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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79년 소련에 망명한 반국가단체인 자칭 '조선사회주의공화국'<ref>현 [[고려공산당 (민국 38)|고려공산당]]</ref>의 지령을 받은 간첩 일본계 교포 문세광에 의해 피습당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사회당의 명예총재(1991년 사임),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ref>2008년 9.11 테러당시 일시적으로 거국내각이 구성되었을때 김영삼, 권영길, 김종필(이상 전 총리), 홍숙자(전 대통령, 자문회의 의장)등과 함께 임명</ref>을 역임하다. 2010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 그 후 1979년 소련에 망명한 반국가단체인 자칭 '조선사회주의공화국'<ref>현 [[고려공산당 (민국 38)|고려공산당]]</ref>의 지령을 받은 간첩 일본계 교포 문세광에 의해 피습당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사회당의 명예총재(1991년 사임),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ref>2008년 9.11 테러당시 일시적으로 거국내각이 구성되었을때 김영삼, 권영길, 김종필(이상 전 총리), 홍숙자(전 대통령, 자문회의 의장)등과 함께 임명</ref>을 역임하다. 2010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 ||
집권이후 이룩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대표되는 | 집권이후 이룩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 발전 및 경제개발의 성과와 신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진흥정책과 평안북도 서해안의 석유시추 성과 등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지만 집권기간중 보인 권위주의, 독선적 행보와 강경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대소·대일공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점, 당내 정적 탄압등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 ||
== 생애 == | == 생애 == | ||
=== 유년시절 === | === 유년시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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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 == 평가 == | ||
대한민국의 제2차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그 실행 방법에 대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 |||
=== 긍정적 평가 === | |||
박정희 총리 집권기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장면 총리 시기의 5개년 계획을 발전시킨 신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한국을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로 변화시킨 것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독선적인 그의 정치방식은 비판을 받기도 하나 그런 정치운영 방식 덕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 성진제철 복구 등의 강한 추진력이 요하는 계획들을 빠르게 입안시켜 실행함으로써 현대 선진국 대한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 |||
또한 조소앙·조봉암 내각 당시에 진전되었다가 장면 내각이후 침체되었던 복지시스템에도 공을 들여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의료보험 제도가 이당시에 자리잡았는데 이 또한 당내외의 바판을 감수하고 추진한 것으로 박정희 총리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 |||
그리고 장면 내각 시기에 이루어졌던 개발은 대도시 및 거점도시에 한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박정희 내각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농촌의 초가집과 비포장도로가 없어지고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도로가 들어섰으며 제한적이지만 전기가 공급되는 등 농촌의 삶의 질은 상당히 높아졌다. | |||
국방면에 있어서도 기존 미중양국의 뒤에 숨어서 조용한 평화의 시대를 누리던 한국의 안보체계를 장준하 총리의 뒤를 이어 강화하고 국군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며 대규모의 군비증축과 자주국방 계획이 실시되었다. | |||
=== 부정적 평가 === | |||
== 비판 및 논란 == | == 비판 및 논란 == |
2022년 6월 28일 (화) 23: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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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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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9·10·11대 국무총리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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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11월 14일 |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 ||||||||||||||||||||||||||||||||||||||||||||||||||
사망 | 2010년 5월 16일 (향년 91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국무총리묘소 | |||||||||||||||||||||||||||||||||||||||||||||||||
사저 |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2동 373-5 | |||||||||||||||||||||||||||||||||||||||||||||||||
재임기간 | 제11대 국방부 장관 | |||||||||||||||||||||||||||||||||||||||||||||||||
1964년 5월 12일 ~ 1965년 8월 9일 | ||||||||||||||||||||||||||||||||||||||||||||||||||
제8대 국무총리 | ||||||||||||||||||||||||||||||||||||||||||||||||||
1967년 5월 16일 ~ 1968년 7월 13일 | ||||||||||||||||||||||||||||||||||||||||||||||||||
제9대 국무총리 | ||||||||||||||||||||||||||||||||||||||||||||||||||
1968년 7월 14일 ~ 1972년 7월 13일 | ||||||||||||||||||||||||||||||||||||||||||||||||||
제10대 국무총리 | ||||||||||||||||||||||||||||||||||||||||||||||||||
1972년 7월 14일 ~ 1976년 7월 13일 | ||||||||||||||||||||||||||||||||||||||||||||||||||
제11대 국무총리 | ||||||||||||||||||||||||||||||||||||||||||||||||||
1976년 7월 14일 ~ 1979년 11월 21일[1]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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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제10대 국방부 장관과 제8·9·10·1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역대 총리중 두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두번째로 젊은 총리[3]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국무총리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1961년 김원봉 당시 국방부 장관에 의해 사회당에 영입되었으며 이후 김원봉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좌우합작 장면내각에서 국방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2년 제6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의 텃밭이자 자신의 고향이던 경북 구미에서 당선되었으며 장준하 총리에 의해 1964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1966년에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사회당의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8년 평양 테러이후 사회당 내부에서 강경론을 주도하며[4] 유진산 총리의 사망과 지도부 부재로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한독당을 제치고 사회당의 지지율을 높이는데에 일조하였으며 이후 총선에서 사회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서 제8대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 후 1979년 소련에 망명한 반국가단체인 자칭 '조선사회주의공화국'[5]의 지령을 받은 간첩 일본계 교포 문세광에 의해 피습당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사회당의 명예총재(1991년 사임),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6]을 역임하다. 2010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집권이후 이룩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 발전 및 경제개발의 성과와 신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진흥정책과 평안북도 서해안의 석유시추 성과 등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지만 집권기간중 보인 권위주의, 독선적 행보와 강경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대소·대일공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점, 당내 정적 탄압등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생애
유년시절
청년기·군인시절
정계 입문과 국방부 장관
최장기간 재임총리
졍계 은퇴와 말년
평가
대한민국의 제2차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그 실행 방법에 대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긍정적 평가
박정희 총리 집권기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장면 총리 시기의 5개년 계획을 발전시킨 신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한국을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로 변화시킨 것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독선적인 그의 정치방식은 비판을 받기도 하나 그런 정치운영 방식 덕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 성진제철 복구 등의 강한 추진력이 요하는 계획들을 빠르게 입안시켜 실행함으로써 현대 선진국 대한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또한 조소앙·조봉암 내각 당시에 진전되었다가 장면 내각이후 침체되었던 복지시스템에도 공을 들여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의료보험 제도가 이당시에 자리잡았는데 이 또한 당내외의 바판을 감수하고 추진한 것으로 박정희 총리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리고 장면 내각 시기에 이루어졌던 개발은 대도시 및 거점도시에 한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박정희 내각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농촌의 초가집과 비포장도로가 없어지고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도로가 들어섰으며 제한적이지만 전기가 공급되는 등 농촌의 삶의 질은 상당히 높아졌다.
국방면에 있어서도 기존 미중양국의 뒤에 숨어서 조용한 평화의 시대를 누리던 한국의 안보체계를 장준하 총리의 뒤를 이어 강화하고 국군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며 대규모의 군비증축과 자주국방 계획이 실시되었다.
부정적 평가
비판 및 논란
유신정우회(舊 민주공화회, 박정희계)
여담
어록
소속 정당
선거 이력
대중메체에서
둘러보기
- ↑ 박정희 총리 피습사건으로 김종필 부총리가 권한대행 (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1월 21일)
- ↑ 직강공파 29세손, 혁거세 65세손 ◯희(熙) 항렬.
- ↑ 첫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가장 젊은 총리는 제6대 장준하 국무총리이다.
- ↑ 사회당 주류파와는 달리 측근인 김종필 당시 민의원 의원(이후 12대 총리)등과 함께 실질적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대일공 선재타격과 소련을 대상으로 한 도발등을 주장하였으며 한독당과 당내 반대파는 이를 비판하였으나 당시 총리의 사망으로 눈이 뒤집혀져 있던 국민들은 여기에 열광하며 박정희를 지지해주었다.
- ↑ 현 고려공산당
- ↑ 2008년 9.11 테러당시 일시적으로 거국내각이 구성되었을때 김영삼, 권영길, 김종필(이상 전 총리), 홍숙자(전 대통령, 자문회의 의장)등과 함께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