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국의 역사
灣華史
선사시대
先史時代
B.C 115,000~ B.C 500
구석기시대
舊石器時代, B.C 115,000 ~ B.C 6,000
환문시대
丸紋時代, B.C 6,000 ~ B.C 1,000
가로시대
城國時代, B.C 1,000 ~ B.C 500
제 1차 통일왕조시대
第一次統一王朝時代
B.C 500 ~ 302
이비광
理非廣, B.C 500 ~ 302
전도시대
戰島時代代
305 ~ 531
전도6수국
戰島六秀國, 305 ~ 531
다마, 운사, 후이비광, , ,
전도소국
戰島小國, 305 ~ 531
정, 호,횡, 한, 필, 각청, 천축, 감경, 백식, 조보달, 훈앵, 봉릉
행경, 골평, 동주, 지산, 홍, 여, 악, 숭, 정궁, 경내궁, 한악, 채기, 월견
제 2차 통일왕조시대
第二次統一王朝時代
531 ~ 722
다마국
성산씨 정권

多麻國, 531 ~ 722
운사국
云私國, 305 ~ 1441
동서시대
東西時代
722 ~ 1332
다마국
대군집정

大君執政, 722 ~ 740
경도의 변 (740년)
몽야마
夢野馬, 722 ~ 1080
방서국
邦瑞國, 740 ~ 894
호락의 변 (894년)
개령국
凱領國, 740 ~ 894
이씨반정 (928년)
성사명
城師命, 929 ~ 1328
기해민란(950년 ~ 990년)
마원전쟁 (1287년 ~ 1288년)
동서전쟁 (1319~1328년)
아사모
亞射毛, 1080 ~ 1332
동서전쟁 (1319~1328년)
제 3차 통일왕조시대
第三次統一王朝時代
1332 ~ 1920
만화국
灣華國, 1332 ~ 1701
만화국
양씨정권

洋氏 政權, 1701 ~ 1873
대만화제국
大灣華帝國, 1873 ~ 1920
왜제습침(1920년)
호국전쟁시대
護國戰爭時代
1920 ~ 1945
만화국 출궁조정
灣華國 出宮朝廷, 1920 ~ 1945
만화국 유신정부
灣華國 維新政府, 1921 ~ 1945
만화공산당
灣華共産黨, 1925 ~ 1945
조국공민군
祖國公民軍, 1925 ~ 1945
건국내전시대
建國內戰時代
1945 ~ 1952
만화국 복궁조정
灣華國 復宮朝廷, 1945 ~ 1952
만화공산정부
灣華共産政府, 1945 ~ 1950
만화항결전군
灣華抗結戰軍, 1945 ~ 1952
현대시대
現代時代
1952 ~ 현재
만화국
灣華國, 1952 ~ 1960
4.4 군사정변 (1960년)
만화공화국
灣華共和國, 1960 ~ 1969
만화국
灣華國, 1969 ~ 현재

환문시대

가로시대

후기 가로시대

제 1차 통일왕조

이비광

기원전 500년경, 만화도에 청동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족통합으로 인해 여러 소국이 생겨났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다마도 남부와 만화도 북부에 걸쳐서 일어난 '이비광'이라는 국가였다. 이비광은 가장 선진화된 청동기 기술로 만화국 전역을 정복해나갔으며, 초기에는 대표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여러 소국의 연합체였으나, 정복국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왕조국가로서 변모하였다. 이비광국은 800년 동안 유지되어오며 전쟁이나 반란, 외란없이 통일왕조를 유지 해 왔는데, 이 통일왕조는 뒤이어 발생하는 다마국 왕조만화국 통일황조와 더불어 만화사 3대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이비광국의 왕조는 제 1차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비광국이 탄생 할 때 까지만 하여도 일본계가 주류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큐슈의 쿠마소와 비슷한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비광국의 왕은 '타카마웨(茶加馬艾)'로 불리었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 2, 3차 통일왕조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 한다. 이비광은 성립 이후 6대 타카마웨인 왜촌찰(矮忖察) 대왕 이전까지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해당 소국의 세력가를 봉건영주로 앉히는 등 초기엔 봉건국가로서 주변을 통일하였으나, 이후 왜촌찰 대왕의 왕권강화 정책을 통해 스스로가 세운 봉건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이비광국은 주변국과의 교류가 극히 드물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11대 타카마웨 왜팽칠(矮澎漆)은 제주도를 침공하여 이비광령으로 삼고 탐라 나을(羅乙)을 영주로 임명하여 '탐모라나을방'을 세우고 관리하였으며, 9대 타카마웨인 왜즐미무칭(矮櫛未巫秤)은 규슈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서진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말이 통하지 않던 관계로 별 소득은 없었다. 서진은 이비광을 '남만(南蠻)'으로 분류하였으며, 국가 형태가 갖춰졌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모를 정도로 이비광에 무관심 하였다.

이비광에 관련된 정보는 사학계에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서적이나 유물의 부재에 기인하는데, 다마국이나 전도시대의 유물과 서적은 차고 넘치는데 비해 이비광에 관련된 서적은 성산씨 정권 때 유물로서 발견된 이비광의 역사를 기록한 '역지(歷紙)'와 이비광의 대외 활동 기록을 기록한 '교부(交簿)'가 전부인데다가 유물은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역지와 교부 마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법적으로 너무나도 이상한 한문으로 작성되어있기 때문에 암호해독 수준으로 해석이 어려운 것도 문제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바로 이비광의 한자사용방법에서 기인한다. 이비광에 한자가 전해진 것은 기원후 100년 전후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초기 이비광은 한자가 한 글자마다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저 중국에서 전래되어오던 때의 음과 형태만이 전해져 내려와 200년대 이후로 한풍이 전해지기 전 까지는 그저 고대 만화어를 한자음을 빌려 음차하여 쓰는 형태로 한자를 활용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70년대 이후부터 한풍(漢風)을 받아들이면서 한자의 사용방법, 이름의 형태, 복식의 형태, 관직, 정치, 예법의 형태등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으며, 한풍의 전래과정에서 다마도로 한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다마도로 유입된 한족들은 현재는 다마민족에 완벽히 동화 되었으나, 사학계는 이들의 유입을 이래한인의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251년부터 즉위한 제 15대 타카마웨 몽종왕의 시대에 있어서 북부쪽에서 '랑다우'라 불리는 전무후무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이비광은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농지가 파괴되고 수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등 그 피해가 엄청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지진은 이후 '신의 계시'로 까지 신격화 되어 랑다우의 신을 섬기고 이비광국의 멸망을 외치며 서부에서부터 일어난 '판파무라야의 난'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몽종왕은 이를 요해진타 성의 영기(靈氣)가 다하였기에 악재가 나는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새 궁성을 지어 하늘의 노여움을 잠재우겠다며 나섰고, 이에 따라 새 궁성을 짓기 위해 노동력의 징발과 가렴주구한 세금정책을 통해 백성을 고통받게 하였다.

몽종왕은 신 요해진타 성의 착공에 앞서서 성을 지을 땅에 대한 신의 허락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3000여명을 순장하고, 신에게 공양한다는 명목으로 신하 혹은 장군들의 아내를 삶아 조장하는 등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다. 신 요해진타 성의 건설이 진행되면 진행 될 수록, 신하들의 반감은 날이 갈 수록 커져갔으며 사정은 더욱더 쇠퇴하여갔다.

이 상황 속에서 반란을 모의하던 세력이 '오장(五將)'이었다. 오장은 판파무라야의 반란을 진압하여 몽종왕으로부터 전 이비광을 5곳으로 나누어 방어와 세력진압을 명받고 군벌을 형성하던 세력들로, 노무군(盧務君), 진새나리(辰塞羅吏), 흑범돌(黑凡突), 양학래(陽鶴崍), 오패천(吾覇薦) 5인의 무관 세력들은 몽종왕의 압제에 대해 계속하여 벼르고 있었으며, 각자의 군벌을 기반삼아 힘을 합쳐 왜씨 왕조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다 301년 몽종왕이 시국을 바로잡아달라며 간청을 온 20인의 의환(義宦)을 궁 내에서 무참히 참하는 사건 (왜씨궁의 변) 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5장의 반란이 일어났다.

5장의 반란을 계기로 몽종왕과 그를 비롯한 왕실은 척살당했으며, '왜(矮)'씨 성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참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왜씨는 중국으로 넘어가 숨을 부지하였으며, 이로서 이비광은 멸망하였다.

이비광의 멸망이후 5장은 새로운 국가를 새우고자 하였다. 동부의 진새나리 장군이 주축이 되어 연합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다마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던 오패천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오패천 장군은 축출되어 다마도의 독립국가인 다마국을 세웠으며, 나머지 4장은 합께 연합하여 '운사국'을 세웠다.

전도시대

전도6수국

다마국

운사국

후이비광

농나라

영나라

제나라

제 2차 통일왕조

성산씨 정권

동서분국시대

서조

대군집정

방서국

개령국

성사명

동조

몽야마

아사모

제 3차 통일왕조

초기 만화국 시대

고비왕 홍희래는 1332년 만화국을 세우고 자신을 천제로 높여 부르는 '천국제제'를 하였다. 정확히 국명을 '만화'로 고친것은 1339년의 일로, 이 전까지는 '아사모'의 국명을 썼다. 1341년엔 연호를 개창하니, 이가 '개락(開樂)' 이었다. 그의 만화 통일 이후, 한동안 남부에서 舊 성사명의 독립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나,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만화국은 천국제제등의 황권강화시도에도 불구하고 태조와 함께 통일을 주도한 개국공신의 시죠 히토나카(四條仁仲)의 기세가 해동지역을 중심으로 날로 커가면서 황권이 크게 악화되려 하고 있었다. 이에 태조 개락천제는1350년 평융(平隆)(現 성경)지역으로 가서 성사명의 도읍이었던 중경지역에 '평경(平京)'이라 새 이름을 짓고 도읍을 정하여, 가운데에 상춘백리성(祥瑃百里城)을 쌓고 주변 평야로 대규모적인 백성이주정책을 실행하여 중심지를 옮기었으며, 동시에 권력이 약화된 시죠 히토나카를 숙청하여 해동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이 때 세운 상춘백리성은 이후 평경을 감싸고 있는 성곽이라는 뜻에서 '평경성(平京城)'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중부의 지역을 뜻하는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1359년 천제 자리에 오른 영조 영화천제원나라에 임은제병극(林殷齊昺克)을 중심으로 한방원사(訪元使), 일본과 조선에는 공강일현주(恭康佚賢珠)를 중심으로 한 방왜사(訪倭使)와 방려사(訪麗使)를 보내 하늘의 제왕을 모시는 국가가 나왔음을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각각 원말명초의 중국, 여말선초의 한국, 남북조시대의 일본의 혼란스러운 동아시아로부터 이래인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400년대 말 까지 만화국은 평화로운 정세를 유지하며 계속되는 이래인들의 유입 과정에서 이래여인(이래조선인)과의 동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자 이름이 점차 소멸되고 3자이름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1437년, 사쓰마 지역을 향하던 방왜사는 운사도에 표류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과거 전설속에서 전해내려오던 운사국이 사실은 만화국 가까운 곳에서 독자 왕국을 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선종 번영천제는 장군인 김인충(金吝忠)을 시켜 운사국을 복속하라 명령을 내렸고, 1440년 운사정벌을 나간 끝에 1441년 운사국을 만화국의 땅으로 복속시켰다. 선종 은 당시 운사국의 마지막 왕인 진중증근강광(辰中曾根康廣)을 운사방후(云私邦侯)에 임명하고 자치권을 주는 형식으로 운사국을 흡수하였다.

이후 1500년대 초반에는 이앙법과 시비법으로 대표되는 선진농업기술이 중국에서부터 전파됨에 따라 생산량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치응(値應)'이라 불리는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수도는 아니지만 최대도시급이었던 해동(海洞)은 통일 이후 점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여 1500년대 초반에는 해동서부에 평야, 해동동부에 상업항구를 두고 거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이를 복법천제의 은덕이라 여기면서 1500년대의 호황을 '복법의 치(福法之治)'라고들 부른다.

복법천제의 차남으로서 황위에 오른 효종 명치천제는 통일된 전 지역의 통치에 있어서 과거 전도시대동서시대에 행해져온 군현제등의 한계를 깨닫고, 국방후봉제(國邦侯封制)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서 전 만화국이 총 28개의 국(國), 그리고 이래인들을 위한 2개의 연주(聯州)를 세우고 이곳에 제후들을 봉하며, 각 지방마다 직치부를 두어 봉건지역을 관리하는 형식의 정조제(政組制)를 실시함으로서 세력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 행해오던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스스로 버리고 퇴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1592년인 강애4년에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만화국은 큰 변환기를 맞이한다. 꾸준히 유입되어오던 이래인들의 비율 중 전란을 피해 도망오는 조선인의 비율이 크게 늘면서 다마민족과의 동화가 빠르게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는 것에 대한 올바른 대처를 실패하면서 만화국은 나름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1599년 평경 지역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나면서 수도 위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기 시작헀는데, 이에 따라 세조 강애천제는 유례깊은 신하간의 회의이자 국정 최고기관인 제백회의(諸伯會議)를 열어서 이를 해결코저 하였다. 그러나 제백회의는 과거와는 다르게 해동(만경)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천도파와 중경에 남기를 선택하는 잔도파로 나뉘며 끝이 안보이는 토론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문제해결은 지연되는 조악한 행정력을 보이면서, 강애천제는 아사모의 시절부터 유례깊게 이어온 제백회의를 해산하게 되었다.

회의 형식이 아닌 기구를 통한 중앙통치방식은 사실은 다마국, 성사명 등에서 이미 시행한 바가 있었으나, 만화국의 모체인 아사모에서 만큼은 역성혁명 당시의 여러 개국공신들과의 회의에 영향을 받았기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었던 것이었다. 제백회의를 이루는 개국공신들의 후손귀족들은 각 지역을 연고지로 잡아 큰 영향을 행사하고, 국정에 있어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는 등 만화국의 정치를 주무르며, 만화국의 급제시험인 '[[대정보시(戴政普試)'등을 관장하며 인재의 발굴을 막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등 그 패도가 극심하였다.

제백회의의 해산 이후 강애천제는 제백회의 귀족들 중 상당수를 숙청하여 정치적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중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중앙통치조직방식인 3성 6부제를 만화국류(流)로 해석하여 2성 8조제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드디어 만화국도 보편적인 중앙통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성은 8조를 담당하는 내서성(內瑞省)과 어명의 수행과 사법을 담당하는 어응성(御應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8조는 각각 이조, 호조, 예조, 병조, 공조, 형조, 계조, 궁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평화로운 정국이 유지되어오고 있던 찰나, 1660년 부터 역사상의 유례가 없을 규슈왜구의 지속적 침입이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다마도와 다왜지역의 항구지역을 약탈해 갔으며, 이 과정에서 이래왜인들은 본토왜인, 그 중에서도 특히 규슈의 왜인들에 대한 지역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피해가 극심해지기 시작한 1690년, 정종 대영천제는 서방방본영사였던 양정수에게 시키어 규슈왜구의 토벌을 명하였으며, 3년만에 토벌이 끝나고 돌아오자, 양정수의 지지층이 조금씩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680년대에 가서는 양정수는 커져가는 명예와 세력에 취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양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경도방본영사에 부임한 이후로는 가혹한 정치를 펼침으로서 안티층을 결집하게 되었다. 이로서 양정수의 위험성을 깨닫은 정종 대영천제는 권력남용과 백성착취를 일삼던 양정수를 파면코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먼저 알아차린 양정수는 1701년 정종 대영천제를 암살하였으며, 자신과 연분이 있던 홍판표 제주위한(弘鈑豹 製姝爲漢)을 천제로 세웠다.

이후로 양씨 세도정권은 결국 만화국 전국을 손에 넣게 되었고, 이후 1873년까지 길고긴 영본군 치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양씨 정권 시대

1701년 경도방본영사였던 양정수가 자신을 좌천하려던 정종 대영천제를 암살하고 그와 사돈관계였던 홍판표를 데려와 천제의 자리에 앉혔다.(경진변천) 이후 양정수는 천제의 호위기관인 '천수국'을 세운 후 천수국의 수장인 '영본군'(令本君)의 자리에 앉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제는 실권을 잃었으며 양씨가문의 126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양정수는 자신의 세력권이 있던 해동(海洞)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고 '신도(新都)'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만경수도권의 시초가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왕대홍주명(王坮泓株命) 장군은 반역 진압을 외치며 제군을 이끌고 신도를 침공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신도침공사건으로 인해 제군을 완벽하게 제압한 영본군의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을 뿐이었다. 양정수는 왕대홍주명 세력의 진압 이후 각 봉건지역의 대군, 후독등을 모아 영본군세력에 충성할 것을 확인시켰으며, 전국을 완벽히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였다.

양정수 이후 영본군에 취임한 양성택은 성경에 있던 경세궁을 신도로 옮기고, 기존의 궁을 공궁(空宮)화 하고 어응궁(御應宮)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천제인 동종 부영천제는 이에 군말없이 따랐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경은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양성택은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공고화하는데는 누구보다 특출났으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의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양성택은 만화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자로, 사실상 중세 후기 만화국이 조선과 같은 수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된 것에는 양성택의 부정부패와 1742년에 일어난 평성대기근(平成大飢饉)이 있었다. 양성택은 천제를 상징으로서 남기고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군주로서의 영본군을 만화국의 지도자로서 온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1731년 청나라에 보낸 서신에서 영본군인 자신을 '다마방주군(多麻邦主君)'으로 나타낸 것에서 드러난다.

하여 그 사업의 일환으로서 양성택은 자신이 영본군이 되기 3년 전인 1726년부터 천수국의 본당인 천수지성(天守之城)을 신도(현재 만경)에 짓고자 열심이었고, 하여 1729년 자신이 영본군이 되자마자 천수지성의 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부족했던건 자금이었다. 양성택은 비교적 부유했던 지방인 화남과 남동지방의 적경성, 지철판, 오송롱, 제활랑, 대돈, 영창, 지화국등 이래한인을 중심적으로 가렴주구한 조세정책을 시행하였으며, 항구이용세와 무역세까지 걷기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 한편 경항지역을 자기 스스로 고립시키면서 화남지방의 경제를 파산시켰다.

화남지방이 파산하자, 이번엔 중평지방의 평경성 평야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조세를 매겼으며, 이때 세금을 낼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농민층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본군 정부는 조세의 단위를 가지고 있는 토지의 수로 책정하였는데, 노비로 전락하지 않는 농민층은 조세감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토지를 팔거나 봉건세력에 팔았으며,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마적(麻敵)이 되어 중국 복건지방이나 일본의 규슈쪽으로 해적질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중평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봉건지방유력가에겐 정경유착의 일환으로 조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하여, 그 대가로 여러가지 공물을 그들에게 받았는데, 종국에 평경성의 넓은 농토 전체가 당시 중평지방의 유력가인 평창 아씨(平倉 雅氏), 적경 구씨(的慶 龜氏), 완남 안씨(頑嵐 安氏)의 중평3문(中平三門)의 사유지로 3등분되기에 이르고, 결국 주요 재정창구였던 이 두 곳이 망하게되고, 평경성지역에서 생산되던 수많은 농산물이 중평3문의 몫이 되어버리자, 생산의욕은 저하되고 농업이 망하면서 평성대기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이 중평3문은 영본군시기가 끝나기 전 까지 만화국 전체를 휘어잡는 세 가문으로서 만화국 전체를 피폐하게 하였다. 한편, 중평3문을 제외한 나머지 영주세력들과 귀족세력들은 영본군 정부와 상대적으로 멀어지게 되면서 세력다툼에서 제외되었고, 평성대기근의 영향으로 인해 일반 평민들과 다를것 없이 재정고에 시달리게 되면서 기존의 신분제도와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3대 영본군이었던 광희군 양치홍(光熙君 洋治洪)의 시기에 와서는 신도 이외의 대부분의 지역이 행정력을 떠나 군웅할거와 도적발생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1842년, 영국의 HMS피나포어호가 경항에 불법으로 상륙하였다. 경항에 상륙한 HMS 피나포어호의 선원들은 경항 내에 있던 상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그곳에 불법으로 영국군의 초소를 세웠으며, 만화국에 강제적인 개항을 요구했다.

양씨정권은 처음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였으나, 점점 경항 주변 상권을 위협하면서 공격적으로 다가오던 영국군 측에서 이들의 무단점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14명의 상인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이에 이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HMS 피나포어호는 경항점거 12일만에 돌아갔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몇십년간의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결국 최후엔 1867년, 레이놀드 제독이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 만화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신유양침) 얼마안가 이들의 개항요구를 수용하였다.

개항이 성사되고 난 뒤 경항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만화는 새로운 문물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후부터 들어오던 수 많은 불평등 조약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고, 근본적으로 서양에 겁을 먹어 덥썩 개항 한 것을 기점으로 일반 양민들의 억눌려온 화가 크게 일어나고, 기존에 무시당해오던 몰락귀족세력들이 천제세력과 규합하여 정권세를 늘려가기 시작하자 양씨정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갔으며 이에 전국적으로 양씨정권을 타도하는 움직임이 격화되었다. 숙종 영세천제의 사망 이후, 영본군 정권의 세력약화를 어려서부터 지켜봐온 순조 화선천제는 천제에 오르고 새 조정을 꾸린 후, 영본군 정권의 약화 기세를 몰아 영본군의 천수국을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양강석 정권에 대해 '복궁'을 요구하였고, 이에 양씨정권이 응하고 양씨정권의 마지막 영본군이었던 양강석이 1873년 경세궁으로 돌아가면서 양씨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를 임신년에 하늘이 돌아왔다하여 임신천환(壬申天還)이라 부른다.

1842년의 당시 40대 중반의 나이에 신유양침의 영향을 받아 여러 신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어 꽤나 개혁적인 성격이었던 순조는 만화국의 종합적인 발전을 위하여 1875년부터 주변열강의 입헌군주체제를 본따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변국개혁'을 실시하였으며, 1881년 붕어하였다. 이후 아들이었던 무송천제는 순조의 뒤를 이어 변국을 수신자강개혁으로서 발전시켜나가고, 1881년 제 1차 이제순 경공각의가 출범하면서 입헌군주제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일련의 개항과 개혁을 통해 발전하는 듯 싶던 만화국이었으나, 어디까지 내부적인 개혁이었을 뿐 외부적으론 만화는 여전히 중국과 같은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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