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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누오우모노(犬追物)나 승마 외 사진 촬영이나 불꽃놀이 등에도 흥미를 가지는 등 폭넓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 * 이누오우모노(犬追物)나 승마 외 사진 촬영이나 불꽃놀이 등에도 흥미를 가지는 등 폭넓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 ||
* 서양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1882년 본인이 직접 슈리성에 전기를 들여오고 불을 밝혔을 정도로 서양의 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말년에는 양복을 입고 상투를 틀지 않는 등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전통을 중요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버지 히사미츠의 | * 서양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1882년 본인이 직접 슈리성에 전기를 들여오고 불을 밝혔을 정도로 서양의 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말년에는 양복을 입고 상투를 틀지 않는 등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전통을 중요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버지 히사미츠의 방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 ||
* 병을 치료할 때 서양에서 들여온 약을 절대 먹지 않고 일본 전통 약이나 한약을 복용했다. 병이 위독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 * 병을 치료할 때 서양에서 들여온 약을 절대 먹지 않고 일본 전통 약이나 한약을 복용했다. 병이 위독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 ||
2021년 9월 18일 (토) 00:36 기준 최신판
사쓰마국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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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요시 | 忠義 | |||||||||||||||||||||
출생 | 1840년 5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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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가고시마현 가고시마군 요시노무라 (現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
사망 | 1897년 12월 26일 (57세) | ||||||||||||||||||||
사쓰마국 슈리특별시 슈리성 | |||||||||||||||||||||
국적 | 에도 막부 (1840~1868) 일본 제국 (1868~1879) 사쓰마국 (1879~1897) | ||||||||||||||||||||
재위 | 사쓰마번 다이묘 | ||||||||||||||||||||
1858년 12월 28일 ~ 1871년 8월 29일 | |||||||||||||||||||||
사쓰마국 국왕 | |||||||||||||||||||||
1879년 3월 7일 ~ 1897년 12월 26일 | |||||||||||||||||||||
즉위식 | 1880년 3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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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타다요시 (忠義)는 사쓰마국의 제1대 국왕이자 시마즈 왕조의 제29대 수장이다.
아명은 소노스케(壮之助), 통칭 마타지로(又次郎)이다. 원복 후 첫 이름은 다다노리(
일생
1840년 5월 22일 시마즈 씨의 분가인 에치젠 시마즈 가의 당주 시마즈 히사미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자가 되어, 1858년 나리아키라 사후 그 유언에 따라 호적을 잇게 되었다. 유언은 나리아키라의 아들 아키라마루(哲丸)가 어리기 때문에 임시로 입양한 형태였지만, 아키라마루도 요절하였기 때문에 본인이 시마즈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번정의 실권은 조부 시마즈 나리오키와 후견인이 된 아버지 히사미쓰, 그 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에게 장악되어 다다요시 자신은 큰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다요시가 실권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사쓰마 번이 일치단결하여 도막운동을 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었다.
1879년 일마조약에 따라 사쓰마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초기 10년 동안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섭정을 하였다. 다다요시 본인도 사이고 다카모리와 아버지 히사미쓰에 밀려 큰 영향력이 없었기에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두 사람에게 개혁과 권한을 일임하는 편이였다. 1888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신하 된 도리로서 10년을 넘어가는 것은 안 된다"는 발언을 남기며 섭정직에서 물러나 다다요시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본인의 생각보다는 원로들의 생각대로 하였고 정치에 간섭하는 것 역시 꺼렸기에 서거할 때 까지 정치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1897년 12월 26일 슈리성에서 서거하였다. 왕위는 왕태자 타다시게가 물려받았다.
여담
- 이누오우모노(犬追物)나 승마 외 사진 촬영이나 불꽃놀이 등에도 흥미를 가지는 등 폭넓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 서양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1882년 본인이 직접 슈리성에 전기를 들여오고 불을 밝혔을 정도로 서양의 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말년에는 양복을 입고 상투를 틀지 않는 등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전통을 중요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버지 히사미츠의 방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 병을 치료할 때 서양에서 들여온 약을 절대 먹지 않고 일본 전통 약이나 한약을 복용했다. 병이 위독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