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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4일 00:50 업데이트 / 이 문서의 내용은 현실의 단체 등과 이름 등이 겹칠 수 있으나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개요

설화가 연재 중인 가상 기업 FutureTech Group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주의: 네이션즈 이탈로 인하여 국적국 설정이 비어버려, 현실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국가들의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단, 대한제국은 개화에 성공하여 근대 국가로 발전, 일제강점기 없이 현재까지 황제가 있는 입헌군주정 국가로 존속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 외에는 현실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합니다. 특히 IMF 외환위기는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많은 모티프를 따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나온 기업과 관련된 모든 설정은 모두 블랑슈나 타인의 창작에 기반한 허구임을 다시 밝힙니다.

그룹 결성 이전 (제1기)

미래음악사 창립

FutureTech Group 제1대 CEO인 심복택은 유학파 작곡가로, 의복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집안의 장손이였다[1]. 덕분에 심복택은 풍족한 환경에서 여유롭게 작곡을 배울 수 있었다. 1866년 독일 유학을 마친 심복택은 일본을 본거지로 약 13년간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1878년, 심복택은 미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를 떠나 마음을 비우고 다양한 것들을 보던 와중, 실린더 레코드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음악을 녹음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유심히 쳐다보던 심복택은 문득 이걸 귀국할 때 가지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레코드와 재생기를 몇 개 사서 귀국했다. 심복택은 이 물건을 지인들에게 보여주었고, 지인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 몇 사람들은 아에 이걸 팔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을 정도였고, 이 제안을 받아들여 1년 후 자본금 1만원으로 음반 도매와 그 재생기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미래음악사를 결성했다. 그때가 1879년 3월 4일이였다.

사세 확장

심복택은 미래음악사를 차리며 본거지를 모국이였던 대한제국으로 본거지를 옮겨 기업 운영과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활동으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받고 있어, 작곡과 기업 운영을 동시에 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심복택은 고민 끝에 미래음악사의 운영을 도와 줄 동료, FutureTech Group 제1대 CFO인 박복자를 섭외했다. 박복자는 심복택과 미래음악사를 같이 운영하다가, 1897년 결혼했다.

집 안에서 편안히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부자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음반과 재생기가 많이 비쌌지만 차차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1887년 손익분기점을 넘긴 이후, 1888년 미래음악사는 대한제국 곳곳과 일본에 여러 분점을 냈다. 모든 분점들이 영업을 잘 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몇몇 분점들은 좋은 수익을 거두었고 이 분점들은 현재까지도 음악 앨범을 판매하는 플래그쉽 스토어로 이어져 오고 있다.

미래음악사는 1889년 3월 4일, 창립 10주년을 기념해서 연극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적자를 면하진 못했지만, 서서히 수익이 늘고 사업이 안정화되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미래음악사는 1892년 일본 등의 외국에도 연극 사업에 진출했으나 큰 적자를 내고 다음 해 바로 철수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내에서의 연극 사업은 호황을 누렸고, 창립 5년만인 1894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처음에는 외화를 수입하는 배급사의 역할만 담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자체적인 연극을 만들어 상영하기도 했다.

1895년 SP(표준시간 음반)이 개발되었고, 미래음악사는 SP의 수입에 앞장섰다. 음반 판매로 많은 수익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음반 제작도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 심복택 본인도 작곡가이니, 지인들과 모여 여러 곡을 작곡해 실린더 레코드와 SP에 실어 발매하였다. 이 음반은 천 부 이상 팔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음반 제작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음반 제작용 스튜디오인 '미래음악사 한성음악녹음실'을 차렸다. 이 음악 녹음실은 미래음악사 자신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내 다른 음악인들도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 현재도 이 곳에는 퓨처테크 음악사업부가 운영하는 스튜디오가 위치하고 있으며, 1층에는 미래음악사 한성음악녹음실을 보존하여 놓았다.

미래전자 창설

미래음악사는 1899년 3월 4일, 창립 20주년을 기념해서 새로운 음반 재생기를 발표했다. 이 음반 재생기는 경쟁 제품들보다 작고 가벼워 나들이 때 들고 나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판매는 손으로 돌리는 일반형 모델이였으며, 배터리가 장착된 고급형 모델은 조금밖에 팔리지 않았다. 당시 혼수로도 많이 각광받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 제품을 계기로 미래음악사는 이러한 전기 제품들의 개발에 신경을 쓰게 되었으며, 1902년 8월 7일 전기 제품들의 보다 전문적인 개발을 위해 미래전기전자를 분사했다. 심복택은 음악만 알던 음악 바보였기 때문에, 또 다른 협력자를 구할 수 밖에 없었고, 지인들 중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은 김병국을 미래전자의 대표, FutureTech Group 제1대 CTO로 임명했다.

미래전자는 제품의 개발과 도매를 하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이 덕분에 미래음악사는 다시 음악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음악사는 신디사이저에 관심을 가져, 신디사이저 본품과 공사비로 큰 금액을 지불하며 녹음실을 한 달 가까이 쓰지 못하는 일까지 감수하며 미래음악사 한성음악녹음실에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한 대 비치했다.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과 달리 처음에는 별 일을 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신디사이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쓰이며 대한제국의 음악 수준을 한 층 높혀 주었다. 이후 미래음악사는 미래음악사 부산음악녹음실을 세우고 최신 모델의 신디사이저를 몇 대 들여 놓았다.

미래연극영화 분사

외화를 수입하고 때로는 연극을 직접 제작하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미래음악사는 외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영화 시장에 관심을 가졌다. 긴 고민 끝에 1907년 미래음악사는 큰 자금을 투입하여 대한제국 한성의 번화가에 영화관 한 곳[2]을 차리고, 당시 외국 연극을 번역하던 부서에 외화의 번역을 맡겼다. 처음에는 영화 필름을 다룰 장비도, 인력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번역한 자료를 외국의 기업에 넘겨서 가공한 뒤 들여오는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상영은 1907년 10월 28일로, 첫 반응은 좋지 못했다.

미래음악사 경영진들은 막대한 자금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수 시간의 대책회의 끝에 일단 반응을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첫 상영을 보고 영화에 대한 소문이 퍼져 영화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미래음악사 경영진들은 안심할 수 있었고, 당초 예정했던 상영 기간을 두배나 늘려 총 1달간 상영해 손익분기점을 배로 넘긴 압도적인 반응을 보였다. 좋은 반응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영화 사업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미래음악사는 2년 후 부산에도 영화관 한 곳[3]을 차렸다. 또한 한성에 영화 필름을 취급하는 시설을 설치해서 외국에 번역 자료를 넘기고 다시 필름을 받아오는 귀찮은 작업 없이 영화를 번역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여 더 많은 시도를 해 볼 여력이 생겼다. 영화 사업의 규모가 꽤 커지자 1917년 1월 1일 미래음악사의 연극영화 부서는 미래연극영화로 분사했다.

미래기술 그룹 결성 (제2기)

미래기술 그룹의 결성

기업이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 이 3개로 나뉘면서 기업 지도부가 셋으로 나뉘게 되자 심복택은 기업 통솔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집안에서 운영하던 화정의류의 경영에까지 관련되게 되어 기업 운영과 작곡을 병행하기엔 너무 바빴다. 또한 세 기업과 화정의류의 담당 분야가 제각각이라 기업 통솔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심복택은 박복자와 김병국, 그리고 미래음악사와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의 고위 인사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 논의는 현재의 그룹최고회의의 시초가 되었다.

대책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복합 기업으로의 전환이였다. 그 결과 1925년 3월 4일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와 화정의류[4] 총 4개 계열사를 산하에 둔 미래기술 그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업의 효과적인 통솔을 위하여 체계적인 지휘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성립한 그룹 체제는 현재까지 조금씩 변화를 겪어오며 존속하여 현재의 퓨처테크 그룹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세대전환 시기

시대에 비해 장수했던 심복택이지만, 80대가 가까워진 심복택은 슬슬 은퇴를 고려할 시기가 되었다. 심복택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아들인 첫째 심상문은 몇년 전 불교에 귀의해 중이 되어, 미래기술 그룹과 같은 속세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딸인 둘째 심상영은 미래연극영화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연극 창작에 몰두해 있어 여러 번 차기 CEO가 될 것을 제안했으나 모두 완강히 거절했다. 딸인 셋째 심상빈은 화정의류에서 의상 디자이너로써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특유의 덜렁대는 성격에 더불어 야망이 없어 또한 차기 CEO가 될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인 막내 심상교는 미래음악사 내에서 앨범과 라디오 방송 등에 올라갈 음악을 편성하는 직책[5]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야망과 리더쉽을 가져 심복택은 일전부터 차기 CEO로써의 자질이 충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내였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는데, 첫째부터 셋째까지 모두 차기 CEO 자리를 포기해 막내에게까지 기회가 오게 되었다. 심상교는 한 달여 간의 고민 끝에 차기 CEO 제안을 수락했다.

심복택은 그룹 지도부에게 심상교를 소개했다. 마침 그룹 지도부들도 심복택이 연로해져 차기 CEO 후보를 찾고 있었던 참이였다. 심상교는 심복택과 미래음악사 지도부들의 지지를 받고 미래음악사 부산지부국 국장으로 취임하여 능력을 시험받게 되었다. 대략 1년여 간의 시험 결과, 그룹 지도부들은 심상교가 기업을 이끌 자질이 있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그러는 사이 그룹 지도부는 또 다른 주자로 김기범, 장영태를 선정했다. 김기범은 미래전자에서 로드맵을 구상하고 그 로드맵에 맞게 기업이 나아가는지 평가하는 직책[6]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역시 유력한 CEO 후보였다. 장영태는 화정의류에서 의상의 최종 점검과 대외 노출의 통제[7]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만만치 않은 후보였다. 이렇게 세 명의 후보가 최종적으로 선발되어, 시험대에 올랐다.

당시 그룹 지도부는 김기범을 지지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김기범으로 차기 CEO를 정하려고 했으나, 반대측에서 다른 주자가 더 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여 CEO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을 함과 동시에 실전 경험을 쌓게 해서 제일 잘 하는 사람을 CEO로 정하기로 했다. 마침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화정의류의 일본지부 대표가 모두 비어 있었기 때문에, 자질을 평가할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1928년 12월 9일 경영진 회의에서 심상교의 미래음악사 일본지부 대표, 김기범의 미래전자 일본지부 대표, 장영태의 화정의류 일본지부 대표 지명안이 가결되었고 셋은 일본으로 출국해 고위직으로의 자질을 시험받게 되었다.

자질 평가

1년간 이 셋은 제각각의 정책 기조를 보였다. 심상교는 미래음악사 출신인 것에 더불어 심복택의 아들이였던 것 때문에 아버지와 비슷하게 유연하고 부드러운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고, 모험적인 사업을 펼쳤다. 이런 정책 때문에 비록 일부 손해도 있었지만 미래음악사 일본지부는 사세를 키워 나갔다. 김기범은 로드맵을 만들고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아 질서정연하고 규범에 일각한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소 사내 분위기가 경직된 감은 있었으나, 질서정연한 사내 분위기 덕분에 미래전자 일본지부는 별 탈 없이 사업을 키워 나갔다. 장영태는 기업 지도부의 힘을 키워 강한 지도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반적으로 김기범과 비슷했지만, 지도부의 힘이 커진 것 때문에 기업이 좀 더 경직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화정의류 일본지부는 그 규모를 유지하였다.

셋이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동안, 그룹 지도부에 소속되어 있던 조사 부서[8]에선 이 세 기업의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조사를 진행하고 세 그룹의 경영, 복지 등 면에서 다양한 통계를 냈다. 1년간 쌓인 통계는 그룹 지도부에게 전달되었다. 그룹 지도부는 수 개월에 거쳐 셋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다. 지도부는 장영태가 자칫 창작이 주된 활동이 되는 미래음악사나 미래연극영화의 사내 분위기를 경직시켜 성과를 저하시킬 수 있다고 판단,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심상교와 김기범에 대한 평가는 대동소이해,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몇 달 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룹 지도부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심복택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며 그룹 지휘가 힘들어지게 되었고, 결국 지도부는 직접 일본지부로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사원들에게서

그룹 지도부는 조사 부서에서 가장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직원들만 골라 청소부로 위장시켜 미래음악사와 미래전자의 일본지부에 투입했다. 청소부로써 부담없이 사원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계획이었다. 대략 한 달 쯤 지나서, 청소부로 외장한 조사 부서의 직원들은 본사로 보고서를 다량 올렸다. 그룹 지도부는 그 보고서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미래전자에 투입된 직원의 보고서에는 사원들의 푸념이 다수 담겨 있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야근을 많이 했다', '몇 주 내내 집에 가면 자고만 있는 식구들 모습을 보니 피폐해진다', '예산이 모자라서 시험적인 시도를 해보기 겁난다'와 같은 반응들을 보고 지도부는 미래전자의 성과가 직원들을 혹사시켜 얻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른 사업부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았던 미래전자의 퇴사율이 이런 원인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지도부는 황급히 일본지부는 물론 전세계 모든 지부의 퇴사율 통계를 가지고 왔다. 그랬더니 정말 미래전자의 퇴사율이 미래음악사의 퇴사율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그룹 지도부는 결국 심상교를 차기 CEO로 낙점하게 되었다. 심상교는 1930년 3월 4일 FutureTech Group 제2대 CEO, 제2대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공식 추대되었다.

세계로의 도약 (제3기)

체계 정비

그룹의 지휘봉을 잡은 심상교는 그룹의 구성을 되돌아 보며 거의 주먹구구식 운영이였다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고민 끝에 현재에도 그 틀이 유지되고 있는 그룹 체계를 구상했다.

먼저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 화정의류를 각각 미래기술그룹 음악사업부, 전기전자사업부, 연극영화사업부, 의복사업부로 개명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라는 명칭을 유지했고 화정의류는 미래의류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게 각 '사업부'들을 구성하고 그 아래에 각각 특정 사업을 담당하는 '국'을 구성, 그 국 아래에 '부', '과', '실' 단위를 두었다[9]. '실' 단위의 부서는 실제로 방 단위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심상교는 회고록에 적었다. 현재도 '실' 단위의 부서는 한 방 단위로 편성되고 있다.

또한 심상교는 각 부서 단위를 묶는 것에 신경을 썼다. 가장 최소의 단위인 '실'의 대표, 즉 실장들이 모여서 과 회의를, 과장이 모여서 부 회의를, 부장이 모여서 국 회의를, 국장이 모여서 사업부 회의를, 사업부장이 모여서 그룹최고회의를 구성했다[10]. 각 부서의 대표들은 회의를 구성하는 대표, 각 부서의 대표자로만 역할해 모든 사원이 수평적 관계가 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는 미래음악사가 수평적 관계를 중요시 한 것에 더불어 아버지가 여러번 자유로운 환경에서 최대의 역량을 이끌 수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산하에 있던 연구소(미래전자 한성연구소 등)들은 '국' 단위로, 그룹의 전반적인 경영을 담당하는 곳은 그룹운영부로 개명하고 '사업부' 단위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구조 개혁을 한 뒤 그 내용을 들고 경영진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영진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통솔 능력이 저하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는게 주요한 내용이였다. 하지만 심상교의 의지는 대단해서, 그들을 계속해서 설득해 보았다. 경영진들도 엄청난 의지에 뭔가 있을거라 생각해 조금 수그려, 세 달 정도 이를 시범 적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시행 결과는 성공적이였다. 미래음악사를 비롯해 모든 사업부에서 좋은 보고들이 올라왔다. 수평적인 관계 덕분에 일명 '갑질'이 줄어들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다는 직원들의 호평이 있었다. 경영진들도 올라간 능률과 수치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범 적용 말기에 이르러선 직원들이 이 제도를 계속해서 적용시켜 달라는 의견을 계속해서 전달했다. 결국 경영진들은 심상교의 그룹 체계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기업 인수

조직 체계 개편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심상교는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음악사업부의 음악 활동과 연동시킬 수 있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음악 방송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사업이나, 음악인과 관련된 기사를 싣을 수 있는 잡지 사업 등이 주로 제안되었다. 심상교 또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잡지 사업은 훗날 출판사업부를 출범시키며 실제로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심상교는 다른 선택을 했다.

심상교의 선택은 중공업으로의 확장이였다.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처음에 극구 반대했다. 현재 사업과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심상교는 음악 관련 사업은 한계가 명백하다며, M&A 시장에 나온 대한제일중공업을 인수해야 미래기술 그룹의 100년이 밝아진다고 설득했다. 심상교는 1930년대 초 대한제일중공업을 인수하고 그룹에 합류시킨 뒤, 철강 제품을 다량 생산하여 미래기술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자고 했다. 또한 음악사업부와 전기전자사업부의 합작으로 차내 편의장치를 만들고 연극영화사업부는 자동차 극장을 만드는 등 기존 사업부들 또한 이 대규모 사업에 동참할 수 있음을 설득했다. 심상교의 설득에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대한제일중공업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1934년 3월 4일, 미래음악사 창사 55주년을 맞이해 미래기술 그룹은 대한제일중공업의 인수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음악 그룹의 중공업 진출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경제 전문가들은 크나큰 실책이라는 평과 와 위대한 선택이라는 엇갈린 평을 내놓았다. 사실 그럴 것이, 대한제일중공업은 엄청난 침체기에 기업 전체가 위축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 당시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미래기술 그룹이었지만 대한제일중공업을 살리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 보였다. 대한제일중공업은 미래중공업, 미래기술그룹 중공업사업부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그룹 지도부는 향후 10년간 사업 확장 없이 중공업사업부의 부흥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내다보았다. 처음 몇 년 간은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그룹의 성장이 지체되어 주주들의 우려를 살 정도로 많은 역량을 집중했지만 중공업사업부는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심상교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갔다. 이대로면 기껏 인수한 미래중공업을 다시 매각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 뿐만 아니라 그룹 경영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극심하게 악화될 것이고, 이대로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주들도 생각은 비슷해서, 1933년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향후 3년 내로 그룹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지 않으면 현 그룹최고회의 의장 심상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상교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심상교는 미래중공업 경영개선 TF를 신설하고, 신뢰하던 동료였던 김의검 등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몇날 며칠간 '너무 바빠서 오랜만에 집에 가려는데 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잠시 기억나지 않았을 정도'[11]로 열심히 대책을 연구했다. 대략 1달간의 TF 활동 끝에 이들은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낸다. 보고서의 결론은 미래중공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외로 적극적으로 진출해 수주량을 늘리고 거기서 경험을 얻어 기술을 진보, 진보된 기술로 해외 고객들의 더 많은 수주를 받는 선순환 구조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룹최고회의 임원들도 보고서의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과연 3년 내에 이것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다. 그룹의 역량을 대거 투여했는데도 겨우 침체기를 막아선 수준이었는데, 과연 반등시킬 수 있는지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심상교는 이판사판으로 해보자는 심정으로 미래중공업에 총력 투자와 더불어 해외 진출의 확대를 주문했다.

하지만 총력적인 투자와 적극적인 해외 진출에도 불구하고 미래중공업의 실적은 그닥 개선되지 못했다. 심상교는 비용의 증가로 인한 현상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심상교는 그룹최고회의의 신임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1935년 주주총회에서도 이 사실을 지적하며 그룹 정상화 제한기간을 언급하며 이 기간을 넘길 경우 언제나 심상교를 신임 철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상교의 걱정은 극에 달해 모든 것을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룹최고회의 임원들과 주주들을 원망하기도, 또 다른 날에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심상교는 1주일 휴가를 내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갔다. 금강산 경치를 바라보며 심상교는 다양한 생각을 했다. '내가 없으면 미래기술 그룹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래중공업을 인수하지 말고 미래출판을 설립했으면 더 나았을까?'라고 여러번 고민했다. 경제 전문가들의 애송이 취급도 덤이었다.

심상교는 금강산을 내려오며 어차피 이미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심 가득한 걱정으로 금강산을 내려오는데 같이 동행한 김의검이 녹초가 된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김의검의 손에는 전보가 들려 있었는데, 전보는 대형 계약이 추진되어 결재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복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심상교는 크게 놀란 심정으로 며칠 빠르게 복귀했다. 계약은 큰 규모로, 미래중공업이 몇 개월 동안 특근을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분량이었다. 심상교는 대호황을 예견하고 곧바로 계약에 도장을 찍었다. 심상교의 예상대로, 미래중공업은 창사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이했다. 이 때가 1936년 주주총회 6개월 전이었다.

대망의 1936년 주주총회, 주주들은 갑자기 개선된 실적에 분식회계를 의심했다. 그러나 심상교는 이것이 분식회계가 아니고, 초대형 계약 수주로 인한 수익이라고 해명했다. 몇시간 동안의 설왕설래 끝에, 주주들은 심상교의 의지와 노력을 인정하고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속 신임하게 되었다. 심상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큰 자신감을 얻고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미래중공업이 새로운 그룹 먹거리가 된 이후로,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은 안심하고 그룹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심상교는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의 의견에 따라 1939년 1월 30일, 미래출판사를 창립했다. 미래출판사는 음악 잡지 등을 발간하며 차근차근히 세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그룹이 구성되기 이전에도 미래음악사와 관련 기업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적국인 대한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별로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전시 체제를 겪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주요 수요국들이 전쟁 상태에 들어가 불황이 발생했고, 가끔씩 프로파간다를 만들었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사는 거의 모든 곳에서 전쟁이 발발해 미래기술 그룹도 전시 체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전시 체제 아래서, 미래중공업이 그룹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래중공업은 대한제국의 명령에 맞추어 중공업 설비를 이용해 군수물자 등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미래중공업의 자동차 산업 진출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기술들과 노하우들을 습득하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룹 전체에 경직된 분위기를 불러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진 개방적인 분위기로 유명해 몇몇 언론사에서 취재까지 올 정도였으나, 이후부턴 여타 다른 기업들과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다른 기업들에 비해 개방적인 분위기를 차별점으로 내세우던 미래기술 그룹에게 이는 악재였다.

그룹에 미친 영향 중에는 대표적으로 심상교가 구성한 조직안에서 각 사업부장, 국장, 부장, 과장, 실장은 단순 각 단위의 대표로서 자기 자신부터 어제 들어온 신입 사원까지 모두 수평적 관계에 있었는데[12], 세계대전 이후 수직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혁신적 조직안의 효과가 약화되었다. 또한 사내 사원들의 단합과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위해 매년 주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사내 단합대회, 발명발견대회나 미래가요제와 같은 행사들이 축소되거나 폐지되기도 했다. 사업을 이끌어주던 큰 동력원중 하나가 약해지자 자연스레 그룹의 성장 동력도 약화되었다. 훗날 이 문제는 그룹을 최악의 위기속에 몰아넣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미래기술 그룹도 평시 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미래음악사가 다시 그룹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미래중공업은 유휴 장비들로 골치를 썩히게 된다. 이 장비들을 그저 놀릴 수만 없었던 미래중공업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보았다. 주방기기 제작, 드럼통 제작이나 공업 장비 제작 등 다양한 사업을 실행해 보았지만 적자만 면하는 수준의 결과를 얻었다. 고심 끝에 미래중공업은 그룹최고회의에 보고서를 하나 올린다. 보고서의 결론은 바로 우리도 자동차 하나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엉뚱한 보고서

그룹최고회의에 올라온 미래중공업의 보고서를 본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은 이번에도 의문을 표했다. 미래중공업이 그룹에 합류할 때부터 독특한 발상으로 여기까지 왔다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강철을 제련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의문점을 자아내는 보고서에 결국 그룹최고회의는 미래중공업 사업부장 김억일을 다가오는 그룹최고회의 정기회에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룹최고회의에서 공문이 내려오자 중공업사업부 미래전략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긴장했다. 이 문제의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 사업으로 인해 철강 사업은 활기를 띄었다. 그러나 전시물자를 생산하던 공장은 할 일이 없어 매일매일 놀고만 있었다. 실제로 영업이익은 평년 이상의 실적을 올렸으나 애물단지가 된 군수물자 공장 때문에 순수익은 처참했다. 이 모습을 지켜볼수만 없었던 중공업사업부 국장들은 미래전략실과 함께 길고 긴 논의에 들어갔다. 이런 논의의 결과물로 처음 만들게 된 것이 주방기기 제작이었다. 공작기계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주방기기를 제작하여 OEM 내지 ODM으로 공급했는데, 생산품은 나쁘지 않았으나 순이익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방기기 생산은 대략 3달 가량 하다가 그만두었다. 중공업사업부 전시방위사업국 직원들은 공작기계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가며 드럼통 제작에 온갖 공업 장비들을 제작해 보았으나 역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에 빠진 전시방위사업국장은 늦은 밤 쓸쓸히 공장에 전등 몇 개만 켜 둔 체 공장을 걸어다니며 고민에 빠졌다. 이 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철거하고 손실 처리하는 것이 맞을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공장을 하염 없이 돌아다니고, 먼지만 쌓여 있는 기계 몇 몇들을 살펴보고, 그러면서 고민하던 도중 국장은 공장 창고에 남아 있던 몇몇 재고 부품들을 발견했다. 창고에 남아 있던 탱크의 엔진 블럭, 크랭크축, 피스톤 몇 개, 캠축, 변속기 기어 등을 살펴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긴 국장은 일단 부품을 자신의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사무실에 놓여진 부품들을 살펴 보다가 사무실 한켠의 간이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

그러나 불안감에 국장은 풋잠을 잤고, 이른 아침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국장은 창문을 열고 스트레칭을 하며 잠을 쫓았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탱크 엔진 부품을 보고 고민하다가 공장 입구로 내려왔다. 공장 입구에서 진입로를 쳐다 보던 국장은 멀리서 들어오던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전시방위사업국 제1생산공장(부 급) 부장임을 직감한 그는 들어오는 차를 맞이하며 잠시 자신의 사무실로 올 것을 요청했다. 부장은 국장의 사무실에 놓여 있는 탱크 엔진 부품들을 보면서 국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장은 부품의 높은 완성도에 감탄하면서 우리 공장의 생산 기술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부장 또한 동의하면서, 생산공장의 사원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것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 외에 이런 부품도 생산했는지 놀라는 국장과 설명해주는 부장의 답이 오가고 있었다. 그렇게 낮이 밝았고 사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국장과 부장이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국장의 사무실을 지나가던 한 신입 사원이 사무실 안에 있던 부품들을 보더니 흥미로움을 보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갑작스런 방문에 국장과 부장은 약간 놀란 기색이였으나 누구인지 알아챈 둘은 곧바로 안심했다. 들어온 신입사원의 정체는 훗날 초대 자동차사업부 사업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박동주였다. 신입사원은 사무실 안에 널려 있는 탱크 엔진 부품들에 큰 관심을 보이며 국장과 부장에게 연거푸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것은 어떤 부품인지,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했고 생산 공정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국장과 부장은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있단 것에 대해 크게 놀라며 오늘 일과를 생략하고 여기서 대화를 나누자고 요청했다. 국장과 부장, 신입사원과의 대화는 몇 시간을 넘게 이어졌는데, 오랜 대화 도중 신입사원이 탱크에 들어가는 엔진이나 자동차에 들어가는 엔진이나 어차피 내연기관인 것은 똑같으니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어떤가 제안했다. 국장과 부장은 처음엔 긴가민가 했으나 곧 신입사원의 설득에 납득하고 자동차 설계 TF를 꾸렸다. 신입사원은 이윽고 중공업사업부 사업부장까지 설득시키며 결국 미래전략실 사원들과 함께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렇게 생겨난 자동차 설계 TF가 올린 것이 바로 자동차를 만들자는 중공업사업부의 보고서였던 것이다.

자동차를 만든다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에게 호출받은 중공업사업부장 김억일은 자동차 제작 TF장 박동주 등 몇 명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 혹시나 생길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은 제철과 자동차 제작은 차원이 다른 난이도라며 회의감을 강하게 드러냈고,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세세하게 질문했다. 아침 7시에 시작한 회의는 5시간 동안 쉬는시간 없이 진행되었고, 12시가 되자 회의에 참가한 모두의 동의 하에 2시간 동안 점심시간 및 쉬는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자동차 제작 TF 구성원들은 사옥 근처의 삼계탕집에서 삼계탕을 먹으며 점심시간 겸 작전회의 시간을 가졌다. 박동주는 삼계탕을 뜯지도 못하며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의 압박에 겁을 먹고 김억일에게 차라리 포기하는 것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김억일은 진짜 가망이 없는 보고서라면 그냥 무시당했을 것이라며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삼계탕의 닭다리 하나를 박동주의 삼계탕 뚝배기 위에 올려주며 많이 먹으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시간은 오후 2시, 그룹최고회의 회의실에 다시 모인 그룹최고회의 임원들은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몇 분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룹최고회의 의장 심상교가 말문을 꺼냈다. 심상교는 보고서의 비전은 뚜렷한 것 같으니 정확히 어떤 자동차를 만들지 보고서를 써서 올릴 것을 지시했다. 심상교는 또한 이 과정에서 필요한 예산은 중공업사업부 및 그룹 잉여 예산이 닿는 한도 내에서는 충분히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박동주는 감격하여 벌떡 일어서서 감사하다고 연거푸 인사를 했다. 심상교는 박동주의 의지에 감탄하며 만약 자동차 사업이 잘 풀리면 중공업사업부에서 자동차사업부를 분리하고 초대 자동차사업부장으로 앉힐 것을 약속했다. 박동주의 설득은 마침내 그룹최고회의마저 정복했고 이제 그들의 목표, 자동차 제작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동차 제작 TF의 구성원들은 우선 그룹 내, 또는 전국 각지의 차량들을 비용을 주고 임대하여 관찰, 주행, 분해 및 조립 등의 방법을 통해 자동차의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 파악했다. 이 때 참고한 차량들로는 알파 로메오의 6C 2500 투리스모 모델과 뷰익 로드마스터 4세대 세단 모델, 애스턴 마틴 DB1 정도가 알려진다.[13] TF 구성원들은 "참 특이한 차들만 모아 놨네."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7년 중순 즈음에 시작된 '자동차 공부'는 해를 넘겨 1948년 연말에 끝나게 된다.

'자동차 공부'가 끝나고 이들은 1949년부터 자동차의 세부적인 설계에 들어갔다. TF는 여러 논의를 통해 그랜드 투어러 모델을 하나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룹최고회의에 이러한 내용들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룹최고회의는 자동차 제작을 진행하되 어느 정도 진척이 이뤄진다면 2차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은 국내외 자동차 관련 학자들을 모아 자동차의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간다. 이 시점에서 미래중공업이 자동차를 만든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동차 관련 기자들이 미래중공업에 내방하여 인터뷰를 요청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룹최고회의는 이 상황을 인지하였고, TF장 박동주를 불러 가용 가능한 예산을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자동차를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박동주는 더욱 많은 것을 해볼 수 있게 되어 기뻤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부담감에 밤잠을 종종 설치게 되었다.

전시방위사업국은 곧바로 자동차사업국으로 개편되었고, 제1생산공장에선 엔진 생산을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자동차사업국장으로 취임한 박동주는 모든 연구원들에게 '예산 무제한, 시간 무제한'을 선언하고 엔진부는 시속 2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휘발유 엔진을, 차체부는 축간거리 3m 이상의 안락한 차체를, 현가장치부는 현가장치에 대해 다양하게 실험해서 편안한 승차감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또 박동주는 음악사업부와 전기전자사업부에 차내 편의장치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다.

출시까지의 우여곡절

그러나 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무엇보다 기술력이라곤 다른 자동차를 관찰하여 얻은 지식이나 새로 온 자동차공학자들의 자동차 관련 이론 뿐이였기 때문에 이들은 몸소 부딛혀가며 학습해야만 했다.

1952년, 탱크 엔진의 생산으로 어느 정도 노하우가 있던 엔진부가 엔진의 개발을 먼저 끝냈다. 이들은 개발한 엔진은 6L의 V8 직동식 OHC 유연휘발유 엔진으로 1300~2300rpm대에서 405Nm의 토크를 냈으며 3600rpm에서 약 186hp을 냈다[14]. 박동주는 이 정도면 충분히 된 것 같다며 차체 개발팀에서 엔진을 얹어 볼만한 차체를 만들기 전까지 엔진의 회전질감이나 내구성 등을 보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엔진 개발팀은 실험실 환경에서 해 볼만한 연구는 거의 끝냈다며 차라리 다른 회사 차량을 개조해서 실차 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박동주는 이 엔진이 올라갈 만한 차량을 수배해 보겠다며 할 일이 없다면 차체부에 가서 연구를 보조할 것을 지시했다. 차체부의 차체 개발이 난항을 겪으면서 이대로 가다간 다른 부문의 개발 또한 크게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체부의 사정은 좋지 못했다. 자동차공학자들 중 차체를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없기도 했고, 빌려온 차인 만큼 자동차의 차체를 분해하거나 절단할 수 없어 내부 구조에 대해서 많이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엔진 개발부, 현가장치 개발부가 차체 장착 직전까지 설계를 끝내 놓고 차체부에 합류하여 연구를 보조했으나 진척이 없었다. 결국 박동주는 차량을 직접 구매하여 분해, 절단을 통해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 파악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일단 사내 다른 사업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사용처가 없던 중고차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는데, 마침 의복사업부 일본지사에서 화보 촬영 목적으로 차량을 2대 구입했는데 더 이상 쓸 목적이 없다고 연락해 왔다. 박동주와 그 일행은 직접 일본지사로 출장을 나가 차종이 무엇인지 확인하러 갔는데, 기막히게도 알파 로메오의 6C 2500이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구했냐고 하니까 이국적인 화보를 찍기 위해 이국적인 차를 구입했다고 했다. 박동주와 그 일행은 해당 차량을 배에 싣고 본사로 복귀했다. 자동차사업국의 모든 사람들은 박동주가 가지고 온 차량의 정체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차가, 이제 완전한 우리 소유로 다시 들어오다니! 자동차사업국은 한 대는 엔진을 싣고 실차 테스트를, 한 대는 분해하여 차체 연구에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엔진부는 곧바로 차량 개조에 들어갔다. 기존 엔진을 완전히 내린 다음, 엔진부가 개발한 엔진과 변속기를 얹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원래 엔진은 2.4L짜리 DOHC 직렬 6기통 엔진이였고, 얹으려는 엔진은 6L라는 대배기량의 직동식 OHC V형 8기통 엔진이였으니 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엔진부는 몇날 며칠 고생한 끝에 차체를 절단하는 등의 개조를 거쳐 간신히 엔진과 변속기를 얹는데 성공했다. 엔진부는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 이 차량을 가지고 한적한 지방도를 수없이 달리며 엔진을 개선했다. 한편 차체부는 절단기를 가지고 와서 대망의 차량 분해 작업에 들어갔다. 꼬박 한나절이 걸린 차량 분해가 완전히 끝이 나고 차체부는 1달 가량 기존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주력했다. 차체 분해 학습 이후 차량 개발은 순풍을 타게 되었고 1953년 연말 즈음에 개발이 어느 정도 끝나 그럴 듯한 차량이 완성되게 되었다.

마침내 시장으로

음악사업부가 카오디오 및 라디오를 완성하여 차량에 탑재한 것을 끝으로 차량 개발은 잠정적으로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차량을 출시하기에는 아직 완성도가 부족했다. 변속기의 감속비 설정이 아직 어색했고, 차체가 대폭 수정되어 현가장치 설계도 크게 변경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시험 주행을 계속했는데, 이 과정에서 언론들이 슬슬 차량에 대해서 인지하고 스파이샷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룹최고회의에서도 이 사항에 대해 인지하였고, 그룹최고회의는 박동주를 불러 차량 개발 과정에서 보안 유지에 단단히 신경쓸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박동주는 발상의 전환으로 차량의 정보를 고의로 노출하여 반응을 떠 볼 것을 제안했다. 그룹최고회의 의장 심상교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으나 탱크 엔진에서 차를 만들어 버린 박동주를 믿고 한 번 도전해 볼 것을 제안했다. 박동주는 이 계획에 대해 자동차사업국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상세한 실행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바로 그룹 사옥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반응을 지켜보자는 것. 물론 그룹 휘장은 제거하였고 번호판이 없었으므로 번호판이 붙을 자리는 쓰레기통이나 안내판 등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려 놓기로 했다. 계획을 세운 일주일 후, 차량을 예정된 위치에 견인해 놓고 1주일 동안 모두 휴가를 갔다.

휴가가 끝나고 박동주는 탄성을 질렀다. 예상대로 대한제국 내 수많은 언론사들이 신차에 대해 대서특필한 것이었다. 언론사들은 이 차량을 기획 의도대로 '그랜드 투어러'로 분류했다. 다만 미래기술 그룹이 음악 좀 다루는 신생기업으로 평가받는 만큼 그랜드 투어러로서의 품격을 지닐 수 있을지 회의를 가지는 시선이 많았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차량 밑으로 기어들어가 엔진 형식 등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내부 디자인은 호평을 받았다. 특히 가죽 마감은 의복사업부와의 협력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외부 디자인은 애매한 평가를 받았다. 디자인은 이상하지 않은데 특출나지도 않다는 평. 박동주는 차체부에게 인테리어부와 협력해서 디자인을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엔진부와 현가장치부는 그랜드 투어러라는 기대에 걸맞는 세팅을 찾을 것을 지시받았다. 수 개월 간의 마무리 끝에 1954년 5월 말, 신차를 발매할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미래기술 그룹은 자동차 부문으로 전혀 유통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년을 갈지 모를 그랜드 투어러를 위해서 전 세계에 유통망을 깔 순 없는 노릇. 박동주는 심상교에게 어떻게 할지 질문했다. 그러자 심상교는 이제 자동차 개발팀이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 판매는 우리에게 맡기라며 안심시켰다. 박동주는 혹시 모를 결함에 대비하여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다. 심상교는 마케팅 전략에 고민하다가 문득 아버지 심복택이 미래음악사의 태동기에 썼던 전략, 바로 '인맥'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세계에서 나름 유명한 사람이기에, 지인들에게 차량을 홍보하며 이름을 알려 보겠다는 것. 차량을 공식 발매하고 1년간 심상교는 직접 발로 뛰어가며 차량을 홍보했고 그 결과 1954년 연말까지 121대를 판매하는 실적을 올린다. 슬슬 차량은 입소문을 타 해외에 수출하는 상황이 되었고 심상교는 이 시점을 계기로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팽창적 고급화 전략 (제4기)

전략의 시작

그랜드 투어러 차량은 고급와 사치의 극을 달리는 차급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미래기술 그룹의 '음악 하다가 다른 것도 하기 시작한 그저 그런 신생기업' 이미지로는 홍보가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심상교는 고민 끝에, 그룹을 통채로 고급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기존의 투박한 감성에서 벗어나 치밀하고 깔끔하며 체계적인 그룹으로 환골탈태해 세계 시장에 어필하자는 것이었다. 1955년 주주총회에서 소개된 이 전략은 주주들의 환영을 받았다. 주주들의 지지를 얻은 심상교는 이른바 '팽창적 고급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의복사업부, 음악사업부, 연극영화사업부는 이미 사람들에게 고급 브랜드로 인식되어 왔고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던만큼 그룹은 이 세 사업부에 대해 현상 유지를 주문했다. 전기전자사업부는 생산 품목들의 고급화, QA와 AS의 총체적 개선을 주문했으며 세계 공급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공업사업부는 자동차사업부를 간판으로 내세워 자동차사업부와 다른 사업부들을 보조하는 전략을 취했다. 중공업사업부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자동차 말고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동차사업부는 그랜드 투어러를 주로 생산하며, 스포츠카나 고급 세단을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 이러한 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미래기술 그룹이라고 하면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으며, 모두가 한번 사용해 보고 싶은 브랜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룹의 팽창 정책은 확실히 그룹의 세를 키우고 영업 실적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룹 지도부는 성장하는 기업과 개선되는 실적에 매번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룹최고회의는 1966년 주주총회에서 이러한 실적을 발표하며 주주들을 만족시켰고, 주주들은 팽창 정책의 확대를 주문했다. 그룹은 1967년 식품사업부, 1972년 11월 21일 생활유통사업부를 창립하는 등 주주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또한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져 F1, WEC, WRC 등에 참여하여 자동차 기술의 획득과 자동차의 홍보를 목표로 하기도 했으며, 각종 기타 스포츠, 특히 바둑과 장기에 많은 투자를 하여 고급적인 분위기의 그룹을 홍보하고자 노력했다.

떠오르는 위기의 그림자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한편으로 위기의 그림자를 그룹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우선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는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기 시작하며 기껏 쌓아놓은 프리미엄 브랜드로의 위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또한 심상교는 그룹의 운영 다수를 각 사업부장 등에게 위임했는데, 심상교가 너무 자유방임주의로 그룹을 운영한 나머지 졸속처리, 날림개발, 원가절감 등을 통해 겉으로만 보이는 실적에 매달려 내실을 갉아먹고 있던 것이다. 또한 직원 복지는 실적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축소되며 직원들은 하나둘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주주들도 파악하여 1975년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우려를 표하기에 이르렀다. 심상교는 내실 굳히기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결국 실적이 개선되지 않자 1980년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심상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사람인 중공업사업부 출신 김덕배를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김덕배는 그룹 전체가 비효율적이라 평가하였고, 그 이유를 강력한 리더의 부재로 꼽았다. 이는 리더가 단순히 대표자일 뿐이었던 심상교 체제의 개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덕배 체제 하에서 사업부장/국장/부장/과장/실장은 수직적 관계를 조성하였다. 또 각 사업부에 자신의 사람을 직접 꽂아 넣으며 그룹의 지도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해가 갈수록 실적은 개선되었다. 비록 직원 복지는 우려스러운 수준이라는 보좌관들의 조언에 따라 개선되었으나 직원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 무렵 생겨난 사내 무기명 SNS 'Unallocated Space'에는 그룹 지도부를 비판하는 글이 다수 올라오기도 했다. 이렇게 미래기술 그룹은 위태위태하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곳곳에서 올라오는 '초심을 잃었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미래 없는 미래기술 그룹, 기술 그룹인가?' 등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덕배는 강력한 권력으로 그룹을 이끌어 나갔다.

이 무렵 음악사업부 음반제작국장, 심상교의 아들이기도 하자 훗날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오르게 되는 심주섭은 훗날 발표한 회고록에 이렇게 서술했다.

뭔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외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괜찮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 구조는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10년 안에 그룹이 망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룹 핵심 인력들의 절반이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 몇몇은 스타트업에 이직했으나 그 중 대부분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타 기업에 이직했다. 아는 지인을 통해 자동차 개발 프로젝트를 살짝 보았는데 퓨처테크 자동차사업부의 절정인 그랜드 투어러 모델 중에서도 최고 지위의 SkyThorugh마저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 말로는 솔직히 로터스같은 곳에 설계 외주라도 줘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15]
심상교, 자서전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 성장부터 부도까지'에서

김덕배의 리더쉽은 오래 가지 못했다. 90년대 초반에 이르자 김덕배의 리더십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그룹최고회의와 주주들 사이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덕배의 오점들이 하나 둘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경정유착, 경언유착을 했다는 의혹이나 허위 사양을 기재했다는 의혹, 심지어 그룹최고회의의 여성 의원들과 밀회를 즐겼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덕배는 이러한 의혹들에 대해 부인하며 법적인 대응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들은 김덕배의 리더쉽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심복택 계열, 음악사업부 계열의 사람을 원하기 시작했다.[16] 위기감을 느낀 김덕배는 그룹을 강하게 이끌어 보려고 시도했다. 1989년 의학사업부(구 한국의학공학 합병) 창설, 1993년 3월 4일 게임사업부(구 플라워게임즈 합병) 창설, 1995년 6월 23일 네트워크사업부 분리 등 사세를 확장시키며 공격적인 전략을 내세웠다. 실적은 제자리걸음이었으나 김덕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룹이 안정화되면 실적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덕배의 설득은 먹혀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한편 그룹최고회의 의장에서 물러난 심상교는 낙향하여 휴식기를 가졌다. 처음에는 나를 버린 주주들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난을 기르고 수필도 쓰고 시도 쓰면서[17] 마음을 다잡았다. 심주섭은 심상교와 함께하며 함께 난을 기르고 글과 그림을 창작하며 주말을 보냈고, 이 과정에서 심상교의 리더쉽과 개방적인 이념 등을 배우게 되었다. 심주섭은 음악사업부 사업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고, 그룹최고회의의 동향을 심상교에게 보고서로 작성하여 보고하기도 했다.

심상교는 심주섭과 대화를 나누며 그룹의 동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심상교는 시간이 갈수록 그룹의 위기감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심상교는 심주섭과 함께 그룹의 위기를 경고하는 보고서의 작성에 들어갔다. 심주섭을 따르는 인물들이 뜻에 동참하였는데, 사업부장부터 평사원까지 그 직책도 다양했다. 이들은 2년간에 걸쳐서 A4 용지 198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익명으로 그룹최고회의에 올렸다. 많은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이 동요했으나 김덕배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보고서를 계기로 마침내 김덕배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고 대다수의 그룹최고회의 의원들과 주주들은 건수만 잡하면 김덕배의 지지 철회를 의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건수'는 너무나도 큰 규모로 다가오고 말았다.

퍼펙트 스톰

1990년대부터 미래기술 그룹은 내딛는 걸음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2년 발매한 자동차사업부가 출시한 Sky 시리즈[18] 등 대부분의 라인업의 전반적인 페이스리프트 제품들의 흥행 참패, 음악사업부의 아이돌 프로젝트의 실패, 의학사업부의 연이은 신약 개발 실패, 게임사업부의 게임 흥행 실패 등 주력 사업부들이 모조리 연패를 겪으며 그룹의 재정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김덕배 또한 위기를 느꼈는지 새로운 활로를 계속해서 물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IT버블에 편승하는 것이 그룹을 살릴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김덕배는 이 결론에 기반해 다양한 신IT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현재는 MuCA로 이어진 음악 스트리밍 프로젝트, OrbitNet으로 이어진 위성인터넷 프로젝트, 그리고 YourMind로 이어진 SNS 프로젝트가 있었다.

신IT 프로젝트는 5년 이상의 중장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김덕배는 안심할 수 없었다. 김덕배는 고민 끝에 비인기 제품이나 서비스를 쳐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서 그룹의 재정 상황은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으나 주식시장에는 그룹이 또다시 비용 절감에 들어갔다며, 아직도 비용을 절감할 구석이 많이 남아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주식은 소폭 하락하는데 그치며 성공적인 방어로 보였으나, 김덕배는 더 이상 비용을 절감할 구석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직원 복지는 최소한의 수준이었으며, 생산 비용 또한 최대한의 원가 절감을 실현했고, 경쟁적 입찰을 통해 원자재나 부품 비용 또한 최대한으로 절감했다. 최대한의 이윤을 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으나 대외적으로 악화되는 이미지와 부실해진 내실로 인하여 실적은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1990년 초 일본의 버블이 무너지고 미국이 금리를 올리며, 주요한 수출원이 피해를 볼 뿐만 아니라 부채가 회수되기 시작하며 그룹의 재정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대한제국 내의 다양한 종합금융사에게 다양한 자본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며 근근히 현재 상황을 유지하던 그룹은 당장 내일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김덕배 또한 이 상황에 초조해 하며 신IT 프로젝트의 완수와 성공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프로젝트마저 실패한다면 더 이상 자신을 비호할 세력이 남아 있지 않을 상황이었다.[19] 그렇게 1997년 새해는 다가왔다.

1997년 초 대한제국 내 한 철강 기업이 수 조 규모의 부도를 일으키며 대한제국의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5조원 어치의 채권이 한순간에 증발하자, 금융권에서 심각한 자금 경색이 발생하였다. 금융권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기업들에게서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채권 회수의 흐름은 미래기술 그룹에게도 찾아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비 자금을 활용해 채권을 정리했으나 예비 자금이 동이 나자 이른바 '돌려막기'에 들어갔고. 이는 그룹의 신용을 크게 저하시켰다. 신용등급이 갈수록 하향 조절되자, 결국 이러한 돌려막기도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7년 중순에 이르자 더 이상 채권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김덕배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자금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의 입지는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결국 김덕배는 1997년 8월 13일 미래기술 그룹을 1차 부도 처리하게 되었다. 제계에서는 이를 '퍼펙트 스톰'이라고 평가했다.

1차 부도에 몰리다

1차 부도 처리가 된 후 김덕배는 체면을 구겨가며 간절히 설득하여 일본의 소원금융그룹[20]에서 긴급히 자금을 빌려와 최종 부도는 면했으나, 이미 주주들과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지지를 완전히 철회하여 1달 후 개최된 주주총회에서 김덕배의 지지 철회를 의결하게 된다. 이로서 김덕배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심주섭이 그 뒤를 이어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소원금융그룹[21]과 채권단은 심주섭에게 그룹의 총체적인 개편을 요구하였고, 심주섭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명령에 거역한다면 남아 있는 채권들로 인해 정말로 최종 부도가 날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심주섭은 그룹 정상화 기밀 TF를 구성하고 그룹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다. TF는 일단 심상교 체제로의 복귀, 직원 복지 확대 등 추락한 직원들의 사기를 돌려 놓아야 하며, 대거 유출된 기술진들을 어떻게든 역 스카우트 해와서라도 분위기를 과거의 미래기술 그룹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TF는 이런 조치를 통해 직원들의 능률을 고양하고 창의력을 개화시켜 궁극적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을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또한 당장의 위기는 면했으나 김덕배가 최후의 발악으로 덕지덕지 발라 놓은 막대한 양의 부채가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TF는 이러한 부채로 인해 발생하는 이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부채 상환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국 자금을 확보할 수단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채권단 또한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채권단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한 경영의 불안정을 지적하면서 사업의 정리를 요구하였고, TF 또한 이 점에 대해 파악했다. 이들은 결국 몇몇 사업을 정리하고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정리 대상으로는 김덕배 체제 하에서 무더기 확장된 사업부들(의학, 식품, 생활유통, 운송사업부)이 지목되었으나 이것들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TF는 다른 사업부들의 부실하거나 침체된 사업들 또한 리스트에 올리는데, 대표적으로 중공업사업부의 열차 사업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고, TF는 고심에 빠졌다. 재개편이 지지부진 해지자 채권단은 IT산업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김덕배의 아이디어만은 인정하면서, 신IT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그룹을 개편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 안에 의해 채권단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벌려진 사업들의 정리에 더불어 결론적으로 의복사업부나 음악사업부 중 한 개를 매각할 것을 요구했다.

TF는 채권단의 요구사항에 고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의복사업부와 음악사업부는 모두 그룹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비중도 컸었기 때문이다. TF는 채권단에게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채권단은 신IT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재기하려고 한다면 두 사업부들 중 하나를 반드시 매각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안을 들고 오거나 그룹을 청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강하게 맞섰다. 현재로써는 마땅히 다른 방책이 없었으므로, TF는 채권단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TF는 두 사업부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매각할 사업부를 결정하는데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 시점을 계기로 그룹 정상화 TF는 사업 정리 TF와 그룹 개편 TF로 나뉘게 되었다.

그룹 개편 TF

그룹 개편 TF는 심주섭의 지위 하에 그룹의 전반적인 개편에 집중했다. 우선 조직 체계는 심상교의 조직안에 기반하되, 과와 실 단위 사이에 팀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신설하여 사업부-국-부-과-팀-실로 만들었다. 또 김덕배 체제 하의 수직적 체계에서 심상교 체제 하의 수평적 체계로 회귀했으며, 직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행사들을 다수 부활시켰다. 가장 중요한 개선은 기존의 보고서 시스템을 발표 시스템으로 바꾼 것이다. 기존의 보고서 시스템은 상호작용 없는 일방적인 보고였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사항에 대응하기 어려운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보고서 대신 직접 발표하며 상호작용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다만,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보고서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김덕배 시기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던 각종 사내 공모전들을 부활시켰다. 또 기존 비공식화 했던 사내 동호회를 다시 공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지원하고 관리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사내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TF는 이 정책들이 사내 복지 개선과 사기 증진 정도의 효과를 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과의 향상과 실적의 개선이라는 예상치 못한 이득을 또한 보게 되었다. 훗날 심주섭은 자서전에서 '사내 발명 대회, 코딩 대회 등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며, 사내 동호회에서 자사의 제품을 사용하거나 외부 동호회와 교류하면서 상품 개선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아무튼 그룹 개편 TF는 다양한 정책을 구상하며 그룹의 내적 개선에 집중했다.

사업 정리 TF

심주섭이 그룹 개편 TF에 합류하며 사업 정리 TF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지휘봉을 잡을 사람에 대해 며칠 간 다양한 의견이 오갔는데, 그 중에는 심주섭이 자신의 인물을 등용해 김덕배의 잔재를 청산하고 복수극을 벌일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고, 제3의 인물을 등용하여 공정하게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심주섭은 그룹 개편 TF장에 오히려 김덕배의 최측근이었던 강창호를 임명하였다. 채권단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나, 강창호는 의문을 표하는 채권단과 직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연설을 하여 논란을 일격에 종식시켰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전 그룹최고회의 의장 김덕배의 오른팔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김덕배의 흔적을 지운다는 그룹 정리 TF의 그것도 일개 구성원이 아닌 대표로 부임한다니 의심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김덕배의 주변인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부임, 그것도 자원을 하여 심주섭의 승인을 받아 여기에 오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기 김덕배의 리더쉽은 막강했습니다. 그룹은 확실히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죠. 김덕배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을 때 즈음에 그룹최고회의에 합류한 저로선 김덕배를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김덕배의 추악한 민낯을 하나 둘 알게 되었습니다. 김덕배 말기 제기된 다양한 의혹들, 사실이 아닌 것도 일부 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사실입니다.[22] 90년대 중반즘 되었을 때에는 이미 김덕배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의 위치나 김덕배의 권력으로 인해 쉽사리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상교 계열이 만든 198장짜리 보고서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24명의 작성자 외에도 대략 수십 명의 작성자가 숨어 있는데, 저 또한 비록 이름은 없지만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부문에서 김덕배 체제의 문제점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덕배 체제의 속사정을 아는 저로써, 누구보다 미래기술 그룹을 사랑했기에 김덕배에 충성했던 저지만 지금은 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자리 다시 한 번 열과 성을 다해 과오를 만회하여 진정한 미래기술 그룹을 만들겠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창호, 사업 정리 TF장에 부임하며

김덕배의 최측근마저 김덕배를 배반함으로 김덕배 체제는 일말의 재기의 가능성마저 남지 않고 완전히 분쇄되었다. 이 외에도 그룹 정리 TF에 있던 김덕배 계열의 인물들이 연이어 결별을 선언하면서 마침내 그룹 정리 TF는 김덕배의 영향력에 구속받지 않고 사업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채권단이 일전에 언급한 의학, 식품, 운송, 생활유통사업부는 1순위로 정리하기로 이미 의견이 맞춰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래기술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많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TF는 여기에 중공업사업부 철도사업국 등의 정리도 추가하였으나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TF는 채권단이 요구했던 의복사업부 또는 음악사업부의 매각을 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룹의 중추 역할을 하던 두 사업부의 매각에 대해 TF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운명의 날

사업 정리 TF는 매일같이 의복사업부와 음악사업부의 사업부장을 호출하여 두 사업부의 청산을 논의하였다. 의복사업부는 음악사업부보다 영업이익 및 순이익 면에서 앞서고, 음악사업부보다 인지도 면에서 앞서 그룹의 새출발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을 제시하며 음악사업부의 매각을 지지하였다. 또한 의복사업부는 음악사업부의 매각 시 연극영화사업부의 청산 또한 고려할 수 있는 옵션이 된다며 TF를 회유하였다.

한편 음악사업부는 의복사업부에 비해 절대적인 경제적 성과는 떨어지더라도 의복사업부에 비해 다른 사업부와의 연계도가 높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신IT 프로젝트 중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앞으로 인터넷 세상이 미래가 될 것이며,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그룹은 침몰할 것임을 강조했다. 음악사업부는 IT기술의 발전으로 게임 등의 미디어가 발전할 것이고, 박자에 맞춰 음악을 연주하는 리듬 게임과 같은 것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고도 간단히 언급했다.

사업 정리 TF는 경영 실적, 사업 성과, 로드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내부적으로 검토를 이어갔다. 의복사업부와 음악사업부 임원들도 여기에 동참했는데, 결정이 지연되자 점점 설득의 강도를 높여 갔고,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의복사업부는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23] 또한 임원이 계속해서 어딘가로 향한다는 소문이 돌자 의복사업부와 음악사업부 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언론의 관심이 주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업 정리 TF는 더 이상 장고할 시간이 없었고, 결국 결론을 내려야 했다.

사업 정리 TF는 마지막 설득을 듣고 결론을 내리고자 했다. 그래서 두 사업부에게 1시간의 발표 기회를 주고 2주 동안 준비해 올 것을 지시했다. 두 사업부의 임원들은 자신이 몸담은 사업부가 청산된다면 가뜩이나 어두컴컴한 경제계 상황에서 도대체 어디에 인수되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이 여태껏 쌓아온 경험을 총동원하여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펼쳤다. 의복사업부는 현재 가지고 있는 의상 컨셉트와 IT기술을 집대성한 컨셉을 준비하였고, 음악사업부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연과 시장에 나와 있는 다양한 리듬 게임의 섭외를 준비하였다. 주어진 2주라는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결전의 날을 맞은 두 사업부는 그룹최고회의에 출석하여 발표를 진행하였다.

의복사업부는 이전부터 마지막 발표를 예상하고 있었고, 그 기반이 탄탄한 상태에서 살짝 다듬어 발표를 진행하였다. 우선 이들은 회의장을 런웨이로 만들었다. 이윽고 다양한 모델들이 그들이 준비한 의상들을 입고 걸어 나왔다. 그룹 내에서도 손꼽히는 달변가로 꼽히는 양민수가 의상들에 대해 해설했다. 최신 소재를 활용한 기능성 소재, 초소형 컴퓨터를 내장한 작업복 등등 온갖 의류가 그룹최고회의 의원들과 TF 의원들의 이목을 끌었다. 대략 30분 가량의 패션쇼가 끝나자 현란한 그래픽을 총동원한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그룹의 향후 20년 간의 로드맵, 현재 그룹이 처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 등을 제시하며 청중들을 설득했다. 이들은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모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의복사업부의 발표는 완벽했고, 흠 잡을 사항도 없었다. 추가 질문 하나 나오지 않은 완벽한 발표를 끝마친 의복사업부 임원들은 음악사업부의 청산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음악사업부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의복사업부의 네거티브가 점수를 모조리 깎아 먹을 것을 기대하고 장기전을 염두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전개에 음악사업부는 마지막 발표를 바닥부터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밤을 꼬박 새가면서 발표를 구성했다. 급하게 게임기와 리듬 게임 패키지를 구입하고, 오락실에 큰 돈을 주고 리듬 게임 기체를 빌려오는가 하면, 소속 작곡가과 음악가들에게 연락하여 발표에 사용될 BGM 등을 요청했다. 하필이면 발표 순서도 의복사업부 다음이었기 때문에 비교당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완벽한 언더독 상태였던 그들에게 믿을 것은 진솔한 메세지가 가져다 줄 희망뿐이었다.

음악사업부에게 의복사업부의 화려한 런웨이나 프레젠테이션 같은 것은 없었다. 강단에는 작은 책상과 프로젝터 화면이 전부로, 청중들은 벌써부터 실망한 심정을 드러냈다. 무대에 오른 것은 양민수 못지 않은 달변가로 꼽히는 김길수로, 긴장을 잘 하지 않는 그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꽤나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음악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발표를 이끌어 나갔고, 전기전자사업부, 자동차사업부, 게임사업부 등과의 사업 연계 사례를 설명하였다. 특히 게임사업부와 전기전자사업부 네트워크부문과의 연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타사 리듬게임의 시연과 분석,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연과 전망 등을 통해 IT기술의 발전은 급격하며 이로 인해 수 년 안에 이러한 프로젝트가 실현 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김길수는 강단에 음악 팬들과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토크쇼를 진행했다. 다양한 질문이 오가는 가운데 사람들은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토크쇼가 끝나고 김길수는 대한제국의 소프트파워가 점점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강조하였다. 김길수는 미래기술 그룹의 세계적 성장을 위해선 문화산업과의 연계가 필수적임을 설명하며 발표를 마쳤다.

두 사업부의 발표가 모두 끝나고, 청중들은 설문지와 펜을 받았다. 설문지를 작성하는 청중들의 눈빛은 고민으로 요동쳤다. 음악사업부는 희망이 있다며 안도했으나, 의복사업부는 예상과 다른 시나리오에 초조함을 드러냈다. 사업 정리 TF장 강창호는 일주일 후 청산할 사업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히며 참여해 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청중들은 모두 퇴장했고, 사업부 임원들이 그 자리에 남았다. 강창호는 착잡한 심정으로 사업부 임원들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최고의 발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두 사업부 모두 매력적인 사업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기술 그룹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미래기술 그룹의 녹록치 않은 사정으로 둘 중 하나는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김덕배의 오른팔로 이런 상황이 되도록 방관한 저의 잘못이니 그룹이 아닌 저를 나무라 주시기 바랍니다.
강창호, 마지막 발표 이후

이 한마디를 끝으로 강창호는 회의장을 떠났고, 회의장에는 의복사업부와 음악사업부 임원들만이 남았다. 두 사업부의 임원들은 기진맥진하여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회의장에는 한숨과 고요만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가 각 임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각 사업부의 사업부장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전등이 대부분 꺼져 입구 쪽만 간신히 사물이 분간될 만큼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두 사업부장은 회의장에 남아 있었다. 두 사업부장은 오랜 정적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수고했다며, 청산될지라도 언젠가 다시 그룹에 합류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했다. 서로 대립했던 사람들이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결국 해탈에 이른 것이라고 사람들은 평가한다.

청산

일주일 동안 사업 정리 TF는 물론 그룹 개편 TF의 모든 구성원들이 모여 청산할 사업부의 목록을 최종 정리하였다. 심주섭과 강창호는 일주일이라는 기간이 턱없이 모자람을 알고 있었지만, 채권단의 압박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이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두 TF의 구성원들은 논의, 식사, 휴식, 고민, 수면 이 5개만 반복하며 밤낮없이 청산할 사업부를 논의하였다. 비단 자금의 문제 뿐만 아니라, 미래기술 그룹과 같은 거물 기업의 M&A는 재계를 뒤엎어 버릴 수 있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논의는 신중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업부의 단순 청산 뿐만 아니라 사업부 간에 분산되어 있었던 사업들의 재분배도 실시하였다.

  • 사업부 완전 매각
    • 의학사업부
    • 식품사업부
    • 생활유통사업부
    • 운송사업부
    • 의복사업부
  • 사업부 부분 매각
    • 음악사업부 연예인매니지먼트국
    • 중공업사업부 철도사업국, 방위사업국
    • 자동차사업부 중고차매매국
  • 사업부 분리
    • 전기전자사업부, 음악사업부 → 그래픽사업부
    • 전기전자사업부 → 네트워크사업부
    • 중공업사업부, 자동차사업부 → 파워트레인사업부
  • 사업부 축소[24]
    • 게임사업부

미래기술 그룹 사업 정리 TF의 최종 보고서 中

사업 정리 TF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와 같은 보고서 내용을 발표하였다. 음악사업부는 일부 국을 잃고 그래픽사업부가 분리되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크게 안도하였다. 음악사업부 임원들은 서로 부둥켜 안으며 만세삼창을 했다. 환호성이 이어진 뒤 그들은 기자회견장을 기쁜 마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의복사업부는 되려 자신이 청산된 것에 격분했다. 의복사업부 임원들은 당장 누구를 잡아먹기라도 할 정도로 항의했으나, 의복사업부 사업부장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체념하였다. 분노한 의복사업부 임원들을 진정시키며 강창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두 사업부 모두 우리 미래기술 그룹에 소중한 사업부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업부를 모두 보듬을 수 없는 사정입니다...(하품)... 죄송합니다. 기자회견장에서 하품을 할 만큼 밤을 새고,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내린 결론입니다. 신IT 프로젝트와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사업부라는 것이 저희 TF의 결론입니다. 이상입니다.
강창호, 기자회견장에서

그렇게 미래기술 그룹의 새출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진행자가 마이크를 내려놓기 기다리던 기자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현수막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제5기)

그룹 개편 TF의 마지막 한 수

그룹 개편 TF가 개편안을 거의 완성해 가던 어느날, 그룹 개편 TF의 말단 직원[25]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룹 이름은 그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결국 이름이잖아요.
그룹 개편 TF의 누군가

강창호는 그룹 개편 TF에 이 제안을 언급했고, 곧바로 새 그룹 이름과 로고, 표어의 구상에 들어갔다. 해당 직원은 과거 심상교가 미래중공업을 살리기 위해 글로벌에 집중한 것처럼, 우리도 글로벌함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TF의 모두가 수긍했고, 결과적으로 미래, 기술을 영어로 번역한 Future, Tech가 합쳐진 FutureTech Group이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진 TF의 조사에 따르면, 외국에서 미래기술 그룹을 Mirae Technology로 부르는 경향이 꽤 있었다고 한다. 또한 FutureTech Group이라는 명칭도 간혹 있었고 최근 증가하는 추세였다고 한다. 상징색 2개(Future Green (#6DD947), Tech Blue (#0DC0FF))와 심볼 로고도 이때 정해졌다. 녹색은 기후 위기 대응, 청색은 최첨단 기술을 상징한다. 덧붙여 CI로고가 이따금 2D로 표현되는 것과 다르게 두 색은 항상 그라데이션 처리한다. 이는 이 두 목표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는 뜻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라데이션 처리가 어려운 상황에선 차라리 이 두가지 색상 외의 단일 색상으로 처리를 하는 편이다.

로고와 그룹명, 상징색 등이 빠르게 결정된 것과 다르게 표어를 정하는 것은 상당히 시간을 끌었다. 대략 30개 정도의 시안이 제안되었으나 모두 마땅치 않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일주일 정도 표어 선정에 난항을 겪는 동안, 강창호 또한 좋은 표어를 찾기 위해 각종 시집과 소설을 찾아 보며 아이디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득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친구들에게 비밀리에 표어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강창호의 친구들 중에선 시인, 작가, 작곡가, 작사가 등 글을 잘 쓸 법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친구들도 이렇다 할 표어를 제시하여 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친구와 집에서 담소를 나누던 와중 질문이 표어 쪽으로 흘렀고, 군사 관련 지식에 해박하던 강창호의 어느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음... 내가 아는 것이 군사쪽이라서 군사쪽으로 답을 할 수 밖에 없네. 영국 왕립 공군의 표어가 인상깊어서 기억하고 있는데, 어... 아! 그래. Per Ardua Ad Astra. 영어로 하면 Through Adversity to the Stars, 한국말로 번역해 보자면...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정도 되려나?
강창호의 모 밀덕 친구[26]

강창호는 무릎을 치며 바로 이거라는 반응을 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포스트잇을 찾아 그 표어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포스트잇은 강창호의 사무실로, 이윽고 그룹 개편 TF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TF 구성원들도 이 표어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래기술 그룹에 닥친 '역경'을 해쳐 나간다는 이미지, '별'을 향한다는 예술적인 표현[27], 세계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라틴어 표기(일단 알파벳이므로) 등의 요소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약간의 논의 끝에 퓨처테크 개편과 함께한, 퓨처테크 첫 표어인 Per Ardua Ad Astra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 표어를 어떻게 발표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룹명 변경 등과 같은 사항은 아직 TF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또한 기자회견 일정이 일주일 앞이었고, 엠바고를 걸어 이미 보도자료를 뿌린 뒤였으므로 돌이키긴 너무 늦었다. TF는 결국 서프라이즈 식으로 발표하는 것밖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현수막을 만들어 기자회견장 천장에서 떨어트리기로 결정했다. 현수막을 만들고 천장에 다는 것은 일주일 내에 넉넉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TF는 출판사업부에 극비리로 해당 현수막을 인쇄할 것을 요청했다. TF는 또한 기자회견이 있을 장소를 살펴보고 현수막을 장착할 위치를 결정했다. 현수막은 인쇄되었고 해당 자리에 곧 현수막이 설치되었다. 잘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도 확인하였다. 또한 진행자에게 급히 수정 대본을 주어 발표를 부탁하였다. 진행자도 예상 밖의 일이라 당황하긴 했으나, 그 사정을 듣고 이해하였다.

내려온 현수막은 그룹의 새로운 이름과 표어였다. 발표자는 침착하게 퓨처테크 그룹이라는 이름과 표어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덧붙여 앞으로의 그룹 정상화 계획 등도 발표하였다. 보도자료에 없었던 내용에 기자들은 동요했다. 이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깜짝 놀라게 되었다. 어느 사업부가 청산될 것인지에 대해선 논의가 많았으나 이러한 강도 높은 개혁까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창호는 덧붙여 그룹최고회의와 같은 핵심 체제는 유지하되, 불필요한 체제는 모조리 제거하고 최소한의 요소만 남길 것을 설명하였다. 또한 경영이 안정화되고 사세가 다시 설 때 까지 그룹은 비상체제로 운영하게 됨을 밝혔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것을 끝으로 기자회견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미래기술 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 퓨처테크 그룹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출발

소원금융그룹 및 대한제국 정부의 자금 지원과 채권단의 관용 등으로 그룹은 해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과제는 산더미였다. 심주섭은 그룹 정상화에 최소 1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다. 심주섭은 그룹 개편 TF와 사업 정리 TF가 부도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상당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다 판단, 해체하여 본래의 그룹최고회의 체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룹최고회의에 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연결, 위원장으로 강창호를 앉혀 비상 체제를 개편하여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해당 안은 그룹최고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곧바로 시행되었다.

비대위 위원장으로 부임한 강창호는 첫 그룹최고회의 전체 발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하되, 체면을 구길지라도 못하는 것은 확실히 못 한다고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공하는 유무형의 어떤 상품일지라도 소비자 선에서는 행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강창호는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구하자고 제안하였다. 여기에 여러 사업부장들이 동의하였고, 곧바로 여러 기업과의 전방위적인 협력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자동차사업국이 다양한 기업들[28]과의 협력을 시행하였고, 다른 사업부들도 크고 작은 협력을 시행하였다.

비상대책위원회는 뒤이어 사원들과의 공청회를 제안했다. 왜 이걸 지금에서야 하는지 묻는 심주섭의 질문에 강창호는 청산이 논의되던 당시에는 자신의 쓴소리가 자칫 자신의 안위나 소속 사업부의 안위를 해칠 것을 걱정하여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지금이 제때라고 답했다. 간단한 수요 조사를 진행하니 수요 조사 서버가 과부하로 문제가 생길 수준으로 지원자가 많았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전 세계 각 지사 단위로 수 차례의 공청회를 진행하였고, 별도로 의견을 직접 낼 수 있는 방법도 마련했다. 무려 한 달 간의 길고 긴 공청회 끝에, 수십 만 건에 달하는 응답이 돌아왔다. 엄청난 양의 응답은 그룹운영부 통계조사국으로 넘겨져 정리와 분석을 거쳤다.

공청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내부 조사 등을 통해 비대위와 통계조사국은 현재 사원들의 민심과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으나 공격적인 개혁과 복지를 통해 민심을 회복하고 사기를 고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덧붙여 현재 그룹의 조달 방식이나 개발 환경은 최악에 가깝다는 비평이 있었고,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사실상 폐업 후 재창업 하는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보고서를 끝마쳤다. 이러한 절망적인 결론에 심주섭의 시름은 깊어지기만 했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보이지도 않았다. 당장 위기는 모면했으나, 지금의 상황으론 내일 그룹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런 부담감은 심주섭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고, 훗날 빠른 퇴임과 이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채권단이 바라던 대로, 그룹은 신IT 사업을 위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는 중공업 계열의 수축을 불러 일으켰고, 중공업계 사업부들[29]의 반발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반발은 힘을 얻지 못했다. 다만 심주섭은 이 여론을 무시하지 않고, 중공업계 사업부들을 위한 정책도 위기가 해소된다면 바르게 시행하겠다고 설득했다. 중공업계 사업부들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므로 믿고 따랐다. 이렇게 사업부들 간의 갈등도 어느 정도 봉합되며 그룹은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갔다.

재기의 서막

신IT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음악사업부, 네트워크사업부 등은 이미 있는 IT 관련 서비스를 대거 확충했다. 신IT 프로젝트의 완성은 아직 꽤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그동안 IT 산업의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변변치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선 신IT 프로젝트의 시행이 분주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2003년부터 새로운 SNS를 출시하며 IT 붐에 편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000년 초 닷컴버블이 예상보다 일찍 붕괴하며 상황은 악화하기 시작했다. 네트워크사업부 등 신IT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사업부들의 주가가 크게 폭락하였고, 투자가 끊기고 채권 회수가 증가하는 경제적 악재가 찾아온 것이다. 그룹최고회의에선 지금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였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창호가 앉아 있는 비대위의 의견은 현상 유지였다. 딱히 차선책도 없다는 것이다. 그룹최고회의는 채권단을 설득하여, 신IT 프로젝트를 엄호하였다.

다행히 닷컴버블과 관계 없는 중공업계는 사업, 대형 수주 성공과 호황으로 차차 실적이 개선되어 자금 수급 역할을 했다. 덕분에 신IT 프로젝트는 순항할 수 있었다. 2002년 초 SNS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YourMind가 사내 베타테스트를 시작하며 슬슬 출격을 준비하였다. 이후 진행된 공개 베타테스트에서 다양한 기능과 편안한 디자인, 빠릿한 서비스 등으로 호평과 기대를 받으며 신IT 프로젝트는 좋은 출발을 하게 되었다. YourMind는 정식 출시 이후 광고 수입 등으로 꽤 짭짤한 수익을 얻게 되었다. YourMind의 성공 이후로 신IT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아 2005년 초 MüCA를 오픈, 기술적 검토가 더 필요했던 위성인터넷 프로젝트를 남기고 모두 개장하게 된다. 신IT 프로젝트는 그룹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 주었다.

MuCA가 본궤도에 오른 2006년은 신IT 프로젝트의 시너지 등과 더불어 1차 부도 이후 맞는 최고의 부흥기였다. 이에 따라 슬슬 그룹최고회의는 비상대책위원회의 해산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창호는 일시적인 상승일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덧붙여 그룹운영부 경영국은 원인은 다양할지라도 수 년 내로 금융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심주섭은 이러한 의견을 수용하여 최소 1년간 더 지켜 보고 비대위 해산을 논의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덧붙여 강창호는 만일 지금의 부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2007년을 그룹 정상화 원년으로 선언할 것을 제안했다. 심주섭을 포함한 그룹최고회의의 의원들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몇몇 의원들, 특히 청산될 뻔 한 음악사업부 계열 의원들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위기를 기회로

강창호와 그룹운영부 경영국의 예상은 불행히 다음 해 적중하게 된다. 2007년 4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며, 이른바 '대침체'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가 발발하게 되었다. 세계를 시장으로 사업하는 퓨처테크도 피해가지 못 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확장하였고, 금융계 분석가들을 대거 섭외하여 그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김덕배 체제의 나태한 대응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비대위의 금융 분석가들과 그룹운영부 경영국에 소원금융그룹 계열 전문가들[30]까지 모여 내린 결론은 1차 부도를 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의외의 결론이었다. 비대위는 만약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시기에 퓨처테크가 어중간하게 버텼다면 이번 금융위기로 완전히 붕괴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1차 부도 상황에서 외국계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오고 사업부를 청산할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 덕분에 부채 부담이 크게 감소하였고, 어쩌면 이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 일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내놓았다.

그룹최고회의는 신IT 프로젝트의 확장을 고민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CosmosLink라는 퓨처테크의 IT 프로젝트 겸 연동 서비스의 시초가 된다. 다만, 위성인터넷 프로젝트는 예산 등이 문제로 또 다시 연기되었다. 은퇴한 심상교는 이를 보며 마치 미래기술 그룹이 중공업을 계기로 변화하는 것처럼, 퓨처테크가 IT를 계기로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심상교는 IT가 중공업계와 문화예술계의 오랜 갈등을 봉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내비쳤다. 그룹최고회의 또한 갈등의 봉합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업 연계성도 고려하여, 그룹최고회의는 중공업과 IT의 융합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룹 단위의 노력 덕분에, 이러한 기대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룹이 IT 산업 위주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동력을 발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IT 관련 사업부들이 대부분 문화예술계 출신이거나 영향을 크게 받아 갈등 봉합에는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갈등 봉합에 실패한 것과 더불어 문화예술계를 그룹의 개편 동력으로 삼은 것에 대해 중공업계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정작 신IT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산은 우리가 주었다는 것이다. 그룹최고회의는 이들의 목소리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이런저런 장밋빛 예상과 심주섭의 직관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화학사업부의 인수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휘청대던 더푸른화학을 인수, 화학사업부로 재편하는 방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중공업계 사업부들에게 크나큰 선물이나 다름 없었다. 문화예술계는 큰 반응은 없었지만, 중공업계가 박차고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찬성했다. 심주섭은 더푸른화학의 인수를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더푸른화학 인수 과정에서의 이런 저런 마찰과 부친상이 방아쇠가 되어 심주섭의 정신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즈음 해서 심주섭은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룹 정상화

그렇게 금융위기를 극복한 퓨처테크는 2010년 3월 4일, 그룹 정상화를 선언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마침내 해산했다. 비대위 대표인 강창호는 퓨처테크에 더 헌신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룹운영부 미래전략국의 국장이 되어 퓨처테크의 앞날을 예견하며 인연을 이어가기 되었다. 뒤이어 심주섭은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창호는 심주섭에게 그룹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등록해볼 것을 제안 받았으나, 너무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음악사업부를 이끌던 음악사업부 사업부장으로 경력을 쌓은 심재복에게 그룹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등록할 것을 제안하였고, 심재복은 수락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로 그룹최고회의 의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기존에는 2005년 그룹최고회의 의장 선출에서 연임에 성공한 심주섭이 또 다시 연임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대로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자 누가 의장이 될지 논쟁이 많았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자동차사업부 사업부장 김준식과 음악사업부 사업부장 심재복의, 즉 문화예술계와 중공업계의 정면 승부 구도가 뚜렷해졌다. 문화예술계와 중공업계의 갈등이 이어지자, 심주섭은 사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할 것을 제안했다. 심주섭의 제안을 반영하여, 전 세계 수십 만 명의 사원들과 주주들, 이사들 등등에 대해 민주적으로 투표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공청회가 끝난 이후, 심재복이 후보직에서 사퇴하면서 김준식이 그룹최고회의 의장에 오르게 된다. 화학사업부 인수 추진으로 중공업계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 한몫 했다. 심재복은 김준식의 제안에 따라 그룹최고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김준식은 그룹최고회의를 확대 개편하였는데, 그 중 인상적인 변화는 노조 대표가 그룹최고회의 의원으로 추가된 것이었다. 이사들의 반대가 꽤 있었지만, 김준식은 사원 의견을 모아 청취하는데 사내 노조 대표만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답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각 노조 대표 4명이 추가[31]되는 등 여러 인사들이 추가되고 극소수가 제외되었으나,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김준식은 인수인계 기간 동안 심주섭에게 조언을 받으며 그룹최고회의를 재구성했고, 한 달 정도 지나자 김준식은 온전히 자신의 소임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심주섭은 이제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심주섭은 그룹최고회의를 떠나며 한 마지막 발언에서 김준식을 응원하며, 그동안 자신을 믿고 그룹 정상화에 일념을 다해 준 사원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전체적으로 밝은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취임 전에 비해 많이 수척해져 많은 이들의 걱정을 샀다.

대략 세 달 쯤 지났을 때,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심주섭이 가족의 공동묘지를 찾은 날, 우울증을 앓고 있던 심주섭이 투신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경호원이 있었으나, 경호원이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사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심주섭은 자살에 실패했으나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심재복의 심리 또한 요동쳐 퓨처테크 일에서 손을 뗄 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김준식은 심재복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고, 심재복은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의 관계는 친형제만큼 돈독해졌다. 그만큼 서로를 덜 견제하게 되었지만, 주변인들 또한 이들을 견제하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화학사업부가 완전히 인수된 것을 기점으로 퓨처테크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이했다. 직원 복지나 R&D에 공격적인 투자를 한 결과가 10년이 지나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각 사업부들도 외연 확장을 노려 보았는데, 그 중 자동차사업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자동차사업부는 그랜드 투어링을 위시한 럭셔리카 사업과 운송사업부를 위해 시작한 상용차 사업이 전부[32]였기 때문이다. 자동차사업부는 내부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할지, 괜찮은 기업을 인수합병 할 지 고민을 하였고, 이후 2017년 경 말레이시아의 자동차 기업 프로톤의 인수전에 참전하기로 결정, 그룹최고회의의 절대적 지원 하에 인수합병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그 외에도 네트워크사업부의 주도로 싱가포르의 보안 솔루션 기업인 아크로니스를 인수(이후 보안사업부)하는 등 사업 확장을 이어나갔다.

특히나 프로톤 인수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프로톤이 자회사로 로터스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사업부는 럭셔리카(제1자동차사업부)와 상용차(제2자동차사업부)를 만드는 퓨처테크, 대중차를 만드는 프로톤, 퓨어 스포츠카를 만드는 로터스의 4대 구도를 꿈꾸었고, 그룹최고회의 또한 이들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프로톤과 로터스는 각각 제4, 제3자동차사업부로 합류하였다. 덧붙여 자동차사업부는 퓨처테크의 이름으로 WEC, 프로톤의 이름으로 WRC, 로터스의 이름으로 F1을 나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동시에 2016년을 끝으로 해체될 위기에 빠진 매노어 레이싱이 합류하면서, 퓨처테크의 모터스포츠 프로젝트는 규모가 매우 커지게 되었다.

그룹의 현재 (제6기)

문화예술계의 부상

자동차사업부의 인수전, 화학사업부 합류 등으로 중공업계가 그룹의 분위기를 잡자 문화예술계는 다소 위축되었다. 김준식이 자동차사업부 출신인 것도 한 몫 했다. 문화예술계는 소폭 불만을 가져, 다시 흐름을 가져오길 기대했다. 이들은 사업 계획 구상이나 프로젝트 추진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심재복이 그룹최고회의 의장에 오르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2017년 경, 퓨처테크에 프로톤과 로터스가 합류할 무렵 김준식은 불현듯 다시금 자동차사업부 관련 업무에 몸 담고 싶어지게 되었다. 이에 김준식은 차세대 SkyThrough 개발이 시작될 무렵 그룹최고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자 했다. 김준식은 심재복에게 그룹최고회의 의장직을 제안하였고, 심재복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준식이 사퇴를 선언하였고, 그룹최고회의에서 심재복의 의장 임명안이 가결됨에 따라 다시 음악사업부 계열 인물이 퓨처테크의 지도자가 되었다. 심재복은 빠르게 인수인계를 마친 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심재복은 어느 날 로고 디자인을 보더니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최근 트렌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상평을 내었다. 이에 그룹최고회의는 그래픽사업부 디자인국 국장을 소환, 새로운 그룹 로고의 디자인을 요청하였다. 그룹최고회의는 디자인국 국장과 대화를 나누며 디자인사업부의 분리를 논의하였다. 대략 몇 달 간의 디자인 논의 끝에, 최종 3개 안이 제출되었고 그룹최고회의는 그 중 하나를 압도적인 지지로 선택하였다. 심재복은 2019년 그룹 창립 14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로고를 발표함과 동시에 디자인사업부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심재복은 한 개의 사업부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을 꺼리는 성향이 있었다. 디자인사업부의 분리부터 시작해서, 수소사업부나 인공지능사업부 등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큰 사업부 내의 국들을 분리하게 되었다. 한편 동시에 사업부 간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사업부의 개수 자체는 증가했지만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룹을 지향했다. 심재복은 그룹최고회의 내 파벌이 해가 된다고 판단하였고, 그 파벌을 없애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큰 효과는 없었다. 심재복은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퓨처테크 그룹은 시련과 역경을 발판 삼아 나아가며 문화예술, 중공업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룹최고회의 내의 여러 인재들의 발상과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불평등, 기후위기 등 산적한 사회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면서 첨단을 달리는 기술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해 나가고 있다. 퓨처테크의 행보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어, 특정 산업 분야의 흥망을 결정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처테크는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친환경차 사업[33], 차세대 명령어 집합(ISA) 프로젝트[34]와 그에 기반한 대통합 플랫폼 프로젝트, 양자컴퓨터 프로젝트 등 다양한 미래 먹거리를 마련함과 동시에 기존 분야에서도 그 영향력을 유지하며 넓혀가고 있다. 한편, 과거의 플랫폼에도 넉넉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35] 최신 기술을 통해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는 목표를 잊지 않고 퓨처테크는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1. 훗날 심복택의 집안이 운영하고 있던 의복 회사는 그룹이 결성될 때 그룹에 합류했다가 2000년대의 경제 위기로 매각했다
  2. 現 FutureFilm Theater 1호점
  3. 現 FutureFilm Theater 부산1호점
  4. 훗날 미래의류로 이름을 변경하게 됐다.
  5. 당시 이 직책을 음악편성국장이라고 불렀다.
  6. 당시 이 직책을 기획추진국장이라고 불렀다.
  7. 당시 이 직책을 대외노출국장이라고 불렀다.
  8. 당시 그룹내사부라고 불렸다. 현재의 윤리감찰부의 전신이 된다.
  9. 다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공식적으로 실 이하의 단위도 있다. 보통 '실'의 규모가 크거나 배정 업무가 광범위한 경우 발생한다. 정해진 명칭은 없으나 대체로 '소실'이라는 명칭이 애용된다.
  10. 대체로 특정 회의를 부를 때에는 부서 이름을 앞에 붙인다. 가령 미래기술그룹 음악사업부 음악편성국의 국 회의를 부를 땐 음악편성국 회의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실 이하의 단위, 일명 '소실'의 경우 인원이 너무 작아 체계적인 회의보다는 상시적인 논의가 더 일반적이다.
  11. 훗날 회고록에서 이 표현을 그대로 인용했다.
  12. 다만 창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완전한 수평적 관계는 아니였다. 대표적으로 호봉의 경우 근속 연차에 따른 인상분과 맡고 있는 직책과 관련해 생기는 기본급의 차이 등으로 인해 그룹최고회의 의장과 신입 사원이 동일한 연봉을 받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선 '더 많고 어려운 일을 하는데 이 정도는 공감한다'는 것이 사원들의 중론이다.
  13. 그룹 단위에선 혹시나 모를 껄끄러운 상황을 막기 위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사항이고 알파 로메오, 뷰익, 애스턴 마틴에서도 알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14. 엔진의 성능은 2000년 중반 퓨처테크 역사관을 조성할 당시에 그 당시의 엔진을 수배해 측정하여 그 당시의 기술력을 감안하여 추정한 것이다.
  15. 훗날 퓨처테크 자동차사업부는 로터스에게 서스펜션 과 차체 등의 설계 및 감수를 외주하기도 했다. 여기서 덕을 많이 봐 호감이 생긴 것의 영향을 받아, 훗날 모기업과 함께 로터스를 인수하기까지 한다.
  16. 예나 지금이나 그룹최고회의는 크게 음악사업부 계열과 중공업사업부 계열로 나뉜다. 음악사업부 계열은 진보적이고 직원친화적인 반면 중공업사업부 계열은 보수적이고 성과지향적인 성향을 띈다.
  17. 심상교는 개방적인 사내 정책을 펼친 것과 다르게 의외로 취미는 고상했다고 한다. 난을 기르거나 서예를 하는 등 딱 이백 년 전에 태어났으면 선비였을 거라고들 한다. 심상교의 고상한 취미는 심주섭, 심재복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나 심현민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심현민은 오히려 컴퓨터, 자동차 덕후로 최신 문물에 밝은 얼리아답터였다. 모 F1 드라이버와 합방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문화예술계와 중공업계의 갈등을 봉합할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18. 최초의 그랜드 투어러 시리즈인 SkyThrough, 슈퍼카 시리즈인 SkyCross, 럭셔리카/리무진 라인업인 SkyLounge 이 3개를 가리켜 Sky 시리즈라고 부른다.
  19. 이미 김덕배는 1996년 초 주주총회에서 그룹최고회의 의장 신임 투표에서 50% 초반대 지지로 간신히 자리를 지켰다.
  20. 지분이 극히 적었던 금융사지만 훗날 제1주주가 될 정도로 많은 자금을 투입한 금융사이다.
  21. 소원금융그룹은 미래기술 그룹의 채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으나, 최종 부도를 면할 자금을 준 것을 이유로 채권단과 비슷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금산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수용하여 그룹 개편 이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편의상 1차 부도 당시 미래기술 그룹 채권단에 소원금융그룹을 포함한다.
  22. 김덕배는 훗날 정치인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결국 실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23. 음악사업부도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하긴 했다. 그러나 그 빈도는 의복사업부가 훨씬 많았고, 사람들은 이를 의복사업부가 청산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24. 국의 개수가 감소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업부에 비해 인원 감축이 유의미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별도로 기재
  25. 누군지 신상이 특정이 되고 또 그룹 차원에서 계속 교류를 이어가고 있으나, 본인의 의견에 따라 신상은 공개되지 않는다. '별것도 아닌데 이런 걸로 유명해진다는 것은 내게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26. 강창호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 친구를 문자 그대로 밀덕으로 표현했다. 덧붙여 자서전에서 강창호는 이 친구의 이름을 정말로 올리고 싶었지만 그 친구가 완강히 반대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27. 단순히 심미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별을 향하는 첨단 기술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28. 대표적으로 영국의 로터스가 있다. 그 외에도 업계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기업들과 기술적 협력을 하였다. 사업국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기술 협력을 시행하였고, 이 덕분인지 자동차사업국은 신IT 사업을 밀던 사업부들 만큼 상당히 빠르게 재기하게 되었다.
  29. 퓨처테크 그룹의 사업부들은 이론상 서로 공평하고 균등한 관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파벌이 존재한다. 크게 음악사업부를 주축으로 연극영화사업부(사실상 한 몸), 네트워크사업부, 그래픽사업부, 게임사업부 등이 속한 문화예술계(약칭 文)와 중공업사업부를 주축으로 자동차사업부, 전기전자사업부, 화학사업부등이 속한 중공업계(약칭 重)가 있다. 중립 세력도 존재한다.
  30. 공식적으로는 채권단 대표 자격이다. 소원금융그룹이 채권 회수를 실시하면 퓨처테크는 거기서 부도로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도 한 몫 했다.
  31. 그룹최고회의 내 파벌과 비슷하게, 노조도 퓨처테크 범공업노조(중공업계)와 문화예술노조(문화예술계)로 나뉜다. 그 외에도 새미래노조(화학/수소/인공지능 등 합류나 창설이 비교적 최신인 사업부), 더푸른노조(기후위기 관련 업무에 종사중인 사원들)가 있다. 이렇게 4개 노조를 퓨처테크 4대 노조로 분류하여, 그룹최고회의 각 노조 대표를 그룹최고회의 의원으로 임명했다.
  32. 엄밀히 말해, 럭셔리카 사업은 제1자동차사업부, 상용차 사업은 제2자동차사업부로 나뉘어 있다.
  33. 대형 상용차는 수소연료전지를, 소형 승용차는 배터리를 동력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퓨처테크, 윌리엄스 레이싱, 로터스가 합작(일명 FWL 얼라이언스)하여 MPEV(다목적 전기차) 플랫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확장성과 유연한 설계를 기조로 설계되어, 배터리 배치나 모터 배치 등 핵심적인 요소도 여유롭게 수정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34. 퓨처테크 내에서는 연구 수준을 제외하고 x86(AMD64), Arm(AArch64), MIPS 세 개의 ISA를 기반으로 프로세서를 만들고 있다. 이 중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MIPS 계열에서 RISC-V를 연구하고 있다.
  35. 이른바 everlasting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것이 그 특징인데, 저율 생산을 유지하고 설계 개선이 없거나 거의 드물지만 최소 20년 이상 그 생산을 유지하고 A/S를 보장한다. 그러나 품질에 비해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