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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나루미 제도 위기
나루미 제도 분쟁의 일부

첨관 해군의 순찰함인 고잉 메리호와 일본 호위함 사이고호의 충돌 모습.
날짜1999년 8월 17일 ~ 1999년 8월 30일
장소나루미 제도 인근 해역
결과

미국의 중재로 인한 일본의 철수, 사실상 첨관의 승리

  • 첨관과 일본의 관계 악화
  • 나루미 제도 분쟁 심화
교전국
첨관 일본
지휘관
  • 모리 요시로
  • 이소지마 츠네오
  • 후지타 고세이
  • 다케고치 쇼지
  • 군대
  • 첨관군
  • 첨관 경찰
  • 나루미 방위대
  • 일본 해상방위군
  • 병력
    7,700 명 1,500 명
    피해 규모
    사망 3명
    부상 17명
    사망 11명
    부상 46명
    행방불명 2명

    1999년 나루미 제도 위기는 1999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나루미 제도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첨관일본의 충돌이다.

    발단

    1999년 8월 3일, 일본 미나미도리시마(南鳥島)의 일본군 해상방위군에 이등육좌로 근무하고 있던 하타베 하야토(波多部隼人)는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父島)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하타베 하야토는 해상방위군을 자의가 아닌 부모와 친척의 뜻에 의해 부사관으로 입대하게 되어 적응에 힘들어 하고 있었으며 병사까지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치치지마로 외출을 하게 된 하타베 하야토는 탈영을 결심하고 8월 3일 밤 11시 49분 경 항구에서 어선 한 척을 훔쳐 몰아서 달아난다. 어선을 타고 달아난 하타베 하야토는 바다를 떠돌다가 첨관 나루미 제도의 미도리지마(綠島)에 8월 4일 오전 7시 30분 경 도달한다. 미도리지마는 민간인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첨관군으로 이뤄진 군기지였던 섬이였고, 바닷가에도 초소가 놓여져 있었다. 해변의 초소에서 미도리지마에 접근하는 하타베 하야토를 발견한 초병 2명은 그 즉시 상부에 보고하였으며, 상륙한 하타베 하야토를 즉각 잡았고, 경찰서로 넘기기로 하고 나루미지마(鳴海島)로 8월 5일 오후 1시 10분 경 데리고 가 경찰서로 넘겼다. 경찰서는 군인과 하타베 하야토에 대해 경위와 이야기를 들은 뒤 하타베 하야토를 구금조치하였다. 그 뒤 군기지에 대한 허가 없는 접근과 밀입국 혐의로 8월 6일 오후 3시 6분 하타베 하야토에 대한 구속영장이 "피고인이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의 조건을 충족하여 나루미 지방법원에서 발부되었으며, 나루미지마 지부 경찰서는 구속수사에 착수하였다.

    전개

    이등육좌가 사라진 일본 해상방위군은 초기엔 하타베 하야토가 외출 중 실종된 것으로 추정했고 경찰이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CCTV와 증언 등을 파악 한 결과 탈영했음을 알게 되었고, 탈영병을 다시 붙잡기 위해 헌병대가 오가사와라 제도 일대를 수사하였다. 한편 8월 10일, 나루미 제도 지역방송에 하타베 하야토의 밀입국 소식이 뉴스로 송출되었다. 당시 하타베 하야토는 자신이 군인 신분임을 숨기고 있었기에 민간인으로 표시되었다. 그 방송을 본 해상방위권은 하타베 하야토가 첨관으로 도피했음을 알고 상부에 이를 알렸다. 8월 11일, 일본군은 첨관에 하타베 하야토의 승환을 요구한다. 첨관은 자국 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신분이고 조사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8월 12일, 일본은 이것을 "자국 군인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으며, 이는 선제 공격이나 다름없다."고 첨관에 경고한다. 첨관은 "우리 일은 우리가 처리한다."고 응수하였다. 8월 14일, 일본군은 8월 16일까지 송환을 첨관이 하지 않을시 대응에 나서겠다고 했다. 첨관은 불응하였다. 8월 17일 오전 12시 정각, 일본 해상방위군은 자국 군인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 없고 이는 우리에 대한 선제 공격이므로 전수방위이다 라는 논리를 들어 함대를 나루미 제도 인근으로 파견한다.

    위기

    8월 17일 오전 12시 27분, 첨관군도 즉각 나루미 제도의 해군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5분대기조 및 함대 파견에 나선다. 8월 17일 오전 2시 6분, 첨관군의 함대와 일본군의 함대가 만났으며 첨관군은 일본군에 대하여 "이곳은 첨관 영해이므로 당장 나가시오."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절정

    그러나 오히려 자위대의 함선들은 첨관의 경비정과 순찰함에 몸통 박치기를 걸어와 손상을 입혔다. 이에 첨관 경비정은 선내 포를 자위대의 함선들에 응사해 명중시켜 버렸다. 결국 자위대 함선들이 물러났고 첨관 순찰함은 거의 침몰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항구로 돌아간다. 8월 17일 오전 7시, 이번에는 자위대의 호위함인 사이고호가 나루미 제도 인근 해역에 나타나 첨관 순찰함 고잉 메리호에 대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해 고잉 메리호의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만다. 사이고호의 선체는 살짝 패인 정도였다.

    결국 이 소식을 보고받은 사토 에이치 첨관 대통령도 "이건 전면전이다!"라고 소리치며 정식 함대를 출동시켰으며, 발포 명령을 내리며 당시 신형이였던 노하라 야츠모토급 이지스함을 내보내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 뒤 오후 11시 경부터 나루미 미도리지마 인근 해역에서 첨관의 함대와 일본의 함대가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지속되기 시작했다. 오후 12시 11분, 일본 경비정이 첨관의 경비정에 밀어내기와 박치기를 시도하였고, 첨관 해군 함정이 위협기동을 실시하자 일본 함선들은 우회기동을 시도하였고 첨관 해군 함정들은 영해에서 떠나라는 의미로 위협사격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일본 함선들이 위협사격에 대해 대응사격을 하게 되었고 결국 포격전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첨관은 3대의 경비정, 순찰함이 침몰하고 3대가 대파상태가 되었으며 1대의 초계함이 대파상태가 되었다. 일본은 2대의 경비정, 순찰함이 침몰하고 2대가 대파상태가 되었으며 1대의 호위함과 1대의 초계함이 대파상태가 되었다.

    첨관 해군은 일본 해자대보다 화력에서 밀렸고 선제공격도 일본이 감행했던 지라 피해를 입었지만 즉각적인 대응으로 집중적으로 일본 함선들을 공격해 많은 피해를 역시 입힐 수 있었다. 오후 12시 58분, 일본 해자대 함선들이 먼저 후퇴하며 전투가 끝났다.

    전투가 발생하자 양국 수뇌부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한 군인의 탈영이 전투로 전혀 예상치 못하게 확대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양국은 당시 서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 감정이 만연해 있었기에 전쟁을 환영한다는 여론도 다수 있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첨관에서 일본산 자동차를 파괴시키는 과격한 시위를 보이기도 했다. 이 전투로 인해 첨관은 1992년 신정혁명 이후 약 7여년만에 데프콘 4에서 데프콘 3으로 격상이 되었고 나루미 제도에 한해 데프콘 2가 발령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은 즉각 패닉에 빠졌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둘 다 동맹국이였고 동아시아 안보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EATO의 주요 국가였기 때문이다. 8월 17일 오후부터 첨일 주재 미 대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럽연합과 동남아,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도 첨관과 일본간의 전쟁 확대를 우려해 중재를 시작한다. 세계 주요 경제강국끼리의 전쟁이였던 탓에 사실상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첨관과 일본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면전은 첨관도, 일본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첨관은 일본과의 전면전이 시작될 경우 경제가 파산될수도 있었으며 일본과의 무역을 매우 많이 진행하는 국가였기에 일본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았는데,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과의 무역은 물론 일본과 거래를 하던 중소기업과 나가하마, 사사오카, 하이스터 등의 대기업도 위험에 빠질수가 있었다. 일본 역시 2차대전 전범국이라는 타이틀이 남아있었는데 선공을 하여 전투까지 일으켰으니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수가 없었다. 일본 역시 전면전시 경제적인 문제가 컸는데, 일본 내의 많은 중소기업이 첨관의 대기업들과 거래하고 있었기에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으로 인해 GDP가 크게 감소하던 시기에 전쟁을 벌이면 큰 폭으로 하락하던 경제가 더 엉망이 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자민당 역시 독주체제가 무너질수가 있었다.

    어쨌든 첨관과 일본의 냉전 상태는 며칠간 유지되었고, 그로 인해 서로 무역이 중단되자 양측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첨일 모두 전면전시의 불리함을 우려해 선공을 하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던 도중, 이 대립을 끝낼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당연히 미국이였다. 미국은 물론 첨일 양국의 대립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나루미 상에서 전투가 발생하자 즉시 테스크포스팀을 가동해 첨일의 외교관을 불러 전쟁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인 압박으로 인해 일본측에서 먼저 첨관에게 정식으로 연락을 하게 된다.

    결말

    그로 인해 8월 21일,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먼저 첨관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게 된다. 사실 서로가 전쟁 의사가 전혀 없었고 탈영병 한 명의 거취 문제가 커져 전투로 발전한 것이였던 만큼 일본 입장에서도 차라리 빨리 끝내는게 이득이였다. 게다가 일본은 먼저 선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했어야 했으며 UN에서 침략국으로 규정할시 수세에 몰릴 지경이였다. 거기다가 양국 모두 서로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높았기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수백개의 기업이 줄도산하는게 기정사실이였고 전쟁이 끝나도 큰 경제적 피해를 입을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첨관과 일본 모두 경제강국이던 만큼 두 국가 모두 경제가 파산하거나 큰 피해를 입는다면 세계도 경제 위기가 찾아올것이 자명했기에 전세계가 중재에 나선 것이였다.

    어쨌든 8월 22일 사토 에이치 첨관 대통령도 요시로 총리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나루미 제도의 충돌은 일단락되었다. 이로서 나루미 제도에서의 충돌은 국지전 수준으로만 마무리가 되었고 무역은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며칠정도의 대립도 첨일 양국에는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첨관의 경제는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회복중이였으나 이 충돌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어 복구에 큰 지장을 주었고, 일본 역시 잃어버린 10년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런 사태가 벌어져 불황은 더 심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