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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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미르 왕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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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치세
초대
안나 바르바나
2017.5.1 ~ 2017.8.22
제2대
압델아지즈빈타미르아르슬란
2017.8.23 ~ 2017.9.17
부총리 미카엘 폰 헤센카셀
제3~4대
한비자
2017.10.3 ~ 2017.12.2
제5대
하유진
2017.12.2 ~ 2017.12.8
제6대
알베르토 몬디
2017.12.10 ~ 2018.1.21
부총리 이맹박
제7대
이맹박
2018.1.24 ~ 2018.2.10
제8대
하유진
2018.2.11 ~ 2018.3.3
부총리 이맹박
제9대
이맹박
2018.3.7 ~ 2018.3.23
제10대
안도진
2018.3.24 ~ 2018.4.10.
부총리
제11대
박이현
2018.4.11 ~ 2018.5.7
부총리 에릭스데우스트
베레니아 세레나
제12대
한비자
2018.5.22 ~ 2018.8.10
부총리 남상은
루이지 마르코 치세
제13대
한비자
2018.8.19 ~ 2018.11.18
제14대
박이현
2018.11.19 ~ 2019.1.3
부총리 이맹박
제15~16대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
2019.1.4 ~ 2019.3.9
부총리 안토니오 데 루카(제15대)
테레사 메이(제16대)
김경수
제17대
김경수
2019.3.10 ~ 2019.7.6
루이지 마르코 치세 로제테 마르게리타 치세
제18대
올리버 폰 프리드리히
2019.7.7 ~ 2019.8.14
부총리 안토니오 데 루카
제19대
테레사 메이
2020.6.22 ~ 2020.8.29
제20대
안토니오 데 루카
2020.8.30 ~ 2020.12.23
부총리 조지 오스틴
제21대
셀리나 마이어
2020.12.29 ~ 2021.1.9
로제테 마르게리타 치세
제22대
테레사 메이
2021.1.10 ~ 2021.2.7
제23~24대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
2021.2.8 ~ 2021.9.4
제25대
테레사 메이
2021.9.5 ~ 2021.11.27
제26대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
2021.11.28 ~ 2022.2.27
제27대
이원희
2022.2.28 ~ 현재
하늘미르 왕국 총리

하늘미르 왕국 제23~26대 총리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
弗拉基米尔·马泰奥·刚池 | Vladimir Matteo Gangchi
소속
성별 남자(♂)
출생 1970년 4월 8일52세
하늘미르 왕국 칼리아리 [1]
관저 하늘미르 왕국 총리관저
거주지 하늘미르 왕국 칼리아리 사저
현직 하늘미르 왕국 총리, 하늘미르 왕국 왕국의회 의원, 재건공산당 서기장
재임기간 제26대 총리
총리임기 시작 2021년 11월 28일 ~ 현재
왕국의회 의원
의정임기 시작 2021년 5월 29일 ~ 현재
재건공산당 당대표
당선 2021년 1월 11일 ~ 현재
연락처
종교 불가지론[2]
본적 캘리포니아 어딘가 해안
본관 아메리카[3]-러시아[4] 강치 혼혈 블라디미르
원적 캘리포니아
야쿠티아사하 북극해 부근 시베리아
학력 칼리아리 대학 철학과 학사
칼리아리 대학 철학과 석사
칼리아리 대학 철학과 박사
정당
배우자 독신[5]
약력 하늘미르 공산당 초대, 2대 서기장, 서기위원
하늘미르 공산당 기관지 라 베리타 총책
재건공산당 창당준비위원장
재건공산당 초대, 2대 서기장
재건공산당 비상대책위원장
제15·16·23·24·26대 총리
제4·제5대 하늘미르 왕국의회 의원, 부의장
제8·9·10·11·12·16·17·18·19·20대 왕국의회 의원
제5대 내각 하늘미르 왕국 국무부 장관
제5대 내각 하늘미르 왕국 총리대행
제6대 내각 하늘미르 왕국 국무부 장관
하늘보리 연대 대표접수자
서명
수결
이칭 홍어[6]
약칭 V.M.G. , 강치

개요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영어: Vladimir Matteo Gangchi, 이탈리아어: Vladimir Matteo Gangchi)하늘미르 왕국의 정치인이다. 하늘미르 왕국의 총리이자 재건공산당의 당수를 역임중이며, 하늘미르 왕국 의회의 의원이다.

인물사(출생 ~ 2019년)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는 1970년 4월 8일, 하늘미르왕국 칼리아리특별시에서 공무원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준수한 성적으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칼리아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대학에서 서양철학과 정치의 연관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평소 관심이 있었던 '유럽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당 ㅡ 철학적 요소를 중심으로' 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석사와 박사직을 취득하며 학계에 인지도를 높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그는 하늘미르의 주요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메이데이 행사에 매년 빠지지 않고 참여할 정도로 학계 출신 인사 치고는 적극적인 정치적 행보를 보이게 되면서 정계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국내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인(설정상) '하늘미르 공산당'을 창당하기로 결심한 것은 당시 정계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한비자 총리가 개헌선 이상의 의석을 보유한 보수신당을 이끌며 하늘미르의 좌파세력을 대표할 정당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평소 그와 뜻이 맞던 좌파세력들과 합심하여 하늘미르 공산당을 창당하며 하늘미르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된다.

하늘미르 왕국 제4대 왕국의회 총선거가 열리기 전에 당시 주요 언론에서 '보수신당의 압승'을 예측했으나, 그와 하늘미르 공산당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공산당의 서기장으로서 보수신당의 야합적 행위를 맹비난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이후 선거유세에서 보수신당과 대다수의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하게 되며 선거의 판세를 완전히 양당구조로 변화시켰다. 선거 결과, 보수신당 196석, 공산당 134석, 평화민주당 26석, 혁신민주당 26석, 자유공화당 18석으로 보수신당의 과반 저지를 성공시키며 그 저력을 입증하였으나, 이후 보수신당이 혁신민주당과 합당을 하게 되면서 한비자 총리의 연임이 결정되었다. 이후 애국신민당 당수 출신이었던 '스텔라'가 당내에서 분규를 일으키자 그의 계파에 소속되는 15인의 의원들을 출당시켰다.

제4대 내각에서 그는 유력한 야당의 당수로 활약하며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당시 과반수의 의석을 보유했던 보수신당에 맞설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야권의 정당인 공산당의 리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스텔라 출당사건'을 계기로 하늘미르의 정당제도의 안정을 위한 '선거제도법'을 발의하나 여당인 보수신당의 비협조로 인하여 좌절하고 만다. 이후 내각의 '이탈리아 10만 난민, 화산 폭발'과 같은 비현실적이고 정권이 악용할만했던 설정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내각과 충돌하였고, 급기야 내각이 한빛의 반공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하늘미르 내에서 반공정책을 실시한다고 하게되면서, 공산당과 정부여당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후 열린 하늘미르 공산당 제1차 당대회에서 무투표로 서기장에 당선되며,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정부여당과의 반목으로 인해 정치활동에 염증을 느낀 그는 정계은퇴를 시사하며 당을 탈당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당대표를 맡았던 이맹박(당시 닉네임 블라디미르 상득)의 무리한 당 구조 개편등이 당원들의 지탄을 받게되었고, 정부여당과의 대립이 지속되자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블라디미르 강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정치에 복귀하며 진보신당으로 개정되었던 당명을 공산당으로 환원시킨 후, 한비자 총리과의 영수회담을 계기로 반공정책이 폐기되고, 국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입증하였다. 그는 국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당시 국방 설정 수립에 관한 국방부의 활동증진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국의회 부의장으로 재직했던 때에는 왕국의회법이 개정됨에 따라 '상임위'제도가 시행되었고, 이에 원내정당간 합의를 통하여 임시적으로 총무위원회와 법무법제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주요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앨런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정국은 급격하게 바뀐다. 비록 하늘미르와는 관련이 없던 사건이었으나, 일국의 총리가 단순한 본인의 흥미로 인하여 당시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가상국가인 앨런에 테러를 자행한 것이었다. 이에 강치 서기장은 영수회담 이후의 협조하는 당론을 완전히 철회하며 투쟁노선으로의 회귀를 시사하였다.

한비자 총리의 사퇴 이후 열린 제5대 왕국의회 선거에서 그는 정책정당의 중요성, 한비자 전 총리의 도덕성에 대하여 비판함과 동시에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개헌을 제안하였다. 이는 당시 하늘미르 공산당이 표방하는 사상중 하나인 '지속적 개헌주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지속적 개헌주의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서 착안한 지속적인 개헌을 통한 사회개혁 추진을 뜻한다.) 그는 동시에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라 베리타'지의 총책으로서 활동했는데, 주로 하늘미르의 정계소식을 간추려서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당 기관지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띄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오늘날 하늘미르의 언론들이 배워야할 자세중 하나라고 본다. 또한 당내 연구기관이었던 '사회연구소'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를 공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산당과 강치 서기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거대여당이었던 보수신당과 공산당의 분당(기독교사회당의 창당)으로 인하여 국민중심당, 바른정당, 민주당이 활동하면서 되려 공산당의 입지는 대폭 축소하게 되었다. 한비자 전 총리가 이끌던 보수신당보다도 적은 의석을 획득한 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5대 의회는 공산당과 강치 서기장에게 기회였다. 당시 의회는 무려 10여개의 정당이 활동하는 초다당적 구조이었고, 여당인 국민중심당은 과반에 턱없이 모자른 의원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다른 정당과의 연립정부 수립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중도와 진보 사이를 아우르는 4당 연립정부(국민중심당, 공산당, 민주당, 중도민주당)의 수립으로 김재헌 내각이 출범되었고 이후 타 정당들도 내각에 협력하는 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라 베리타'지의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강치 서기장은 원내총회를 열어 원내지도부를 출범시키고, 공산당에 배정된 국무부 장관에 블라디미르 강치 서기장을, 복지부 장관에 둘기 의원을 임명하면서 연립여당으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하였다. 이후 왕국의회 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행정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한비자 특검법의 표결을 수행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또한 국무부 장관으로서 수교국 목록을 정립하고 소슈티 사태에 관한 성명도 발표하였다. 이후 각 정당간의 의견 차이로 인하여 제대로 합의되지 않았던 '상임위원회 의석 배분'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그가 추진했던 일중 논란이 많았던 사안이었다. 당시 왕국의회에는 11개의 상임위원회가 존재하였는데, 강치 부의장이 주요 여당에 10개의 위원회를 할당하고 나머지 한개의 위원회에 보수신당 의원들을 몰아넣는 식으로 배분을 강행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진 2차 배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그도 "경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위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빛민주공화국측에서 김재헌 총리를 '테러사건의 주범'으로 규정하며 총리와 내각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한 것이었다. 이는 출범한지 일주일도 채 안된 내각이 무너지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 사건에 대한 논란으로 인하여 김재헌 총리가 사퇴하면서 블라디미르 강치 국무부 장관을 임시총리로하는 '과도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그는 당시 의장의 일시적 부재로 인하여 의장대행직을 겸직하였기에, 총리대행직 수행으로 인하여 의장대행직을 사임하였다. 하루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하루 빨리 차기 내각의 출범이 가능토록 노력하였기에 그는 "과도내각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였기에 지금까지도 크게 회자되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어진 알베르토 몬디 내각에서도 여전히 국무부 장관직을 수행하였으며, 그때 그는 '對 앨런 조치'라는 장관령을 고시하였다. 주요 골자는 혼란스러웠던 앨런에서의 즉각적인 대표부 및 교민의 철수, 그리고 앨런-하늘미르 회담의 취소였다. 이는 훗날 이맹박 총리가 총리에 재임하였을 때까지 유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과도내각의 총리로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기상청장의 임명과 경제부 장관, 최고재판소장의 후보자를 지명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두번째 정계은퇴를 시사하였다. 첫번째 은퇴와는 달리 두번째 때에는 별다른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여전히 하늘미르의 정국은 어수선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로 하여금 큰 압박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블라디미르 강치는 정계를 은퇴한 후에 뒤에서 '조언'을 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왜 유럽 한복판에 있는 하늘미르에서 '한국이름'의 사용이 문제가 없는지 의문을 표하였고, 이에 몹시 짧은 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한 현재까지도 들어볼 사람은 들어본 '하늘미르의 민주주의 솔루션'이라는 글을 통하여 하늘미르 정치의 구조적 문제점(헌법, 선거제도, 네이버 카페 자체의 문제 등)과 정당민주주의 부재, 편중된 설정등을 조밀하게 따지며 큰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솔루션은 나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한비자 전 총리의 정계복귀와 이어진 2달간의 깜깜이 정국이 하늘미르를 칠흑과 같은 어둠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그렇게 망가지는 꼴을 두번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으며, 과거의 실패사례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 한번 재기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약 한달 후에 '재건공산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창당 발기인 대회 당시에 모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재건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이후 무소속 의원 1명이 당에 입당하며 원내정당이 되었다. 그가 재건공산당의 초대 서기장을 맡으며 가장 먼저 '공산당 재건 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을 이어나갈 것임을 표방하였고, 재건공산당과 한울당, 철십자당의 야3당 합의문을 통하여 차기 공동내각 수립의 약속과 강경투쟁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8대 왕국의회 선거에서 제3당으로서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나노단결당의 대표였던 나노가 철십자당으로 당명을 개정하고, 이후 재건공산당와 통합하면서 재건공산당은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울당과 동일한 의석수를 확보하는 등의 의회에서 선전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그는 총리 선출 정국에서 또다른 난관에 봉착하였다. 당시 재건공산당은 총리 후보를 배출할 의사가 없었으며, 때문에 같은 야당의 일원이었던 한울당 측에서 총리 후보를 빠른 시일내로 선출해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한울당 측이 전반적으로 미진한 대응을 보여왔고, 이에 실망한 강치 서기장은 바른정당의 박이현 내각 동의안에 찬성하며, 제11대 박이현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제8대 왕국의회에서 그는 '정당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당시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5%의 봉쇄조항 도입과 정당의 창당조건에 '강령'을 추가하도록 함으로써 정책중심의 정당운영이 가능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박이현 내각과의 관계 역시, 박이현 총리가 한비자 전 총리를 경제부 장관 겸 제3부총리로 임명함에 따라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는 과거 反한비자 노선에 최선봉에 있었던 사람 중 한명으로서, 개인적인 감정이 있음은 물론이며 하늘미르의 정치 혼란기 당시에 한비자 총리가 논란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그를 기용한 내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가 있었기에 그러한 선택은 당연한 수순으로 귀결되는듯 하였다.

이후 강치 서기장은 공소시효가 사실상 만료된 '한비자 특검법'의 폐기와 국외선거의 부활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킴으로서, 꾸준한 개혁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지방선거 부정'사태였다. 논란의 주인공은 바로 강치 서기장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부정선거에 관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부계정을 이용하여 선거에 참여하였음을 시인하였고, 이에 대한 일체의 의도도 담겨져 있지 않다고 항변하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시켰다. 이후 검찰의 독립화, 사법부 직선제 등을 주장하며 자신의 개혁적 정책추진을 국민들에게 역설하였고, 비대해진 왕국의회 의석의 감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당인 개혁정당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고, 총리선거 정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안도진 의원은 왕국의회 의원으로서 '3차 헌법'의 제정을 제안하였고, 이것이 만장일치로 통과됨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었다. 개정된 헌법에 주된 내용이 '총리직선제'였고 당시 헌법의 개정이 이루어진 후 즉시 차기 총리를 선출하도록 명시되었기에 하늘미르 사상 최초의 총리선거가 실시된 것이었다. 강치 서기장은 총리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고, 그 대신에 재건공산당에 합류한 '나노'의원을 총리 후보자로 출마하게 하였다. 이후 나노 후보와 재건공산당은 압도적인 지지세와 를 보이며 선거의 승리를 이끌 것으로 세간의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한비자 전 총리가 총리선거에 출마할 것임을 시사함에 따라 보수표의 결집이 이루어져 그가 다시 한번 한비자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개혁정당이 전진당으로 이어지면서 한비자 총리가 소속된 여당이 되었고, 이후 바로 제9대 왕국의회 선거 국면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 강치 재건공산당 서기장은 정책 중심의 정당, 헌법 개정에 따른 야당의 필요성등을 강조하며 호소하였으며, 이후 과거에 존재했던 극우정당인 HNSLP와 전진당의 연대설에 대하여 맹렬하게 비판하였고, 선거유세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선거가 실시되기 바로 전에 극적으로 재건공산당-한울당-HNSLP간의 야권선거연대의 출범을 선언하였고, 이는 호불호가 갈렸던 정치적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야권연대인 '하늘보리연대'가 여권연대(전진당-정정당당)의 과반득표를 저지하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본래 방침에 따른 야권연대 소속 정당간의 의석 분배를 단행하였다. 이후 3차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정치에 대한 피로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강치 서기장이 밝힌 바가 있다. 이후 열린 3차 당대회에서 '수월' 서기장이 선출되고, 당의 강령과 당헌이 개정되는 등의 구조개혁이 단행되었다. 수월 대표는 이후 블라디미르 강치를 고문으로 임명하고 당의 원로로서 충실히 예를 다할 것이라고 표방하였다.

그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선거제도 개혁안 제시'를 통해서였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하늘미르의 정치구조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상을 지속해왔고, 그 결과 '선거제도'의 전면적인 개편만이 공정한 선거진행을 가능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거제도 개혁안에서 두가지의 예시를 제안했는데, 한가지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었으며 두번째로는 '블록투표제'이었다. 강치 고문은 두 제도 각각의 장단점이 있음을 알리고 그것이 실제로 적용되면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제시하는 등의 국민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블록투표제 시행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으며 이를 관철시키며, 그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주소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주소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블라디미르 강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후 열린 지방선거에서 안타깝게도 재건공산당이 출마했던 칼리아리 특별시의 남상은 후보자가 낙선됨에 따라 '생활개혁'에 몰두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한 후 재건공산당을 기존의 단일지도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는 등의 수평적 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하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인물사(2020년 ~ 현재)

주석

  1. Via Sacchi 24 09030 Giliaquas, Cagliari hanulmir
  2. 프로타고라스 학파
  3. 캘리포니아
  4. 시베리아 추정
  5. 동정
  6. 모의전에서 불리는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