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두 판 사이의 차이

101번째 줄: 101번째 줄: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델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델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처음부터 소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83년까지만 해도 델련의 공업 생산량은 [[서평연방공화국|서평국]]의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델련 성립 이전 북부지방의 산업 혁명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어 델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ref>사실 북부지방 당시에도, '''못 사는 지방'''이라는 인식이 한성국 전체에 깔려있었을 정도로 이 지역 민생들의 삶은 처참했다.</ref> 그렇게 북부지방에서 연방을 갓 독립시킨 델타 공산당은 델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델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델타 공산당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의 일부를 체제에 도입하였다.
처음부터 델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83년까지만 해도 델련의 공업 생산량은 [[서평연방공화국|서평국]]의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델련 성립 이전 북부지방의 산업 혁명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어 델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ref>사실 북부지방 당시에도, '''못 사는 지방'''이라는 인식이 한성국 전체에 깔려있었을 정도로 이 지역 민생들의 삶은 처참했다.</ref> 그렇게 북부지방에서 연방을 갓 독립시킨 델타 공산당은 델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델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델타 공산당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의 일부를 체제에 도입하였다.


1986년 제 1대 서기장 사후부터 시작된 공산당내의 혼란기에 경쟁자들을 제치고 1987년 최고 지도자가 된 제 2기 서기장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델련을 강력한 공업국가로 바꾸길 원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서평연방공화국|경쟁자들]]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델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자유진영측을 위협할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내긴 했다. 1985년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로 자유진영이 한참 혼란기에 빠져있을때 델련은 경기 불황을 무시하고 성장하였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SSA 서버]] 제 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그시대 델련 인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제 2기 공산당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해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고, 2005년 국가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공산당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반동분자'들을 델련 남부의 비밀 도시들에 있는 [[노동 교화소]]에 강제로 끌고 갔다.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과 죄없는 인민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야말로 독재정치를 했다. 이 [[대숙청]]을 인식해 델타 공산당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잔존 보수파나 부르주아, 부농들은 [[서평민주공화국|서평국]]이나 [[청라 연방 공화국|청라국]]으로 도망을 갔으나, 2005년 [[델타 연방 정보성]]에서 보낸 요원들에게 전부 암살 또는 실종되었다. 물론 델타 공산당은 모른척 대외적으로 부인했고, 제 3기 델타 공산당에서는 당시 암살에 관여했던 [[델타 연방 정보성]]요원들에게 [[델타연방군/훈장|델타사회주의연방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1986년 제 1대 서기장 사후부터 시작된 공산당내의 혼란기에 경쟁자들을 제치고 1987년 최고 지도자가 된 제 2기 서기장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델련을 강력한 공업국가로 바꾸길 원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서평연방공화국|경쟁자들]]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델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자유진영측을 위협할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내긴 했다. 1985년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로 자유진영이 한참 혼란기에 빠져있을때 델련은 경기 불황을 무시하고 성장하였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SSA 서버]] 제 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그시대 델련 인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제 2기 공산당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해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고, 2005년 국가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공산당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반동분자'들을 델련 남부의 비밀 도시들에 있는 [[노동 교화소]]에 강제로 끌고 갔다.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과 죄없는 인민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야말로 독재정치를 했다. 이 [[대숙청]]을 인식해 델타 공산당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잔존 보수파나 부르주아, 부농들은 [[서평민주공화국|서평국]]이나 [[청라 연방 공화국|청라국]]으로 도망을 갔으나, 2005년 [[델타 연방 정보성]]에서 보낸 요원들에게 전부 암살 또는 실종되었다. 물론 델타 공산당은 모른척 대외적으로 부인했고, 제 3기 델타 공산당에서는 당시 암살에 관여했던 [[델타 연방 정보성]]요원들에게 [[델타연방군/훈장|델타사회주의연방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어쨋든 자유진영 열강들이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델련과 옆동네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은 나란히 약진했고, 델련은 초기에 반공을 외치는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에 맞서 자유진영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자<ref>그렇지 않아도 사회주의를 경계하던 국가들이니 만큼 선뜻 지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ref> 되려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 서버를 놀라게 한다. 이후 20년동안 잘 나가다가 2025년 6월 독일에 의하여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잉여가 된 군 지휘 체계로 인해 초반에 크게 밀렸으나,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을 사수하고 1943년 8월 지상 최대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까지 승리 하면서 전황은 반전되고, 결국 1945년 5월 베를린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소련 역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부터 진격해 내려왔고, 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했다. 그때의 진격으로 소련은 사할린 섬 전역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2700만에 달하는 인민들이 희생되었긴 하지만.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하는데, 약 5년간 전쟁하느라 공업과 농업의 기반이 전부 날아가버려서 재건하는 데 또 인민이 갈려야 했다.
어쨋든 자유진영 열강들이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델련과 옆동네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은 나란히 약진했고, 델련은 초기에 반공을 외치는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에 맞서 자유진영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자<ref>그렇지 않아도 사회주의를 경계하던 국가들이니 만큼 선뜻 지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ref> 되려 [[송도국가사회주의공화국|송도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 서버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았다. 소련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그 시절에서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는 전세계에 소련과 몽골 인민 공화국, 그리고 얼마 후에 소련에 편입될 투바 인민 공화국이 끝이었으나, 2차 대전의 승리로 그 잃었던 영토를 모조리 되찾음은 물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을 전부 집어삼켜 그 세력과 영향력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잭팟이 터져 세력을 크게 넓혔다. 한편으로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권으로 갈아타고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아프게 하며, 쿠바뿐만 아니라 먼로 독트린 이후 계솟 미국의 앞마당 취급 받았던 중남미에서 대규모 좌익 운동, 좌파 정치 세력을 지원하여 자본진영의 총본산 턱 밑에 공산주의의 칼을 들이대는 성과를 거둔다. 그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소련은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서 약 50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과 보이지 않는 대결을 반복하였다. 통칭 냉전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 한반도와 베트남,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온갖 지역 국가들이 이념 대립의 대리전장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 확실하게 개발살을 내버리려고 양 진영의 주요 도시에 항상 ICBM을 겨누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게 강대한 군사력과 매혹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소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부족한 가운데 사적 소유가 철폐된 결과 등장한 '비민주적인 계획경제'에 내재된 효율성 부진으로 인해 전면적 대립보다는 데탕트, 공존 경쟁이 추구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서기장이 된 사람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였으나 그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만에 사임하였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스탈린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신격화를 중단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까내렸으며 또 스탈린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의 숨통을 트게 하고 권력투쟁에서 지면 처형이나 다름없던 스탈린 체제의 정치를 크게 순화시켰다. 수용소의 인구도 스탈린 때 1300만명에서 1956년에는 500만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러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서방과 소련 내부는 물론이고 공산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 비난하였고 결국 이 두 국가는 국경분쟁까지 벌어지는 등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졌다. 동유럽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났고 소련은 이를 진압하였다. 스탈린 때까지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했음에도 정작 인민의 삶의 질은 낮은 수준이었지만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 삶의 질도 상당히 나아졌다. 생활 수준도 올랐고 미국의 잡지를 비롯해 일부 영화, 책, 음악, 예술의 자유(그러나 종교만큼은 엄청나게 탄압하였다.) 등이 허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허용되었고 서방과의 교류도 늘어났다. 다만 미국과의 경쟁 자체는 이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특히 우주 분야에 있어서 흐루쇼프 때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를 날려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개를 우주에 보냈고,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와 1962년 인류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를 탄생시켜 경쟁국 미국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결국 농업정책에서 큰 실패를 해야했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다가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으며 끝내 권력 기반이 약해져 실각되어버렸다.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된 양반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참고로 그가 통치했을 때에 소련은 서방에서 회색의 시대, 또는 침체의 시대(Эпоха Застоя, Era of Stagnation)로 불렸다. 이는 근본적으로 생산력이 서방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와 상명하복식 관료주의의 체제로 인해 천천히 무너져가고 경제 성장이 둔화된 모습과 떨어져가는 노동생산성, 그리고 별다른 개혁도 없었고, 개혁을 몇 번 하더라도 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아져 사람들의 삶은 편안해졌고 특별히 피를 부르는 사건이나 숙청도 거의 없었다. 또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국방비가 GNP 대비 12%나 될 정도로 늘어나고 비대칭 전력의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다만 침체의 시대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 후 동유럽에 개입하여 프라하의 봄이라던가 폴란드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해버렸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인도-아라비아해의 주도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소 봉쇄를 시작하였다.
 
최초로 시도된 것은 식량 봉쇄였다. 소련의 농업은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로 박살난 이래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대대적인 농지 개간과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자급을 하지 못 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이는 소련의 농·축산업 체계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만 해도 중유럽을 먹여살렸던 과거[35]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미국에서만 매해 2500만 톤이 넘는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으며, 이 막대한 수입량을 다른 곳에서 대체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카터 행정부는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수출 중단으로 인해 소련으로 흘러가던 막대한 곡물들이 시장에 풀리자 식량 가격이 대폭락하여 미국의 농가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일시적인 식량 위기를 벗어난 소련은 폭락한 국제 곡물 가격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통해서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36]
 
또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 등의 각종 무기를 지원했다. 교외를 장악한 반군이 소련 손아귀의 도시들과 거점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소련군이 교통하기 위해서는 항공편을 사용하여야 했는데, 미국의 물밑지원으로 상당한 무장력을 갖춘 반군이 게릴라전으로 헬기 전력에 대항하자 소련은 빠져나갈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저 돈만 쏟아부을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전면적인 경제 봉쇄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막대한 재정 출혈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원자재 수출로 간신히 명줄을 연장하던 미약하디 미약한 소련 경제를 붕괴시키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석유값이 일정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버틸 수는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초장기 집권은 그의 사후 권력을 이어받을만한 실력자들이 함께 폭삭 늙어버렸으므로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1년씩 해먹고 바로 죽는 혼란기가 찾아와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그후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등극하여 여러 문제를 보고 1985년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시행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해 하반기에 사우디와 미국-영국의 치킨게임으로 1986년 석유값이 폭락하여 세수가 크게 줄어버린데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터지면서 결국 소련의 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버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라스노스트는 소련 체제 하의 온갖 비리와 범죄를 드러내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다. 한번 시장의 고삐가 풀리자 인플레이션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혁신 정책은 원래의 의도는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붕괴를 초래했고,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발트 3국 등지에서 처음으로 "독립 만세!!" 를 외치며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탈퇴와 민족국가로써의 자주독립,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환원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소련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 체제만은 유지하려 하였고,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7.8%의 지지를 얻었지만, 몇 달 뒤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리스 옐친이 이를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입지가 더욱 커지자 소련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쿠데타는 민중의 저지로 인해 실패로 끝났으나, 1991년에 이미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쿠데타 진압으로 정치적 스타가 된 보리스 옐친은 이미 진작에 소련을 탈퇴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몰도바, 아르메니아)을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한 소련 소속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기로 밀약해 모두 소련을 탈퇴하는 바람에 소련은 가입국 하나도 없는 빈사 직전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소련은 공중분해되었다.
 
소련이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는 러시아 연방이 계승하였으며, 소련의 공화국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모조리 독립국가가 되어버렸다. 이후의 상황은 러시아 참조. 하지만 소련은 심슨에선 다시 부활했다. 베를린 장벽, 레닌과 함께
 
소련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이 성립할 때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에게로 넘어가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37] 소련이 보유한 영토는 몽골 제국이 보유했던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크고 아름다운 광대한 크기였다. 지금도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은 경제적 가치가 꽤 높은 편.
 
그러나 소련 붕괴 전후로 불거진 민족 갈등과 소련 시절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소련에서는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으며[38] 이후로도 1960년대까지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민족갈등을 고려하지 않고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39]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을 했고 그건 서방 세계도 마찬가지였다지만 결국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소련은 초강대국이라 외부의 위협은 미국 밖에 없고 자원도 많으며 내부 통제도 잘 이뤄지고 있는데다가 중진국 수준의 1인딩 GDP와 복지수준을 보였는데 이런 나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9년 1월 27일 (일) 02:07 판

상위 문서:한성국, 한성국/멸망 이후, SSA서버/구성원


이 문서는 저작자 표시를 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저작자 표시와 출처 공개를 하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비영리로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비영리로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변경 금지입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문서를 변경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nion of Delta Socialist Republic
파일:델타 연방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국가 델타 연방 찬가
수도 델타특별시 델타국 서북쪽
최대 도시 델타특별시
정치
공용어 영어, 러시아어, 델타어, 한국어
국민어 러시아어, 한국어
지역어 알 수 없음
역사
델타 공산당 정부 1981년 6월 15일 출범
 • 델타 연방 출범 1981년 7월 7일
지리
면적 알 수 없음 (1위)
인구
1991년 어림 약 2억 5천만명
1999년 조사 알 수 없음 (1위)
인구 밀도 알 수 없음 (4위(추정))
경제
GDP(PPP) 2109년 어림값
 • 전체 약 11조 4770억 달러 (2위)
 • 일인당 약 45,908 달러 (2위)
명목 약 5조 7385억 달러 (3위)
HDI 0.788 (53위, 2101년 조사)
통화 델타 루블, 달러, 원 (§, $, ₩)
기타
도메인 du
국제 전화 ++2






개요

(중략)...1981년 7월 7일 13시를 기해, 전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들의 뜻에 따라 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결성됨을 선포한다. -1981년 7월 7일 델타 선언의 내용 일부

이념의 조국

오랫동안 차별받던 지역이 강력한 국가로 다시 부활하다

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한성 대륙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서평연방공화국 다음으로 세력이 가장 강력한 국가이다. 1981년에 수립되었고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가장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국가이며 서평연방공화국과 양극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초강대국이다.

국민총생산(GNP)만도 전체 2위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절대 자유진영 국가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20년에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18,300달러 정도[1]였는데, 당시 청라 연방 공화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 절반 정도인 약 9,900달러 정도였다.

거기다가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여서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에[2]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본적인 부분 이 보장되었다. 또한 무상의료가 실질적인 형태로 구현된 국가 중에는 서평연방공화국, 청라 연방 공화국과 함께 유일했다. 나중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델타 연방도 계속 무상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옛 시절의 무상의료 제도는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였다.

정치 체제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흐름인지라 이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연방과 그 구성국들의 생존을 보장 할 수 없게 되어,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된 지 오래이다.

정식 명칭

델타 연방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이를테면 주요 민족 또는 땅 이름)가 국가명에 포함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나라였다. 러시아어로 쓰면 'Дельта Союз (델따 싸유스)'가 되고 영어로 쓰면 'Delta Union'이 된다. 종종 이 나라를 '델연방'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델(타)연방의 줄임말이므로 맞는 표현이다.

사람들이 종종 줄여쓰는 표기의 '델련'에서, 델은 '델타'를 줄인 약칭이다. 인터넷에서 언급되는 사례 등을 볼 때 '델련' 만 써있어도 그냥 델타 연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 델련, 서평국에 대민지원! 등.

서적이나 언론 등을 가리지 않고 "델타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라고, 연방과 공화국의 단어 순서를 바꿔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명칭이니 쓰지 않도록 주의하자. 헷갈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델련은 '(무슨무슨)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뭉친 나라이므로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방'인 것이다. 즉, 연방제란 자치권을 가진 각 단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국가인데, 델련의 경우 이 각각의 단위들이 주(州)나 도(道)가 아니라 '공화국'이었다는 것. 따라서, 공화국의 연방체이므로 공화국 연방이다. 무엇보다도 델련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델타국의 정식 명칭이 '델타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었음을 기억하면 착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델타 연방 밑에 또 다른 델타 연방이 있다 이것이 왜 이렇냐면, 여기서 설명하는 델련은 'Union', 즉 일종의 국가 연합을 말하는 것 이지만, 그 밑에 가입한 "델타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경우 고유명사(?)인 Delta 뒤에 "Federation"이 붙는다. 즉 델타 지역의 지방 정부들이 모여 "델타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고, 그런 국가들이 모여 결성된것이 "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인 것이다.

역사

이 문서는 저작자 표시를 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저작자 표시와 출처 공개를 하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비영리로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비영리로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변경 금지입니다.
이 문서는 저작자가 문서를 변경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공식 설정이므로 무단 수정은 반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단, 단순 오류 및 오타의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현재 공사 중입니다.

이 문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본문에 다소 난잡하거나 생략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연표로 보는 델타 연방의 역사
1923년 제 1기 델타 공산당 출범, 델타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성립.
1924년 연방 헌법 공포.
1927년 제 2기 공산당 정부 출범.
1930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1934년 대숙청[3]
1935년 수도 재건축 계획 시작.
1941년 연방수호전쟁 (~1945년)
1949년 청덕국에 대한 델련의 선전포고로 서버 2차 대전 발발.
1959년 서버 2차 대전 종전.
1960년 서버 냉전 (~2039년)
1961년 태영 사회주의 공화국이 델타연방에 가입.
1970년 제 3기 공산당 정부 출범.
1980년 제 4기 공산당 정부 출범.
1990년 제 5기 공산당 정부 출범.
1991년 제 5기 공산당 정부의 개혁개방정책 실시.
2000년 제 6기 공산당 정부 출범.
2010년 제 7기 공산당 정부 출범.
2020년 제 8기 공산당 정부 출범.
2030년 제 9기 공산당 정부 출범.
2040년 제 10기 공산당 정부 출범.
2050년 제 11기 공산당 정부 출범.

1981년 6월,북부 공산 혁명으로 북부 지방 영주 정권이 무너진 이후, 공산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체제 건립을 내세운 델타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할 것을 우려한 한성국중앙 정부가 잔존한 보수파와 쫒겨난 영주를 지원하며 내전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중앙정부군에게 일부 중심도시를 제외한 영토 전역을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공산당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1981년 7월에 델타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D. F. S. R)이 탄생한다.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델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처음부터 델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83년까지만 해도 델련의 공업 생산량은 서평국의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델련 성립 이전 북부지방의 산업 혁명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어 델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4] 그렇게 북부지방에서 연방을 갓 독립시킨 델타 공산당은 델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델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델타 공산당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의 일부를 체제에 도입하였다.

1986년 제 1대 서기장 사후부터 시작된 공산당내의 혼란기에 경쟁자들을 제치고 1987년 최고 지도자가 된 제 2기 서기장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델련을 강력한 공업국가로 바꾸길 원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경쟁자들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델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자유진영측을 위협할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내긴 했다. 1985년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로 자유진영이 한참 혼란기에 빠져있을때 델련은 경기 불황을 무시하고 성장하였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SSA 서버 제 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그시대 델련 인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제 2기 공산당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해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고, 2005년 국가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공산당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반동분자'들을 델련 남부의 비밀 도시들에 있는 노동 교화소에 강제로 끌고 갔다.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과 죄없는 인민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야말로 독재정치를 했다. 이 대숙청을 인식해 델타 공산당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잔존 보수파나 부르주아, 부농들은 서평국이나 청라국으로 도망을 갔으나, 2005년 델타 연방 정보성에서 보낸 요원들에게 전부 암살 또는 실종되었다. 물론 델타 공산당은 모른척 대외적으로 부인했고, 제 3기 델타 공산당에서는 당시 암살에 관여했던 델타 연방 정보성요원들에게 델타사회주의연방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어쨋든 자유진영 열강들이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델련과 옆동네 송도국은 나란히 약진했고, 델련은 초기에 반공을 외치는 송도국에 맞서 자유진영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자[5] 되려 송도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 서버를 놀라게 한다.

  1. 이 당시 서평연방공화국의 GNP는 약22,560달러 정도였다.
  2. 당연히 시대가 지나며 사회주의 체제가 도태되어 갔기 때문에, 국가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에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일반 자본주의 국가와 전혀 다를것이 없어진다.
  3. 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2000년대 들어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공산당 정부는 이전 반대파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얼마나 심했으면 사상무장이 출중한 공산당 당원인 사람도, 단지 반대파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강도높은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았던 일반 반대파 출신은 어땠냐고? 당연히 노동 교화소에 끌려가서 죽거나 반 불구가 되었다.
  4. 사실 북부지방 당시에도, 못 사는 지방이라는 인식이 한성국 전체에 깔려있었을 정도로 이 지역 민생들의 삶은 처참했다.
  5. 그렇지 않아도 사회주의를 경계하던 국가들이니 만큼 선뜻 지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