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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at of arms of Tungning.png
영어: Kingdom of Formosa
네덜란드어: Koninkrijk Formosa
스페인어: Reino de Formosa
민난어: Tang-lêng Kok
객가어: Tûng-nèn Koet
동녕국
東寧國 (둥 닝 궈)
국가 동녕취청
(중국어: 東寧翠青, 영어: Formosa the Green)
국화 매화
(중국어: 梅花, 영어: Prunus_mume)
표어 太平一統光世界 평화는 빛의 세계를 통일한다.
(영어: Perfect Peace unifies the World of Light)
면적 36,121 km2 (아시아 38위, 세계 138위, 아시아 0.081%)
이전 국가 - 도네이 군정청 (1943-1945)
- 일본령 호코 제도 (1943-1945)

인문 환경


인구 총 인구 12,053,245‬‬명(2020년 기준) / 세계 78위
민족 구성 한족 94.5%
고산족·평포족 2.4%
기타 3.1%
인구 밀도 333.6명/km2
기대 수명 82.7세(2020년 기준)
출산율 1.34명(2020년 기준)
공용 문자 한자, 주음 부호, 로마자 등등
종교 분포 도교 35.1%
불교 22.2%
기독교 10.3%
기타 4.8%
무종교·무신교 27.6%
HDI 0.849(2020년 기준) / (High세계 40위)
국군 동녕군

정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다당제, 단일국가, 성문법주의(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6.05(2020년 기준)
결함있는 민주주의(세계 75위)
황제 사오칭 紹淸[1]
국가
요인
총리 리세더 李偕德
부총리 라이융위안 賴永元
입법원장 위청마오 宇成懋
참정원장 샤오추이쉬 蕭翠頊
사법원장 쳉즈창 程知強
집권 여당 동녕민주당 東寧民主黨
  1. 휘는 '옌쉬안'(延暄), 휘호는 '응휘황제'(應輝皇帝)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소유권 절대의 원칙, 사적 자치의 원칙, 과실책임의 원칙
명목
GDP
전체 GDP $5,719억(2020년 기준)
1인당 GDP $47,447
GDP
(PPP)
전체 GDP $8,074억(2020년 기준)
1인당 GDP $66,986
수출
입액
수출 $3,017억(2020년 기준)
수입 $3,093억(2020년 기준)
외환보유액 $5,326억(2020년 기준)
신용 등급 무디스 Aa3
S&P 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동녕 달러(東寧蚊)
ISO 4217 TWD
국가
예산
1년 세입 $2,289억(2020년 기준)
1년 세출 $2,303억(2020년 기준)
지니계수 33.8(2020년 기준) / Low

단위


ccTLD .tn, .東寧
ISO 3166-1 158, TN, TUN
국제 전화 코드 +886
법정연호 서력기원, 연호
DST UTC+8(동녕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날짜 형식 dd-mm-yyyy / yyyy-mm-dd
운전석(통행 방향) 왼쪽(우측 통행)

외교


유엔 가입 1955년 12월 14일 가입
유엔 회원국 승인 여부 193개국 승인
수교국 191개국 수교
(시리아, 쿠바 미수교)
동녕 위치

동녕 왕국(중국어: 東寧王國, 영어: Kingdom of Quelpartia 킹덤 오브 켈파르티아), 또는 약칭으로 동녕(중국어: 東寧, 영어: Quelpartia 켈파르티아)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도서 국가이다. 국토는 동중국해에 위치해 있는 동녕 제도의 세 개의 큰 섬(남풍南豊, 백림白林, 천류天流)과 이들 주변에 산재된 부속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면적은 45,118 km2이며 에스토니아(45,228 km2), 덴마크(43,094 km2)[1]와 엇비슷하다. 수도는 성도(星道)이고 인구는 대략 1,850만 명이다.

10세기 이전까지 해적들의 근거지 혹은 중계지로 활용되었다. 926년, 월랑 왕조(月狼王朝)가 개창하여 제도를 통일한 이후부터 중원한반도에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부터는 일본 제국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과 분리 독립 세력들을 견제하고자 태평양 패권의 확장을 도모하던 미국을 끌어들여 미녕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97년에 이르러 표면적인 계몽적·인도주의적 목표와 제국주의적 침탈 목적이 명확해진 미국은 총독을 파견하고 동녕의 고루한 정치 질서를 무너뜨린 다음 미국령 켈파르티아를 성립시켰다. 일종의 자치 식민지로 편입된 동녕은 도민 총독이 주도하는 민정 지배를 바탕으로 정당제와 근대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침공을 개시한 일본 제국은 동녕 제도를 점령하여 군정 통치를 실시하였다. 8월 15일 종전과 함께 동녕 일대가 해방되었으나 약 2년간의 미군정의 자문 통치를 받았다. 허나 격앙된 민족주의와 주둔 미군들의 일탈 문제로 민족재건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양측의 합의 아래 국민투표를 거쳐 1947년 6월 14일에 자주 독립을 선언하였다.

현재의 동녕은 1947년 독립 이후 1970년에 제정·시행된 동녕 수정헌법(東寧 修整憲法)에 의해 법적 구성된 국가이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맡는 성주(星主)와 국민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정원(參政院, 상원), 민의원(民議院,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의 성주애휘, 국무경이훤이다.

동녕은 선진국으로 평가된다. 인간개발지수(HDI)는 2020년 세계 기준 0.933으로 홍콩과 같은 특별행정구 등을 제외한 동아시아 나라 중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협소한 국토[2]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부족한 인적·물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17번째로 수출이 많으며 세계에서 15번째로 수입이 많은 나라이다. 국내총생산(GDP) 역시 세계 36위로 세계 은행에서 고소득 국가로 분류하는 등 상당한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추세이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비상임이사국을 여러 번 역임한 전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21개국(G21),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과 같은 기구에서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요


성도의 전경

동녕의 최고봉인 설화산 국립공원

미국령 켈파르티아의 성립 직전까지 동녕은 말레이시아고려 전기와 유사한 형태로 토착 세력가들이 각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형태를 띄었다. 성주호족 연합 정권의 수장이었으며 군사적 자립권을 갖추기 시작한 군벌에 의해 불안정한 통치권을 유지했다.

미국은 민정 체제를 수립한 직후 초법적인 통제권을 선언하며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수립을 시도했다. 아울러 정치적 실권까지 상실한 왕실은 철저히 미국 집권 세력에 의해 얼굴마담 역할로 전락했다. 1947년 이후에는 중앙정부의 도움을 받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건명제제(建明帝制)를 선포하였고 실제로 분리주의에 따른 지방의 독립 추동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으나, 기존 호족 세력들의 재산 및 자치권 상환을 놓고 무력 충돌까지 벌어지는 등 성공적인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수정헌법의 공포 이후 광역 지방자치제가 실시하면서 각 지방들은 고유한 정치 체계는 물론 입법권, 행정권을 인정하는 등 스위스칸톤에 준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특히 단안(丹岸)과 같은 군소 지방들은 직접 민주제를 시행하여 참정권을 가진 향민(鄕民)들끼리 의사결정을 정하는 등 풀뿌리 민주주의 정착과 정치 참여도를 높이는데 힘을 실었다.

신주 열도(晨州列島)[3]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인민공화국과 분쟁 마찰을 겪고 있으며,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로 인해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패러독스에 얽매인 한중일의 관계처럼 동녕 역시 동아시아 경제권에 점차 종속되는 형태를 띄고 있어 다방면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변국들로부터 오해를 겪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로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지리적 환경에 의거해 동북아시아로 간주되고 있고, 또한 오키나와(북위 26°), 대만(북위 23°)보다 높은 위도인 북위 28°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비슷한 위도상에 놓인 저장성과 같이 아열대 계절풍 기후대에 속해 있으며, 일부 부속 도서들의 경우에는 열대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국내 항공사의 경우에는 ICAO 코드 내 동아시아로 표기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이나 일본과 같은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동녕의 공식 국호는 '동녕 왕국'(東寧王國)이다. 동녕 수정헌법에서의 규정 이전까지는 성문화된 명칭이 없었으며, 1947년에 제정된 동녕 건국헌법에서 표기된 '동녕국'(東寧國)을 정식 명칭으로 활용했다. 영어권에서는 역본 및 내각령에 따라 정식 영문으로 'Kingdom of Quelpartia'라 표기한다.

동녕(東寧)이라는 명칭은 10세기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 의미는 '동쪽의(東) 편안(寧)'이다. 당시 동녕 제도를 통일한 월랑 왕조무종(武宗)이 오대십국 중 하나로 저장성 일대에 독립했던 오월(吳越)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청하자 이를 승낙받고 동녕왕(東寧王)으로 책봉된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후부터 성주 지위를 차지한 들은 중원 왕조로부터 동녕왕 칭호를 책봉받으며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예스러운 표현, 혹은 관용적 어구로 '하늘의 누각'이라는 의미인 천루(天樓)라 불러지기도 한다. 일본이 자국을 미칭(美稱)으로 히노모토(日の本), 야마토(大和)라 부르는 것, 조선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지칭했던 것과 비슷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둥닝현과의 동음이의어로 인한 혼동을 방지하려 동녕을 '톈루'라 부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도네이'(とうねい)와 '덴로'(てんろう)를 혼용하고 있다.

'Quelpartia'의 유래는 1787년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태평양 탐험에 나섰던 라페루즈(La Perrouse)의 원정단이 동녕 일대를 과거 조선에 표류했던 헨드릭 하멜제주도로 착각하여 '퀠파트 제도'(Quelpart Islands)로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독일의 민족학자인 아돌프 바스티안(Adolf Bastian)과 같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지금의 명칭이 굳혀지게 되었다.

국기

동녕의 국기는 1947년 8월 10일, 임시 내각의 국기 지정안에 따라 공식 제정되었으며, 청방기(靑方旗)라고 불린다. 푸른색 바탕은 평화에 대한 열망을, 다섯개의 별은 민족의 통합, 흰색 문장은 왕실동녕인을 상징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동녕의 국기를 참고.

청방기
한자 靑方旗
영어 Flag of Quelpartia
Ch'ŏngbanggi[4]
주음 부호 ㄙㄟㄏㄚㄑㄧ (세 이 하 키)

국가

동녕의 국가인 자유의 바람(중국어: 自由的風, 영어: Wind of Freedom)은 14세기부터 전해진 시절가조(時節歌調)에 근현대에 들어 곡을 붙인 형태다. 천루시요(天樓詩謠)에 기록된 이후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며, 미국령 켈파르티아 성립 이후엔 장악원(掌樂院)[5] 원장이었던 헨리 버나드 클레이조지아 행진곡 등의 곡조에 가사를 맞춰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동녕의 국가를 참고.

역사

동녕의 역사
東寧史
구석기 시대
舊石器時代, 11,000 BC ~ 1,000 BC
패총 시대
貝塚時代, 1,000 BC ~ 200 AD
개벽 시대
開闢時代, 200 ~ 926
| 이혈 | 성읍 시대 (885 ~ 926) |
월랑 왕통
月狼王統, 926 ~ 1349
| 분국 시대 (1349 ~ 1357) |
회온 왕통
懷穩王統, 1357 ~ 1765
| 군벌 시대 (1765 ~ 1770) |
애류 왕통
艾瀏王統, 1770 ~ 1897
미국령 켈파르티아
米國領 東寧, 1897 ~ 1941
| 동녕 도민 정부 |
일본 통치기 동녕
日本統治期 東寧, 1941 ~ 1945
| 가잔·류큐·동녕 전역 |
동녕국
東寧國, 1945 ~ 1970
| 군정기 | 건명 시대 | 정흥 시대 |
동녕왕국
東寧王國, 1970 ~ 현재
| 영화 시대 | 개성 시대 |
동녕의 역사
東寧史

대외적으로 '평화의 섬'이라 알려진 동녕사의 실상은 내부 분쟁과 제국주의 충돌의 격돌로 얼룩져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근대에 있어 동녕은 들의 각축장이었으며, 현대에 있어서도 일본 난세이 제도중국 대륙, 필리핀, 타이완 섬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때문에 주녕미군(駐寧米軍)의 주둔에 따른 군사력 긴축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징병제를 비롯한 상비군 체제와 최신 무기 도입에 예산을 투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1947년 자주 독립 이후에 동녕사를 다루며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동녕의 역사 문서를 참고토록 한다.

독립과 군정 체제의 성립

초대 군정 장관인 존 에드윈 헐 장군

일본 제국의 패망 직후인 1945년 8월 15일미군이 복귀하였으며, 일제 임시 통치기구로서 설치되었던 동녕 행정청(東寧行政廳)이 폐지되고 군정기가 성립되었다. 9월 2일, 쇼와 덴노무조건 항복 선언 직후 군정장관으로 부임하던 존 에드윈 헐은 법령 18호 '켈파르티아 독립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0년 이내에 유예기간을 거쳐 국민투표를 통해 동녕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표명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동녕인으로 구성된 자치 내각(自治内閣)이 실질적인 행정 통치를 실시하였으며 왕실은 전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복귀할 수 있었다.[6] (을유복벽, 乙酉復辟)

왕실의 복권과 함께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즉시 독립을 지향하던 정치 세력들은 동녕 독립 준비위원회을 창설하고 초계파적인 통합을 이루어 군정청과 타협하던 자치 내각과 공의당(共義黨)을 비판하며 투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국민 통합과 민족 통일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하던 왕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붕괴된 권위 회복을 목표로 하던 왕실 역시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기 위해 협력함으로서 동녕 내 정치 흐름은 미군정과 공의당이 주축이 된 타협파와 왕실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세력들이 연합한 독립파로 양분되었다.

독립파는 자치 내각이 진행시키던 '전쟁범죄처벌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미흡한 점을 지적하고 정치적 기조에 얽매이지 않는 비정계 위원들로 구성하여 전쟁범죄행위자(戰爭犯罪行爲者)에 대한 올바른 조사 및 처벌이 이루어질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이들의 금전적 지원을 받던 내각은 야권의 제안을 기각하였다. 야권은 보복의 의미로 1946년 4월에 치뤄진 동녕 자치의회 선거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하고 대거 불참하는 등 정치적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한편 자치 내각은 식민지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토지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왕실과 야권 세력에게 치우쳐진 농촌의 지지를 회복하려 했던 노골적인 정치 술수였고, '유상몰수 무상분배'(有償沒收 無償分配) 개혁을 선전하면서 소작민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허나 지주층의 격렬한 반발과 함께 이런 토지개혁이 궁극적으로는 정부 재정의 파탄을 초래한다 여긴 미군정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무산시킴에 따라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더욱이 1946년 9월부터는 냉전에 따른 체제 대립에 있어 오키나와와 함께 극동아시아 방위에 최전방에 나서게 되면서 미군정의 기지 건설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자치 내각의 수장이었던 공의당 이승회(李承恢) 총재는 '군기지 건설은 야권은 물론 전국민적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며 극구 만류했으나 공산권 침략의 교두보가 될 동녕에 대한 군사적 포기를 택할 수 없던 미군정은 내각의 행정권까지 장악하여 진행시켰다.

미군정은 군기지 건설을 위한 부지 확보를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강매하였으며 반발하는 이들에겐 총칼로 위협하는 등 고압적으로 나서자 토지 재산 수호와 민족 자립을 내걸은 동녕 독립 준비위원회가 농민들과 함께 민족재건운동의 일환으로 토지 전쟁(土地戰爭)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동녕민족연합, 향촌지사회 소속의 시위대가 반내각·반미 구호를 외치며 백화궁(白華宮) 일대를 점거하고 공의당 당사를 공격하는 등 격화되어갔다.

결국 정치적 수세에 몰린 미군정은 당시까지 동녕의 유일한 통화 체계였던 B형 군표(B型軍票)의 유통량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등 경제 혼란을 야기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내각에서까지 불만이 표출되자 끝내 땅값 매입에 대한 가격을 다시 책정하여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를 냈다. 허나 군기지 건설에 대한 안건이 일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행패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1947년 1월에 양문현 미군기 추락사고로 적지않은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는 등 전국민적인 공포심이 격앙되었고, 그 해 3월에는 미둔령 장갑차 사건에 대한 미군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민심은 들끓어 올랐다.

미군정은 더이상 간섭 통치를 통해 여론과 민심을 조율할 수 없다고 판단, 자치 내각의 해산을 강행한 뒤 동녕 독립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연수혁(燕秀赫) 민족당 총재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한달 이내로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독립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이후 5월 11일에 치뤄진 투표에서 89%에 달하는 높은 비율로 찬성 표가 던져졌고, 마침내 6월 14일, 백화궁에서 성조기가 내려진 뒤 동녕기가 걸리면서 군정 체제는 막을 내렸다. 미군정의 대행 권한들은 임시 내각에 이관되었으며, 군정 정부 내 토지와 공장 같은 부동산 권리도 내각 소유로 귀속되었다.

건명·정흥 시대

독립 동녕의 임시 국무경(國務卿)으로 추대된 연수혁임시 내각을 동원하여 8월 13일건국헌법을 제정 및 공포하였으며 8월 19일에는 제1회 동녕 민의원 의원 총선거을 실시했다. 여기서 민족당을 중심으로 한 독립파가 전체 110명 의석 중 중 89명을 차지하여 연수혁이 국무경으로 선출되면서 초대 내각(初代內角)이 출범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연수혁이었지만 자주적으로 성립된 첫 정권이라는 상징성을 더하여, 당시까지 독립파의 정책 추진에 개입을 가하거나 린치를 시도하던 타협파 세력과 미군정에 의해 레드 퍼지를 당하던 공산주의 성향 노조들이 동녕의 공산화를 위한 무제한 투쟁 개입에 나서면서 출범 선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여 국민의 신임과 지지를 바탕으로 왕실과 함께 건명제제(建明帝制)를 선포했다. 군주의 정치 권한·권리를 대폭 인정한 뒤 국무경이 대행 권력자이자 국내 대립 세력들의 '교무자'(敎務者)로서 이들 세력들에 대해 국가 발전을 위한 단결을 촉구하고 이런 문제를 야기한 의회 제도를 '일시' 정지하는 애국 통치(愛國統治) 실시를 민의에 의결해 발표함에 따라 동녕의 오랜 기간 악순환이 될 훈정(訓政)의 시작점을 알렸다.

애치슨 라인의 개략적인 모습

연수혁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반대파의 정치 활동을 견제했고, 언론감찰법(言論監察法)을 통과시켜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신문사와 관련 조직들의 출판 및 보도를 통제하는 등 편집권을 제한시켰다. 특히 분리 독립은 물론 지방자치 확대를 요구하는 주민들을 탄압하고, 일부 상황에서는 '사살 명령'까지 내리는 등 강경 행보를 보였다. 허나 이런 상황에 국공내전으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던 중국 대륙을 국민당국부천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한반도에서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동아시아 내 공산권의 급격한 확장과 함께 도미노 이론과 같은 체제 붕괴 여파를 염려한 미국은 동녕에게 막대한 경제 원조를 유치토록 했다. 이에 1948년부터 동녕의 민생 및 산업 부흥을 위한 3억 달러 규모에 무상 기반 산업 지원[7]ECA(경제협조처)와 주녕미군의 도움을 받아 약 4천만 달러 상당의 물자를 제공받았다.[8]

잔존한 공업시설을 바탕으로 빠르게 경제 재건에 나선 일본과는 달리 퀠파트 제도 전투로 산업화 기반을 상실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정부에서는 1952년부터 일관된 경제 성장 계획을 수립하고 체계화했는데, 이는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내각령으로 실시된 '경제 대안 수칙'에 기인되었다. 주 내용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대내외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는 것이었고, 이에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견제하고 물가를 안정화시키고자 고금리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아직까지 노동집약적 경제를 유지하던 동녕의 기업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진행,[9] 이는 곧 소득 분배의 개선으로 이어져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는 미국의 경제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원조 할당 권한을 손에 쥐고 있던 연수혁초대 내각 정권은 공기업은 물론 정치자금을 수수하던 일부 기업들과의 정경유착을 통해 동녕 내 경공업 전반을 잠식하고 경제권을 장악함에 따라 체제 유지 기반을 다졌다.

1960년대부터는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들고 차관을 받아들이면서 외채 상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수출 주도 정책을 추진하면서 인위적인 화폐 가치 하락과 변동환율제 채택이라는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고 막대한 공산품을 국외로 방출하면서 수출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후 경제 성장 계획을 8개년 단위로 나누며 진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농가 소득 개선, 사회간접산업과 기간 산업(비료, 시멘트, 제강, 석유 등)의 장기적 육성, 공업의 기계화를 꾀하는 등 수출주도산업화를 통해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자립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고도 발전과 독재

고도의 경제 성장과는 별개로 지방 내에서의 애국 정권에 대한 불만이 점차 극대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애국 통치의 결의에 대한 조건 중에서 '10년 이내에 지방자치법을 개선할 것'이라는 통보 이후 60년대 말까지 관선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임명 통치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가 장기적으로 민주화 운동와 함께 정권을 위협하리라 판단한 연수혁은 결국 1970년의 동녕 수정헌법을 공포함으로서 부분적인 정치·사회·문화의 3S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지방자치의 시행은 물론이며 영상매체 규제 폐지, 동녕 프로야구(QPBL), 동녕 프로축구(Q리그) 등의 스포츠 산업의 육성를 꾀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을묘항쟁 당시 체포되어 압송되는 반정부 인사

허나 여전히 지역 통치의 주력이 되었어야 할 지방 의회정무원(政務院)은 허울뿐인 어용단체로 이용되면서 그 역할은 자문 수준에 그쳤고, 정무의원마저 정부와 연고가 있는 이들만이 정치 자금을 지원받아 선출되는 등 일방적인 중앙 독재 시스템이 지역 사회를 잠식했으며, 스포츠 역시 정계가 개입하면서 여러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또한 국내의 정권 불만이 높아질수록 연수혁과 애국 정권은 냉전이라는 국제 상황을 적극 활용해 '멸공대국'(滅共大國)을 앞세워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을 좌익 세력으로 몰아 감금 혹은 처형하는 등 경직된 이데올로기 체제를 강화코자 했다.

그러나 1973년 자원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1차 오일 쇼크의 여파로 저가 경공업의 경제 체계의 위기가 감지되었고 특히나 상하이 공동성명, 핑퐁외교로 냉전의 종식 기미가 보이자 연수혁은 지방 빈곤 퇴치를 명목으로 신촌운동(新村運動)을 통해 지역 반발을 억제코자 했으며 안보통제명령(安保統制命令)을 선포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은 물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까지 규제하였다. 탄압에 신음하던 비정계 인사들은 을묘항쟁(乙卯抗爭)을 일으켜 애국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독재와 이에 반발하는 민주 인사들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 상황은 지속적인 성과를 보였다. 특히 사회 인프라 개선이 진전을 이루면서 기존 호시조라 공로(星空公路)[10]의 불안정한 통행량을 안정시키고자 도로를 연장하고 주요 도시권들을 잇도록 추진된 정흥고속공로(正興高速公路)가 1976년에 전 구간 개통되었으며, 1979년에 각각 위항 국제공항(委巷國際空港)과 북부선(北部線) 간선 철도가 건립 및 운행하는 등 사회 간접 자본이 확충되었다. 한편 에너지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로 1978년에 미랑 원자력 발전소(美浪原電)가 상업 운전 가동이라는 결실을 보여주었다.

훈정 통치의 종식과 전면 민주화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애국 내각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급격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경제 발전 정책이 수십년에 걸쳐 상당한 성과를 거둔 후, 포퓰리즘에 영합했던 내각은 기존의 철칙이었던 철저한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훼손시켰다. 잇따른 정권 내 내부고발로 인한 정경유착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애국정권 비자금 사건 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또 을묘항쟁에 있었던 과잉 진압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한 천류성립대학(天流星立大學)의 학생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일당 독재를 강화시켰다.

이런 와중에 1985년, 연수혁 국무경이 조영제 과민 반응과 부작용에 따른 급성신부전으로 사망하면서 권력이 공백화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애국 내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던 위문엽(魏炆燁) 시위사령부(侍衛司令部) 사령관은 일부 사단과 헌병대를 불법으로 동원하여 백화궁육군성(陸軍省)을 장악한 뒤 계임 내각(繼任內閣)을 구성했다. 허나 이 과정에서 정치인사들과는 무관한 이들까지 반정권 내통자로 규정하고 가택연금, 고문 등을 자행했음이 밝혀지면서 군부의 폭력성과 인권유린을 절감한 국민들은 창의총궐기(倡義總蹶起)로 불리는 자발적 항쟁 집단을 결성함으로서 군부를 위협했다.

1985년 11월 23일을 기점으로 전국의 주립·도립 대학에서 민족쇄신(民族刷新), 공화신보(共和新報) 등에서 간행한 출판물이 확산되면서 각 대학가는 전국학생회 소속의 학생들로 구성된 비폭력 반군부 시위가 거리를 장악하였다. 혼란한 정국에서 정권 탈취를 노리던 인민공화당의거여단(義擧旅團)과 같은 좌익 무장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설 테러는 물론 노동자들과 결탁해 태업을 감행했다. 이에 군부는 인민공화당에 대해 내란단체로 판단하고 강경한 진압에 나섰으나 창의총궐기에 참여한 시위대까지 무자비한 폭행과 체포함에따라 여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 해 12월 23일에는 창의총궐기 간부들의 '민주선언문' 발표를 막기 위한 군부의 발악으로 단축 수업, 조기 퇴근 및 전철 무제한 통행 금지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도리어 화이트칼라로 불리는 직장인들까지 시위에 자연스레 합류토록 유도되었다. 결국 통행 금지 도로에서 시작된 차량 경적 시위를 시작으로 팔선사(八仙寺) 신창인 법사, 천주교 성도대교구(天主敎 星道大敎區) 임시환 빅토리노 추기경 등의 종교계까지 민주화 요구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공안 경찰과 충돌하는 창의총궐기 소속 시위대

12월 25일, 성도신수대공원(新守大公園)에서 총궐기의 대표자들이 구국민중내각(救國民衆內閣)의 수립을 선포했다.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계임내각의 총해산과 정권과 직접적으로 대치 중이던 진유성당의 농성자들이 안전히 귀가할 수 있도록 공권력이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내각과 군부의 온건파였던 소장파(少壯派) 치안당국은 무력 시위와 농성을 중단하면 구속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임을 밝힘에 따라 극적으로 타결했다.

해가 넘어가면서 반정권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이에 위문엽은 수도권 외부에 주둔하던 낙엽수 부대(落葉樹部隊)들을 성도 외곽에 집결시켜 군대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을 실시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1월 13일에 대인민 담화를 발표하여 소요 사태를 종결시킴을 통보코자 했다. 위정훈 공안총감은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려고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통제하겠다고 표명했으나 백림도립대학, 남풍도립대학 등에서 연좌 농성이 벌어져 수천 명의 학생들이 경찰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인희정·사전정 거리는 시위대로 포화 상태를 이루는 등 전혀 통제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위문엽은 구체적인 군사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각 군단의 직할대와 함께 항공여단 및 화학부대의 소집과 철도성과의 협의를 통한 열차 병력 수송안까지 끝맞추었다. 이에 맞서 시위 지도부도 비상 연락망을 가동해 군경의 강제 연행을 늦추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 군부 내각이 합법적인 정권 취득 및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와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허나 미국의 정계와 여론은 대한민국전두환처럼 절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민주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시위대를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한 군부를 옹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1980년대 내내 미국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이란 이슬람 혁명과 그 여파로 발생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었으며 자국 내 인종 차별 문제와 자연재해로 인해 동녕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허나 1986년 필리핀에서 피플 파워 혁명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퇴진하게 된 일을 계기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도 독재 종식을 위한 압박 정책에 나섰다.

군부 내각 내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소장파 장교·정치인 내통자들이 미국의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CIA 동녕지부장 에드윈 맥그로와 접촉한 주기윤(朱祁昀) 평정장관(評定長官)은[11] 계엄령 선포와 군 투입을 막기 위해 주녕미국대사관과 본국에 해줄 것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백악관에서는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는 방안까지 고려한 후 대통령 친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후 로버트 브루스터 주녕 미국대사가 '미녕 동맹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는 논조의 내용을 위문엽에게 전달했다. 결국 계엄령과 군 투입 시도가 정권 유지는 커녕 위협할 수 있음을 인지한 그는 해당 지시를 철회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수도와 주요 도시 외곽을 점거하는 행위에 대해 회의감을 갖던 야전 사령관들은 민주 정권으로의 이양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내각과 군부의 핵심이자 중추 인원이었던 소장 ~ 상장급 지휘관 출신 민의원들조차 내각불신임결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시위대 측에서도 을묘항쟁을 비롯한 시위 희생자들을 위한 운구 행렬 행진을 벌였다.

5월 21일, 결국 측근들과의 타협책을 구상하던 위문엽은 국무경 직책을 사임하는 대신 안전히 국외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함으로서 군부 내각은 종식을 맞이했다. 그러나 공의당을 비롯한 야당 세력들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계임내각의 쇄신파이자 민족당 총재로 떠오른 주기윤이 '호헌정치'를 내걸고 제2회 동녕 민의원 선거에 압승하여 국무경으로 취임함에따라 국민들이 염원하던 정권 교체는 미뤄졌다.

권위주의 통치가 끝을 맞이하면서 재계에서도 변화의 물살이 쏟아졌다. 노동운동권에서는 인민공화당을 위시한 좌익 폭력단체를 제외한 채 독자적인 노동조합이 속속 설립되는걸 시작으로 대투쟁의 시대가 열렸다. 교육계에서는 '전국학생공동교섭회', 문예계에서는 '공동문작투쟁회의' 등이 발족되어 이런 기조를 이어갔다.

주기윤 국무경은 언론 및 야당 자유화를 공식적으로 선전하였으며 지방자치에 대한 중앙 정계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사회 분위기의 급격한 이완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안기동대(公安機動隊)가 더욱 활발히 움직이던 시기였으며 이들은 시민 자치경찰과 함께 하이바를 시작으로 삼단봉, 화염병으로 무장하여 데모와 노동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또한 공산권과의 군비 경쟁에도 힘을 쓰면서 209급 잠수함을 인수하고 개량한 신해급 잠수함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을 자체 건조한 선화급 호위함을 취역함으로서 대양 해군 발전의 시도를 알렸다.

1989년에야 천우서(千舒旴) 공의당 총재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 있었으며 공의당도 임시내각 이후로 42년만에 재집권에 나섰으며 1990 성도 아시안 게임를 유치 및 성황리에 유치하면서 국격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남풍대지진의 미숙한 대처를 시작으로 각종 부실 사고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새로이 취임한 태정건(太健炡) 국무경이 신루기업 스캔들소비세 논란으로 95일만에 사임을 결정하면서 헌정당(憲政黨)의 집권기가 시작되었다.

개성 시대의 개막

지리

동녕의 지리적 위치는 동중국해 상에 한반도타이완 섬 사이에 길게 줄로 이어진 열도(列島)의 집합체다. 동녕의 최동단은 실질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신주 열도이며 최서단은 궁원도, 최북단은 영류도, 최남단은 남천도이다. 일본처럼 동녕은 아주 대륙(亞洲大陸) 동부 연안에 자리잡아 있다. 국토는 약 45,118 km2로서 주변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선 작은 국토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일본규슈(36,782 km2)와 오키나와현(2,280.98 km2)을 비롯해 동아시아 내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 제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형

동녕 일대는 신생대 제3기말 플라이오세에서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걸친 화산활동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성화산활동이 발생함에따라 수많은 응회환응회구들이 생겨났으며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이 화산체들이 파도에 깎이고, 해양 퇴적물과 함께 섞이기를 반복하면서 이혈층(異穴層)을 형성시켰다. 퇴적 이후, 동녕 일대가 해수면 위로 점차 성장하였고, 이후 60만년 이후부터는 용암이 분출하면서 넓은 용암 대지들을 만들었으며, 용암이 겹겹이 쌓이면서 설화산(屑話山)을 중심으로 한 순상화산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렇듯 동녕에서의 화산활동은 적어도 100회 이상의 용암분출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제도 곳곳에선 휴화산을 비롯하여 오름, 주상절리 같은 다양한 화산 지형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설화산은 15만년에 걸쳐 거대한 화산 폭발과 함께 뜨거운 용암이 솟구쳐 올라 형성된 화산이다. 한라산과 유사하게 전체적인 형태는 순상화산을 띄고 있으나 산 정상부는 종상화산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 정상에는 천귀담(天龜潭)이라는 화산호가 있다. 설화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크기의 측화산이 해안에서 활동함에 따라 다양한 부속 도서들을 형성시키기도 했다.

오랫동안 침강과 융기를 반복한 동녕 일대는 유라시아 대륙과의 깊은 연계성을 지녔고, 산호초와 지각운동에 의한 단구가 크게 발달해 있다. 이때문에 해안 단구, 사빈해안이 많으며 연안에는 거초(礁)·보초(堡礁) 등의 산호초가 다양하게 분포되고 있다.

지방과 행정구역

각주

  1. 페로 제도그린란드를 제외하고 보른홀른 섬과 본토만을 포함한 면적을 말한다.
  2. 동북아시아 기준으로 한정이다. 네덜란드, 스위스와 같은 선진국들과 비교하였을 때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
  3. 중국어로는 천저우(Chén zhōu)라고 부른다.
  4.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표기한 명칭.
  5. 동녕의 근대 기구 중에 하나로서 음악을 관할하는 기관이었다. 종래의 아악사(雅樂署)를 미국 민정 정부가 통폐합한 뒤 서양 군악대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했다. 1947년 독립 이후에는 왕립국악원이 계승하였다.
  6. 미국령 켈파르티아의 존속 기간 동안, 왕실은 실질 통치권을 상실하는 대신 유지될 수는 있었다. 이는 동녕 사회에 팽배했던 유불도민간신앙에 따른 문화적 관습과 민족주의 태동에 의한 국민통합의 구심점으로 활불(活佛)이자 현인신(現人神)으로 신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7. 식료, 비료, 의류, 석탄, 고무 등 공업용품 등을 중심으로 지원받았다.
  8. OFLC 혹은 군정기 종료 후 무상으로 증여되는 잉여 물자.
  9. 고금리 정책은 민간의 저축률을 높이고 기업의 대출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다. 이에 노동자 중심의 인적 기반을 필요로 하던 동녕 경제의 뜻밖에 긍정적 방향을 가져왔고 국민들에게 성취감을 줌으로써 실질평등사회로의 조성에 일조했다.
  10. 일본 통치기 동녕 동안 동녕인들의 권익을 증진시키고자 노력했던 호시조라 세츠나(星空刹那) 행정관에서 따온 명칭.
  11. 대한민국대통령비서실장을 망라한 청와대 실권, 일본내각관방장관과 유사한 직책이다. 국무경 다음으로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는 중요 요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