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사건
날짜 1926년 3월 12일
참여자 과격 군주복고론자 (과격파)
원인 정권의 과격파 위협으로 인한 과격파의 반정부 감정 격화
결과 미네츠야 토키모 정권 붕괴, 쿄와 로망의 붕괴 위기, 공화 체제의 흔들림
사상자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
미토카이 아츠코 대통령 보좌관
츠키야시 토로 경호실장
피해
사망자 7 명
부상자 13 명

3.12 사건(일본어: 三·一十二事件)은 1926년 3월 12일 타이난 공화국에서 스스로 왕도파(王道波)를 주장한 과격 군주복고론자들이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을 암살하고 폭탄테러를 벌인 사건으로서 정권 전복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으며, 4.15 사건과 함께 쿄와 로망의 분위기를 종식시키면서 혼란을 야기한 사건이다.

상세

과격 군주복고론자들의 정치적 성격은 과거 막부조정의 가세했던 이들의 주장을 답습하던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공화정이 도리어 민중을 정치로부터의 타락에 휩쓸게 한다."고 말하면서 "테이쿤(帝君) 폐하를 복고하여 '제국(帝國)'을 자칭하는 일본에게 항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일본계 국가였던 타이난과 일본의 관계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태평양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이 격화되었으며, 이에 수많은 민중들이 "또 한번의 세계 대전이 타이난에서 벌어지면 어떠하는가"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였다. 이를 노린 군주복고론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공화정 폐지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물타기 속에 많은 민중들의 야유성이 거세졌다.

그러나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은 없으며, 타이난은 지속적인 호황을 유지 중이다. 불안에 감응되지 마라."고 공식석상에 발표하면서 "국가적 위기감을 암암리에 조성하는 이들에게는 그에 대응되는 처벌을 줄 것"이라며 군주복고론자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처벌을 두려워 하던 민중들 대부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오히려 이를 노린 토키모 정권은 지속적으로 정권에 위협을 주던 군주 복고론자들을 대거 체포하기 시작했다. 당장에 해체될 위기에 처한 과격파는 토키모 정권에 의해 체포되기 전에 정권 전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서는 빠른 시일내에 대통령 관저, 행정 관저, 입헌민정회 본부, 야마다미야 고궁, 경찰청을 차례로 습격한 후 일부 별동대로 하여금 변전소를 습격해 난세이 도 전역을 암흑천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거사일인 1926년 3월 12일, 과격파들은 쿠데타를 실행에 옮겨 먼저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 머문 대통령 관저로 쳐들어갔다.

당시 관저에는 소수의 친위 병력만이 존재했는데,[1] 가장 먼저 돌입한 과격파 일행인 이토미 아사카는 권총을 겨누고서 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으며, 총기 발포 소리를 들은 토키모 대통령은 자신의 침실로 도망하였다. 이후 과격파는 '미토카이 아츠코' 보좌관을 살해한 뒤 대통령의 침실로 들이 닥쳤고, 토키모 대통령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토키모 대통령은 과격파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고, 이것이 먹혀들어갈 뻔 했으나, 관저 뒷문으로 입장한 과격파 지도자인 다카 미나이와가 이끄는 무리가 밀어닥쳤고, 미나이와는 대통령의 말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곧장 총을 빼내들어 "들어도 소용없다.(聞いても無駄だ。)"라고 답한 뒤 토키모 대통령의 다리를 쏘았다. 토키모 대통령이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움직이려하자, 아사카도 토키모의 머리를 쏘았으며, 대통령은 그 즉시 사망하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일행 동원 등의 세부지침도 없었으며, 변전소를 비롯해 각 주요 거점지를 습격하려던 다른 일행들이 체포되면서 별다른 이유 없이 분노만 높았던 이들의 반란은 곧 진압군에 의해 체포되어 정권 전복 특수회의에 회부되었다. 사실상 반란이라기보단 그냥 테러에 가까웠다.

결과와 영향

과격 군주복고론자들은 반란죄를 적용하여 난세이 도에서 열린 정권 전복 특수회의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지도자들을 처리하고 여기에 가담했던 일행들에게 폭발물취급위반죄 및 살인,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난세이 지방재판소에 회부했다. 전 육군사관학교 후보생이자 과격파의 지도자였던 다카 미나이와는 육군형법 대신 난세이 지방재판소에서 일반형법을 적용받았다.

이후 대통령을 '직접' 살해한 다카 미나이와이토미 아사카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휘하의 대통령 관저에 침입했던 이들은 무기징역을, 나머지 가담자들은 각각 15년 형으로 집행되었다. 본래 판결은 더 강한 형으로 집행되려 했으나, 민중의 호응으로 인하여 직접 살해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관여치 않던 군부 내에서왕도파를 표방하던 육군 장교들이 4.15 사건을 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해내는데, 이는 정권 전복을 시도한 뒤 투항 및 항복하더라도 낮은 형을 언도 받을거라 생각한 낙관주의에서 비롯되었다.[2]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국가원수가 암살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음이 대대적으로 대서특필되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였으며, 일부는 대중들에게 법치보다는 극단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인식시켜주게 됨에 따라 쿄와 로망의 붕괴와 정치적 극단화의 대중화라는 추측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이 나아가 사회 전체에 팽배해지기 시작하면서 부분적 행정 마비를 야기하였다.[3] 또, 과격파들을 사주한 이들이 현지민들이라는 향간의 소문이 떠돌자 무분별한 보복 살인이 발생했으며,이에 공화 체제의 붕괴라는 사회적 위기를 막기 위해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미누카이 츠카사[4]야마다 미야헤이하루를 비롯한 야마다 가문의 직계 후손들을 타이난으로 귀국할 것을 명령한 야마다 귀국령(山田 歸國令)을 공포한 뒤, 야마다 미야헤이하루에게 강제로 토모키미(共君)라는 타국의 국왕과 다름없는 영구 종신 직책을 하사하여 사태 수습에 전면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억지로 떠밀린 야마다 미야헤이나루는 대대적인 지방 순행을 통하여 민심을 다독이는데 전면으로 나섰고, 이에 군주주의자들과 반 공화주의자들 일부 세력은 "테이쿤(帝君) 폐하의 복귀를 환영한다."라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당장의 민심 수습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공화 체제의 불신이 쌓여만 갔고, 4.15 사건을 정점으로 민중들은 군부토모키미를 더욱 신뢰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각주

  1. 다른 이유가 아니고, 미네츠야 토키모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서 "보좌관과 친위 병력의 수를 줄이고 늘어난 수입 만큼 민중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노력하겠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 약속했던 공약을 이행한 점이 도리어 대통령으로서의 본인이 살해되도록 만든 요소로 작용한 것이 아이러니.
  2. 이 때문에 4.15 사건 당시에 언도된 육군 장교들은 낮은 형을 기대했으나, 무기 징역과 같은 중형을 선고 받음에 따라 당황했다고 알려져 있다.
  3. 물론 이 당시는 전체적으로 전간기에 걸치고 있던 시기로서 사회적 안정기를 꿈꾸고 있었고, 타이난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외부의 전쟁으로 호황을 누렸던지라 전쟁에 대해 무감각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4. 타이난 역사상 처음으로 현임 국가원수가 임기 수행중 사망함에 따라 후임 국가원수직에 오른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