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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21년 로버트 보든의 연임을 위해 아서 메이건이 총리직과 보수당 대표직을 모두 사임한 후에야 국민통합당은 가까스로 정권 유지에 성공했다. 보든의 국민통합당은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여, 보든이 주장한 "국민통합시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캐나다가 전쟁에서 평화시기로 전환하는 국면을 완전히 기득권이 주도하도록 보장한 선거이기도 했다. | 결국 1921년 로버트 보든의 연임을 위해 아서 메이건이 총리직과 보수당 대표직을 모두 사임한 후에야 국민통합당은 가까스로 정권 유지에 성공했다. 보든의 국민통합당은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여, 보든이 주장한 "국민통합시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캐나다가 전쟁에서 평화시기로 전환하는 국면을 완전히 기득권이 주도하도록 보장한 선거이기도 했다. | ||
전후 보든의 집권기 동안, 연맹에 잠시 속해있던 자유주의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권으로 돌아갈 것이 당연했다. 처음부터 연립 내각은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적어도 1920년에 보든은 스스로의 공약을 이미 달성한 상황었다. 그렇게 보든의 내각은 1925년이 지나서야 붕괴되었고, 마침내 원내 과반수를 상실했다. 궁극적으로 캐나다의 정당들은 기득권층을 위해 일하는 것은 동의했지만, 기득권층을 위해서 만 일한다는 한계 속에서, 결정적으로 캐나다를 이끌 비전에 있어서는 항상 분열된 상태였다. 20세기가 캐나다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윌프리드 로리에 전 자유당 총리의 낙관적인 예측은 이제 대부분의 캐나다 사람들이 코웃음치는 농담으로 전락했다. 로리에 자신은 전쟁 중 서거했고, 그의 통치 기간인 19세기 후반 캐나다에 번영을 가져온 고인의 죽음은 캐나다 사람들에게 캐나다의 번영을 노잣돈으로 가져간 것처럼 보였다. 1925년의 선거 직후 보든 총리는 샤토 로리에의 방에서 누워 숨을 거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켈트 디아스포라에 합류하기 위해 고향인 노바스코샤로 돌아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 |||
옛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정치적 거물이 세상을 떠나면서, 캐나다는 정치적 무명성에 대한 깊은 국가적 불안감에 빠졌다. 이런 불안의 원인은 당연히 1925년 {{카라링크|영국 혁명}}으로 본토를 잃은 것 때문이다. | |||
1925년 보덴이 서거하자, 메이건은 보수당의 총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5년 선거에서 {{카라링크|매켄지 킹}}이 이끄는 자유당에 패배했다. 1925년은 캐나다 정부의 시각에서 격동의 해였다. 그러나 각 정당과 보든, 메이건, 킹 등의 대표들은 접근법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보였지만, 영국 왕실과 망명자들을 캐나다로 입국시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캐나다가 다가오는 폭풍을 어떻게 이겨낼 지에 대해서는 킹이 전임자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망명자나 망명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들지 못했던 캐나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 |||
=== 협상국의 지도자 === | === 협상국의 지도자 === | ||
생디칼리스트들의 본토 전복은 캐나다의 외교와 내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링크|프랑스 코뮌|프랑스}}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급진적인 숙청과 폭력에 많은 영국의 귀족, 기업인, 우익 정치인들은 물론, 일부 중산층과 부유층 수천 명이 {{카라링크|인도 자치령|인도}}, 아프리카, {{카라링크|오스트랄라시아}}와 같은 지역이 아닌, 대영제국에서 유일하게 혁명의 불길이 닿지 않은 캐나다로 망명했다. 망명자들과 함께 영국 육군의 반란군도 같이 대서양을 횡단했다. 이로 인해 캐나다는 {{카라링크|서인도 제도 연방}}과 {{카라링크|인도 자치령}}과 같은 영 연방 잔존 국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빠르게 맡게 되었다. 1926년 국민투표를 통해 뉴펀들랜드 자치령은 엘더 자치령으로 통합되었다. | |||
망명자들의 도착은 캐나다 정계에 격변을 일으켰다. {{카라링크|매켄지 킹}} 총리가 망명 중인 영국 정부가 캐나다 정부를 대체하는 것을 거부하자, 영국은 캐나다 총독직을 폐지하고 {{카라링크|조지 5세}}를 국가 원수로 올렸다. 캐나다와 영국 육군은 영국-캐나다 연합군으로 지휘 체계가 변경되었다. 캐나다의 정치는 우경화되어, 진보주의자들은 {{카라링크|생디칼리스트}} 동정론자로 비난받았고, 자유당 총리 킹은 제국의 대부분을 생디칼리스트, 민족주의자, 독일에 의해 빼았겼다고 비난 받았다. 게다가 국왕과 망명자들은 제국을 유지하고 본토 수복을 위해 고안한 재무장 프로그램과 공격 계획으로 캐나다를 이끈 것이 드러나 큰 비난을 받았다. 대전쟁의 여파로 독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망명자들이 캐나다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조지 5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고립으로 미국이 포기한 지위를 캐나다가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희망은 이제 웨일스 공 {{카라링크|에드워드 앨버트}}에게 집중되고 있다. 과연 그는 최초의 진정한 캐나다 국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망명 중인 영국 왕인 채로 남을 것인가. | |||
망명자들의 도착은 캐나다 정치 생활에 큰 격변을 일으켰다. 매켄지 킹 총리가 망명 중인 영국 정부가 캐나다 정부를 대체하는 것을 거부하자 총독직은 폐지되고 조지 5세가 직접 교체되었다. 캐나다와 영국 육군은 영국-캐나다 연합군의 지휘 하에 병합되었다. 캐나다의 정치는 우경화되었고, 여전히 강력한 진보주의자들은 신디칼리스트 동정론자로 비난받았고, 자유당 총리 킹은 망명자들을 제국의 대부분을 신디칼리스트, 민족주의자, 독일에 빼앗겼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왕과 영국 망명자들은 빠르게 캐나다 정치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되어, 제국의 통합을 보존하고 홈 아일랜드의 재정복을 준비하기 위해 고안된 재무장과 공격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독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조지 왕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고 강조했고, 오히려 그들의 나라를 고립으로 인해 버림받은 미국의 평화 유지자로 보고 싶어했다.미국주의자이다. 그러나 모든 희망은 이제 조지의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앨버트에게 집중되어 있다. 망명 중인 영국 왕-황제나 다름없다. | |||
== 정치 == | == 정치 == | ||
캐나다는 영국 왕이 통치하는 연방제 의회 군주국이다. 캐나다 총독직은 1926년에 폐지되었으며, 마지막 총독은 비미의 바론 빙이었다. 의회는 국왕, 선출된 하원, 임명된 상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의 새로운 구성원의 대다수는 국왕이 임명한 영국 망명자이다. 하원의원은 선거구에서 단순 다수결로 선출된다. 총선은 5년 이내에 총리의 실시로 진행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하원에서 내각을 불신임한 경우이다. 상원은 영국, 캐나다의 세습 또는 임명 의원으로 구성된다. 공식적으로는 국왕과 많은 귀족들이 망명함으로써 1925년 이후 상원은 망명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굉장키 큰 상태다. 본토와 이외의 제국, 특히 킹 수상이 "앵글로색슨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 대한 재정복을 갈망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매켄지 킹 총리는 캐나다 자유당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내각 구성원이 하원 의원이어야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는 등, 보수당 망명자들에 의해 압도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와는 반대로 캐나다 내에서의 자유당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한편 상원 내의 좌파 의원들은 캐나다가 독일처럼 의회민주주의의 사문화를 통해 전제군주국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또 다른 정치적 불안에는 프랑스계 퀘백 주민들이 영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프랑스계 주민에 대한 불리한 정책의 증가,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도 포함된다. | |||
'''징병법:''' 지원자만 | |||
'''경제법:''' 민간경제 | |||
'''무역법:''' 수출중점 | |||
'''정부수반:''' 매켄지 킹(Mackenzie King) | |||
'''외무장관:''' 레스터 B. 피어슨(Lester B. Pearson) | |||
'''경제장관:''' C.D. 하우(C.D. Howe) | |||
'''치안장관:''' 어니스트 라포인테(Ernest Lapointe) | |||
'''정보장관:''' 공석 | |||
=== 매켄지의 정책 === | |||
현재 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은 캐나다 자유당으로, 다른 제국 구성 국가들과 달리 허버트 애스퀴스, {{카라링크|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대전쟁의 패배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정계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았다.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영국 귀족들이 영국 혁명이 일어나 캐나다로 망명할 때 캐나다 총리를 지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캐나다 정치를 재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여전히 영국 귀족들과 망명자들이 제국을 잃은 것을 비난하면서도 "앵글로색슨 세계" 내의 다른 국가들과의 상호 의존적이고 통합된 경제에 기반한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촉구했는데, 이는 평화 기간 중 캐나다의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의 제국주의적 의무를 인지하고 있는 영국-캐나다 정치 및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잘 받아 들여지지 않은 정책이었다. 비록 그가 {{카라링크|미국제일당|미국 제일당}}을 {{카라링크|미노조연맹|미국 생디칼리즘}}의 잠재적 난제로 보았지만 일부에서 추진하는 "캐나다 빅스틱 정책"을 거부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정당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 |||
그는 또한 영국의 금 보유고와 선진적인 기술의 전도를 통해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산업의 확장을 통해 강력한 반생디칼리즘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산업화를 통한 노동자 시위의 증가를 두려워한 킹은 노동자의 권리 개선을 거부하는 대신 왕립 캐나다 기마 경찰과 함께 1925년의 위니펙 총파업을 진압하면서 노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많은 RCMP 장교들이 가한 폭력은 캐나다 정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고, 킹 휘하의 자유당은 협동연방당(CCF, Canadian Commonwealth Federation)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서두르는 자유당"에 불과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보수당에 대한 범국민적 반대를 형성하기 위해 좌익의 손을 빌린 결과 캐나다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 동맹을 통해 킹은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고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킹 집권기의 주요 야당은 보든이 사망한 이후의 아서 메이건 경과 R.B. 베넷 경이 이끄는 영국의 지원을 받는 보수당이며, 영국 혁명 이전의 정치인인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및 윈스턴 처칠의 지지를 받았다. 1930년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당은 제국 통합을 위한 정당으로 자신들을 내세웠다. | |||
=== 자유당 대표와 왕실의 관계 === | |||
=== 퀘백 문제 === | |||
== 군사 == | == 군사 == | ||
=== 육군 === | |||
=== 해군 === | |||
=== 공군 === | |||
== 외교 == | == 외교 == | ||
== 경제 == | == 경제 == | ||
=== 산업 === | === 산업 === | ||
<big>시작 시</big> | <big>시작 시</bi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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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석유 | * 4 석유 | ||
=== | == 문화 == | ||
== 같이보기 == | |||
== 각주 == | == 각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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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2일 (월) 23:1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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