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 {{제이위키 다른 뜻|대한제국|신한국세계관의 대한제국}} {{대한제국 표 (신한국)}} '''대한제국'''(大韓帝國, {{llang|en|Korean Empire|코리안 엠파이어}}, {{ja-y|大韓帝国|だいかんていこく|다이칸데이코쿠}}, {{llang|zh|大韓帝國|다한디궈}}) 혹은 '''대한'''(大韓, {{llang|en|Korea|코리아}}, {{ja-y|大韓|だいかん|다이칸}}, {{llang|zh|大韓|다한}})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써, 서쪽으로는 [[중화민국 (신한국)|중화민국]]이, 동쪽으로는 [[일본 (신한국)|일본]],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필리핀]] 등과 접하고 있다. 수도는 [[한성]]이며, [[부산]], [[평양]], [[대련]], [[봉천]], [[장춘]], [[회령]], [[염포]], [[대북]]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한국어]]가 공용어이며, 북부에서는 [[만주어]]와 [[중국어]]가 북동쪽에서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남쪽에서는 [[유구어]] 등이 지역어로써 사용된다.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대한제국의 연호 (신한국)|연호]]를 사용한다. 공식적인 국명은 '''대한제국'''과 '''대한'''이나, 국내에서는 '''한국'''(韓國), '''한'''(韓) 등으로도 사용되며, [[일본령 조선]] 이전 존속하였던 [[대한제국 (1897-1910)]]과 구별하기 위해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 혹은 '''신한국'''(新韓國)이라 불리기도 한다. 약 3만에서 4만년전, 한반도에 고대 인류가 출현한 뒤로, 기원전 2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건국한 [[고조선|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남북국 시대]], [[고려]]를 거치며, [[1392년]], [[조선 태조|태조]]에 의해 [[대조선국]]이 건국된다. [[대조선국]]은 약 500년 동안 단일의 왕조이 존속해왔으며, 17세기에 들어 열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1897년]]에는 27대 국왕이던 [[광무 황제|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로 바꾸며 [[대한제국 (1897년-1910년)]]이 선포되었다. [[광무개혁]]과 같이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음에도,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 대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걷어낸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에 의해 합병당하였다. [[1929년]], [[관동군 (신한국)|관동군]]의 독단적 행위로 인해 [[봉천 군벌]]과의 사이가 파탄에 이른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 내부에서는 [[관동군 (신한국)|관동군]]에 대한 처벌을 두고 분열되었고, 이는 [[제1차 일본 내전|내전]]으로 치닫는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 [[봉천 군벌]]과 손을 잡고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여 독립을 이룬다. 그러나 독립 이후 건국된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은 국내의 분열으로 인해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한 [[한성 진군]]에 의해 문민 정부는 붕괴된다. [[한성 진군]] 이후 군부는 황정복고를 선언하고 [[신주 황제|의친왕]]을 [[대한 황제]]로 옹립한다. 건국 이후 [[신주개혁]]을 시행하며 [[광무개혁]]의 후신 개혁을 진행하였고, [[봉천 군벌]]과의 전쟁을 통해 개혁의 필요를 증명하였다. [[신주 개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신주 북벌]]이나 [[신주남정]] 등의 팽창 정책을 채택하며, 주변국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서양 세력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왔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함으로써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후에는 팽창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국제]]에 의해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이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대한 황제]]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대한제국군]]을 통솔한다. [[전주 이씨]]가의 [[청천 황제]]가 즉위 중에 있으며, [[이 ]]가 법적 계승자로 있다. [[대한제국 의정대신]]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한제국의회]]에 의해 선출되어 [[대한제국 궁내부|궁내부]]와 [[대한제국 원수부|원수부]]를 제외한 내각을 이끈다. [[대한제국의회]]는 대한제국의 입법부로써 [[대한제국 중추원]]과 [[대한제국 추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제국 중추원]]은 도 단위의 [[대선거구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6년의 임기를 지니며, [[대한제국 추민원]]은 [[소선구제]] 선거를 통해 4년의 임기를 지닌다. [[대한제국 추민원|추민원]]에서 가결된 법안은 [[대한제국 중추원|중추원]]에서 다시 논의되어 법안을 부결시킨후 [[대한제국 추민원|추민원]]으로 되돌려보네거나 통과시킨후 [[대한 황제]]의 승인을 받아 공표된다. [[대한제국 대법원]]은 대한제국의 최고 사법부로 1명의 [[대한제국 대법원 대법관|대법원 대법관]]과 --명의 [[대한제국 대법원 법관|대법원 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3심제에 의해 [[항소]]와 [[상고]]를 거친 사건을 판결하거나, [[대한제국 국제]]에 반하는 법안을 판단하고 법안을 무효화시킨다. == 국명 ==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여러 해석이 있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 (신한국)|광무 황제]]가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 (신한국)|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진군]]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일본 (신한국)|일본]], [[중화민국 (신한국)|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Zh|s=韓國|한궈}}, [[주음 부호]]:ㄏㄚㄋˊㄍㄨㄛˊ한궈, {{ja-y|韓国|かんこく|칸코쿠}}, {{Vie|v=Hàn Quốc|pr=한 꾸옥}})이라 부른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불리는데, 이 명칭의 시초는 중세 왕국인 '[[고려]]'라는 국명이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지면서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Korean Emprie로서, 약칭 'K.E.'로도 사용된다. [[대한제국 (1897-1910)(신한국)|구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 역사 == {{한국사 (신한국)}} === 조선 독립 전쟁 === {{본문|조선 독립 전쟁}} [[1928년]] [[6월 4일]], [[관동군 (신한국)|관동군]]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에 의해 [[황고둔 사건]]이 발생한다. [[봉천 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은 암살을 피해갔으나, 이로 인해 [[봉천 군벌]]과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화하였다.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 제국]] 군부 내에서는 해당 사건을 일으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의 처분을 놓고 [[통제파]]와 [[황도파]]로 분열되어 [[6월 15일]], [[통제파]]의 쿠데타가 발생한다. 쿠데타는 곧바로 [[제1차 일본 내전|내전]]으로 번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로 한다. [[황고둔 사건]]으로 [[봉천 군벌]]은 [[난징 국민정부 (신한국)|난징 국민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면서([[동북역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난징 국민정부 (신한국)|국민정부]] 뿐 아니라 [[봉천 군벌]]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28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선 독립 전쟁]]을 선포한다. [[8월 13일]], [[봉천]]에 주둔한 [[관동군]]을 공격함으로써 [[봉천 전투]]를 개시하였으며, [[관동군]] 수적 열세로 인해 봉천역에서 열차를 통한 후퇴 작전을 진행하였다. 후퇴한 [[관동군]]은 상당한 양의 무기를 두고 탈출하였고, 독립군은 이로 무장한다. 이후 [[8월 19일]], [[관동주]]의 [[보란점]]에서 [[대련 전투]]가 시작되어, 독립군 측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군대를 둘로 나눠 공격적인 작전을 취한다. [[8월 22일]], [[보란점]]은 점령되었으며, [[대흑산]]을 사이에 두고 [[금주]]에 전선을 형성하였다. 독립군은 계속해서 [[대련]] 끝자락으로 공격해나갔고, [[관동군]]은 본토의 지원을 원할하게 얻지 못함에 따라 계속해서 패퇴해나갔고, 결국 [[8월 26일]], [[대련]]의 [[관동군]]은 항복하였다. 요동에서의 두번의 전투 끝에 [[관동군]]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일본령 조선]]의 영토에는 100여명의 주둔군 밖에 남지 않았다. [[8월 28일]], [[단동]]에 있던 독립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한다. 십만의 병력이 한반도 주요 대도시로 철도를 통해 이동하였으며, [[8월 31일]]에는 이틀간의 교전 끝에 [[경성]]이 함략된다. [[1928년]] [[9월 1일]], [[조선 총독부]] 청사에서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이 선포된다. [[9월 3일]], [[부산]]에서 제4대 [[조선 총독]]인 [[야마나시 한조]]와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이 체결된다.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에 의해 [[일본령 조선]]은 해체되었고, 배상금과 [[관동주]]의 일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 한성 진군 === {{본문|한성 진군}}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의 체결 이후 [[10월 1일]], [[제1회 대한국 총선]]이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전까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이념의 집합체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국 (신한국)|대한국]]은 새로운 국가의 정치 이념과 관련되어 분열되었다. 반년 가까이 헌법은 채택되지 못하고 1장에서 논의가 벗어나지 못하였고, 결국 [[1929년]] [[1월 16일]], 군부는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점거한다. [[김원봉]] 등의 좌익 장교들은 이에 대항하여 한성으로 진격하였으나 저지당한다. [[한성 진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됨에 따라 군부 내부에서는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자들과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들으로 나뉘어졌다. 하루 동안의 논의 끝에 왕정복고로 그 의견이 모아졌으며, [[이범석]]을 [[대한 황제]] 임시 권한대행으로써 [[1월 18일]] 대한제국이 선포된다. 군부는 [[광무 황제]]의 삼남인 [[신주 황제|의친왕]]을 [[대한 황제]]로 추대하였고, [[신주 황제|의친왕]]은 이를 수락하며 [[1월 21일]] 즉위한다. === 신주개혁 === {{본문|신주개혁}} [[1929년]] [[2월 17일]], 경제, 교육, 제도, 군사 등 다방면의 분야에 대한 개혁인 [[신주개혁]]이 발표되고 실행된다. [[프로이센]]의 여러 제도를 참고로 작성된 [[신주개혁]]은 수 십년전 [[광무개혁]]의 여러 개혁안들이 다시 등장했으며, 조세와 같은 몇몇 항목은 수정·보완되었다. [[4월 15일]]에는 [[KIS 양무호]]의 이름을 딴 해군 계획인 [[양무 계획]]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29년]] [[4월 24일]], [[경흥]]의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수십명의 광부가 수장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광부들은 항의하며 안전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신주개혁]]으로 인해 광업 대부분이 개인으로부터 몰수당해 정부의 인수인계가 진행되던 상태였고 광부의 요구는 무시당한다. 이 과정에서 광부에 대해 폭행이 가해짐에 따라 [[4월 26일]], 광부들은 파업을 일으킨다. 초기 며칠 동안은 평화적인 상황으로 흘러갔으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의 지원을 받은 [[조선 공산당]]이 광부들과 주변 노동자들을 부추기며 무력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무력 사태에 대해 [[진위대]]는 무력으로 진압을 개시하였고, 결국 [[5월 4일]], 백여명의 사상자를 낸체 사건은 종료되었다. === 제1차 한봉 전쟁 === {{본문|제1차 한봉 전쟁}} [[황고둔 사건]] 이전까지 [[봉천 군벌]]은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과 손을 잡고 [[간도]] 내 조선인과 독립군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황고둔 사건]]으로 [[봉천 군벌]]과 [[일본 제국 (신한국)|일본]]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동북역치]]함으로써 [[난징 국민정부]]에게 복종한다. 이는 [[조선 독립 전쟁]]에 큰 힘이 되었으나, [[대한국 (신한국)|대한국]] 때부터 [[봉천 군벌]]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한제국이 [[한국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간도]]에 대해 [[대한제국 (1897-1910)]]과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는것에 더해, [[부산 조약 (신한국)|부산 조약]]에서 [[대련]]의 일부를 [[봉천 군벌]]에게 반환하지 않고 [[여순도]]라는 이름으로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시키면서 갈등은 더욱 커졌다. [[1929년]] [[3월 23일]], [[봉천 군벌]]은 [[대련]]에 주둔하는 [[여순 진위대]]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제1차 대련 전투]]가 발생한다. [[대련 전투]]로 인해 남아있는 민간인이 적었다고 해도 [[봉천 군벌]]은 시가지로 진입하였고, 여러 차례의 교전 동안 십 여명 정도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순 진위대]]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유리한 교전을 여러차례 진행하여 승리하였으며, 결국 [[3월 28일]], [[봉천군]]은 퇴각한다. [[1929년]] [[7월 10일]], [[봉천 군벌]]의 [[장쉐량]]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이 소유권을 지니고 있던 [[중동로]]를 무력으로 회수한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신한국)|소련]]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해결을 원하였으나, [[난징 국민정부]]와 [[봉천 군벌]]이 [[중동로]]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9월 19일]], [[봉소 전쟁]]이 발발한다. [[9월 26일]], 이를 틈타 대한제국 [[대련 진위대]]는 [[봉천 군벌]]이 선제 공격을 취했다 주장하며 [[제2차 대련 전투]]를 일으킨다. [[제2차 대련 전투]]까지 대한제국이 승리하였고, 자신감을 얻은 대한제국은 [[간도]] 내 한국인 보호를 명분으로 도하한다. 이에 [[봉천 군벌]]은 항의하며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9월 30일]], [[제1차 한봉 전쟁]]이 발발한다. [[10월 4일]], [[단둥]]에서 [[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는 [[안동 (안동도)|안동]]이 점령당한 [[10월 8일]]까지 지속된다. [[안동 (안동도)|안동]]을 점령한 [[제1 진위연대]]는 [[안산]]을 향해 북상하였고, [[여순 진위대]] 또한 [[금주]]를 점령하고 [[안산]]으로 진군하였다. 동부의 [[제1 진위연대]]는 [[두만강]]을 건너 [[10월 12일]], [[연길]]을 점령하였고, [[연길]]의 간도인들을 징집하여 [[봉천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1929년]] [[11월 4일]], [[봉천 군벌]]은 [[안동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에게 [[관동주]] 전역과 [[대한제국 (1897년-1910년)]]이 주장하던 [[간도]]의 지배를 인정한다. === 신주남정 === {{본문|신주남정}} {{참고|신주 북벌 계획}} [[제1차 한봉 전쟁]]의 승리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는 팽창 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여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1929년]] [[5월 20일]] 개회된 [[제1회 대한 의회]]의 원내 정당들 또한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다. 정부 또한 예외는 아니여서 --- 내각은 기존의 소극적인 외교 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신주 북벌 개획]]을 작성하였다. 그러던 [[1930년]] [[4월 18일]], [[일본 (신한국)|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구 (신한국)|유구]]에서 [[4월 1일]] 일어났던 [[오사카-교토 봉기]]의 혼란을 이용해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유구 독립군은 빠른 속도로 [[오키나와현]] 전역을 장악해나갔으며, 뒤늦게 위험성을 깨닳은 [[일본 (신한국)|일본]] 정부는 [[4월 19일]], [[유구 (신한국)|유구]]로 진압군을 보낸다. 이에 [[유구 (신한국)|유구]]의 독립 운동에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한제국은 유구 독립 정부를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 (신한국)|일본]]에게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강행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다. [[오사카-교토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던 [[일본 (신한국)|일본]]은 어쩔 수 없이 [[4월 18일]], [[도쿄]]에서 [[유구국]]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도쿄 협정]]을 체결한다. [[도쿄 협정]] 이후로도 [[일본 (신한국)|일본]]은 [[일본령 대만]]까지 해방하여 사실상 해외 영토를 잃고 다시 [[일본 열도]]에 고립되었다. [[대만 공화국]]이라는 신생 공화국이 수립되자 대한제국은 반년 동안 증가한 영토 확장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1930년]] [[5월 8일]], 남쪽에 대한 침략 계획인 [[신주남정 계획]]이 수립되었다. [[대만 공화국 (신한국)|대만 공화국]]과 [[유구국|유구국]]에 대한 강한 야욕을 지닌 [[신주남정 계획]]은 2차 대전이 종전되기 전까지 기밀 문서로써 존재하였다. 해당 계획에서 [[대만 공화국|대만]]과 [[유구국|유구]]는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로 나가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였고, 최종적으로 해당 계획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까지를 목표로 삼았다. [[1930년]] [[6월 13일]], 대한제국은 [[신주남정 계획]]에 따라 [[유구국 (신한국)|유구국]]과 외교권과 통행권·정박권을 대가로 국방과 독립을 보장하는 [[대한-유구 협정]]을 체결하였다. [[9월 23일]], 대한제국은 [[대만 공화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대만 공화국]]을 침공한다. 하루만에 [[대북]]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령한 대한제국은 25일, 항복 협정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고, [[9월 28일]], [[대한령 대만]]을 수립함에 이른다. === 제2차 한봉 전쟁 === === 한중 전쟁 === === 한소 전쟁 === == 지리 == === 지형 === === 기후 === == 정치 == {{대한의 정치}} === 대한 황제 === {{대한 황제}} === 대한 정부 === {{대한 정부}} === 대한 의회 === {{대한 의회}} === 대한 법원 === === 행정 구역 === {{대한의 행정 구역}} == 국방 == {{대한군}} == 경제 == == 사회 == === 인구 === === 민족 === === 종교 === === 언어 === === 교육 === === 언론 === === 복지 === == 교통 == == 문화 == == 대외 관계 == == 같이 보기 == [[분류:신한국]] [[분류:국가 (신한국)]] [[분류:대한제국 (신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