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페당 타이틀}} {{공식 설정}} {{페당}}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border:2px solid #000000;" |- ! colspan="2" style="background:#000000; color:#ffc500;" "text-align: center;" | |- ! colspan="2" style="background:#f5f5f5; color:#000000;" "text-align:right;" | [[파일:Kaikok_City_Skyline_(night).jpg|450px]]<br/> |- ! colspan="2" style="background:#f5f5f5; color:#000000;" "text-align:right;" | [[파일:Pedang Shrine.jpg|450px]]<br/> |- ! colspan="2" style="background:#f5f5f5; color:#000000;" "text-align:right;" | [[파일:Yau Sai Dik.jpg|450px]]<br/> |- ! colspan="2" style="background:#000000; color:#ffcb21;" "text-align: center;" | <big>'''페당의 주요 전경'''<ref>위에서부터 수도 [[카이콕]]의 야경, [[성 아우구스티노 웡 성당]], [[태조(페당)|태조 창해왕]]의 석상이다.</ref></big> |- |} '''페당'''({{llang|zh|毘燈 <small>피덩</small>}}, {{llang|zh-yue|Pei3 Dang1 <small>페이당</small>}})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이다. 국토 면적은 총 35,831 km<sup>2</sup>로 [[페당 섬]]과 [[콰이푸이 섬]]을 중심으로 하여 영토가 구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페당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인구는 대략 1,140만 명이며,<ref>[[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몽골]](약 330만 명) 다음으로 적은 인구 수다.</ref> 수도는 [[카이콕시|카이콕]](啓覺), 최대 도시는 [[포트엘리엇시|포트엘리엇]](艾略特港)이다. 고대에는 [[서족]], [[백월]]이 정착하였고 [[남월]]에 지배를 받던 중 [[한무제]]에 의해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손권]]이 [[섭우]]를 시켜 정벌을 시도, 원주민들을 병력으로 차출했다. 그 뒤 [[하이난 섬]]처럼 [[유배지]]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송나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한족]]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국 대륙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여러 독립적인 [[군벌]]이 난립하였는데 이를 [[조기 페당 시대]]라 하였다. 13세기 말에 [[남송]] 망명 세력이 주축이 된 [[후송]]이 전국을 통일하였으나 [[정화]]가 이끌던 명군에게 항복, [[광둥성]]으로 편입되었다. [[명나라]]의 멸망 이후엔 [[소무제]]와 함께 광둥성에서 [[반청복명]]을 이끌던 [[태조(페당)|유세적]](游世迪)이 세력을 규합해 페당 일대를 점유, 명 부흥 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에 청나라는 [[천계령]]을 반포하는 등 페당을 압박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수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1684년 [[유청화의]]를 체결하여 반청복명 포기 및 청과의 [[페당 해협]] 공동 관리를 조건으로 [[조공국]] 지위 승낙 및 유세적을 '창해왕'(漲海王)으로 봉하였다. 그 후 페당은 [[남중국해]] 내 무역 거점이자 서양 세력을 견제하는 전초기지가 되었고, 18세기 말부터는 영국 상인의 적극적 지원 아래 [[아편]] 산업의 배후지로 지목되어 청나라 전역에 이를 유통시켰다. 19세기 중반에는 [[남중국해]] 해상에서 활동하던 [[해적]]과 [[서구 열강]]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1855년 [[영국]]과 [[룽아문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보호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나 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의 유지를 꾀했고 [[베이징 조약]]에 이르러서야 영국에게 [[종주권]]을 넘겼다. 영국은 [[페당 총독부]]를 설치하고 [[근대화]]를 추진해 오늘날의 [[포트엘리엇시|포트엘리엇]], [[글래드스턴시|글래드스턴]]과 같은 유럽식 도시들을 조성하였다. 또한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힘들다는 점을 이용해 많은 [[군벌]] 인사와 혁명당원들이 망명해오기도 했다. 1941년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 1945년까지 군정 체제에 돌입, [[성 바르톨로메오 병원 대학살]]를 비롯한 [[전쟁범죄]]가 자행되었다. 이에 왕실의 지원 아래 민중들은 [[게릴라]]를 조직하고 항일 투쟁에 나섰으며, 1945년 9월에 이르러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소탕했다. 이후 영국은 탈환한 페당에 대해 기존 왕실을 폐지한 뒤 [[왕령식민지]]로 통치 체제를 개편코자 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히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1949년 [[자치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커크 청]](柯克·張)과 그가 창당한 [[페당 민족해방연맹]]은 독립을 통한 국권 회복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결국 대대적인 독립 열기에 굴복한 영국은 1958년 페당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이듬해 3월에 총선을 실시, 페당 민족해방연맹이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 페당의 총리가 된 커크 청은 영국과 유사한 형태의 정치 제도를 도입하려했다. 허나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능종]]은 군사를 동원해 [[우국 사태]]를 일으켜 커크 청을 추방한 뒤<ref>추방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왕실 폐지와 [[민주화]]를 주장하는 비판적 논설을 쓰면서 활동했으며 여러 반페당 단체를 이끌었다. 2015년 지병 악화로 사망했다.</ref> [[페당 민족해방연맹]]을 해산시켰다. 이후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고자 강력한 경제우선개발 정책을 실시했으며 영국에 도움을 받아 [[페당 해협]]에 위치한 해저 유전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의 경제에서 [[경공업]]·[[중공업]]을 위시한 다각적 산업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제 통치에 대한 불만은 지속되었고, 1976년에 [[레이메이 폭동]]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하면서 독재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오늘날의 페당은 [[동남아시아]], [[중국]], [[필리핀]]을 잇는 항로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무역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 아래 [[첨단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2019년부터 정치적 위기와 경제 제재 아래 놓인 [[홍콩]]을 대신해 아시아의 [[금융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2021년을 기점으로 [[야당]] 탄압과 [[정경유착]]으로 분노한 국민들이 [[페당 민주화 운동]]을 일으킴에따라 향후 미래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 각주 == {{각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ISO 639 이름 (원본 보기) 틀:Lang (원본 보기) 틀:Llang (원본 보기) 틀:각주 (원본 보기) (보호됨)틀:각주/styles.css (원본 보기) 틀:공식 설정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언어 이름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틀:페당 (원본 보기) 틀:페당 타이틀 (원본 보기) 모듈:Langname (원본 보기) 모듈:Langname/data (원본 보기) 페당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