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arnacht/국가/중화민국 광주정부

[ 극야 : 혁명의 잔재 ]
[ 4대 팩션 ]
PATRA Commonwealth of Nations SchutzBündnis Pacte de La Rochelle
중화민국
中華民國
국기 국장
'
民族, 民權, 民生
민족, 민권, 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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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국명 (한국어)
중화민국, 광주정부, 국민정부, 국민당
국명 (중국어)
中華民國
상징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
국화
매화
국장
청천백일
역사
1911년 신해혁명
1917년 호법전쟁
1920년 2차 호법운동
1926년 제 1차 북벌
1929년 북경혁명정부 수립
1929년 만주사변
1931년 복건사변
지리
수도
광저우
위치
지구
동아시아
남중국 일대
주변국
남경군벌
광서군벌
운남군벌
호북군벌
호남군벌
독일 연방
포르투갈 왕국
대영제국
정치 · 경제
정치 체제
대중사회주의
혼합 체제
국가 원수
왕징웨이
행정 수반
장제스
경제 체제
혼합 경제 체제
통화
중화민국 위안

1926년에 이루어진 북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통일을 이룩하였을지 몰라도 동맹회 내부의 결속은 느슨했고, 소위 말하는 '군벌'들은 국민당에 합류하여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 바빴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통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허울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동맹회의 처참한 실패는 동맹회의 분열을 불러왔고 국민당은 광저우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복건, 강서에서 통일공화당과 천중밍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복건의 주요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의 군대는 푸저우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국민당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으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천중밍과 장제스는 불편한 동상이몽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위태롭게 유지되던 국공합작도 공산당의 모험주의적 경향성, 이로 인한 하이루펑 해방구에서의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충돌, 국민당의 비협조적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합작의 파기를 요구하는 공산당의 문건이 유출되면서 국공합작을 거부하는 국민당 내 우익 세력과 용공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세력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이에 장제스는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며 천중밍, 왕징웨이 등과 격한 논쟁이 주고받았습니다. 이에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익 세력은 탈광동화를 통한 천중밍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직예 잔당에 대한 공세를 주장하였습니다.

장제스는 봉천과의 협상을 위해 회담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 회담의 목적은 봉천 군벌과 연계하여 직예 잔당을 무너뜨리고 난징까지 진출하는 것입니다. 물론 북벌은 난징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난징은 국민 혁명을 위한 거대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국민혁명군은 사천, 서북, 화북, 만주까지 아우르는 중화 전역에서 군벌지배를 축출하고 국민혁명의 가치를 전파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치욕과 분열의 세기에서 벗어나 하나된 베고니아 잎을 피울 것입니다.

33년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혼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국민당은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던 간에 말입니다...

개요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혹은 국민정부(國民政府,Nationalist Government), 중화민국 광주정부(廣州中華民國政府, Nationalist Government in Canton)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1929년 만주사변의 여파로 중국의 북경혁명정부가 해체되고 상당한 내부갈등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이며, 분데스베르케 쇼크(Bundesberkekrise)의 여파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다.

1933년의 상황

총통 부총통
장제스
부총통
 - 안정도 : +5.00%
--------------
왕징웨이 장제스
  중국공산당 (5)
  중국공산당 (7)
  국민당 세계사 (4)
  국민당 개조파 (13)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 (10)
  치공당 (11)
  국민당 정치학파 (7)
  국민당 태자파 (10)
  국민당 서산파 (4)
  국민당 백적파 (13)
  국민당 황포파(7)
  교권주의 (0)
  국민당 중앙구락부 (7)
  남의사 (2)
국민당 개조파 KMT-RF
대중사회주의 Popular Socialism
국민정신

역사

신해혁명기

청일전쟁에서의 청의 패배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입헌의 승리,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로 받아들여졌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신파는 광서제에게 중용되어 빠르게 변법을 추진하고 나서나, 이는 서태후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량치차오는 이를 계기로 중국인의 노예근성에 대한 비판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목을 매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은 남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을 제한했다. 이는 곧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암시하는 것이었고, 만주와 조선에서의 분쟁은 일본의 선전포고를 자아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산발적인 교전, 양국 간의 경제 위기는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게 옭아맬 뿐이었지만, 이내 미국의 중재로 일본의 사실상 판정승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청에게 있어 입헌운동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반대로 일본에 기대를 안고있던 많은 중국인 혁명가들에게는 제국주의적 행보에 실망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태후가 죽고, 광서제가 서거하면서 푸이가 즉위한다. 섭정 짜이펑은 헌정내각을 구성하나 이는 황족내각으로 불리며 많은 개혁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이러한 와중에 보로운동은 철도 노동자들의 시위를 촉발했다. 이러한 와중 시위 진압을 위해 후베이성의 군세가 쓰촨으로 진입하면서 무창에서 봉기가 터져 나왔다.

무창기의 이후, 즉각적으로 동북에서도 빠르게 혁명이 진행되었다. 란톈웨이의 신군 제 2여단은 봉천성 북대영에서 선양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자오얼쉰은 우쥔성 등 구군을 불러들여 이를 막고자 했으나, 혁명군과 결탁한 장쭤린 등이 결탁하여 봉천성 보안회를 결성, 보안회의에서 자오얼쉰을 겁박해 봉천성을 장악하였다.

무창기의의 발발 이후 혁명은 승진가도를 이어갔다. 북양군의 개입은 이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겠지만, 산서의 옌시산과 연합한 우루전과 북양 6진의 반란은 스자좡과 바오딩을 점거하고 이들의 진압을 막아섰다. 산동의 쑨바오치마저도 위안스카이와의 회선을 단절하고 북방의 봉쇄에 집중했다. 그러나 롼저우의 협력자인 장샤오정이 패해 봉천성의 란톈웨이에게로 향하자 청 조정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마후이톈과 같은 도적은 우루전을 기습했고, 이는 우루전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북방혁명군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그가 동북으로 도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의 반역을 두려워하며 그를 지속적으로 견제하였고, 이는 위안스카이가 변절을 꾀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청조는 혁명군의 조직력에 의해 조기에 진압하기는 실패했고, 오히려 무창의 군은 북상하여 난양을 점령하고 정저우에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있었다. 북양군은 칼을 뽑아들고 그 칼 끝을 황궁으로 향했다. 이들은 황궁을 핍박하며 퇴위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많은 만주족 귀족 세력들 중 자이타오, 푸웨이, 시치아, 량비와 같은 이들은 톈진 조계로 암살 위협을 피해 탈출하였고, 끝내 1912년 2월 12일, 짜이펑은 이에 굴복하였다.

중화민국의 수립

마지막 황제의 퇴위 이후 난징 임시정부와 북양군의 거두 위안스카이는 극적으로 타협하여 중국 역사 상 최초의 근대적 민주공화정의 수립에 합의하였다. 청조의 몰락은 복드 칸국과 티베트의 독립을 초래했고 중국은 과분의 위협에 여전히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합의안에 근거해 중화민국의 두 번째 임시 총통으로서 베이징에서 취임 선서를 했고, 민국 임시정부는 베이징으로 이동하다. 그러나 공화주의 전통의 발전은 쑨원과 그의 동맹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느렸다.

위안스카이는 정치적 감각에서 뒤떨어지는 신흥 혁명가 세력들과 대비되게 전 청조의 관료 세력들과 야합하여 행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힘썼다. 이에 대비되는 동맹회 세력은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동맹회를 구성하던 핵심 축, 량치차오와 전 보황회가 혁명파를 이탈해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았으며, 동북의 군벌로 군림하는 부사관 3걸의 충성심은 믿을 수 없었고, 화흥회와 흥중회 간의 갈등도 부각되어, 신생 국민당의 당권 문제로 치달았다. 국민당의 당쟁에서 쑹자오런이 승리를 거둬냈고, 이는 12월에 이뤄진 중화민국의 초대 총선에서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국민당의 승리 이후 초대 국회는 국민당이 크게 약진하여 참의원의 의장으로 장쥐, 부의장으로 왕정팅이 취임하였다. 국민당은 의회에서 단독 과반의 지위를 얻어냈고, 이는 국민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 지방자치제, 중의원의 국무총리 선출, 헌법 제정 등을 밀어붙이며 위안스카이를 공격해왔다. 1913년 3월 20일 쑹자오런이 총탄에 의해 저격 당하게 된다.

쑹자오런의 죽음 이후 위안스카이는 본격적으로 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공작을 개시했다. 집익사, 정우회, 계축동지회 등의 조직을 지원해 국민당의 분열을 부추겼고, 공화당과 통일당, 민주당이 진보당으로 통합을 결의하자 자금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어 선후대차관 사건과 중러선언으로 외몽골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계속된 주권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자, 국민당 내부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계축전쟁

불온한 기류 속에서, 위안스카이는 선제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싱의 육군상장 계급을 취소했으며, 강서도독 리례쥔이 면직되었으며, 후한민이 광동도독의 자리를 잃었고, 안휘도독 바이원웨이가 몰락했다. 국민당의 무력 기반은 산산이 와해되었으며, 관외도독 란톈웨이, 봉천민정장 우징롄, 운남도독 차이어 등은 진보당 지지의 뜻을 밝혔으니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다. 국민당의 기의는 탄옌카이 마저 해임되면서 모두 실패하였다. 국민당 지도부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들을 규합하여 국민당은 중화혁명당으로 새롭게 당을 정비했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에 대한 공포정치를 이어나갔고, 슝스후이를 총리로 일류내각을 조직하였으나 이내 1914년 국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정식 대총통이자 군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의 행보에 진보당 또한 위안스카이와 결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진보당과 진보당에서 떨어져나간 민주헌법당, 국민당이 손 잡고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천단헌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공민당을 기반으로 하여 ‘국회의 전제정치’를 비난하고 국민당을 해산, 이내 국회를 해산해 정당정치의 종식을 자아냈다.

호국전쟁

국회의 해산 이후, 정치는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하여 어용집단인 정치회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위안스카이는 종신 총통제를 마련하여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 정계에서 군주제의 재도입 주장이 활발하게 퍼져나가며 점차 위안스카이의 야심을 부추겼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길로 나아가기 전,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위안스카이의 군주제 움직임이 극렬에 달하자 1915년 9월부터 강렬한 반군주주의 운동을 개시한 량치차오가 그 표적에 올랐다. 량치차오와 진보당 인사들은 구 국민당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며 동시에 동북과 서남의 협력자들에게 연락하며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1915년 12월 23일 긴급회의를 통해 탕지야오, 차이어, 리례쥔, 우루전 등은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제를 지키고 군주제의 영원한 폐지, 양두와 옌푸, 돤즈구이, 량스이 등 13명 측근의 처단을 요구해왔다. 위안스카이로부터 답이 돌아오지 않자 12월 25일 운남성과 봉천성 등이 독립을 선포했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소요사태에 대해서 열강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으나, 봉천성에서의 반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즉각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며, 양 측 봉기 지도자와 접촉하였다. 혁명군 지도자들은 쑨원과 량치차오의 외교적 노력의 덕택으로 일본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으나, 위안스카이가 매국적 조약을 일본에 타진한 것을 이유로 일본은 결정을 번복하고 혁명군과 대치하나, 프랑스 공사 콩티의 폭로로 위안스카이가 궁지에 몰리며,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본격적으로 아시아주의적 기치에 따라 량치차오, 쑨원 등과 본격적인 협력 관계를 수립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위안스카이 정권과 승세를 이어가는 혁명군은 류셴스, 룽지광, 탕샹밍 등도 남방에서 독립을 선포하니 그 기세가 매우 높아졌다. 장쉰과 펑궈장 리춘, 진윈펑 등도 제제를 규탄하니 위안스카이가 곧 놀라 제제를 철회하고자 했지만, 불길은 그치지 않고 상하이, 산둥성 유현, 주촌 등지를 중화혁명당에게 잃으니 군무원이 성립되어 호국군정부가 성립되었다.

위안스카이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어 이내 죽음을 맞이하였고,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군정부는 개편되어 남방군무원으로 남았고, 독립을 유지하는 남방의 성들을 대표하고 조율하는 자치기구로 남았다. 우루전은 동삼성도독으로 거듭났으며, 동북의 자치를 얻어냈다. 기존의 동맹회, 즉 진보당과 구사연구회, 중화혁명당 등은 국회로 다시 진출하여 구 약법의 회복, 국회 재소집 등을 이루어 냈으며 남북의 화의가 언뜻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으나, 구 시대의 잔재는 한 없이 작아질지언정, 결코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니 내전은 예견된 비극으로 보였다.

1차 남북화의

부원지쟁

2차 동맹회 결성과 1차 호법운동

2차 남북화의

외몽골 정벌과 혁명당 개조

안직전쟁

2차 호법운동

조오전쟁

월전전쟁

2차 안직전쟁

국공합작

동맹회 내부의 노선 갈등으로 인해 분열이 극렬해진 상황 속에서 민주입헌당과 량치차오가 쿤밍-하노이 철도를 통해 독일로부터 직접적인 협력의 대상으로 낙점되자, 쑨원은 조급해진 마음에 합작 대상을 모색했다. 1922년의 홍콩 파업과 선전부장으로 광주정부에 재직 중이던 천두슈 등을 통해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을 결정할 수 있었고, 민주입헌당으로 인해 좌경화된 국민당의 상황 속에서 쑨원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국민당은 단순한 단일정당이 아니라, 당내당으로서 통일공화당과 공산당을 포용한 거대정당으로 변모했다.

2차 안직전쟁의 와중에서 이들은 호남과 강서, 복건성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맞았는데, 호남성은 특히 상황이 복잡했다. 청첸과 탄옌카이 등 통일공화당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오헝티와 갈등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자오헝티와 탕성즈 등의 인물 또한 자치론을 주장하는 와중에 이들의 사상적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2차 안직전쟁으로 우페이푸가 북방과 동방의 정세에 집중하는 동안 비밀리에 쑨원에게 호남 연치정부 수립을 종용했는데, 쑨원은 이를 호남을 동맹회의 영향력에 온전히 포섭할 기회로 여겼고, 호남성헌에 대한 논의를 국회로 넘겼다. 천중밍 또한 이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로 여겼고, 루디핑, 천중밍, 황이어우 등은 직접 창사로 향해 양 측 세력의 화평을 조장하고 호남공화국의 자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는 쑨원과 국민당이 천중밍의 월권에 대한 반감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직풍전쟁

동북에서는 한국과의 간도 분쟁과 내부적인 파벌 갈등과 남부와의 절연 문제로 인해 문제를 겪는 동안, 그동안의 군공에도 불구하고 우페이푸에 의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불만이 쌓여있던 펑위샹이 후레와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돤치루이가 공격을 감행하도록 부추겼다. 또한 우루전 또한 군을 움직여 긴장감을 조성하자 직계는 순식간에 확대된 전선에 대응하느라 급급했다. 이에 1924년 10월 26일 펑위샹이 베이징에서 정변을 일으켜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했다.

베이징의 펑위샹은 자신의 군세를 국민군으로 칭하고, 서북과 동북, 남쪽과 연계하여 직예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했다. 국민군은 붕괴한 직예 전선의 빈틈을 파고 들었고, 직예, 산동, 하남, 섬서 4개 성을 장악했다. 우페이푸는 후퇴하여 우한으로 향했고, 차오쿤은 톈진에 은거했다. 직예의 주도권은 장강의 지배자로 거듭난 민절순열사 쑨촨팡와 우페이푸가 다투는 형국이 되었고, 북경에 설치된 임시집정정부는 쑨원, 우루전, 돤치루이, 펑위샹의 4강회의를 개최하였다.

쑨원의 죽음과 유보된 혁명

쑨원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쓰러진 쑨원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각동맹은 무너졌으며, 광저우 정부는 차기 총통직 문제로 북벌의 동력을 상실했다. 통일공화당과 공산당은 각각 국민당 내부의 좌/우익과 손잡기 시작했으며, 당권 투쟁은 극단으로 치닫았다. 랴오중카이 암살 미수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국민당 내 우익분자들의 과격성은 당의 통합을 크게 저하했고, 통일공화당 또한 이러한 우익과의 동맹을 재고했다. 왕징웨이는 군 부문에서 천중밍과 대립관계에 있던 장제스를 기용했고, 쉬충즈를 회유하면서 천중밍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했다.

왕징웨이는 새로운 북벌을 통해 북방 혁명파와 협력하기 위해 사전 외교 공작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운남의 민주입헌당과도 화해를 추진했다. 이들은 사천에서의 민주입헌당 우위를 인정하며, 남아있는 북양파의 잔재를 무너뜨리고자 했고, 천중밍을 달래기 위해 그의 성장 노선을 인정하며 동북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사를 파견했다.

반풍전쟁

중원을 장악한 펑위샹의 국민군은 반달리즘 행위를 거듭했으며, 그 유명한 ‘핍궁’사건으로 인해 동북군과의 갈등이 발생했다. 이들의 군세는 진군을 멈추지 않았고, 호북성과 하남성의 접경 지역에서 진군이 막히자 쉬저우와 안칭을 향해 또다시 나아갔다. 이들의 팽창 지향적 정책은 직예의 세력권이 무너졌다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고, 민절순열사인 쑨촨팡을 중심으로 오성연군이 조직되었으며, 우페이푸 또한 호남성을 공격해 크게 패퇴시키고 다시 자오헝티와 손잡으며 세력을 다시 굳혀 화중의 지배자로 우뚝 섰다.

펑위샹은 고조되어가는 갈등 속에서 타개책으로 옌시산과의 합작을 제의했다. 그러나 펑위샹 휘하의 장군들은 산서성의 행정을 크게 어지럽히기 시작했고, 옌시산은 우루전과 합작하며 반풍동맹을 결집했다. 이들은 즉각적으로 행동하여 스자좡, 뤄양, 정저우, 쉬저우, 쉬창, 베이징 등에서 집중 포화를 가했으며, 국민군은 총체적인 붕괴를 맞이해 서북으로 도망갔다.

동맹회 1차 북벌

직예가 화동과 화중에서 세력을 회복한 것도 모자라 남방을 위협해오자, 동맹회는 이들의 세력을 일소코자 하였다. 이내 1926년의 해가 밝자 왕징웨이는 천중밍과의 회담을 통해 북벌의 시기가 당도했음을 선포하고, 복건전역에 천중밍을, 호남전역에 장제스를, 강서전역에 쉬충즈를 파견했으며, 쿤밍의 정권과도 협력하여 쓰촨 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동북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신샹과 지닝, 타이안 등에서 직예 병력과 격돌하였는데, 우세를 점하고 철도를 따라 남하해왔다. 이들의 공세는 이내 저지당했는데, 동북군 내부의 파벌 갈등과 통일 세력을 저지하고자 하던 일본과 한국의 국경도발이 이어져오면서 북방의 전선은 멈췄다.

장제스의 군대는 호남의 수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탕성즈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빠르게 창사를 수복하고 우한에 포구를 겨눴지만, 우페이푸의 방어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고, 장제스의 군세가 우한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천중밍의 군세는 푸저우를 점령했으며, 쉬충즈의 군세는 난창을 점령하고 주장과 징더전으로 군을 나눠 진군하였으나, 우페이푸와 쑨촨팡의 군세가 주장의 군세를 격파하고 장제스의 뒤를 급습하자 천중밍 또한 원저우로 향하던 군을 돌려 장시성의 수습에 주력할 뿐이었다.

남부의 군세는 호남과 강서, 복건 세개 성을 점령하고는 대치 상태에 들어섰다. 전선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우페이푸와 쑨촨팡의 갈등이 거세졌는데, 지지기반이던 복건성을 상실한 쑨촨팡은 권위가 크게 흔들린 상태였고, 주도권은 안휘성장 천댜오위안의 지지를 얻어낸 우페이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동남역치와 만주사변

동북에서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봉합하고 군을 다시 중원으로 돌린 동북군은 산서와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옌시산은 강을 건너 뤄양으로 나아갔으며, 산둥에서 직예의 군세는 완전히 축출당했다. 스자좡에서 출발한 우루전의 군세는 철도를 통해 정저우를 거쳐 우한까지 도달하면서 혁명의 기세를 완전히 드높였다. 파벌의 지휘부가 완전히 붕괴한 직예는 쑨촨팡의 지휘 아래 역치를 단행했다. 이들은 호법정부의 깃발을 올렸으며, 남직예와 절강의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벌의 종료 이후 중국 전역이 2차 동맹회로 일컬어지는 세력의 깃발 아래 통합되면서, 이들은 사법, 입법, 행정 면에서의 통일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정부와 국회는 북경으로 이전해갔고, 비대해진 군대를 해체하고 이들을 노동자로 흡수하기 위해 동북 시장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혁명과 맞닿으면서 지나치게 위험해져있던 관동군을 크게 자극했고, 주권을 회복한 한국의 부추김을 통해 남만주 지역의 치안 사정이 매우 혼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루전은 동북 지방의 안정을 위해 묵뎬으로 향했으나, 이는 사실상 고립되어있는 관동군에게 즉각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관동군은 묵뎬에서 우루전을 폭사시켰으며, 주요 도시들에서 한국군과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만주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관외의 반혁명파 세력들과 협력해나가면서 만주를 장악했다.

북경사변과 종사당의 난

만주가 즉각적으로 상실되고, 동북의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던 우루전의 죽음은 북경 정부에 혼란을 초래했다. 한 편으로 당시 정계는 새롭게 재편되어가고 있었는데, 통일공화당은 국민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고, 입헌민주당은 동북과 홍콩 등지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청년당이 그 지지세를 흡수해나갔으며, 국민당은 점차 좌경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항하여 쑨커와 국민당 우파 또한 당적에는 이름이 올라와 있지만, 새로운 파벌을 꾸려나갔다.

랴오닝성과 지린성이 대부분 점령 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중국 정부는 란톈웨이를 주축으로 한 토벌군을 구성하여 파병했으나, 이들은 진저우 인근에서 경악할만한 소식을 듣는다. 정계 내부에서의 책임 공방 끝에, 중국 청년당이 산동군벌과 연합하여 반기를 들었고, 동북군의 주축으로 기능하던 장쭤린 등의 녹림파가 군비 미지급으로 열하성에서 보급을 원활히 하지 않자 이들은 관내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만주 지역의 상실은 북경 정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과 궈쑹링이 영도하는 육대파는 호북성을 장악하고 직예와 합종연횡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하남 지역에서 발호한 토비들의 권세가 날로 커져 하남성장에 기존 동북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량비를 임명하였는데, 량비는 관동군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켜 하남의 독립을 선포했고, 이는 식물로나마 기능하던 정부의 권력을 완전히 파괴했다.

민월사변과 하이루펑 사건

북경혁명정부가 사실상 와해 수순을 밟자 정당들 또한 기존 군벌들의 할거지역으로 나아갔다. 국회는 임기가 다 한 국회의원들이 해산했고, 국민의 대변자로서 국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당이 광동과 복건, 강서 지역으로 귀환하였고, 장제스는 복건과 강서에서 천중밍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국민당 중앙의 영향력 아래 귀속 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복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사들을 크게 자극했고,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의 군대는 푸저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생산인민당과의 협력 아래 진행되었지만, 삽시간에 진압당했다. 그러나 해당 반란 진압에 광동군이 진입하지 않으면서 장제스와 천중밍 간의 갈등이 극단에 치닫게 되었다.

하이루펑 해방구는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으나, 이들의 모험주의적 경향성은 국민당군과의 전투로 이어졌는데, 해방구의 지도자들은 공산당 지도부로 복귀하여 국민당의 비협조적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합작의 파기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면서 공산당은 위기의 기로에 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당 내 용공주의자들과 우파 지도부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장제스는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면서 천중밍, 왕징웨이 등과 격한 말다툼을 나누었으며, 탈광동화를 위한 목적으로 직예 잔당에 대한 공세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