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사클레치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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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클레치아 민주당'''(Democratic Party of Saculechia, DPS)는 [[사클레치아 왕국]]의 제1야당이자 사회민주주의와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상징색은 파랑색이다. 현재 [[사클레치아 국민의회]]에서는 제2당이다.

2020년 7월 11일 (토) 18:21 판

틀:어나더어스 주의

사클레치아 국민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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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국민의회 220.02 ~ 221.10
호르스트 엘벤 내각
221.09 ~ 221.10
여당

통합군주당
56석

공명연단
3석

미래신화당
1석
야당

민주당
26석

자유당
10석

무소속
3+1석
재적 100석
사클레치아 왕국의 자유주의 정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민주당 민주당
자유당
(개별 합류)
사회당
(개별 합류)
카네이션 연합 민주대안당
입헌민주당

사클레치아 민주당(Democratic Party of Saculechia, DPS)는 사클레치아 왕국의 제1야당이자 사회민주주의와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상징색은 파랑색이다. 현재 사클레치아 국민의회에서는 제2당이다.

IY 186년 6월 자유당, 사회당의 일부 당파 등 2개 정당과 카네이션 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하였으며 처음에는 율리우스 5세가 이를 불법정당으로 인식하고 해산을 시도한 바가 있었으나, 일리오스 광장에서 제1차 당대회를 열어 무려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동시에 군주당 해산과 율리우스 5세의 퇴진, 정치 탄압 중단을 촉구하였고 이에 따라 민주당원의 수는 1만명에서 3만명으로 증가하였고, 거기에 자유당이 동참하면서 더욱 거세지면서 율리우스 5세가 정치단체, 정당 설립과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정당임을 인정하였다.

19대 총선에서 12석으로 원내 진출을 시작하였고, 20대 총선에서는 자유당과 49석을 얻어 총 59석의 연립 정부로 부상한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 야당이 되었고 209년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의 돈세탁 의혹으로 물러나자 의장이 21대 의회 해산을 선언하면서 야당들은 때를 노리긴 했지만 당 내 16명의 중도좌파 성향 의원들이 민주당이 지나치게 우경화되었다며 탈당을 선언하면서 민주대안당을 창당함에 따라 진보진영에 금이 가는 듯 싶었으나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44석, 자유당이 20석으로 총 64석을 흭득하여 다시 한번 자유당과 연립여당이 된다. 그러나 민주대안당의 지지율이 자유당 지지율을 흡수하여 점점 증가하였고 지지율이 10%에 불과했던 통합군주당이 공명연단과 선거연합을 맺어 18%를 기록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민주당-자유당은 동반 하락, 결국 23대 총선에서 참패하여 제1당 자리를 내주었고 자유당은 10석이 되면서 교섭단체를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23대 총선 이후 여당 의원들의 각종 사고와 선거법 위반 등으로 인하여 매년 공석이 생기던 216년 재보궐선거부터 3년동안 자유당과 공동 압승하여 통합군주당-공명연단 연합미래신화당 연립 정권을 무력화시켰고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24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유당, 무소속 3석을 포함하여 39석을 얻으면서 참패를 당했고 동시에 UMP-KE에게 제1당 자리를 내주었다.

역사

창당

186년 1월 자유당은 율리우스 5세를 비판하기에 바쁜 상황이었고, 백성들과 자유당원들은, 자유당으로는 율리우스 6세를 비판할 힘이 없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를 대변하기 위한 정당을 만들자는 계획을 준비했고, 20명을 중심으로 창당 준비를 시작하였다. 4월이 되자, 당 명칭을 민주당으로 정하고,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원은 20명에 불과했으며, 사클레치아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지 않은 데다가, 이 상태로는 민주당 창당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던 중, 사클레치아의 진보단체인 카네이션 연합은 당사를 방문하여 카네이션 연합에 합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민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창준위는 자진 해산을 선언하였고, 카네이션 연합에 들어가게 된다. 그 중 민주당원 중 하나였던 마르쿠스 펠릭스가 카네이션 연합의 대표가 되었고 이에 대해 "과거 민주당 창준위에서 활동했을 때, 내 소원은 민주당이 의회에 입성하는 것과 사클레치아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백성이 아닌 국민이며 국민들을 해치는 율리우스 5세를 끌어내리고 국민과 함께 왕정을 이 자리에서 끝내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연설문을 발표했으며 이에 호응한 회원들은 민주정당 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이 되자, 각 진보정당 대표들은 민주당 전당대회를 7월에 열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시민단체들도 민주당 참여에 합류했는데 한편 자유당은 민주당 참여를 위해 민주계 대다수가 탈당한 상황이었고, 사회당도 당 내 갈등으로 중도파가 사회당과 결별한 상태였다. 이들은 민주당 참여를 선언하였고, 이어 입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헌민주당,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민주국민당도 이에 참여하면서 곧 합당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150여 명의 의원단을 중심으로 투표를 진행했고, 투표 결과 전원이 합당에 찬성하면서 곧바로 합당을 선언하였고, 드디어 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의 시작은 좋지 못했다.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도 율리우스 5세가 민주당을 반국가단체로 인식하여 해산을 시도했다는 점과, 당시 민주당 합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점차 우경화되면서 원외 우익정당인 국민당을 만들어 민주당 창당을 방해했다는 점 때문에 민주당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며 민주당의 첫 전당대회 장소를 수도 일리오스의 일리오스 광장으로 정하였고, 요구조건을 정당, 정치 단체 활동의 자유와 자유당 수호, 율리우스 5세 퇴진 촉구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7월, 전당대회가 시작되었다. 민주당은 시작 전 10,000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보다 많은 50,000명 이상이 참가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보인다. 이 중에는 민주사회주의자, 중도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이를 본 경찰들과 헌병들은 엄청난 인파에 경악하면서, 아예 진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곧 철수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만 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참석하기도 했었고 소규모 도시의 경우 탄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도 일리오스는 1차 당대회 뿐만 아니라 정치 탄압 반대 시위에서도 광장에는 무려 10만 명이 참가하는 등 백성들의 분노가 엄청났으며 처음부터 주장해온 율리우스 5세의 퇴진보다는 정치 활동의 자유, 자유당 탄압 중단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율리우스 5세는 자유당의 정치 활동 금지 처분을 해제했고, 정당, 정치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자유군주당 내에서는 반발이 있었지만 곧 잠잠해졌다.

19대 총선에서의 진출, 20대 총선 대약진

자유군주당과 자유당이 19대 총선을 준비하는 사이 민주당도 총선 준비에 나섰다. 민주당은 50명의 후보를 내는 대신, 주류, 비주류, 중립파를 각 20:5:20으로 나눠 분배했으며, 그 중 보수 텃밭이던 자일리온주의 모든 선거구에 비주류, 중립 후보 9명을 전략 공천했고, 경합세를 보이는 자카르파티야주에는 4개 선거구에만 주류 후보를 전략으로 공천했다. 펠릭스는 일리오스 시티 제3구에 출마하여 대규모 유세를 펼쳤다.

비록 민주당과 군주당의 극성 지지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몸싸움은 물론,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과 혐오 발언 등으로 인해 문제가 되었으나, 민주당은 조금씩 극성 지지자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군주당의 일부 의원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지지도를 조금씩 끌어올렸고, 독특한 선거운동 전략을 펼쳐 백성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이로서 어스미터에서 19대 총선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이 15.1%로 대약진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거를 일주일 앞두던 190년 4월 아침, 노르문티아주 4구에 출마했던 페르소니아 마르쿠스 후보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민주당은 범인의 배후를 공산당이나 극우정당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인 결과 극우정당인 새벽당 지지자로 확인되었다. 한편 군주당은 이 때를 노려서 막판까지 선거운동을 치렀고 지지율은 조금씩 상승하였다. 민주당은 "지금 후보자가 쓰러졌는데 꼼수로 선거운동을 벌이는 군주당은 대체 뭘 하고 있나"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한 군주당원이 타 후보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유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군주당도 위기가 일어났고, 결국 지지율이 민주당보다 3.3% 하락하였다. 19대 총선 결과, 군주당이 보수당, 공명당과 합쳐 73석을 흭득했지만 자유당과 함께 26석을 얻어 원내에 입성하였다. 펠릭스도 이 선거에서 당선되어 의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191년 3월부터 부당수를 신설하여 펠릭스계 의원인 알렉산드르 체리페츠를 부당수로 임명하였다. 그 후 올바른 방법으로 군주당의 행보와 정부를 비판하였고, 민주당의 백성 소통을 토대로 지지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자유당도 이미 특이한 방법으로 지지율이 16%까지 올라갔다. 192년 3월에는 점점 군주당을 쫒아가다가 193년 1월 여론조사에서는 31.4%로 군주당 지지율 29.8%를 넘어 추월에 성공하였다. 193년 3월 율리우스 6세가 국가시장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자유당과 민주당이 적극 반대하였고, 백성들도 이에 반대하면서 여론조사에서는 67.3%가 반대할 정도로 반대 여론이 높았다. 결국 민주당과 자유당, 그리고 기타 진보정당들은 국가시장제 폐지를 위한 단식 투쟁을 실시하였고, 도리어 일부 의원들의 삭발식까지 강행했다. 193년 6월 율리우스 6세가 이클리우스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왕궁 앞에서는 무려 10만 명의 사람들이 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6세가 돌아오자 헌병들을 동원해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쳐 총 2,659명이 부상을 당했고 5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194년 3월 세습 문제를 지적하며 부국왕 폐지와 총리 신설, 지방선거 실시, 총리 선출 방법 등을 담은 헌법 개정안을 자유당 전원과 군주당 일부 의원들과 발의하면서, 97명의 의원들이 찬성하면서 총리제 실시를 이끌어냈다. 이어 195년 5월 처음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690석을 흭득하면서 상당히 약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5년 11월 민주당은 체리페츠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부당수에서 사퇴하자 제2차 전당대회를 열었다. 주류 후보에 알렉산드르 루코프스키, 가브릴로 밀로치카, 비주류 후보에 세보치크 노비크가 출마하였으며, 여론조사에서는 루코프스키가 차기 부당수 선호도 1위로 조사되었고 그 뒤로 노비크가 2위, 밀로치카가 3위로 나타났다. 전당대회 결과 루코프스키가 69.9%, 밀로치카가 13.3%, 노비크가 17.7%로 나타나면서 루코프스키가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198년 9월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이 55.3%로 일단 20대 총선에서는 제1당이 예상된다. 199년 6월 자유당은 "만약 민주당과 100석을 흭득한다면 통합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통합론을 주장했으나 비주류계가 일부 반대하면서 묻히고 말았다. 그러던 중, 민주당과 자유당의 지지율을 합친 63.1%를 기점으로 멈추면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지만 회복과 감소를 조금씩 띄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자유군주당이 통합군주당이 된 이후에는 지지율이 69.8% vs 19.1%로 나타났고, 결국 20대 총선에서 49석을 흭득, 자유당이 10석을 얻어 총 59석의 연립 정권이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통합군주당은 31석으로 추락한 반면 원외정당이던 노동당이 3석을 얻고 범진보 무소속도 4석을 얻어 사실상 범진보는 66석, 범보수는 34석으로 그쳤다.

집권여당 기간

20대 총선은 100명의 의원 중 각 정당이 추천한 총리 후보를 뽑아 가장 많이 나온 후보가 총리가 되는 총리 선출제를 적용한 첫 선거였다. 민주당은 자유당, 노동당과 함께 같은 당 소속인 데이비드 스칼렛을 추천하였다. 스칼렛은 20대 총선에서 일리오스 1구 의원이었고, 민주당에서는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예정이었다. 그 후 스칼렛은 71:26:3으로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끝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스칼렛은 기존의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혼합 경제 체제를 채택하였고,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국에 컴퓨터 보급, 사이버 인프라, IT 산업 투자 등을 목적으로 "사이버-200"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 일리오스를 수도로 정하고 자카르파티야주의 주도 자크라티야를 제2수도로 지정, 명칭을 "자파티아"로 변경하는 "세컨드 캐피탈"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년 4월, 사이버-200 계획이 거의 진행될 쯤, 사이버부대가 250만대의 컴퓨터를 해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사클레치아 국토부는 이 사태로 인해 세컨드 캐피탈 계획을 사실상 중단했다. 201년 5월 자체 여론조사에서는 온라인에서의 조사가 불확실해지자 오프라인 조사를 한 끝에 71.1%로 나타났으며 67.5%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지만, 율리우스 6세 사후 카를 1세는 자신의 컴퓨터마저 해킹당하자 당장 주동자를 찾아내라고 명령했지만 사이버부대는 국왕의 명령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던 중, 안티해커스라 불리는 컴퓨터 백신 연구팀이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면서 사이버부대의 암호 코드마저 해독에 성공하자 사이버부대는 40일 만에 저지당했고 그동안 해킹당한 컴퓨터들도 하나둘씩 복구되었다. 이후 사이버부대는 군주당의 구 엠페로우파 세력들이 조직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정부를 무력화시키려 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면서 한 때 사이버부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그러나 세컨드 캐피탈 계획을 재개시키자 자카르파티야 시민들은 반대하였고, 급기야 대규모 반대시위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는 다른 지역들은 대부분 찬성하는 가운데 자카르파티야 지역에서만 무려 81.1%가 반대하였다. 심지어 어스미터에서도 자카르파티야 주민 95.6%가 반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세컨드 캐피탈 계획을 폐기하기로 결정하면서 자카르파티야 주민들은 환호하는 반면 일부 타 주민들은 왜 폐기하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결국 자카르파티야주의 지역주의를 촉발시켰다는 지적이 나왔다. 급기야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된다는 의견까지 나오기도 했다. 한편 군주당은 이 시점부터 자카르파티야 내 지지층을 끌어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203년 2대 지방선거까지 이어지게 된다. 203년 7월 2대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이 1,325석을 흭득한 반면 군주당은 자카르파티야의 대부분 지역에서 압승하면서, 총 969석을 얻었지만 군주당 지지율을 끌어모으는 계기가 되었고, 203년 8월 군주당의 새 원내대표에 율리우스 쿠카르키메스가 선출되자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지층을 더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이를 대항할 방법이 없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자유당도 당수의 성추행 의혹으로 물러나면서 지지율마저 추락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한편 공명연단, 군주신당 등의 보수정당들은 이를 이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꼼수를 자행했고, 이듬해 6월에는 왕궁에 테러가 일어나자 군주당을 제외한 보수정당들은 이의 책임을 민주당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슬라마교 수아르파 교인들로 밝혀지면서 보수정당의 지지율은 추락하게 되지만 군주당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205년 2월 스칼렛이 군대를 동원해 자카르파티야 주지사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음모론이 자카르파티야 주민들에 의해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타 지역까지 번졌고 스칼렛 총리 퇴진 운동이 곳곳에서 벌여졌다. 뿐만 아니라 사클레치아 국방사령부의 내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백성들이 충격에 빠졌고, 결국 민주당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21대 총선 직전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이 33%, 자유당은 7%로 하락한 반면, 군주당은 38%, 공명연단은 3%, 군주신당 1%로 상당히 약진하였다. 결국 21대 총선에서 29석을 얻으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자유당 역시 11석으로 마감하여 범진보 동맹은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1차 야당 생활

21대 총선 패배로 인해 지도부가 총사 자유당과 민주당은 결국 야당 신세가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205년 12월 전당대회를 열어 중도우파 성향의 앨리스 리너반이 선출되었고, 선거 직후 군주당 추천으로 새로 선출된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는 야당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야당과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6년 1월 민주당과 연정을 제안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면서 무산되긴 했으나, 같은 해 8월 일리오스에서 유로아스피아 전쟁 피해 유족들의 진상규명 시위가 일어나면서 과거사 청산 여론이 커졌고 민주당과 자유당 등을 야당들도 이에 합류하면서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였다. 결국 아페렌스는 과거사 청산 캠페인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민주당은 "확실히, 제대로, 투명하게 과거사 청산에 임해달라"고 밝혔다. 그 후 과거사 청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자 여론조사에서는 아페렌스의 지지율은 70.1%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9년 아페렌스의 돈세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율 하락을 겪자 민주당과 자유당 등 야당은 "과거사 청산으로 국정 운영하랬더니 백성들 몰래 부정부패 저지른다. 이건 백성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가 없다"며 아페렌스 총리를 비판하면서 퇴진 운동을 주도하였다. 심지어 군주당 지지율은 36%에서 22%로 줄었고, 아페렌스 총리 역시 지지율도 54.1%까지 떨어지면서 민주당은 48.5%, 자유당은 19.9%까지 올라가면서 야당의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10년 1월 16명의 중도좌파 성향 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했는데, 이들은 "민주당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 기득권들을 위한 우파정당이 되어 간다"며 민주당의 우경화를 비판하였다. 이후 탈당파들은 민주대안당을 창당하였고 민주당은 29석에서 13석으로 줄어들면서 교섭단체를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210년 3월 22대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대안당은 5.1%를 기록하여 가뿐하게 3%를 넘겼고 22대 총선에서의 대안정당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신뢰성을 위해 중도화를 택했으며 자유당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야권연대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5월 자유당, 노동당, 사회당과 함께 야권연대를 형성한다. 22대 총선 결과 민주당은 44석으로 제1당, 자유당이 제2당이 됐지만 원외정당이 된 노동당과 사회당을 제외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민주당-자유당 지지세가 강한 첸트루주베뢰니크주에서는 민주대안당의 녹색 돌풍에 못 이겨 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다시 여당으로

민주당은 22대 총선에서 다시 여당이 되었고, 자유당과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두번째 정권교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