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제1혁명 (서태평양 연대기): 두 판 사이의 차이

65번째 줄: 65번째 줄:


1926년 11월 10일, 마지막 만주국왕 훙루이의 차녀이자 만주 왕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신교로 시하가 계엄군과의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ref>삼녀인 아이신교로 시리 역시 1914년 6월 10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1924년 마적에 의해 살해당했다. 후에 아이신교로 시하는 동생을 죽인 마적 두목의 어린 딸을 동생으로 삼았는데, 우연히도 이름이 시리였다.</ref> 그동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첩보에 6년이 넘게 지명수배중이었던 그녀는 할빈을 거점으로 사하리얀 미로라는 이름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암약하던 중 할빈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시민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ref>삭타 아바하이는 후에 실력 좋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인기가 있었을 뿐 그녀의 정체를 위원회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고 나섰다고 밝혔다.</ref> 청 정부는 즉각 시하를 묵던으로 비밀리에 압송하고<ref>묵던으로의 압송은 시하 공주가 요구했던 것으로, 수도 자무하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신도시인데다가 친정부 여론이 강해 자신의 협상력이 약해질것을 우려해 옛 만주 조정에 대한 우호 여론이 강한 묵던을 지정한 것이다. 물론 청 정부는 정보를 은폐할 속셈이었지만 이 은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ref> 뒤이어 일본과의 협의로 동원이 가능해진 제16국경경무여단, 무단기양로경무청 경력을 할빈에 투입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묵던 시내에 시하의 압송 소식이 퍼져 외신기자들이 묵던북부역에 진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평소 시하 공주 - 정확히는 사하리얀 미로 - 와 친분이 있었던 월간 아이신지(紙) 기자 타타라 시하가 주도한 것으로, 당시 다소 통제가 느슨했던 경찰 측에서 할빈 봉기를 취재중이던 그는 협상장에 시하 공주가 나타나자 우정국 우편항공기를 타고 자무하로 날아와 오만 단체와 언론사들에 익명으로 시하의 압송 소식을 뿌렸다. 당시 대형 언론사들은 모두 자무하로 이전해있었기 때문에 묵던에서의 취재경쟁을 주도한 것은 비행기편으로 날아온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었다. 이 둘은 6년 후 결혼한다.</ref> 드라마와도 같은 '''공주의 귀환'''에 전세계 언론의 이목이 묵던과 할빈으로 집중되었고, 묵던 시내에서는 경찰이 통제를 포기할 정도의 대규모 환영 시위가 열렸으며, 한국 정부와 황실은 주한청국대사관과 주청한국대사관 양쪽 모두를 통해 '''1시간 단위로''' 시하 공주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결국 청 정부는 11월 15~16일 이틀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시하 공주의 한국 망명과 만주 재입국 및 황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할빈 시민들에 대한 보복 방지를 공언할수밖에 없었다. 이에 11월 20일부터 한국 및 일본 측 참관단 주재로 할빈 시민들의 무장 해제와 계엄군 철수가 진행되었고, 시하 공주는 할빈의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11월 25일 봉기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민위원회 위원 등과 함께 열차편으로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1926년 할빈 봉기는 막을 내렸다.
1926년 11월 10일, 마지막 만주국왕 훙루이의 차녀이자 만주 왕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신교로 시하가 계엄군과의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ref>삼녀인 아이신교로 시리 역시 1914년 6월 10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1924년 마적에 의해 살해당했다. 후에 아이신교로 시하는 동생을 죽인 마적 두목의 어린 딸을 동생으로 삼았는데, 우연히도 이름이 시리였다.</ref> 그동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첩보에 6년이 넘게 지명수배중이었던 그녀는 할빈을 거점으로 사하리얀 미로라는 이름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암약하던 중 할빈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시민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ref>삭타 아바하이는 후에 실력 좋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인기가 있었을 뿐 그녀의 정체를 위원회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고 나섰다고 밝혔다.</ref> 청 정부는 즉각 시하를 묵던으로 비밀리에 압송하고<ref>묵던으로의 압송은 시하 공주가 요구했던 것으로, 수도 자무하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신도시인데다가 친정부 여론이 강해 자신의 협상력이 약해질것을 우려해 옛 만주 조정에 대한 우호 여론이 강한 묵던을 지정한 것이다. 물론 청 정부는 정보를 은폐할 속셈이었지만 이 은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ref> 뒤이어 일본과의 협의로 동원이 가능해진 제16국경경무여단, 무단기양로경무청 경력을 할빈에 투입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묵던 시내에 시하의 압송 소식이 퍼져 외신기자들이 묵던북부역에 진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평소 시하 공주 - 정확히는 사하리얀 미로 - 와 친분이 있었던 월간 아이신지(紙) 기자 타타라 시하가 주도한 것으로, 당시 다소 통제가 느슨했던 경찰 측에서 할빈 봉기를 취재중이던 그는 협상장에 시하 공주가 나타나자 우정국 우편항공기를 타고 자무하로 날아와 오만 단체와 언론사들에 익명으로 시하의 압송 소식을 뿌렸다. 당시 대형 언론사들은 모두 자무하로 이전해있었기 때문에 묵던에서의 취재경쟁을 주도한 것은 비행기편으로 날아온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었다. 이 둘은 6년 후 결혼한다.</ref> 드라마와도 같은 '''공주의 귀환'''에 전세계 언론의 이목이 묵던과 할빈으로 집중되었고, 묵던 시내에서는 경찰이 통제를 포기할 정도의 대규모 환영 시위가 열렸으며, 한국 정부와 황실은 주한청국대사관과 주청한국대사관 양쪽 모두를 통해 '''1시간 단위로''' 시하 공주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결국 청 정부는 11월 15~16일 이틀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시하 공주의 한국 망명과 만주 재입국 및 황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할빈 시민들에 대한 보복 방지를 공언할수밖에 없었다. 이에 11월 20일부터 한국 및 일본 측 참관단 주재로 할빈 시민들의 무장 해제와 계엄군 철수가 진행되었고, 시하 공주는 할빈의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11월 25일 봉기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민위원회 위원 등과 함께 열차편으로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1926년 할빈 봉기는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1926년 할빈 봉기는 만주 민권운동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입헌의 관철에 실패한 채 종식되었으나, 임시적이나마 선거에 의한 의회와 행정부의 구성이라는 선례를 남겼으며, 무엇보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보복을 방지한 채 종료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만주 혁명에 매우 큰 자산을 남겼다. 이들이 봉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정부 권력에 대한 공포가 남지 않은 점이 혁명 초기 시민들의 대대적인 합류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만주 왕실의 적녀인 아이신교로 시하의 존재는 만주의 주체로써 정당한 권리를 찾는 만주 민권운동의 상징으로써 이후의 혁명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


=== 제1차 만주전쟁과 3차 민권운동 ===
=== 제1차 만주전쟁과 3차 민권운동 ===

2021년 9월 26일 (일) 06:07 판

개요

만주 제1혁명은 1932년 3월 1일부터 1934년 3월 1일[1]까지 진행된 만주의 공화주의 혁명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화혁명으로, 만주인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정부를 등장시켜 10년 후 한국 혁명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만주의 중원 '회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만주에서의 정착을 선언함으로써 동아시아사의 고질적인 패턴이었던 북방민족의 중원 침공, 남하를 종식시킨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제1혁명의 종료가 1934년 3월 1일인것은 관내 포기를 통해 만주 국가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음이 국제연맹 가입을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단

청의 만주 경영

최후의 퉁구스계 왕조인 청나라가 1636년 산해관을 넘어 회북에 입성한 이래, 만주 방위는 청나라의 영원한 고민거리이자 화두였다. 배후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청과 대등한 황제국이자 군사동맹 관계이지 몽골이나 후요와 같이 정복, 복속시킨 상대가 아니었고, 한국이 회북 침공을 지원한 것은 후요가 멸망하고 발해인 유민들이 쏟아져들어오는 상황에서 머리맡에 만주인이라는 시한폭탄을 이고 사느니 이들을 차라리 장성 너머로 보내버리자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전의 조선이야 요동을 제대로 정복, 영위할만한 국력이 없어 국경 일대에서의 부락 토벌 정도로 만족했지만, 조선과 이어를 통합하고 칭제에 이른 한국의 국력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는 1628년의 전쟁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후요는 발해인들의 국가였고, 자연히 만주 인구에서 발해인과 조선인의 비중이 상당했다. 입관 당시 만주지역 추정인구 700만명 중 발해인과 조선인 200만명, 만주인 150만명, 후룬 등 비만주 여진인 140만명, 니칸인[2] 130만명, 거란인과 몽골인이 70만명 수준이었다.[3] 발해인들의 요동 개척과 경영의 수혜를 받아 여진계도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주민으로 요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발해인과 니칸인, 그리고 친요 여진계를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후요 성종 이여송의 사후 발생한 후계 분쟁이 아니었으면 요금전쟁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요와 조선(진)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으나 적어도 동족의식은 있었으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요동 침공이 과거 몽골의 연 지방 침공으로 만주와 중원이 차단된 채 말라죽어간 남금의 공포를 재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입관 직후 청은 회북 통치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와 만주 방위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해야 했다. 고심 끝에 청이 내놓은 결론은 만주에서 만주인의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유지하며 회북에서는 발해인, 요동니칸인, 몽골인 등을 최대한 '만주화'시켜 친위세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전제로도 만주인의 필요 인구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만주 여진인을 최대한 만주인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그러고도 최후까지 복속되지 않은 수완부 등은 서북 변경 수비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치로 만주 지역의 인구는 17세기 후반에는 200만명 이하로 무려 1/4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후요인들이 개척한 요동의 농업인프라는 황폐해졌다.

한국은 당초 청의 입관을 지원하면서 요동 할양까지도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직 15년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한국 조정 내에서 요동 개척과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요동의 무인지대화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청이 200만명 가량의 인구를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에 잔류시키는 반면 한국이 연계를 시도할만한 발해계는 대거 회북으로 이주시키자 결국 1644~1646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한청간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봉합된 것은 직후 1652년부터 오호츠크해 일대에 진출한 러시아와 청 사이의 무력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만주가 남으로 한국, 북으로 러시아의 양면 공격을 받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한러간 동맹이 체결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야 했다. 결국 청은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활동과 한-만 교역에 상당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한국의 불만을 달래고 대러전쟁에서 한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이는 만주에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린 한국이 청의 만주 경영을 묵인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상당한 숫자의 한국인들이 만주로 유입되어[4] 잔류 발해인과 함께 만주 경제를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입관 이후 방치된 농업 인프라를 노린 니칸인들의 유입도 장성 북부와 요동반도 등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만주 방위를 위해 인구와 농업생산력을 확보해야 하는 청 조정은 한국인 - 발해인을 포함하는 - 과 니칸인들의 만주 유입에 일관된 정책을 취할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류 만주인들이나 일부 여진인은 이미 후요 시기부터 수렵경제에서 농업 중심으로 전환에 성공하여 한국인 인구의 증가를 그럭저럭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상당수의, 특히 농사에 익숙하지 않았던 동요하 이북지역의 여진 부족들은 이에 편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인과 니칸인들에게 토지와 경작권을 침탈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170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인들은 숭가리강을 따라 할빈 일대까지 진출하여 벼 재배에 성공하였을 정도로 침투의 범위는 겉잡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침투에 당황한 청조는 만주 주민들의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추진했다. 건륭 31년(1766)년부터 관동, 즉 산해관 동부 만주 지방의 모든 공문서는 만주문만을 사용하도록 하고 한문의 사용을 금하였으며, 건륭 33년(1768년)에는 관동 호적령이 공포되어 관동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이 만주식 성과 이름을 등록하도록 강제하였다.[5] 그러나 그 반동으로 상당수의 한인들과 니칸인들은 호구등록을 거부하거나 아예 만주를 떠나 몽골 혹은 누르칸(現 연해주 지방) 등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반발했고, 청조는 호구를 등록하지 않거나 만주식 성명으로 개정하지 않은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한국 역시 자국민들의 만주 유출을 반기지 않았기에 이러한 조치에 별 반응이 없었고, 이에 힘입어 1815년에 이르면 관동에서 만주식 성명을 등록한 인구는 약 800만명으로 입관 이전의 추정인구를 뛰어넘는 성황을 이루었다.

문제는 청의 만주 통치는 군현제에 의한 체계적인 행정체제가 아닌 각 장군부에 의한 사실상 군정에 가까운 체제였다는 것이다. 후요 시기 군현제가 실시되었던 요동 지역은 요동장군의 지배 하에 각 군사지역마다 별도의 전담 행정관이 배치되어 군현제와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길림장군 및 흑룡강장군부 지역은 각 부대가 그대로 지역을 통치하였다. 청조는 강희제 이후 각종 제도의 화화(華化) 속에서도 만주의 한화만은 극도로 경계하여 중원 및 한국과 구별되는 이른바 '만주 고유'의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내는데 집착하였다. 이는 만주인들 입장에서 중원과 별도의 지원책과 우대책이 시행되는 이득도 있었지만, 만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주민의 통치체계를 거부하는 상황은 행정의 비효율과 그에 따른 정책 시행의 난맥상을 불러왔다.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틈탄 마적과 수적의 발호, 상거래에서의 사기 등 각종 무법·탈법행위가 횡행했고, 19세기 들어 러시아와의 국경충돌이 빈번해지면서 만주인들은 과거의 우대와 지원이 아닌 관내 귀족들의 장원 경영과 군비 지원이라는 명목 하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1810년대 이후 만주인들은 이러한 상황의 해결을 북경 중앙조정에 청원하려 하였으나 청조는 1822년 통관조칙을 통해 만주 방위를 이유로 오히려 만주인들의 관내 진입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만주인들이 만주인 국가인 청이 아니라 적대적 이웃인 한국을 통해 물자와 정보를 습득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만주조정의 수립과 이중통치구조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58년 아이군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 이북 영토의 관리권이 러시아에 넘어갔으며, 2년 후인 1860년 북경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이 러청간 국경으로 확정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만주 인구의 증가를 위해 1860년부터 관동 호적령을 철폐하여 만주식 성명 없이도 호구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대러 방위라는 명목으로 숱한 희생을 감내해왔던 만주의 민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1864년 묵던에서 한국인과 니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폭동이 벌어진 데 이어[6] 1870년대 초까지 만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빈발했다. 이 와중에 한국은 자신들이 약 200년간 청의 우방으로써 만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한편 수차례의 출병으로 만주 방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였으나 청조가 러시아에 사하리얀강 이북 및 우수리 지방을 러시아에 넘겨버리는 행태를 배신행위로 여겼고 이는 한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 전격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베이징 조약으로 주강 하구의 향산과 뇌주반도, 주산군도를 뜯어냈던 한국은 이어 한국계 주민 및 기업 재산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수차례 출병하여 친한민병대와 함께 포수, 부르가투, 칭니와, 콰이다무 등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였다.[7]

청조는 한계가 명확해진 기존 만주 통치 방식을 개편하려 하였고, 여기에 한국이 끼어들었다. 한국은 근 10년에 걸친 만주 내전으로 자국민과 기업들이 입은 피해와 만주 방위를 위해 치른 비용을 청조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편전쟁 이후 각지의 반란과 분리독립에 시달리고 있던 청조는 이 요구를 수용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청조의 입장에서는 발상지지라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미개척지에 양면전선의 위험을 안고 있는 만주보다 풍요로운 중원에서의 정권 유지에 집착했고, 결국 1874년, 전 진수흑룡강등처장군 아이신교로 이샨의 장남 아이신교로 자이아[8]를 만주국왕으로 봉하여 관동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이는 왕조의 발상지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어 사실상 한국 자본에 배상금으로 넘겨준 격이라 많은 만주인들의 공분을 샀으나, 그나마 새로운 만주조정이 한국의 협조를 이끌어내어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1878년부터 만주 로현제를 실시하는 등 행정과 치안을 회복하면서 만주는 차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의 과중한 군사비 지출로 말미암은 고질적인 재정난과 조세부담은 계속되었고, 한국 자본은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만주 전역에서 이권 침탈을 가속화하였으며, 청조는 번국인 만주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조공관계를 강요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중앙조정은 만주에 대해 별 다른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만주는 꼬박꼬박 조정의 재정을 채워줘야 했다.[9] 특히 청 조정이 러시아와 가까운 몽골의 방위 문제에는 중앙조정 차원에서 대응하면서도 '집토끼'인 만주 방위는 만주 현지인들에게 떠넘기는 상황은 만주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여기에 만주의 통치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행정인력을 만주에서 충당할 수 없어 대부분 관내에서 데려와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니칸인 혹은 화화(華化)된 만주인들로 현지 만주인들의 언어, 문화 등을 무시하고 관내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했다. 이미 청조의 강요로 반강제적으로 만주화되었던 상당수의 한국계와 니칸계 만주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행태에 극렬히 반발하였고,[10] 만주 지식인들은 만주어, 만주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주장하며 만주교육운동을 벌였다. 그나마 공선왕 자이아 이래 만주왕실이 스스로 만주어를 쓰고 나름대로 만주인민들의 교육과 복리에 신경을 쓰면서 왕실에 대한 만주인들의 여론은 호의적으로 변했으나, 정작 만주국왕 역시 청조의 번왕이라는 신분상 권한이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고 만주 조정이 북경 중앙조정에서 파견된 인력들과 관내 귀족들의 영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이중적인 통치구조가 만주인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흠정헌법대강과 만주민권운동

1899년 의화단의 봉기로 시작된 북청사변은 1900년이 되자 만주에도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은 기본적으로 화인들이 주도한 멸만흥화 운동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1900년 들어 부청멸양으로 구호가 바뀐 후에도 관동 지역에는 거의 유입되지 않았으나, 대신 멸만흥화 구호에 자극을 받은 만주인들이 곳곳에서 니칸계 주민과 관리들을 린치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주 조정은 신설 만주군을 투입해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만주에 주둔중이던 중앙의 팔기부대는 나름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대러국경 수비를 위해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만주 조정은 한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1900년 8월부터 한국군 10만여명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11] 이유야 어찌되었건 번국 조정이 천조의 승인 없이 외국군을 들인 문제로 격분한 청조는 1902년 10월 한국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전격적으로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고, 만주 조정은 묵던성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국왕 아이신교로 유거와 세자 훙투이가 모두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조는 홧김(?)에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으나 정작 만주를 직할통치할 계획은 없었고, 이에 만주 왕실의 폐지에도 만주 조정은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는 공위 상태가 도래했다. 이러한 권력공백 상태를 틈타 러시아는 기어이 숭가리강 이북지역에 진주하여 하르빈과 치치가르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한국은 압록-두만강 북안 9개 현을 점거하고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이 와중에 일본은 1905년 극동전쟁에서의 승리로 러시아로부터 우수리강 서안지역을, 한국으로부터 두만강 동안지역을 획득하여 호세츠(寶雪)만에 항구를 건설하고 병력을 주둔시켜 동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란에 지친 만주인들은 1906년 청조가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자 만주 통치의 법제화를 기대하였으나, 1908년 반포된 흠정헌법대강은 장성 이남지역에만 적용되어 만주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간 청조의 만주에 대한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발상지지이자 황실, 귀족들과 동족이라는 사실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만주인들은 청조가 만주를 사실상 외국, 그것도 식민지로 취급하는 사실에 분개하여 대대적인 민권운동을 벌였다.

사실 청조 치하에서 '만주인'에 대한 관념은 청조와 관내 만주인, 관동 만주인들 사이에 완전히 제각각이었고, 정확히는 관동에서도 정주민인 조선계, 니칸계 만주인들과 여진계 만주인들, 기인들이 또 달랐다. 원래 만주의 황족과 귀족들은 부족제 사회에서 출발했고 기인으로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언어와 이름을 사용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복속민이지 동등한 입장의 동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인이 아닌 일반 농민으로 새롭게 유입된 조선계나 니칸계는 말 할 것도 없었다.[12] 청조가 이들을 만주인이라는 이름 아래 묶은 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만주에 남아있던 우디거, 우랑카이, 나나이 등의 제 부족으로부터 우위를 점하고 조선인이나 니칸인 등의 정주민들로부터 관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13] 반면 여몽전쟁 이후 고려-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국가 정체성의 경험이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깊게 남아있던 조선계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만주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스스로를 황족과 동족인 만주인이 된 것으로 여겼고,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북방민족과 스스로를 구분했던 니칸인들 역시 만주화를 만주 정착을 위해 겪었던 고난, 통과의례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이후 관외 출신 관리들의 화화(華化) 강요에 만주 원주민들보다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물론 그 외의 원주민계 만주인들도 상당수는 건주에 무력으로 통합된 처지였고, 청조가 만주의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그저 발상지지 타령이나 하면서 묻고 넘어가려 드는데 고개를 끄덕거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똑같이 '만주인'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관내 만주인과 관동 만주인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관내에서의 만주인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계급 그 자체인 반면, 관동 만주인은 조금 더 근현대의 민족적 개념(그것도 혈통보다 문화에 기반한)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관동 만주인들, 특히 건주와의 투쟁경험이 없거나 희박한 조선계, 니칸계는 거의 짝사랑에 가깝게 청조에 동족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또 그것을 기대한 반면, 청조를 위시한 관내 만주인들은 만주 지역의 영위에 큰 문제가 없는 한 딱히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제화인(諸華人)들을 위무하며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한 관점에서 황권을 스스로 제약해가며 흠정헌법대강을 내놓았는데 굳이 만주에서까지 황권과 만주 귀족들의 구시대적 특권을 내려놓을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았던 팔기 소속의 관동인들 역시 최전선 방위를 책임지면서도 관내 기인들에게는 하대당하는 신세였고, 나름 출세할 수 있었던 만주 내부에서조차 중앙조정의 관리들과 충돌하면서 오히려 만주 지식인의 지위를 꿰차고 만주민권운동을 주도하는 판이었다. 이에 1908년 만주 최초의 정치단체인 민중회가 조직되었고, 1909년에는 만주노동연맹이 창설되는 등 만주 내 정치세력들의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여론의 결집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사실 만주의 열악한 교육여건 상 이런 민권운동을 만주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권운동 초창기 대다수의 만주인들은 어디까지나 청조가 자신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으로써 민권운동의 주요 요구, 즉 헌법, 선거, 의회의 시행과 설립에 찬성하는 것이었으므로, 만일 청조가 여기에서 어느정도 만주인들에 대한 유화책을 시도했다면 민권운동은 큰 반향을 얻기 전에 흐지부지되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조는 1910년 아이신교로 유거의 차남 훙루이를 공위 상태였던 만주국왕위에 앉히는 것 외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이웃한 한국에서 이미 30년간 헌법이 시행되는것으로도 모자라 극동전쟁 패전을 계기로 국가 권력이 황실에서 의회로 넘어오는 모습을 지켜본 만주인들은 점차 단순한 상징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민권 획득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절감하였다.

만주인들에게는 다행히도,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입헌정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만주 입헌운동가들과도 교류해왔던 훙루이는 중앙 조정을 설득하여 만주기본법과 만주의회 설립을 허가받았고, 이에 1912년부터 기본법 제정과 만주의회 설립을 추진하여 민중당과 노동당 등의 정당이 창설되었다. 다만 만주 민권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훙루이와 만주 조정은 베이징 조정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흠정헌법대강에 기초한 보수적인 흠정헌법으로 방향을 잡았고, 선거 역시 조정의 의향에 따라 연간 국세 20원을 납부한는 25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하였다.[14] 그러나 1913년 8월 민중당과 노동당, 학생단체, 노조 등이 참여한 묵던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여론을 확인한 만주 조정은 이에 고무되어 유권자 기준을 국세 5원 이상 납부자로 하향하였고, 청조가 이에 극력 반대하였지만 만주 정부는 1914년 3월 1일 만주기본법 초안을 발표하고 선거일을 6월 9일로 예고하였다. 이에 청조는 이를 반역으로 몰아 선거 다음날인 6월 10일 새벽 묵던에 주둔중이던 팔기를 동원하여 훙루이를 비롯한 왕실 일가를 도륙하고 만주 조정까지 폐지하여 관동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정체제를 수립하였다. 자무하, 할빈, 칭니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팔기에 의해 진압되었고, 시민들이 무장 봉기에 나선 할빈 역시 7월 16일 저항이 종식되었다.

관내 상실과 북청시대

만주 왕실과 조정이 폐지된 직후인 1915년, 흑령호 사건으로 한국이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협상 측에 가담한 한국의 침공으로 청은 어쩔 수 없이 산둥반도에 병력을 주둔시킨 독일과 손을 잡고 동맹 측으로 참전하였으나, 만주 전선은 한국과 일본의 협공으로 붕괴되어 7개월여만에 대힝간산맥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협상군에게 장악되었다. 이어 1916년 협상군의 베이징 진공과 산둥반도 상륙으로 황실과 정부는 타이위안을 거쳐 시안까지 도피하면서 체면을 구겼고, 반면 화인들로 구성된 신건 북양육군이 황하과 대운하에서 협상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북양원수 위안스카이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18년 2월 협상측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청 조정과 황실이 베이징으로 복귀하자 불만이 폭발한 베이징 시민들은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황족을 포함한 베이징 시내의 만주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고, 황실과 조정이 사라진 베이징에 북양군을 이끌고 입성한 위안스카이는 1918년 3월 3일 중난하이에서 대화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학살의 와중에 선통제 푸이와 조정의 핵심 인사들은 간신히 베이징을 탈출하여 산해관을 통과, 묵던에 도착하고 임시수도로 선포하여 청조의 국체를 지속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한때 5만명에 육박했던 만주 최대의 씨족 아이신교로 황족의 숫자는 급감했다. 또한 청조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5만여명의 만주경찰과 옛 만주군 복무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소집된 2만여명의 민병대가 전부로 당장 북양육군의 만주 진공조차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조는 급히 만주에서 징병령을 내렸으나 그동안 망가질대로 망가진 만주의 행정체제는 묵던과 할빈, 자무하 등 만주종관철도 연선의 대도시들에서만 간신히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화인들의 만주 침공을 원치 않았던 한국과 일본이 나서서 북양군의 산해관 통과를 저지함으로써 북청은 멸망을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 청 조정에서는 묵던 천도라는 용어로 에둘러 표현하였으나, 민간에서는 관내 상실이라 불렀다. 관내를 잃고 대청제국 조정이 관외 만주 지역만을 통치한 이 시기를 통상 북청이라 이른다.

그러나 입관 이후 수백년간 푸대접해온 만주에 복귀한 청조는 그 업보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관내 상실 직후에는 북양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로 잠시 근황 여론이 일기도 하였으나, 한일의 개입으로 만주의 안전이 확보되자 1920년부터 다시 민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특히 800만에 달하는 관내 만주인들 - 그것도 기득권층이었던 - 이 관동으로 몰려들면서[15] 만주의 경제적 문제도 심각했을뿐더러 이들이 만주에서 정부 최요직부터 지방 말단 관직까지 두루 꿰차는 상황은 민권운동의 핵심이었던 헌법, 선거, 의회에 대한 갈증을 부채질했다. 한국과의 교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만주는 민간의 주도로 민중 초등교육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었지만 정치적 권리의 보장은 주민들의 지식 및 의식수준 향상을 따라잡지 못했고, 이 부의 축적에 앞장선 만주 경제계 역시 정치 참여의 기회가 차단당한 데 대해 불만이 드높았다. 불법조직으로 지정되어 강제 해산당한 만주 민중당 등 기존 정당들은 한국군 점령 하인 1917년 새롭게 만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정부 투쟁에 나섰고, 여기에 1921년에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만주공산당이 창립되어 만주 민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게다가 250년간 화화가 진행된 관내 만주인들은 만주어를 거의 잊어 아예 연어(燕語)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황제인 푸이조차 만주어를 거의 몰라 매일 만주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청조의 오랜 봉관 정책으로 관내 만주어와 관외 만주어의 차이가 심해 숭가리 이북에서는 공무원들이 주민들과 대화가 어려웠고 군대와 경찰에서도 연어나 연어가 섞인 관내 만주어를 쓰는 관내인 간부와 관외인 하급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될 지경이었다. 이에 1922년부터 기존의 종학 만주관[16]이 황립언어원으로 개편되어 표준어를 제정하려 하였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관외 화자들을 무시하고 관내 중심으로 진행되는 제정 작업에 반발이 심했다.

청조는 관내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력은 어느정도 회복되었지만 수도권과 남부지방을 제외한 전역에서 마적이 활개를 쳤고, 관내파 귀족들은 자신들의 봉건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부 재정을 압박하는것으로도 모자라 지역 방위를 명목으로 영지 일대의 경찰권을 사유화하였다. 관내 회복주의는 스스로를 중원 왕조로 여기는 인식의 발로였고, 이 때문에 황실과 조정 인사들은 만주 표준어 제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버젓이 연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화국은 만주와의 대치를 '내전'으로 규정하며 무력충돌을 정당화하였고, 최대 후원자인 한국 역시 만주 기병이 두렵지 않은 총기와 차량의 시대에 굳이 화국과의 무력분쟁을 야기하는것으로도 모자라 만주 현지 자본을 옥죄며 수십년간 구축되어 온 한만 경제협력 체계를 무너뜨리는 청 정부를 곱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은 1920년대 중반 들어 만주 정부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화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구만주군[17] 출신의 군인들은 만주 방위를 위해 피흘린 대가를 해산과 탄압으로 갚은 청조에 반발하여 북부 산간지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북부 최대 도시인 할빈은 서로는 눈강 상류, 동으로는 숭가리강 하류 지역을 점거한 반청 군벌들과의 내전과 러시아 백군계 군벌들의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눈강 평원 최대 도시인 치치가르는 1920년부터 1927년까지 만 7년간 구만주군 출신 군벌 마기야 잔샨의 지배 혹은 습격을 받았고 만러간 교역의 중심지였던 할빈은 동청철도의 운행이 수시로 통제되면서 피폐해졌다.[18] 심지어 1924년 1월에는 할빈 경찰이 치치가르 방면으로 출동한 틈을 타 아러추카 타이람이 이끄는 마적단이 할빈 시내를 습격하여 철도노조와 우정국 직원대, 철도중학 학도대가 이를 격퇴하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관외인들의 민심 악화를 절감한 청 정부는 결국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한 구 수도 묵던을 포기하고 1923년 만주종관철도와 지린우라-간도철도의 분기점인 자무하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단기적으로 친정부적인 관내인들로 채워진 안정적인 수도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관외인들은 만주 전통의 수도이자 중심지인 묵던을 포기한 행위에 분개했으며 관내인들 역시 태조 누르가치가 직접 건설한 구도 묵던을 포기한 데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다. 특히 인구 50만의 대도시 묵던은 한순간에 국가 중추기능이 모두 자무하로 빠져나가면서 도시 기능에 상당한 공백이 발생하였다.

1926년 할빈 봉기

라린강 이북지방은 17세기 이후에야 개척민들이 당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고대부터 꾸준히 개발되어왔던 요동과 남만주 지역에 비해 지역색과 자부심이 강했고, 그 중심에는 북방의 수도라 불리던 할빈이 있었다. 이미 1914년에 한차례 무장 저항의 경험이 있었던 할빈 시민들은 대체로 마기야 잔샨을 비롯한 구만주군 출신 군벌들에 대해 호의적이었고,[19] 만주 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 의회 선거를 치렀던 1914년 6월 9일을 기념하며 매년 선거 요구 시위를 벌였으며, 1924년의 할빈 습격 사건 이후에는 폭동 직전의 상태에 달했다. 북부지방의 불만이 높아지자 청 정부는 1925년부터 대규모 지원예산을 급편하였으나 할빈시장 아하교로 푸차 등이 엮인 대규모 횡령, 착복 사태가 벌어졌고, 일부 하급공무원들은 처벌되었으나 정작 비리의 중심이었던 푸차는 교로씨라는 이유로 황실의 비호를 받아 해임으로 마무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6년 10월 11일, 할빈역광장 앞에 모인 시민들은 아하교로 푸차의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할빈시경은 시위 불허와 즉각 해산을 요구하는 숭가리로경무청과 경무국의 성화에도 충돌을 최소화하며 최초 신고된 시위 시간을 보장했다. 이후에도 시위가 계속되자 10월 15일 경무국은 부임 8개월차였던 할빈경찰서장 닝구타 가란타이를 압박하여 퇴직서를 제출케 하였고, 성난 시민들은 가란타이의 퇴직 반려와 푸차의 처벌을 요구하며 할빈을 떠나려는 푸차의 차량을 막고 진압을 위해 투입된 숭가리로경무청 경력과 할빈역광장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밤새 대치했다. 정부는 10월 16일 06시를 기해 숭가리로 전역에 계엄령을 발효한 데 이어 할빈시에서 발포를 허가하였고, 이어 치치가르 방면에 주둔중이던 11사단을 할빈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만주공산당은 철도노조로 하여금 정부군 수송에 고의태업을 시전하도록 하는 동시에 할빈지역 노조원들의 무장봉기를 촉구하였다. 안그래도 북부 출신으로 지역민들의 정서에 공감하던 차에 서장이 한순간에 경질되고 이웃들이 총격에 받아 희생되는 모습에 분노한 할빈경무서과 숭가리로경무청 소속 경찰관들이 대거 시민들에게 합세했고, 할빈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인근 지역의 마적들까지 시내로 진입하여 무기를 공급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10월 17일 벌어진 총격전으로 숭가리로청이 시 외곽으로 밀려나 푸루경무서에 임시로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11사단이 할빈 시가지 진입을 시도했으나 숭가리강을 넘지 못한 채 각개격파되며 돈좌되었다. 할빈시내는 무정부 상태에 놓였고, 정부는 병력을 추가 병력을 투입하려 하였으나 사방이 적대세력으로 둘러싸인 청 정부는 어느 국경, 전선에서도 병력을 차출할 수가 없었다.

1926년 10월 22일, 할빈시내 해방구에서는 1914년 이후 무려 12년만에 그토록 염원하던 선거가 치러져 총 16명의 시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할빈법학전문학교 교장 삭타 아바하이가 임시 시장 겸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민위원회가 출범과 동시에 맞딱뜨린 첫 의제는 어떻게 활동을 종료할 것인가? 였다. 일부 경찰병력이 합류했으나 할빈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열세였고, 외부와의 소통은 끊겼으며, 기대했던 북부 군벌들은 할빈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잔샨은 봉기 이래 처음으로 치치가르에서 뛰쳐나와 할빈으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무두리타샤호 일대에서 격퇴당해 다시 치치가르를 빼앗겼고, 한국은 한만국경에서 만주군 병력의 차출을 저지해주고는 있었으나 청 정부의 진압을 저지할 명분이 없었을뿐더러 입헌우국당과 공영당 등 보수진영에서는 오히려 좌익폭동에 대한 진압 협조를 부르짖고 있었다. 정부가 어느 한 전선에서라도 병력 차출에 성공하는 순간 할빈의 멸망은 시간문제였다. 시민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계엄군은 시민위원회 자체를 불법 사조직으로 규정하며 협상을 거부했다. 만주공산당의 개입은 노조의 조직화와 무장 지원으로 초기 할빈의 봉기에 도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부로 하여금 봉기를 좌익 폭동으로 선전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노조는 숭가리강 수로를 통해 할빈을 지원하려 하였으나 조직이 수면 위로 노출된 공산당은 즉시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려 일부 조직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고 자연히 노조 조직의 할빈 지원도 한계에 다다랐다. 민중당과 공산당 등의 정당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지원은 묵던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당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력이었던 친위사단 파견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카드는 의외의 성과를 거뒀는데, 할빈에서 그 사이 최대의 협상카드를 찾아낸 것이다.

1926년 11월 10일, 마지막 만주국왕 훙루이의 차녀이자 만주 왕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신교로 시하가 계엄군과의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20] 그동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첩보에 6년이 넘게 지명수배중이었던 그녀는 할빈을 거점으로 사하리얀 미로라는 이름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암약하던 중 할빈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시민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21] 청 정부는 즉각 시하를 묵던으로 비밀리에 압송하고[22] 뒤이어 일본과의 협의로 동원이 가능해진 제16국경경무여단, 무단기양로경무청 경력을 할빈에 투입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묵던 시내에 시하의 압송 소식이 퍼져 외신기자들이 묵던북부역에 진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23] 드라마와도 같은 공주의 귀환에 전세계 언론의 이목이 묵던과 할빈으로 집중되었고, 묵던 시내에서는 경찰이 통제를 포기할 정도의 대규모 환영 시위가 열렸으며, 한국 정부와 황실은 주한청국대사관과 주청한국대사관 양쪽 모두를 통해 1시간 단위로 시하 공주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결국 청 정부는 11월 15~16일 이틀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시하 공주의 한국 망명과 만주 재입국 및 황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할빈 시민들에 대한 보복 방지를 공언할수밖에 없었다. 이에 11월 20일부터 한국 및 일본 측 참관단 주재로 할빈 시민들의 무장 해제와 계엄군 철수가 진행되었고, 시하 공주는 할빈의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11월 25일 봉기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민위원회 위원 등과 함께 열차편으로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1926년 할빈 봉기는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1926년 할빈 봉기는 만주 민권운동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입헌의 관철에 실패한 채 종식되었으나, 임시적이나마 선거에 의한 의회와 행정부의 구성이라는 선례를 남겼으며, 무엇보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보복을 방지한 채 종료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만주 혁명에 매우 큰 자산을 남겼다. 이들이 봉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정부 권력에 대한 공포가 남지 않은 점이 혁명 초기 시민들의 대대적인 합류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만주 왕실의 적녀인 아이신교로 시하의 존재는 만주의 주체로써 정당한 권리를 찾는 만주 민권운동의 상징으로써 이후의 혁명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

제1차 만주전쟁과 3차 민권운동

전개

널허 어르더무 한의 즉위와 쟁탈화(爭脫華)

2.12 쿠데타

할빈 시민 봉기와 널허 어르더무 한의 합류

할빈 시가전

'반란의 진압'과 퇴위 조서 발표

결과

만주 제1공화국 수립

국제연맹의 만주공화국 승인

영향

만주 현대사의 시작

한국 3월 혁명

  1. 만주 제1공화국의 국제연맹 가입으로 제1혁명이 완수된 것으로 간주
  2. 만주에 거주하는 화북계 주민을 이르는 말. 원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을 이르는 말이다.
  3. 후요 인구는 400만명 수준으로 발해-조선인이 200만명이며 화인(니칸인) 100만명, 여진인 60만명 등이었다. 이 당시에는 흥안령 일대의 키탄부를 몽골인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 1660년~1760년의 100년간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은 약 60만명으로 추산된다.
  5.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 이후 호구를 등록한 조선인과 니칸인들은 대부분 본국에서도 성씨가 없던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일본과 비슷하게 지명을 따거나 거주지역의 특징을 따서 이런저런 만주식 성을 만들었는데, 만주의 부족적 특성에 기인한 무쿤-하라 방식의 성씨와도 달랐을뿐더러 복수의 씨족이 동일한 성씨를 가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화식 성씨가 있는 이들은 보통 성씨 뒤에 '기야'(家)를 붙였다.
  6. '한국계 만주인'과 '니칸계 만주인'도 만주인으로써 이 학살에 대거 가담하였다.
  7. 그나마 청조와의 교섭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청간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외무부의 만류로 묵던 점령은 면했다. 대신 구도 리요안과 철광산지인 안산이 모두 한국군 혹은 친한민병대에 점거당했다.
  8. 강희제의 14황자인 순근군왕 윤티의 5대손이다. 그가 만주국왕으로 낙점된 것은 아버지를 따라 관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조상인 윤티가 옹정제의 동복제로 황실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샨이 아이군 조약의 청측 대표로 만주에서 반감이 드높았기 때문에 청조에 대한 불만을 떠넘기려는 의도도 있었다.
  9.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는 정통의 변을 계기로 중원이 분열되어 막대한 물산을 독점하는 천자국이 사라지면서 무역제도로써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고, 이후 동아시아의 교역은 민간이 주도하는 각종 형태의 사무역 중심이었다. 18세기 초 강희제의 청이 강남 원정에 성공하고 중원 천자국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한때 한국과 일본도 청에 재조공을 고려할 정도로 조공무역이 각광을 받던 시기도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들어 청이 빈발하는 자연재해와 내란, 외침에 시달리면서 조공은 다시금 번국들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었다.
  10. 니칸인들의 화화 강요에 오히려 니칸계 만주인들이 반발한 점은 킬트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사례와도 종종 비교된다.
  11. 북경 공략에 투입된 육수군 3만명은 별도.
  12.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15년 전쟁으로 유입된 야마토여진 출신자들을 더 높게 쳤고 이들은 만주 팔기 귀족으로 편입되어 입관도 함께했다. 야마토부를 여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족 공동체로 인정했기 때문.
  13. 특히 이 조치는 화식 성씨를 중시하는 한국이나 니칸의 중류층들이 만주에 터 잡고 살면서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14. 1915년 기준 만주에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인구는 총 인구 2150만명 중 15만명이었다. 이렇게 기준이 높았던 이유는 국세 납부 상위권에는 관내 귀족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이들을 유권자로 등록하여 만주 의회를 통제하려던 중앙 조정의 꼼수가 있었다.
  15. 이 800만에는 관내에서 만주인과 함께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니칸 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관내의 만주 팔기 소속 인구는 800만 정도로 추산되었고 이들 중 200만 정도는 만주로 복귀하지 못한 채 학살당하거나 화성(華姓)으로 바꾸어 숨어 살았다.
  16. 관내 상실 이후로 황족의 숫자는 두자릿수로 줄어 종학은 사실상 역할을 상실했다.
  17. 1914년 해체되기 전 만주조정 산하의 만주군. 이후 청조가 만주에서 새롭게 창건한 만주군은 만주신군 혹은 신건군이라 불렸다.
  18. 1919년 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러교역 자체는 급감하였으나, 한국, 일본, 미국이 이르쿠츠크 방면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경로로 동청철도를 이용하면서 할빈은 중간경유지로 여전히 활황을 유지했다. 그러나 잔샨이 이끄는 힝간군이 동청철도를 통제하면서 서방측은 1.5배 이상 돌아가는 아무르-우수리 철도를 이용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수차례 만주군의 힝간군 토벌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힝간군은 그때마다 대힝간산맥 서부 몽골령으로 도피하였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동청철도 연선을 습격하기를 반복했다.
  19. 힝간의 잔샨, 라하수수의 아무하 라이치야 등 구만주군 출신 군벌들 중 상당수는 청조가 헌정을 시행하고 관외인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한다면 군을 해산하고 정부에 협력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이 차별 시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관외인의 정부 참여에 있어서 많은 관외인들, 특히 북부에서는 잔샨 등의 군벌 지휘관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헌정에는 의회 구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한국, 일본식 보통선거를 실시하면 당연히 관외인의 몰표가 예상되었으니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전혀 수용할 생각이 없었고 선거 요구 여론이 드높은 북부에서는 내전의 책임을 반란군벌이 아닌 정부에게 돌리고 있었다.
  20. 삼녀인 아이신교로 시리 역시 1914년 6월 10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1924년 마적에 의해 살해당했다. 후에 아이신교로 시하는 동생을 죽인 마적 두목의 어린 딸을 동생으로 삼았는데, 우연히도 이름이 시리였다.
  21. 삭타 아바하이는 후에 실력 좋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인기가 있었을 뿐 그녀의 정체를 위원회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고 나섰다고 밝혔다.
  22. 묵던으로의 압송은 시하 공주가 요구했던 것으로, 수도 자무하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신도시인데다가 친정부 여론이 강해 자신의 협상력이 약해질것을 우려해 옛 만주 조정에 대한 우호 여론이 강한 묵던을 지정한 것이다. 물론 청 정부는 정보를 은폐할 속셈이었지만 이 은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23. 평소 시하 공주 - 정확히는 사하리얀 미로 - 와 친분이 있었던 월간 아이신지(紙) 기자 타타라 시하가 주도한 것으로, 당시 다소 통제가 느슨했던 경찰 측에서 할빈 봉기를 취재중이던 그는 협상장에 시하 공주가 나타나자 우정국 우편항공기를 타고 자무하로 날아와 오만 단체와 언론사들에 익명으로 시하의 압송 소식을 뿌렸다. 당시 대형 언론사들은 모두 자무하로 이전해있었기 때문에 묵던에서의 취재경쟁을 주도한 것은 비행기편으로 날아온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었다. 이 둘은 6년 후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