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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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목이 객진수문의 난으로 멸망한 이후 북연이 남위를 정복하고 원고 반도를 재통일하기까지 진행된 원고 반도의 212년간의 혼란기이다.

상세

만목 멸망 ~ 남당 멸망

시작부터 선양으로 포장된 쿠데타로 인해 세워진 북진과 지방 곳곳을 나눠 통치하던 호족들을 어설프게 통합시킨 남당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다. 남당의 초대 황제인 이경해는 그나마 호족을 적절히 견제하는 정책을 펴며 지방을 안정시켰으나, 북진을 세운 객진수문은 초장부터 철권통치를 휘둘러 나라를 세운 지 3년만에 조카의 반란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등 산북은 산남에 비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북진은 세워진 지 30여년만에 효별개무의 난으로 멸망하고, 남당의 2대 황제 이경상대 또한 호족 통합정책을 보기 좋게 말아먹고 수도까지 쳐들어온 호족들의 강요로 그들의 지방권력 행사를 공인하는 등 만목의 멸망 이후 원고 반도에는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반란에 성공해 북진을 멸망시킨 효별개무는 곧 지방을 통제하고 북제를 세웠다. 효별개무는 감부를 설치하여 북진 시대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권력을 정점에 올리는 한편 황족과 일반 귀족의 관직 진출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는 등 귀족에 대한 권리도 어느 정도 인정해줌으로써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북제는 북진에 비해 더 안정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 내부의 혼란한 상황이 해결되자 북제의 지략가들 사이에서는 산남을 정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산북 정통론이 대두하게 된다. 북제가 남당을 침공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남당의 지배 세력이던 호족들 사이에서는 북제의 통일을 지원한 뒤 그 댓가로 북제의 보호 하에 권력을 누리자는 환침론과 남당 조정에 비해 북제는 믿을 게 못되니 차라리 지금 북제를 물리쳐 당분간 산남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자는 항전론이 충돌하였다. 항전파는 일찍이 만목 후기부터 성장한 호족의 일파로서 중앙정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했으나, 남당의 지방분권화 이후 뒤늦게 성장한 신흥 호족들은 북제를 도구 삼아 현재의 기득권 세력인 주전파를 제거하고 공신으로써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환침파는 곁다리 세력으로써 목소리가 매우 작았고, 논리 자체도 박약하여 항전파에 비해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결국 논쟁을 통해서는 힘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환침파는 황백산을 내세워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항전파 인사인 사유혼이 반란을 진압하고 정계를 장악하면서 항전론이 환침론을 완전히 짓누르게 되었다.

남당 정국을 장악한 사유혼은 개령산성을 짓고 환침론파 호족들이 소유했던 사병을 혁파하여 모두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북제의 침략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한편, 북제는 상황이 달랐다. 한창 산남 침공을 준비하던 효별개무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 헌종(효별상지)이 즉위하자, 산남 정벌에 반대하던 주화파는 효별개무를 이은 주전파의 대표주자인 감부장 연무위를 견제하기 위해 헌종을 등에 업고 조정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효별개무 즉위 시절에도 산남 정복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가 막강한 왕권을 지녔던 효별개무의 사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이처럼 주화파가 기어오르려는 시도를 하자 연무위는 결국 밤새 군대를 파견하여 주요 주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헌종을 납치하여 감부에 머물게 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연무위의 쿠데타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침내 북제는 남당을 침공했으며 명분 부족으로 처리하지 못한 남은 주화파 세력들을 전장에 내보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사기가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북제군은 남당군의 철저한 방어에 막혀 개령산성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개령산성에 파견되지 않은 남당군은 개령산 저지대를 통해 방어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북제군의 옆구리를 노렸고 작전은 대성공, 결국 북제군 대부분이 포위섬멸당하고 잔여 병력은 패퇴하고 말았다. 남은 병력의 지휘관이자 주화파 세력이었던 이연국은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현재 원주 남부의 숲으로 숨어들었는데, 부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지 말고 아예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며 결국 그들은 연산으로 진격하였다.

북제의 수도 연산에서 전황도 잘 모른 채로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있던 연무위는 이연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둥지둥 사병들을 모아 반란에 대응하였으나 실전 경험을 쌓은 장수들에 비하면 오합지졸일 뿐이었고, 결국 연무위는 패퇴하여 헌종을 놔두고 옛 광양 땅으로 도망쳤으며 연산은 이연국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후 이연국이 효별상지를 폐위하고 북하를 세웠으며, 연무위는 녹주에서 북송을 세우며 산북은 둘로 분열되었다. 같은 시각 개령산성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사유혼은 수도인 산구로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며 이미 그의 영향력은 평범한 호족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남당의 4대 황제 목종(이경운강)이 사유혼에게 선양하면서 남당이 멸망하고 남주가 건국되었다.

남주 건국 ~ 북연의 통일

남주의 역사는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호족 세력 약화와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고조(사유혼)의 치세와, 아버지가 일궈놓은 국력을 보기좋게 탕진하고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데다 숙청과 살인까지 즐겼던 천하의 폭군 말제(사유곽)의 치세가 그것이다.

우선 고조는 자신 스스로도 호족 출신이였기에 현재 남주 정계를 장악한 호족들이 얼마나 무서운 세력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아들인 사유곽에게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집권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계획을 함께할 수 있는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마침내 만목의 멸망 이후 오랫동안 세력을 잃었던 산족을 다시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대단한 충신이었던 가정부직은 고조가 직접 하기 곤란한 여러 개혁정책들을 대신 시행했으며, 그 중 정훈 정책은 당말주초에 집권한 호족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정훈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훈이 축소되고 권력에 피해를 입은 호족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반역을 꾀했으나, 미리 젊은 호족들을 스파이로 심어둔 고조는 역모 현장을 샅샅이 포착해내 모두 형장으로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절대권력을 얻은 고조는 권력의 빈자리를 청사(기득권 호족 제거에 기여한 젊은 호족)과 신산(고조 치세 초기 새로 집권한 산족)으로 메꾸었으며 숙청당한 호족들이 비정상적으로 늘린 사유지의 절반은 신산과 청사들에게, 나머지는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백성들도 만족하고 포상을 확실하게 받은 공신들도 만족하는 평화로운 결과를 이뤄냈다.

반면 그의 아들 말제는 태자 시절부터 인격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고, 특히 그는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가정부직이 한낱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르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폐제는 즉위하자마자 가정부직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처형하고, 나머지 신산 소속 대신들도 모조리 참하였다. 남은 청사 세력은 황제가 무서워 감히 저항하려 들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16년간 이어진 황제의 방탕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중 일부는 황제에게 아부를 떨고 그의 묵인 하에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재산을 축재하기도 했다. 고조대에 번영하였던 남주는 이제는 백성의 고통밖에 남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한편 충신들에 대한 숙청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말제가 신임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유헌공이었다. 유헌공은 고조 치세 말기에 국경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군직에 올랐는데, 말제의 즉위 이후 잦아진 두 북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면서 말제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길로 유헌공은 수도육군통제사의 자리까지 오르며 말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는 속으로 말제를 폭군이라 여기며 말제의 의심을 피해 정변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말제는 677년 유헌공이 일으킨 정변으로 인해 폐위당했으며, 남주를 멸망시킨 유헌공은 남위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한편 북하를 세운 태조 이연국은 연무위의 북송을 멸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세를 이어갔으나 태조대에는 모두 실패하였고, 차기 황제인 영종에 이르러서는 군사적 활동보다는 인구 및 생산력 증가와 지방 통제에 중점을 두었다. 북하가 다시 활발한 공격을 시작한 것은 3대 황제 무종대의 일로, 그가 즉위할 때는 한창 남주 말제가 국가를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갈 때라 이를 기회로 여긴 무종은 풍주 동북부를 거의 휩쓸고 다니며 유헌공과도 여러 번 대치했다. 이는 남위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나 성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난 뒤로는 다시 북송과의 경쟁에 집중했다. 결국 691년 5대 황제 성종이 화곡을 점령하고 북송 4대 황제 연무경이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나서야 산북은 통일되었다.

북하가 산북을 통일하고, 자연스럽게 중앙권력은 문신들이 아닌 직접 북송 멸망에 기여한 무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성종 또한 남위를 멸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앙정부에 3보(정보, 진보, 국보)를 세워 국방, 대외 정사, 회계를 군인들이 의논토록 하였다. 그러나 성종 승하 이후로는 3보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무신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대지주로 군림하는 등 그 폐해가 심해졌고, 덩달아 6대 원종은 땅을 뺏긴 소작농들을 강제로 무신 집 노비로 넣거나 대규모 노역에 징용, 또는 군에 입대시키는 등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민 지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무인들에게 뇌물을 대었고 그 댓가로 노역과 군역을 면제받고 땅의 소유를 보장받는 지정첩을 받아 가까스로 땅을 보전하였다. 이들은 평민과 무인 사이의 사회적 신분에 위치해있다고 인식되어 중인으로 불렸으며 후일 북연의 건국에 기여하여 주요 권력집단으로 성장했다.

북하가 이렇게 무신과 3보를 기점으로 국정을 운영할 무렵 남위 또한 호족을 이어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 되었던 청사를 내치고 그 자리에 시무들을 앉혀 강력한 군사력 기반의 국가를 만들었다. 시무는 과거 남당 시기 호족가문 저택의 호위를 담당하던 무인 계층이었는데, 남주의 호족 숙청에 기여하고 중앙군에 등용되며 점차 힘을 키웠고, 최종적으로 시무 집안 출신인 성조 유헌공이 남위를 세우며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였다. 성조는 국내에서 반란이 터지거나 외적이 침입해오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방을 시무들이 직접 다스리도록 하고 군사력까지 분할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무 출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았던 시무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지방을 충실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3대 황제인 혜종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외척인 선진빈무가 아기인 4대 의종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서자, 시무들은 선진씨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위권파와 나라에 반기를 들 수 없다는 주화파로 나뉘었고 이는 결국 거대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은 다름아닌 북하를 멸하고 세워진 연나라에 의해 종결됐다. 북하 7대 황제 목종 대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장악한 무신들 내에서도 원로 무신들에 비해 젊은 무신들이 차별받는 등 신분적 폐해가 심해지고 있었고, 몰락한 문신들은 경제력이 있으나 신분은 낮은 중인들과 연대하여 사회적 지위 상승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무인들 중 하나인 죽문신양은 목종 재위 초기에 일어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부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대표적 몰락 문신이었던 정대석은 죽문신양과 연합하여 청년 무인-몰락 문신-중인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적 동맹을 형성하고자 했다. 결국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본 죽문신양과 정대석은 국신사를 설립하여 하나의 큰 세력으로 성장했고, 그 위세는 정부마저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8대 민종은 국신사를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령했으나 국신사 또한 청년 무인들로 인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국신사는 역으로 황궁을 점령하고 민종에게 항복을 받아내어 북하를 멸망시키고 연을 세웠다. 연의 황제로 추대받은 죽문신양은 산북이 비로소 안정되자 한창 내전중인 남위에 눈을 돌렸고 결국 군대를 일으켜 산남으로 쳐들어가 내전의 양대 세력에게 모두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산남을 정복하고 만목 멸망 이후 212년만에 원고 반도를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