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뜻|무조}} '''무조'''({{llang|zh|武祖}}, [[1368년]] [[12월]] [[6일]]~[[1416년]] [[6월]] [[23일]])는 재위기간인 1402년부터 1416년까지 [[동화]](東和)를 통치한 군주이다.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지내던 중, [[이성계]](李成桂)의 지원과 동북면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무인정사]](戊寅靖社)로 인한 [[조선]](朝鮮, 1392-1402) 지배층 사회의 혼란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임오거병]](壬午擧兵)을 일으켰다. [[청천강 전투]](淸川江戰鬪)에서 이성계가 지원한 [[가별초]](家別抄)<ref>[[이성계]]의 개인 사병으로서 역성혁명의 기반을 마련한 군사 조직이다. 동북면 고려인과 귀순했던 여진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대략 2천 명에 인원을 상시 유지했다고 한다.</ref>를 비롯해 [[올량합]](兀良哈) 등의 여진족의 도움을 받아 [[이숙번]](李叔蕃)이 이끌던 조선 중앙군을 패퇴시키고 한양에 입성하였다. 이후 [[이방원]](李芳遠)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스스로 '동화군왕'(東和君王)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ref>[[이방원]]과 [[이성계]]를 비롯한 [[전주 이씨]](全州李氏) 가문은 무조 치세 동안 세력 기반을 빼앗기고 몰락했으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종]](顯宗)의 구 왕실 복권 정책에 의해 동북면의 [[성주]](城主)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ref>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그동안 유지되고 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ref>[[고려]](高麗) 후기부터 [[조선]]까지 있었던 최고 의결 기관. 고려 초기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여러 기관의 관원이 회의에 참여하는 관청이며 정무를 아우르는 국가 기관의 역할을 행했다.</ref>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으나, [[이서]](李舒)를 크게 중용한 이후부터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인한 [[군신공치]](君臣共治)<ref>왕과 신하가 함게 나라를 다스림.</ref>를 야기하여 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ref>[[현종]](顯宗) 대에는 개국공신이라는 지위와 적장자(嫡長子)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유례없는 왕권을 휘둘렀으나, 이후 왕들은 [[세도 정치]](勢道政治)에 나선 관료들의 허수아비 노릇으로 전락하고 말았다.</ref> == 각주 == {{각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Lang (원본 보기) 틀:Llang (원본 보기) 틀:각주 (원본 보기) 틀:다른 뜻 (원본 보기) 틀:다른 뜻 설명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모듈:Langname (원본 보기) 모듈:Langname/data (원본 보기) 무조 (동화)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