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연호
연희
延熙
1678년 1월 23일 ~ 1700년 2월 18일
연희 1년 1월 1일 ~ 연희 22년 12월 30일
경희
慶熙
1700년 2월 19일 ~ 1743년 01월 25일
경희 1년 1월 1일 ~ 경희 43년 12월 30일
천우
天祐
1743년 01월 26일 ~ 1746년 01월 21일
천우 1년 1월 1일 ~ 천우 4년 12월 30일
20대
헌종
경희지절
慶熙之節
1700년 2월 19일 ~ 1743년 01월 25일
경희 1년 1월 1일 ~ 경희 43년 12월 30일
1. 개요
경희지절 또는 경희 시대는 헌종이 즉위한 1700년부터 퇴위한 1743년까지 총 43년간의 치세를 일컫는 말이다. 이 시기 조선은 -무굴 제국 뒤를 이어- 약 3천만명의 인구를 보유한 세계 2위의 인구 대국이자, 대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경제 대국이었는데 이러한 인적,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유럽에서는 프로이센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건국되었고, 스페인과 폴란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으며 대북방전쟁이 종식되는 등 전란과 함께 종교혁명에서 발원한 계몽주의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과학 및 기술, 철학적 발견이 각지에서 대두되었고 이 또한 조선에서도 연구되고 전파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의 요하강과 흑룡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보한 채로 내정에 힘을 쏟았으며, 여진족과 한족이 각각 중국대륙의 남북쪽에서 패권 경쟁을 지속하였고,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친조선파인 하라후쿠 막부에 의한 동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청을 요동에서 몰아내고 천리장성을 축조한 조선은 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견제하였고 이렇게 이룩한 평화와 조선의 제도적 완성이 절충되어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 시대상
    기득권은 해체되어 만인이 법적으로 양인에 속해 평등해졌으며, 상업과 공업은 나날이 발전하여 대외 무역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조보로 불리는 신문은 조정에서 발간한 것이든 민간에서 사사로이 발간한 것이든 만민에게 유통되어 판매되었고, 사람들은 작은 우편 용지에 한 줄을 적어서 원하는 곳으로 발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정보 매체에 실린 일기예보나 사설을 통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석탄의 매캐한 연기가 2, 3층 건물 근처를 휘감았으며, 이러한 난방은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습니다. 한성은 그러한 도시 중에서도 발전하여 공용 마차가 다니며, 음악회나 연극회가 열리는 등 각종 사업이 발달했으며, 상업 공간과 주거 공간은 분리되어 관리되었습니다. 모든 아동은 소교에 다니며 수학하였고, 수 많은 지식인들은 학회에 모여 서로의 연구를 공유하고 서적을 발간해 그들의 업적을 전국에 공유하고 있습니다. 몇몇의 위대한 발명가는 남작에 봉해지고 전용권을 받아 유명해졌습니다. 관리들은 유교 뿐만 아니라 각종 전문지식을 살펴 알맞은 관청에 소속되었고 대다수는 연금과 정기적인 봉급이 보장되었습니다. 일부 상공업자들은 조합을 만들어 거대한 유통망을 형성하거나 생산망을 구축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외국에 유통하려고 선원들은 높은 몸값을 받았습니다. 각종 노동 계약은 그것이 불합리한지 신고하여 검토받을 수 있었으며, 삼심제도와 변호인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변모했습니다.
    북방은 매우 격동적으로 변화하였는데, 요동과 북관의 광산이 활성화되어 부를 얻고자 하는 이들은 산을 탐험하길 꺼리지 않았으며, 험지에서도 각종 구황작물을 재배하면서 삶을 비교적 잘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만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자들도 생겨났고, 몇몇 사람들은 각종 혜택을 누리기 위해 만주 개척지로 향했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이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중원과 열도의 전란으로 인해 조선으로 이주한 한족과 열도인들에 의해 사회는 훨씬 다층화되었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격동의 시기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빠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2. 대외관계
 | 열도 후쿠하라 막부·우에스기·다테·난부·간토 도쿠가와·기슈 도쿠가와·오다
일본은 조선의 영향력 확대와 그에 따른 오우치 정권의 세력 확장에 대항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관동 연합을 결성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은 뒤 얼마되지 않아 연합은 와해되었습니다. 오우치 정권 또한 내분으로 쇠퇴하여 동정은 실패하였고 열도는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1643) 조선은 북벌을 통해 막대한 국력을 소비하고 있었음으로 오우치 정권은 내분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다시금 분열하면서 열도에는 다시금 다이묘의 각축전으로 변모했습니다.(1645) 고종이 즉위한 이후로 조선이 열도로 영향력을 안정적으로 행사하게 되자, 시마즈와 오우치의 동맹으로 관서는 다시금 안정화되어 오우치 정권이 복권되었고, 천황의 거처는 후쿠하라로 다시 옮겨졌으며, 고니키시 가문이 대대로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1698)
 | 화북 청·준가르 칸국·튀시예드 칸국·세첸 칸국·자사그투 칸국
청은 조선의 두 차례에 잇다른 북벌과 삼번의 존재, 준가르의 준동으로 쉽사리 중원을 점거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족은 그들의 고토를 잃어 오직 소수만이 대륙에 속해 있었으며, 이는 대륙 정벌에 큰 문제로 작용했으며 곧 몽골계 민족이 준가르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준가르 원정과 조선의 북벌로 청의 황제가 전사하고 왕도가 무너지자 제국은 빠르게 분열되었습니다.(1696) 그러나 준가르도 갈단 칸의 사망과 함께 분열되어 화북지방에는 몽골과 만주족의 칸국이 난립하게 되었습니다.(1698) 헌종의 치세 동안은 튀시예드 칸국이 준가르에 대항해 가장 크게 번성하여 세력을 확보하였습니다.
 | 강남 오주·동월·남민·서교·진송
남명의 왕조는 단합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오삼계를 위시한 청의 삼번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이 삼번은 다시 청을 상대로 반역하여 남방을 장악했습니다.(1678) 그러나 오삼계는 얼마 못가서 죽었고, 삼번의 군주들은 서로의 이익에 눈이 멀었습니다. 이에 분열된 남조들은 다시 내전에 돌입하여 헌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그러한 내전은 계속되었습니다. 헌종이 즉위한 뒤로는 동월이 해안 지대의 자본력을 기반으로 대륙의 동남부를 장악하였으며, 오주를 패퇴시키고 장강 이남의 패권을 장악하였습니다.
 | 러시아
러시아는 조선과 함께 극동의 이권을 나눠 갖기로 맹세하고 아무르 강을 경계로 청의 영토를 분할하였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원래 원했던 자바이칼 지역의 패권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러시아의 이익이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스만, 스웨덴, 폴란드, 프랑스, 프로이센 등과 유럽 패권을 두고 계속된 전쟁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극동으로의 진출은 거의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헌종의 치세에도 러시아는 유럽 전선에서 막대한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그 사이 조정의 관계자들은 극동의 이권을 늘리기 위해서 몽골을 동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스페인
스페인 또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전란에 신경쓰기에 바빴으며 필리핀 도독령 남부에서 계속된 모로 전쟁으로 힘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명의 붕괴로 인한 무역 감소와 여러 전쟁으로 인한 지출 증가로 조선 및 일본과 연계된 무역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인의 편의를 봐주었으며 루손 섬 북부에서 조선인의 거점 확보에도 대응하기는 커녕 오히려 환대해주며 모로 전쟁에 동참하기를 기대했습니다.
 |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경우, 포르투갈의 동남아 무역 영향력을 축출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무역과 도자기나 차 등 각종 사치품의 무역도 담당하면서 필리핀 도독령을 제외하면 독보적인 무역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대만섬 일대에서 다두 왕국을 굴복시키고 스페인과의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전쟁으로 본토가 피폐해졌으며 튤립 공황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대만섬은 이 기회를 틈타서 조선이 매입했으며, 서서히 상권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위태로워지자 조선 및 중국 세력과의 독점 무역을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한 열강 사이에서 조선은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중앙정치
국왕 (國王)
국가 최고 권력기관
언론부 (言論府)
중앙언론기관
사간원 (司諫院)
언론간쟁기관
사헌원 (司憲院)
내부감찰기관
사문원 (司文院)
자문연구기관
의정부 (議政府)
의결·심의기관
원수부 (元帥府)
중앙군사기관
중추부 (中樞府)
대의의결기관
궁내부 (宮內府)
궁내업무기관
규장원 (奎章院)
왕실 도서관
의금원 (義禁院)
국왕직속사법기관
시강원 (成均院)
세자교육기관
추밀원 (樞密院)
국왕직속정보기관
종친원 (宗親院)
왕실후손 관련 사무
승정원 (承政院)
국왕비서기관
춘추원 (春秋院)
역사기록편찬기관
금군청 (禁軍廳)
친위경호군영
이부 (吏部)
인사 행정기관
교부 (交部)
외교 행정기관
재부 (財部)
재정 행정기관
군부 (軍部)
군사 행정기관
법부 (法部)
법률 행정기관
공부 (工部)
산업 행정기관
학부 (學部)
교육 행정기관
서부 (書部)
선전 행정기관
은청 (銀廳)
경제조정기관
우청 (郵廳)
우체업무기관
경청 (警廳)
경시업무기관
의청 (醫廳)
의료업무기관
비청 (備廳)
재해방비기관
기청 (氣廳)
기상관측기관
상청 (商廳)
대외무역기관
격청 (格廳)
연구개발기관
  • 국왕
    조선은 기존 한반도에 존재한 어느 국가보다도 강한 왕권에 기반하여 건국되어 운영되었다. 태조와 태종 때에는 당대 업적과 선망, 무력, 정치 따위에서 나온 권위에서 그 정통성을 확보하였고 거기에서 발원한 강한 왕권을 유지하고 물려주었다. 이에 따라서 세종부터 정조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장자적통의 정통성과 인덕, 명석한 두뇌에 기인한 높은 성리학 이해도에서 발원한 막강한 왕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 권한은 실로 막대하여 하위의 의정부, 중추부, 언론부, 궁내부, 판위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사와 정책 운용의 최고 승인자 및 주체로 군림했다. 그러나 선종 때에 일어난 무리한 토목공사 및 정복 활동으로 인한 폐해를 수습하며, 고종은 이러한 국왕의 막대한 권한은 국가와 백성들에 있어 막대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의정부, 중추부, 언론부의 의결에 따라 국왕의 권한 및 관리의 생사여탈권을 정지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는 막강한 왕권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기 쉬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 의정부
    조선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원칙에 따라 중화권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3성 6부제를 기반으로 의정부, 삼사와 함께 육조로 국정을 운영했다. 이후 인종에 의해 국가 발전을 위한 6개 주요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육서를 추가적으로 설치하였으나, 성리학적 규율에 따라 육조의 하위 아문으로 제한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자성의 난으로 대명이 패망하게 되자, 고종은 기존 중화 중심의 질서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는 한편, 기존 육조와 육서를 개편하여 팔부팔청을 설치하였다. 팔부는 행정기관이며, 팔청은 전문기관으로 분리하여 등용방식이나 운용방식을 차별화하고 각 아문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도록 수평적인 위치에 배치하였다. 이들 위에는 바로 의정부가 위치하여 각 정책을 심의, 운영하고 일정한 국정 운영이 가능하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국왕께 직접 아뢰어 승인받는 권한이 있다.
  • 중추부
    중추원은 조선 초기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이었으나 삼군부에 이어 원수부로 그 권리를 이양함에 따라 폐지되었다. 이와 별개로 세종 때부터 국가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만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자 광종 때에 선의원을 설치하여 주기적으로 지역 대표자 회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선의원은 성종 때에 지방 토호의 편파적인 의견 검열에 의해 각 지역, 계층 및 직업별 인원을 추첨하여 구성하는 민회원으로 개혁되었고 정조 때에 지방에서 일정 수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여 회의를 구성해 중추원이라 명명하였다. 중추원은 고종 때에 이르러 그 권환이 확대되어 의정부의 정책에 대해 일일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 아문의 칙임관직의 임명거부권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언론부의 각 수장을 추천할 권리도 의정부와 동일하게 부여받았다. 또한, 특정 사안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될 경우 국왕도 이에 반대할 수 없는 등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다.
  • 언론부
    언론부는 예로부터 삼사나 대간으로 불렸는데, 보통 왕권의 견제 기관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의정부나 중추원에 대한 견제 활동을 주로 삼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언론부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공직자에 대한 기소의 권리를 포함하여 탄핵소추권 등을 부여 받았으며 내부의 징계 수준, 중추부 의결에 대한 거부권 등의 권리도 소유하고 있다. 또한, 언론부는 기본적으로 왕권 견제 기관이기 때문에 왕의 결정 사안에 대해서도 간쟁하고 언론 활동을 주도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 궁내부
    궁내부는 광종 때 개편 신설되었는데, 이는 궁내 업무의 예산과 국정 업무의 예산을 분리하고 각 업무에 사용되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관리, 운영하여 예산 지출을 줄여 국가재정에 이바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조선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궁내부 하위 아문 또한, 점차 축소되었다. 다만, 국내외 정보를 거의 독점하는 기존의 조서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명종 때 조서직계제를 시행했으나 이마저도 정조 때에 개편하여 추밀원(조서)을 궁내부로 편입하였고 금군위, 금군청과 같은 친위군도 궁내부에서 운영하도록 변화했다.
  • 판위부
    판위부는 정조 때 형조(법부)에서 독립되어 다른 정치기관과 관련없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재편되었다. 판위부의 주 역할을 판결과 집형인데, 이는 일차적으로 지방의 수령에 의해 관아에서 이루어지고 이에 불응하는 자가 있을 때, 사의청에서 관찰사에 의해 재검하고 이에 대해서도 불응하면 중앙의 판청에서 최종적으로 판결하도록 삼판 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위공직자의 판결은 통상 의금원에서 처리했으며, 판청의 판결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판사직의 지방 관리는 이조(이부)와 언론부(사헌원)에서 가지고 있는 한계는 있었다.
  • 견제 양상
왕권견제
국왕
국왕
국왕
재선출명령 / 인사결정권
중추부
중추부
중추부
의정부
의정부
의정부
언론부
언론부
언론부
왕권정지 및 섭정 발의 · 동조
삼부견제
중추부
중추부
중추부
정책·인사거부권
의정부
의정부
의정부
인사추천권
언론부
언론부
언론부
의결거부권
중추부
중추부
중추부
선출관리·재선출발의 감사·소추·기소 인사추천권
4. 지방행정
부청 (府廳)
부의 행정관청
부를 관할하는 관아, 기관장은 부윤
· 행정사무
· 민생고충
· 농어업 현안
· 경제상업 현안
· 민,형사재판
인천, 충주, 홍주, 공주, 전주, 남원,
나주, 제주, 진주, 동래, 대구, 안동,
강릉, 춘천, 개성, 해주, 평양, 의주,
강계, 함흥, 갑산, 경성, 한성
군청 (郡廳)
군의 행정관청
군을 관할하는 관아, 기관장은 군수
· 행정사무
· 민생고충
· 농어업 현안
· 경제상업 현안
· 민,형사재판
· 치안활동
· 군무 및 병역
향청 (鄕廳)
지방수령 자문·보좌 기구
행정실무기관으로 기관장은 좌수
· 행정실무
· 환곡 사업
· 민생고충
향교 (鄕校)
지방중등교육기관
· 주로 경학 교육
· 소교 이수자 입교
· 일부 육학/농상학 교육
소교 (小校)
초등교육기관
· 소학 및 예절 교육
· 언문 및 한자 교육
· 기초 산학, 율학 교육
· 사학 교육
· 지리 교육
상교 (上校)
중등교육기관
· 경학 및 육학 교육
· 소교 이수자 입교
· 선현 제사
민료원 (民療府)
지방의료기관
치료·제약비용 수금
통전원 (通錢院)
지방금융기관
· 예금 및 대출
· 지방세 및 재정
· 회계 업무
· 시전 임대 관리
· 상업관리
심과원 (審過院)
지방치안기관
비사 (備司)
비서 · 방재기관
필요시에만 소집되며,
소방, 방재, 건축을 맡아하는 조직.
건축비 수금
사의청 (思義廳)
지방감찰기관
부청보다 높은 권한으로,
중앙에서 파견하여 감찰하는 기관.
기관장은 관찰사
병영 (兵營) / 수영 (水營)
지방군사조직
파견된 위장과 위군감이 지휘하여,
부의 군을 징집, 훈련, 군무,
노역 및 군사작전을 실시하는 거점
  • 지방행정구역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은 그 규모에 따라 대도호부, 도호부, 부, 목, 군, 현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 수령의 명칭 품계도 달라졌었다. 이렇듯 복잡하고 어려운 지방행정은 인종 때에 개편되어 부목군현을 모두 군으로 통합하고 그 경계를 생활권 기준으로 정리했으며, 나아가 각 군의 면적과 인구 수준을 조정해 규모 차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보다 더 작은 단위에서는 광종 때에 면리제와 십가작통제에 의해 구분되며 세밀화 되고 유향소, 권농관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도-군-면-리-통-가의 지방행정제도가 정립되었다. 이후 현종 때에 조선팔도를 십삼도로 개편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나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세부 지방행정이 정착되기 까지 오랜 세월이 걸려 정조 때에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이후 고종 때에 도를 폐지하고 전국 이십사부로 개편하여 생활권을 반영하고 지방행정이 더 면밀히 진행되도록 장려하였다. 이로서 경희지절에 이르러 부-군-면-리-통-가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 도군이청
    조선초기 지방은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하여 관찰사, 부윤, 군수, 현령, 원님 등으로 불리며 각 지역 관아에서 모든 업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수령에 과도한 권력과 부정부패를 촉진하였음으로 현종 때 군청은 향청에 의해 제한되고, 도청은 사의청이란 기관을 두어 감사하도록 하였다. 이는 폐도치부가 실시되고 부청으로 계승되었는데 그 형태는 동일하다. 또한 지방 수령은 부윤과 군수로 통합하고 사의청의 관찰사에 의해 감시되었다. 이들은 또한 암행어사와 비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순찰사에 의해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 도관삼원
    현종 때에 지방행정을 강화하면서 지방에도 한성부와 비슷한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삼원을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민료, 통전, 심과이다. 민료원은 한성의 활인원, 혜민원에 준하여 의약학에 기반해 환자를 치료하고 역병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설치되었다. 통전원은 성종 때 발전한 지방 장시와 화폐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환전, 대출, 상가관리와 같은 민간상업과 지방세 확보와 운영, 회계와 같은 경제행정업무를 주관하도록 설치되었다. 심과원의 경우, 한성의 포도청에 해당하는 조직으로 지방의 범죄와 민란을 억제하며 각종 수사 및 기소를 담당하여 사의청에 용의자를 인도하여 재판에 회부되도록 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삼원의 운영은 지방의 성장에 여러 도움을 주었으나 지방세의 확대로 세율이 증가하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5. 농상공업 및 조세

성종 때에 실시된 개혁으로 조선의 상업은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대동법으로 공인이 성장하여 지방 난전이 성장하자, 장시랑을 두어 관립장시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도록 하였고 평시청, 환전청을 두어 경제를 국가에서 효과적으로 운영하였으며, 모든 관리의 봉급을 녹봉으로 대체하여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화폐를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광종 때부터 시작된 대규모 탐광 작업과 광산 개발 장려에서 기인한 대규모 금속 비축량과 경제 성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바로 다음 현종 때에 공납의 혁파로 대동법도 전세에 포함되고 화폐로 수취되는 조세를 늘리며 더 확대되었고, 순판선 및 순행상을 통해 대대적인 해외 무역을 실시하여 막대한 부를 국내로 이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폐 도입과 무역 확대를 기반으로 이후 열왕 때에 꾸준히 지방 장시와 민간 무역을 확대하면서 완만한 경제 성장을 유도 및 통제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기조가 유지되었다. 조선의 대외 무역은 양잠업, 방직업, 유리공업과 같은 공업 활동을 장려하면서 성장한 수출 경쟁력과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던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무역 거점과의 연결을 통해 막대한 부를 끌어모을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이후 개혁을 진행할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음, 증권, 배당, 선물과 같은 각종 금융 상품과 조합제와 공장제, 특허제, 자격제, 판삼분제와 같은 여러 제도 정비는 국가 산업의 발전 뿐 아니라 경제학이 태동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공상업의 경이로운 성장과 함께 조선의 농업도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는데, 이는 조선이 태생적으로 주장한 농본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상공업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강구했으나 이를 적절히 제어하여 농업과 균형을 이루도록 조정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 각종 대외무역의 수출입을 통제하고 농작물의 유통량에 적극적 개입 및 통화와 곡물 간의 가치 조정으로 두 산업의 균형을 이루어왔다. 이를 통한 경제학의 발전은 조선 특유의 것으로 고종 때에는 조상학이 발전함에 따라 효과적인 국가 경제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할 수 있었다. 또한 인종 때 농서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육종 사업과 왜란 전후로 유입된 각종 구황작물과 신작물, 농사직설, 모내기법과 같은 농법의 보급, 기술의 발전과 주기적 토목공사로 유지된 치수 환경 등이 서로 절충되어 조선의 농업 생산량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고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삼, 남령초 등의 상품작물의 개발과 재배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경희 시대에 이르러서는 소빙하기로 인한 농업 생산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남만과의 교역과 구황작물의 보급으로 막대한 인구 부양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인구 또한 성장하기를 반복하여 2천만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할 수 있었다.
조선의 조세 수취 또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변화하였는데, 조용조로 대표되던 초기 시대와 비교하여 공물이 대동법을 거쳐 전세에 포함되고이후 전세는 각종 잡세를 폐지하는 대신 지속적으로 그 세율이 증가하는 경향을 가져왔다.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공상세에 대한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세를 지세로 개편하였는데, 이 지세는 필지총록에 등재된 토지의 용도에 따라 세율을 정하고 그 소유자에게 통합적으로 지세를 수취하도록 하였다. 이 때, 조합과 같은 경우 조합 명의로 토지를 소유하고 조합원이 동일한 세금을 부여받도록 하였다. 정조 때에 이를 더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민간계출과 조합계출을 시행하여 각종 민간의 수입과 지출 정보를 확인하고 세율을 변동하였다.
6. 과학기술 및 교육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종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과 같은 여타 사업의 진행을 위해 진행되었는데, 인종 때를 거치며 이러한 실용학문은 이론학문으로도 확대되었다. 인종은 기술을 통해 백성의 노동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려 조세 부담을 줄이고 태평성세를 이룰 것이라 자부했다. 이에 따라 막대한 투자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였으며 국가에서 권장하는 여섯 학문을 육학으로 뽑아 교육할 것을 강조하였고 각 지방마다 소교-향교-상교-육교 순으로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늘어난 교육기관과 교육과목은 서서히 적용되어 교육자를 충분히 교육시키도록 했으며 방학관을 두어 순차적으로 지방을 돌아가며 교육시키거나 백민훈감, 훈민서를 편찬해 교육과정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교육하도록 하는 등 인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학전과 양현고를 확대하여 교육에 임하거나 교육을 받는 자를 권장하고 독서당 제도를 통해 이미 임관한 관리도 육학을 배우길 장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교과서를 편찬하기 위해 간문청이 설치되었고 이후에 인쇄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조보와 같은 각종 홍보 매체를 이용하여서 백성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국문 개량과 교육에도 힘써 만민이 공평하게 교육받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인종의 교육 개혁은 이후 열왕의 치세에도 경이로운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이러한 관학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대거 등용되어 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관학파로 기존 유교와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위민정치와 실용정치를 구사하였으며, 각종 기술에 깨어있었다. 이들은 인종 때에도 등용하여 격서나 기기청으로 진출하였는데, 이 두 기관은 격물치지를 내세워 자연을 탐구하며 도구와 기계를 개발하는 관청이었다. 이 두 기관은 꾸준히 확대되어 일종의 학회나 아카데미의 성격을 가졌으며 국가 과제와 개인 과제를 병행하는 등 자율적인 연구 개발을 진행하였다. 이 뿐 아니라 경종과 명종 때에는 서양에서 유입되는 인재들을 영입하고 서양 학문을 편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수현전과 각종 학회를 창설하여 기술 개발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기상학,인쇄술, 대기압펌프, 천체역학, 고전물리, 미적분학, 대수학, 측정학, 지구과학, 동식물학, 의약학, 항해술, 제련술, 경제학, 기계공학, 언어학 등에 있어 광대한 발전이 있었고, 농기구, 방직방적기, 생활가구, 측정연구기구, 수력증기기관과 같은 각종 장치도 개발되었다. 이 중 육종과 유전확률, 농기구 같은 발전은 농업에, 제련술과 탐광법은 광업에, 항해술과 기계공학 등은 공업에 성장을 불러왔으며, 이것은 막대한 부로 연결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이렇게 기술 개발로 발생한 이익을 전용상작제로 보호하여 기술개발자를 보호 장려했으며, 나아가 조선의 과학 개발을 세계 수준으로 유지하게 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인재들이 군기청에 소속되어 무기 개량에 힘써 화포 무기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를 기반으로한 뛰어난 교환비, 인마살상력과 원거리 타격능력을 보유하여 강군을 키우는 것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인종의 교육 개혁은 이후 열왕의 치세에도 경이로운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이러한 관학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대거 등용되어 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관학파로 기존 유교와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위민정치와 실용정치를 구사하였으며, 각종 기술에 깨어있었다. 이들은 인종 때에도 등용하여 격서나 기기청으로 진출하였는데, 이 두 기관은 격물치지를 내세워 자연을 탐구하며 도구와 기계를 개발하는 관청이었다. 이 두 기관은 꾸준히 확대되어 일종의 학회나 아카데미의 성격을 가졌으며 국가 과제와 개인 과제를 병행하는 등 자율적인 연구 개발을 진행하였다. 이 뿐 아니라 경종과 명종 때에는 서양에서 유입되는 인재들을 영입하고 서양 학문을 편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수현전과 각종 학회를 창설하여 기술 개발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인쇄술, 대기압펌프, 천체역학, 고전물리, 미적분학, 대수학, 측정학, 지구과학, 동식물학, 의약학, 항해술, 제련술, 경제학, 기계공학, 언어학 등에 있어 광대한 발전이 있었고, 농기구, 방직방적기, 생활가구, 측정연구기구, 수력증기기관과 같은 각종 장치도 개발되었다. 이 중 육종과 유전확률, 농기구 같은 발전은 농업에, 제련술과 탐광법은 광업에, 항해술과 기계공학 등은 공업에 성장을 불러왔으며, 이것은 막대한 부로 연결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이렇게 기술 개발로 발생한 이익을 전용상작제로 보호하여 기술개발자를 보호 장려했으며, 나아가 조선의 과학 개발을 세계 수준으로 유지하게 했다.
신관학파에 소속된 기술직들은 혜종 때 과거시 개편이후 대거 정계로 유입되었는데, 기존의 과거시는 유교경전에 의한 암기식 시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혜종 때 실용적인 관직 등용 방법으로 과거제를 개편하고자 각 관청 별로 실무 지식을 기반한 본고사를 개최하여 실용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는 한편, 유교경전에 대한 시험은 여전히 공통 과목으로 유지되었으나 그 강도가 크게 낮아져 대과를 응시하지 않는다면 큰 제한이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개혁에 기반하여 조선은 대규모 기술직 인재를 확보하여 국가 정책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인재들이 군기청에 소속되어 무기 개량에 힘써 화포 무기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를 기반으로한 뛰어난 교환비, 인마살상력과 원거리 타격능력을 보유하여 강군을 키우는 것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7. 토목건축과 도시

여말선초까지 한반도의 대표적인 서민주거양식은 움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조선 초기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그 양식이 크게 변화하였으며 이에 따른 목재 문제 또한 대두되었다. 이러한 한옥의 형태는 다층화되어 ㅁ, ㅂ, ㄱ형 주택과 복층가옥으로 고도화 되었다. 민간의 건축은 경제가 발달하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이는 부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치로 귀결된 것이었기에 금세 법으로 금지 되었다. 이후 중종 때 호간제한법이 강경하게 시행되며 가옥의 면적은 크게 감소했으나 그 층수는 높아져 3, 4층 건물도 지어졌으며 이를 통해 건축술의 발전도 있었다. 이후 소빙하기에 의한 한파가 일상화되면서 온돌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중종 때에 이러한 변화에 발 맞추어 증수온돌을 개발하였다. 이를 통해 복층에도 온돌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온돌의 땔감으로 목재 소비가 급증하자 금초목령을 재집행하였는데 대신 석탄을 통한 증수온돌의 보급을 장려하였다.

정조 때에는 전란으로 파괴된 가옥을 보수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건축술과 그 장비들을 기반으로 한성대개축을 강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각 도시의 규범이 되는 형태를 제시하였다. 한성은 개축되면서 공공욕탕, 공공변소, 교육기관, 하수로와 장시의 위치를 설계하여 반영하고 교량과 도로의 폭과 양식을 규범화하여 적용하는 등 합리주의에 의해 진행되었다. 또한, 한성대개축 이후 한성에서 궁궐을 제외한 단층 건물은 모두 철폐되었는데, 대부분 복층이나 그 이상의 층수를 가진 복합가옥으로 개축되었다. 이러한 개축은 이후 지방에서도 서서히 민간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대부분 한성대개축을 참고하거나 이를 보완하여 진행되었다. 경희 시대에는 이러한 양식이 보편화되어 조선의 도시들은 대부분 복층에서 3층의 건물로 변모하였으며 난방 시간을 제한하는 등하여 석탄의 매연을 줄이고자 각종 도시 정책이 적용되었다.
8. 교통

조선의 교통은 그 환경적 요인에 있어 불리한 점이 많았는데, 산과 언덕이 많아 지역 간 분리가 심했으며 수레를 이용하더라도 그 고충이 심하여 제대로 도입되지 못하고 전적으로 수운에 집중된 교통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세종, 문종, 광종 때에 지속적으로 도로망 정비와 수레 권장 정책을 펼쳤음에도 정착되지 못한 배경이었다. 이에 따라 혜종 때에는 대대적인 지리조사를 통해 평지와 낮은 둔턱 위주의 지역 도로망을 정비하고 지역 도로망에서 연결된 포구에서 타 지역간 운송을 담당하도록 체계화하여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경제 성장과 맞물려 민간이나 지방에서도 호응하여 효율적인 교통망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교통은 대외무역이 발달하고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함에 따라 수운의 효율성이 증대됨에 따라 더 안정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부 사이에 육로 이동이 여전히 힘들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9. 종교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국가였기 때문에 교육제도 등지를 이용하여 만 백성이 어느정도 유교 사상을 기반한 종교생활을 영유하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였던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기에 이러한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서양과의 교류가 증가하며 서학 및 천주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이 외에도 무속신앙이나 도교 등의 민간신앙이 여전히 횡행하는 풍경이 조선 초기에 유지되었다. 숭불정책 이외의 종교 정책을 처음 펼친 왕은 광종이었는데, 그는 궁내 업무를 간소화하고 국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각종 행사의 규모나 수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며 이 때문에 도교 의식을 담당하던 소격서가 당시 폐지되었다. 이후 불교, 도교, 무속신앙에 대한 억제기조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는데, 일부 왕들은 불교 신자로서 암암리에 불교를 옹호하는 등 국정 방향이 일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에 의해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이어지자 정조는 천주교를 포함한 각종 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조선이 가진 방대한 정보망에 기반한 서학비판에서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전국에 배포되는 조보를 통해 천주교 국가들의 만행을 일일이 지적하여 천주교의 모순을 만천하에 적시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성직금제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선교 및 종교행사는 금지되었으며, 성직자임을 공공장소에서 표방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성서, 교서의 판매와 종교 회담만이 허용되었다.

10. 대중문화와 문화자산

조선의 농상공업이 발전하고 서민의 생활수준이 증대되자 대중문화 또한 발달하였는데, 가장 크게 발전한 것은 출판업을 등에 업은 한글소설이었다. 이 시기에는 매월 수만부의 한글소설이 유통되었으며, 소설 뿐만 아니라 시집, 수필이나 논문 및 비문학 서적도 상당히 늘어나 유통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극으로 확장되어 판소리 및 줄타기, 연극, 사물놀이 등의 성행으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소설가나 극작가, 연기자 등을 민간에서 양성하거나 자처하는 경우도 다수 생겨났다. 이와 함께 음악의 발전도 계속되었는데, 악기의 개발과 정간보의 개량 등에 탄력을 받아 작곡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기존의 거문고나 가야금 연주회를 넘어서서 대규모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과거의 운동경기였던 격구 등이 유행하여 격구회나 소싸움이 지방 곳곳에서 열리는 등 각종 대중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대다수의 문화는 민간이나 서민들에 의해 향유되었으나 그림과 서예의 경우, 양반 층의 전유물인 경향이 지속되었다. 물론 서민화풍이 등장하였으나 몇몇 분야가 아닌 경우 성행하지는 않았고, 대부분 부유한 집안에서 고용된 화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산수화, 초상화 나 병풍화를 주로 담당하였으며 경희 시절까지 이들은 대중문화에 편입되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의 공예품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조선백자나 분청사기 일부 청자는 대외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높은 값에 중국, 일본이나 서양으로 팔려나갔다. 이에 따라 도공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등 도공 업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도기의 생산량은 조선 초기와 비교하여 큰 폭으로 증가하였고 서민들도 도기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1. 언론 및 민족관

조선은 건국 때부터 강한 민족관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민족관은 현격히 강화되었다. 조선은 초기의 지속적인 개혁으로 조보(신문)와 우정(우편)으로 대표되는 정보전달체계를 통해서 중앙의 뜻을 즉시 지방까지 배포할 수 있었고, 소교-향교-상교와 같은 체계적인 교육기관 및 체계에 기반하여 대부분의 백성에 유사한 민족관을 공유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이는 교육학과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더 강력한 수단이 되었는데, 한반도의 기존 정권과 조선의 역사와 문화 행태 등을 교육하고 한민족관을 지속적으로 선전하여 백성의 민족관을 더 강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남정북벌에 대한 민중의 여론은 거의 호의적이었고 토목공사나 신역에 대해서도 조정에서 정당화하고 민란의 위험을 낮출 수 있었다. 이러한 선전과 국가중심교육의 기조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으며 이는 요동과 만주 일대와 일본 등지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12. 복지와 사회풍토

조선 초기의 법률은 대명률(대명법)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자체적인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졌고, 이와 함께 성리학적 방안에 입각한 사회복지제도가 탄생하였다. 세종 때에는 노비종모법과 남녀 모두 출산휴가를 지정하였으며 자자형을 금하여 인권을 상당히 진전시켰으며, 이후 사창제와 환곡제도, 대출제도를 개편하여 백성이 기아로 목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형법을 섬세히 조절하였다. 이후 열왕에 의해 유지되던 복지제도는 정조 때에 크게 확대되었는데, 상은제(국가수익보험)에 의해 수익의 안정성을 보장하도록 노력했으며, 노비감제법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오직 부채와 형벌에 의해서만 노비가 되고 세습은 불가하도록 지정하였다. 안민원을 설립하여 군사경찰에서 일반경찰로 전환함에 따라 경찰의 폭력성을 줄이고 전문성을 높여 사법윤리를 확보했으며, 재판변호제를 개편하여 모든 사람이 변호를 받고 삼심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 받도록 하였다. 나아가 검약청을 설치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복지 확대의 기조는 고종 시기에 더욱 증가하여, 아동을 제외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서얼, 과부, 천직의 법적 차별을 없애고 연좌제, 계급제, 첩제, 부채노비제, 연좌제 철폐하는 등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형벌에 의해 공노비가 된 자를 제외한 모든 백성은 양인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조혼, 무속신앙과 같은 악습을 뿌리뽑기 위해 대대적인 운동을 실시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 아동에 대해서 의무 교육을 실시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를 이룩한 고종 재위기 위후 경희 시대에는 이러한 제도들이 안착되도록 노력하여 실제로 많은 차별이 철폐되었다. 성별, 재산, 혈통에 연연하지 않고 배움을 통해 능력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농상공업 나아가 국가와 가문에 기여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가 전국에 만연하여 누구도 배우기를 꺼리지 않았고 오히려 향교 등에 다니지 않는 학력단절자에 대해서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농민들 또한 향학까지 진출하여 산학, 율학과 같은 학문을 배우고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노비가 해방됨에 따라 지방 토호의 세력은 다소 약화되었으나 그 자본을 이용해 상공업으로 전환하는데 박차를 가하였으며, 대규모 지주의 경우 이를 처분하여 소작제가 크게 줄어들고 자영농과 상품작물재배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13. 외교와 군사

조공책봉을 제외한 조선의 외교는 근본적으로 군사 분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근간은 체탐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초기 국가의 가장 큰 위협은 북방유목민족과 여진족이었는데, 이들의 침략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 체탐인을 보내는 것에서 정보수집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은 이후 광종 때에 크게 확대되어 체탐사가 되었는데 바로 다음 인종 때에는 육서 중 하나인 조서로 개편되어 비단 무력정찰 뿐 아니라 정보수집에 대한 막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조서는 이후에 명, 여진, 왜, 몽고 등지에 체탐인을 파견하여 각종 첩보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이후 국내 정보에 대한 수집 역할도 확보하면서 막강한 권력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국왕은 이를 견제하여 조서의 행정부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고 직계제를 실시해 각 (국가별) 부서에서 직접 보고를 받도록 하였다. 이후 고종 때에는 추밀원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정보 기관은 서양과의 접촉으로 크게 변화하였는데, 새로운 서양이란 존재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여 남만과 서양으로 다수의 사절을 파견하였다. 명종 때에는 하남만을 실시하여 사절단을 마닐라, 마카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고아 일대에 파견하여 서양 세력의 규모와 심중을 파악하였으며, 덕종 때에는 원양통신사를 파견하여 서양 상선단과 함께 대규모 사절을 서양 본토에 파견하였다. 이후 정기적인 서양과의 정보 교환을 실시하였으나 정조의 종교 정책으로 이러한 대서양 외교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동남아 일대의 무역사와의 외교는 지속적으로 연장되는데 성공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고종 때에 대규모 외교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마닐라 및 마카오, 나가사키, 자바섬 일대에 외교 공관을 수립하여 지속적인 외교 활동을 실시하였고, 나아가 스페인 본토에도 조선통관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이는 동서양 사이 가장 강력한 외교, 정보 창구로 발전하였다.

조선의 군사적 노선은 초기 동안 기병과 원거리 투사 무기를 통한 예방전쟁에 국한되었으며 이를 위해, 각종 화약무기를 발명, 개량하는 것에 치중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기술 발전과 함께 경종 시기까지 조총, 천보총, 승자총통, 호준포, 불랑기포, 비격진천뢰, 완구, 지뢰, 무오포 등의 무기를 개발하여 실전에 배치하였다. 이와 함께 화약무기의 근간이 화약 제조법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또한 경종 때 개량되어 염초밭과 공공변소 등의 도입으로 생산량 증대를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무기의 발전과 함께 외부의 대규모 공격에 의해 조정은 새로운 진법과 전술에 대한 발전도 미진하지 않았는데 명종 때는 을해은문을 개발하여 암호화 능력을 향상했고, 중종 때는 총병진법을 발간해 총병을 전면에 내세운 전법과 잡색군을 정비하여 대규모 군대를 운영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졌다. 나아가 뛰어난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영선원과 훈련원을 증편하고 이를 통해 해군과 육군의 사령관을 분리했으며 원수부를 통해 언제든지 긴급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작계를 준비하게 하였다. 혜종 때에는 제한적으로 국가에서 정병에게 봉급을 주고 모든 무기를 국가에서 관리하도록 하여 전투력의 표준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의 군사적 노선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변화하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왜구 때문이었다. 명은 왜구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해금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해상무역을 포함한 상업 증진을 위한 조정의 정책이 위협받았다. 따라서 조선은 왜구를 선제토벌하여 상업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대마도, 일기도, 평호도, 남왜도(오도) 일대를 점령, 토벌하고 왜구와 동조하는 비전국 번주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조선은 제한적인 예방전쟁을 수행했으나 임진왜란에 의해 국토가 침탈되자 조정은 공세적 군사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 대규모 보복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가 무술, 기해남정이었다. 이후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에 의해 호란이 있은 뒤 전례와 같이 대규모 북벌을 준비하여 신사, 갑진, 을묘 북벌을 일으켜 강하게 응징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정복전쟁과 예방전쟁을 통해 조선군은 그 용병술이 크게 성장했고 조선군 자체의 실전 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조선군은 비단 정벌과 토벌 뿐 아니라 해외 거점을 확보하는 것에도 동원되었는데, 대원도와 여송도 일대가 바로 그곳이다. 이 곳들은 덕종 때에 자리잡아 정조 때에 이르러 안정되었는데 이러한 거점을 통해 해적을 제압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고종 때에는 이를 확장하여 대원도와 여송도 전역을 조선의 땅으로 선포하고 장악하기 위해서 각종 소규모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14. 헌종의 치세
  • 사회문제
    헌종이 집권한 초기, 조선은 계속된 개혁과 잇달아 벌어진 대규모 전쟁, 최근에 발발한 왕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한 혼란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 개혁의 강압적인 진행은 당연하게도 수구층의 반발을 야기하였으며, 이들은 유신으로 인한 각종 법적 차별 철폐와 기존 풍습의 해체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 반면, 잇달아 벌어진 전쟁은 상이군인과 사회취약층을 양산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수용력을 초과하는 인력이 도시에 집중되면서 생겨난 빈민 문제도 각지에서 발생되었다. ▲ 이러한 문제는 종교 문제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증가한 사회취약층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천주교가 다시 세를 늘리면서 기존 정치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 나아가 사회에 만연해진 지식인 계층과 발전된 언론에 의해 각종 사회문제가 빠르게 전국에 퍼져나가며 각종 정책 논의가 격화되어 몇몇의 폭력 사태가 일어나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 정책수립
    선대 왕이었던 고종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왕실과 조정의 권위로 억눌러 와해시키길 원했다. 실제로 그러한 방안은 그의 재위기 동안 어느정도의 효과를 보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헌종이 즉위하면서 기존의 사회문제가 급격히 수면 위로 부상했으며, 이는 헌종의 정치력을 시험하는 거대한 시련으로 헌종 스스로 인식했다. 헌종은 스스로 선대 왕인 고종과의 차별을 위해 회유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길 원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한 정책 기조를 수립하였다.
    헌종은 가장 먼저 사회취약층과 빈민층의 구제를 목표로 하여 종교 문제와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는 적극적인 복지 정책으로 실시되었는데, 징용되어 상해를 입은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한 상해보험을 국가에서 운영하도록 하였고, 실업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교육기관을 통해 교육을 이수한 뒤 만주 개척지로 보내졌다. 이외에도 도시에 집중되는 인파를 막기 위해 농토에 대한 지세 세율을 감소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각 지방 대도시에 교지를 하달하여 장기 도시 확장 계획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헌종은 또한 지식인 계층을 포섭하기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각종 학회에 참석하여 각종 강연을 듣길 즐겼으며 본인도 이과학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조정에서 지급하는 학회보조비가 상당히 증액되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지식인의 포섭과 함께 조선 과학계 발전에 지대한 공로로 이어졌다.
    다만 헌종은 수구파에 대해서는 회유책이 아니라 고종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압박과 공권력을 휘둘러 제압하도록 하였다. 이는 개인적으로 기존 악습에 대해 청산해야 할 것으로 인식했고, 나아가 그러한 활동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 왕실이 오랜 기간 개혁적인 성향을 유지해온 관성에서도 유래되었을 것이며, 사회의 여러 지식인과의 교류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종교 문제에서 헌종은 당근과 채찍을 모두 활용하였는데, 먼저 교회와 성당의 설립을 합법화하고, 합동 기도 및 세례 또한 허용해 주면서 그 이면으로 막대한 세금과 사회적 책무를 부과하도록 했다. 천주교의 성직자가 종교활동을 하기위해서는 별도의 교육을 이수하여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고, 교회는 무조건 무료배식소를 갖추어야 했으며, 몇몇 수공업을 제외한 어떠한 상공업도 운영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의료와 교육의 공공책임 등의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였는데 이는 헌종 때 수립된 복지제도로 편입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설립된 종교시설은 막대한 부채를 감수해야 했는데, 몇몇 거대 수도회에서는 이러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한국에 교구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 조정이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갔다. 심지어 반사이익으로 종교 활동을 금하지 않았으니 서양 세력과의 무역에서도 이전과 같은 갈등은 방지할 수 있었다.
    • 연구진흥
      헌종은 지식인 계층을 폭넓게 수용하고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경희 시대 동안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개발비는 -각종 채무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치를 갱신했다. 이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는데, 국가적인 과제 해결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헌종은 먼저 미적분학의 개발로 인한 탄도학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고, 유체역학 및 기상학을 통해 항해의 안정성을 보장하고자 했으며, 화학을 성립시켜 철과 구리, 비료, 화약 등의 품질 균일화와 생산력 강화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국가연구기관인 격청이나 이와 관련된 학회는 특히 막대한 지원을 받았으며 그 대가를 위의 주제에 대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헌종 집권기 말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부정적 영향
    헌종 이전의 열왕 때에 계속된 개혁과 지방행정의 비대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대규모 전쟁은 국가 경제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한 부채는 조정이 소유한 이와미 은광과 같은 각종 광산에서 나오는 귀금속과 전쟁에서 얻은 배상금, 조공이나 무역을 통한 이익을 통해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규모는 점차 늘어났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조세 부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가중화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에 비해 2배 정도에 달했는데, 이마저도 다 충당하지 못하여 국채를 발행하여 사업을 진행하거나 요역을 대폭 늘려 충당해야 했다. 특히, 이러한 조세 부담은 선종 때에 극심해졌으며, 이 시기에 무리한 북벌과 천리장성 축조와 같은 각종 토목 공사로 인해 폐위되었을 정도였다. 천리장성 축조는 매우 비싼 사업으로 막대한 양의 국채가 발행되었는데 이 부담은 후대로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위험은 뛰어난 조정의 경제학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으나 언제든 국가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헌종 또한 이러한 위험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러한 막대한 부채에도 조선은 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경이로울 정도의 매출과 일본 및 중국 대륙의 유력 세력을 통한 무기 수출 및 국가 수준의 대부업을 실시하여 얻는 막대한 경제 성과에 기인했다. 이러한 경제 성과와 더불어 조선의 왕실은 광종 이후로 왕실 내의 사치나 대규모 행사를 관례상 금하였음으로 궁내 지출 또한 그리 많이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경제적 위기는 다소 과대평가되었다.
15. 통계
인구
19,285,221명 (1740)
세부 내용 추가
면적
1,067,858km² (1740)
세부 내용 추가
인구밀도
18.06명/km² (1740)
세부 내용 추가
상교
33개교 (1740)
584,400명 당 1개교
향교
1,199개교 (1740)
16,000명 당 1개교
소교
6,525개교 (1740)
3,000명 당 1개교
정조 때에는 전란으로 파괴된 가옥을 보수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건축술과 그 장비들을 기반으로 한성대개축을 강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각 도시의 규범이 되는 형태를 제시하였다. 한성은 개축되면서 공공욕탕, 공공변소, 교육기관, 하수로와 장시의 위치를 설계하여 반영하고 교량과 도로의 폭과 양식을 규범화하여 적용하는 등 합리주의에 의해 진행되었다. 또한, 한성대개축 이후 한성에서 궁궐을 제외한 단층 건물은 모두 철폐되었는데, 대부분 복층이나 그 이상의 층수를 가진 복합가옥으로 개축되었다. 이러한 개축은 이후 지방에서도 서서히 민간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대부분 한성대개축을 참고하거나 이를 보완하여 진행되었다. 경희 시대에는 이러한 양식이 보편화되어 조선의 도시들은 대부분 복층에서 3층의 건물로 변모하였으며 난방 시간을 제한하는 등하여 석탄의 매연을 줄이고자 각종 도시 정책이 적용되었다.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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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목조
태조 4대조
추존
익조
태조 3대조
추존
도조
태조 2대조
추존
환조
태조 1대조
초대
태조
1392 - 1398
2대
정종
1398 - 1400
3대
태종
1400 - 1418
4대
세종
1418 - 1450
5대
문종
1450 - 1466
6대
광종
1466 - 1480
7대
인종
1480 - 1501
8대
성종
1501 - 1529
9대
현종
1529 - 1538
10대
혜종
1538 - 1543
11대
경종
1543 - 1558
12대
명종
1558 - 1581
13대
중종
1581 - 1605
14대
숙종
1605 - 1617
15대
덕종
1617 - 1634
16대
정조
1634 - 1656
17대
단종
1656 - 1660
18대
선종
1660 - 1678
19대
고종
1678 - 1699
20대
헌종
1699 - 1742
21대
철종
1742 - 1745
22대
순종
1745 -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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