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 (리반)의 묘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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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랑 왕조]]의 성립 이후 [[제후국]]의 종묘 제도인 [[오묘제]](五廟制)가 확립된 이래 [[외왕내제]](外王內帝)와 함께 본격적으로 묘호와 종법 제도가 동녕에 전래되었다. 이런 묘호는 주로 후대 군주들이 선대 임금에게 높은 묘호를 올림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왕권 강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중원 왕조에게 자국 군주에 대한 시호를 하사받는 '청시(請諡)의 예'를 행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호]]와 종묘 체계를 사용함으로서 자주성을 강조했다.
[[월랑 왕조]]의 성립 이후 [[제후국]]의 종묘 제도인 [[오묘제]](五廟制)가 확립된 이래 [[외왕내제]](外王內帝)와 함께 본격적으로 묘호와 종법 제도가 동녕에 전래되었다. 이런 묘호는 주로 후대 군주들이 선대 임금에게 높은 묘호를 올림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왕권 강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중원 왕조에게 자국 군주에 대한 시호를 하사받는 '청시(請諡)의 예'를 행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호]]와 종묘 체계를 사용함으로서 자주성을 강조했다.


종호를 붙일 때에는 세가지의 원칙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창업지주(創業之主)에게는 조(祖)를, 계체지주(繼體之主)에게는 종(宗)을 붙일 것"이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유공왈조, 유덕왈공'(有功曰祖、有德曰宗<sup>새로이 일어나면 조, 계승하면 종</sup>)이라는 원칙에 영향을 주었다. 허나 군주들이 자신의 선친의 추숭에 열을 올림에 따라 묘호는 모든 군주에게 적용되는 용법이 되었다.
종호를 붙일 때에는 세가지의 원칙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창업지주(創業之主)에게는 조(祖)를, 계체지주(繼體之主)에게는 종(宗)을 붙일 것"이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유공왈조, 유덕왈공'(有功曰祖、有德曰宗<sup>새로이 일어나면 조, 계승하면 종</sup>)이라는 원칙에 영향을 주었다. 허나 군주들이 자신의 선친 추숭에 열을 올림에 따라 묘호는 모든 군주에게 적용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특히나 정통성을 이유로 선대 묘호를 함부로 추탈할 수 없었고 선시(善諡)를 남발하는 경우도 잦았다.
 
오늘날의 동녕에서는 선왕이 승하한 후 종묘와 사직을 관할하는 [[침원서]](寢園署)에서 묘호와 함께 [[시호]], [[능호]] 등을 함께 결정하며, 일반적으로 국내 여러 학자들에게 추천받은 후보 묘호들 가운데 정담회(鼎談會) 등을 거쳐 3개 안으로 좁힌다. 이를 수망(首望), 부망(副望), 말망(末望)이라고 지칭하며 삼망단자(三望單子)로 부른다. 그 후에는 지식인 6인, [[참정원]]·[[민의원]] 의장 등이 배석한 자리에서 투표를 거쳐 선정된다. 현임 [[동녕의 군주|성주]]가 참석하지 않는 이유는 전근대에 있던 취지 변질에 대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자주 독립 이후부터 기존 묘호가 겹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2016년, [[동녕 신종|영화주]](永和主)의 사후 묘호가 '신종'(神宗)으로 결정된 것에서 [[시법]](諡法)에 의거했을 때 좋은 의미를 향유하지 못한다고 [[김회은]] 시종원경(侍從院卿)의 [[트위터]]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에 의거하여 일부 우익 인사들이 묘호 교체를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분류: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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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4일 (토) 23:1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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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의 묘호(언어 오류(qp): 東寧ㄝ廟號)는 왕실 예법 중 하나이자 승하한 성주(星主)에게 주어지는 칭호로서 태묘(太廟, 혹은 종묘)에 위치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때 주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묘호는 두 글자로 이루어지는데, 앞자는 시호법에 따라 군주의 치세와 업적을 뜻하는 글자인 시자(諡字)이고 뒷자는 ‘조’(祖) 또는 ‘종’(宗)을 붙이는 종호(宗號)이다. 군주와 신하 모두에게 바쳐질 수 있는 시호(諡號)와는 달리, 묘호는 오로지 종묘에 그 위패가 합사된 군주만이 받을 수 있는 미칭이다.

월랑 왕조의 성립 이후 제후국의 종묘 제도인 오묘제(五廟制)가 확립된 이래 외왕내제(外王內帝)와 함께 본격적으로 묘호와 종법 제도가 동녕에 전래되었다. 이런 묘호는 주로 후대 군주들이 선대 임금에게 높은 묘호를 올림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왕권 강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중원 왕조에게 자국 군주에 대한 시호를 하사받는 '청시(請諡)의 예'를 행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호와 종묘 체계를 사용함으로서 자주성을 강조했다.

종호를 붙일 때에는 세가지의 원칙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창업지주(創業之主)에게는 조(祖)를, 계체지주(繼體之主)에게는 종(宗)을 붙일 것"이다. 이는 후대에 이르러 '유공왈조, 유덕왈공'(有功曰祖、有德曰宗새로이 일어나면 조, 계승하면 종)이라는 원칙에 영향을 주었다. 허나 군주들이 자신의 선친 추숭에 열을 올림에 따라 묘호는 모든 군주에게 적용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특히나 정통성을 이유로 선대 묘호를 함부로 추탈할 수 없었고 선시(善諡)를 남발하는 경우도 잦았다.

오늘날의 동녕에서는 선왕이 승하한 후 종묘와 사직을 관할하는 침원서(寢園署)에서 묘호와 함께 시호, 능호 등을 함께 결정하며, 일반적으로 국내 여러 학자들에게 추천받은 후보 묘호들 가운데 정담회(鼎談會) 등을 거쳐 3개 안으로 좁힌다. 이를 수망(首望), 부망(副望), 말망(末望)이라고 지칭하며 삼망단자(三望單子)로 부른다. 그 후에는 지식인 6인, 참정원·민의원 의장 등이 배석한 자리에서 투표를 거쳐 선정된다. 현임 성주가 참석하지 않는 이유는 전근대에 있던 취지 변질에 대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자주 독립 이후부터 기존 묘호가 겹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2016년, 영화주(永和主)의 사후 묘호가 '신종'(神宗)으로 결정된 것에서 시법(諡法)에 의거했을 때 좋은 의미를 향유하지 못한다고 김회은 시종원경(侍從院卿)의 트위터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에 의거하여 일부 우익 인사들이 묘호 교체를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