이탈.
  3. 본래 3인(워싱턴 D.C.)이었으나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알래스카 주의 공화당 출신 불충실한 선거인단 3인, 워싱턴, 미네소타, 펜실베이니아, 뉴욕 주의 민주당 출신 불충실한 선거인단 10인 추가 획득.
  4. 미국 정치에서 "Favorite Son"은 한 지역과의 강한 유대성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인데, 지역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해 표현한 것이다.
  5. 미국 정치사의 대표적인 음모론인 리처드 닉슨의 상대후보 도감청 및 사보타주 설이 실제 역사였다는 가정으로 제작된 대체역사물이다.
  6. 조지아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의 보수파 정치인으로, 신남부(New South)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현실 역사에서는 재선 조지아 주 연방 상원의원 직을 거쳐 1992년 대통령 선거 경선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빌 클린턴에게 패배했고 1994년 "깅리치 혁명"의 열풍 속에 상원 의원 재선에도 실패해 정계를 은퇴했다. 여담으로 아직까지 살아있으며 전현직 상원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