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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Ernst | 세계관: 크리크 & 빌레


제3차 세계 대전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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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리드 작전
제3차 세계 대전유럽 전구의 일부의 일부

비그리드 작전 최초 기획안
날짜1988년 1월 6일
장소독일 민주공화국
결과

북대서양 조약기구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프랑스 프랑스
우폴베니아 우폴베니아
이탈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동음이의) 스페인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디츠 체코슬로바키아 디츠 체코슬로바키아
노르웨이 노르웨이
덴마크 덴마크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캐나다 캐나다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동독 독일 민주공화국
폴란드 폴란드 인민공화국
헝가리 헝가리 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지휘관
우폴베니아 하인츠 클라인
(서부 집단군)
우폴베니아 게브하르트 겐트너
(동부 집단군)
우폴베니아 에르빈 베른하르트
우폴베니아 에두아르트 슈미트
우폴베니아 안드레아스 헤센
우폴베니아 펠릭스 비드
우폴베니아 슈테펜 슈미트
우폴베니아 라인하르트 클라이스트
우폴베니아 프리드리히 몰트케
미국 데이비드 에반
영국 데이비드 밀러
프랑스 리차드 이반
덴마크 에리크 요르겐센
동독 슈나이더 바텐베르크
(동부 방면군)
동독 루트비히 바그너
(서부 방면군)
소비에트 러시아 세르게이 파블로스
(폴란드 주둔군)
군대

우폴베니아 서부 집단군

우폴베니아 동부 집단군

미국 미군

영국 영국군

프랑스 프랑스군

덴마크 제28야전군

동독 동부 방면군

동독 서부 방면군

소비에트 러시아 소련 공군
폴란드 폴란드 공군
헝가리 헝가리 공군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공군
병력

우폴벤 독일:
168개 사단
포 6,592문
전차 4,851대
덴마크:
8개 사단
다국적군:
16개 사단
포 8,500문
전차 4,000대
전투기 1,200기


전체:
독일군 1,680,000명
덴마크군 80,000명
다국적군 160,000명

전체 지상군: 1,920,000명

독일 민주공화국:
72개 사단
포 14,000문
전차 16,200대
공격기 500대
소련군:
공격기 2,000기


전체:
동독군 720,000명
소련군 30,000명

전체 지상군: 750,000명
피해 규모

장비:
전차 3,800대 파괴
공격기 900기 파괴
구축함 2척 침몰


우폴벤 독일:
8,976명 사망
522명 실종
33,610명 부상
덴마크:
2,300명 사망
5,823명 부상
다국적군:
5,625명 사망
23,360명 부상

전체 사상자: 80,216명

장비:
전차 13,000대 파괴
공격기 880기 파괴
구축함 1척 침몰


독일 민주공화국:
185,600명 사망
2,280명 실종
32,120명 부상
소비에트 연방:
1,820명 사망
58명 부상
전체 사상자:
222,000명 사망
496,000명 포로

총 손실: 718,000명


각국의 군사력

우폴벤 독일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독일의 군사력입니다.

독일군(Deutschwehr)은 1976년공산 진영대규모 공격으로 파괴된 군 체계의 전반을 11년 간의 시간 동안 꾸준히 복구해 왔었다. 비록 주변 국가[주 1]에 비해 수적이거나 질적인 우위를 확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상태는 이미 1967년의 독일 군사력을 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1976년부터 전문적인 군 지식 교육을 위해 국–공립 사관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군사 교육을 확대했다.[주 2] 1977년부터는 고등 김나지움을 대상으로도 군사 교육 시설을 권장하였고 주요 김나지움 및 구 네덜란드의 중등 교육 시설군사학과 수업과 예비 군사 훈련이 의무적으로 개설되었고 군인 양성을 전문적으로 맡는 사립 김나지움 건립이 합법화되었으며 이들 고등학교에서는 실습을 위한 전차(주로 1호 주력전차 2AV형)와 총기의 소지 또한 정당화되었다.[주 3] 1987년까지 4개의 군사 연구기관, 33개의 대학원, 35개의 주요 대학 그리고 18개의 고등 김나지움이 건립되어 총 2,331,374명의 대학생도 및 대학원생이 졸업했다.[주 4] 이들 중 1,349,533명은 졸업 이후에 2년 간의 군 훈련을 완전히 마쳐 질적으로 우수한 병력이 되었다.[1] 이외에도 본래 이루어진 군사 훈련을 체계화 시켰다. 1976년 당시에서 살아남은 선임들은 사병에서 장교가 되어 군에서 꾸준히 훈련을 받았으며,[각주 1] 1977년 완전 징병제가 선언된 이후에 1987년까지 제대한 사람은 없었다.[각주 2] 2년의 군대 기본 교육이 끝나면, 거의 의무적으로 2년의 장교 과정으로 승급되고, 이 과정마저 수료하면 이외의 고등 장교 과정 또한 의무적으로 승급된다. 훈련은 더욱 세밀하고 현실성이 부여되었으며 새롭게 도입된 정치 장교(대다수 국립 정치 군사 대학 졸업자)들에 의해 강화된 사상 교육을 받았다. [2]

1976년부터 1987년에 걸쳐 독일은 파괴된 국토와 새로이 영향력 아래에 둔 지역 전체에 걸친 대규모 산업 투자를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써 안네르부르크 광역권 건설[참조 1]브뤼셀 및 그 인근의 도시에 대한 그린벨트 해제, 바이에른 지역과 보헤미아 지방, 오스트리아 동부 지방에 걸친 공업 기반 시설과 주요적인 군수 시설이 건설되고 운영되었다.[3]이러한 산업 시설은 하나의 기구가 관할하게 하여 효율적인 생산을 꾀하였는데 이를 위해 설립된 기관이 독일 공업 기술 연구 기관(Deutsch 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DITRI)이었다.[3] 또한, 그들은 공산 진영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북부 특히, 슬로바키아 북부 국경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네덜란드 해안을 따라 상륙을 제어하기 위한 요새 시설에 대한 계획을 가졌다.[4][참조 2]

독일 국방부는 1976년부터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이전 체계는 이미 종이 조각에 불과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로 구축해야 했다.[주 5] 주요 정규군은 독일 제일 전략 전술 부서(OSA)와 독일 최고 군사 사령부(OKH)의 지휘를 받았다.[5] 이 둘의 견제가 심화됨에 따라 이를 중재하기 위한 독일 정치-군사 복합 기관(DEMPO)이 1979년에 출범했으며, 그 다음 해에 독일군의 주축인 육군의 세부 체계가 세워졌다. 특히 참모 본부가 특이하게 3개로 나뉘는데 독일 제일 전략 전술 부서, 독일 지역 전략 전술 부서, 하급 참모 본부[주 6]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독일 제일 전략 전술 부서(Oberst Strategische Taktische Abteilung, OSA)는 가장 처음 수립된 참모 본부로 고위급 장교에게 열려 보수적인 역할을 하였다.[참조 3] 독일 지역 전략 전술 부서(Regionale Strategische Taktik Abteilung, RST)는 영관급 장교들로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계획안을 제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모든 기관을 중심에 육군에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독일 육군 사령부(Hauptquartier des Heeres,HQH)가 있다. 1981년도이치 국방군 사령부(Militärkommando des Deutschwehr, MKD)이 출범하여 육군 뿐 아니라 해군, 공군의 참모부를 육군 참모부에 병합시키고 그들을 전군 참모 본부로 탈바꿈 시켰고 MKD가 DEMPO의 역할을 물려받았다. 대신 DEMPO는 독일 무장 또는 비밀 경찰들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해군의 지휘체계는 대양 해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Ozean-Marine,OKOM)으로 통합되었고, 공군은 공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Luftwaffe,OKL)으로 통합되었다. 새롭게 편성된 정보군국가 첩보청(Nationaler Geheimdienst, NGH)이 총괄 지휘, 감독하게 되었다.[각주 3] 이렇게 세분화되고 잘 중재되는 군 체계를 갖춤으로써 여러 관점에서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고했으며, 긴급 상황에 따른 빠른 명령 하달을 위한 시스템의 구축으로 상황 대처 능력은 그 만큼 더 제고되었다.[6][주 7]

육군은 작전 년도인 1987년까지 24개의 야전군을 구성하였다. 이 야전군들 예하에는 총 264개의 사단과 12개의 여단이 있었다. 총 384만 여명의 병력으로 프랑스와 기타 주변국[주 8]으로부터 어느 정도 수적 우위와 질적 우위를 갖추게 되었다. 육군은 어느정도 검증된 1호 주력전차 2형(레오파르트 2호 전차)을 주력으로 삼고, 그보다 신형인 2호 주력전차(바이마라너 전차)의 프로토 타입을 합해 정수보다 적은 약 8,851대 정도의 전차를 보유하여 45개의 기갑 여단을 편제했다.[참조 4] 이들을 보조하기 위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보병 병력의 46% 정도를 기계화 시켰다. 이를 통해 기동전 능력을 확보 및 제고하였다.[7] 기본적인 군사 교리에서는 기동전과 시간은 승패를 결정짓는 매우 주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많은 분야에서 기갑 및 기동 교리를 연구한 독일에서는 이를 넘어서 군 그 자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교리는 기타 작전 부대와 함께 적의 전선 어느 한 곳에 돌파구를 뚫고 적 부대를 고립시켜 보병 부대가 고립된 적 부대를 각개 격파하는 것을 말한다. 작전은 주위의 상황과 전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경하고 일반 보병이나 (보통 기갑척탄병[주 9]이라 불리우는) 기계화차량화 보병의 지원에 의해 보완되었다. 이 또한, 자주포 운영 교리와 함께 맞물려 화력 지원 면에서 강화되었고, 전차 자체 능력 향상과 함께 대(對)미사일 전 능력을 진보시켰다.[참조 5][8][9]

공군은 전황 자체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잠재력과 그 능력을 가지며 침공 및 기동전 등 기동력이 필요한 제병합동작전에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말하자면 주요 폭격기는 적의 보급선 및 통신선을 차단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적의 산업 기반 능력을 상실시키고 전쟁 지속 능력을 파괴시킬 수 있었다. 전투기들은 이러한 폭격기를 호위하거나 아군의 침공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여러 의미로 중요한 제공권 확보에 주요적인 역할을 했다. 수송기는 긴급 강하 보급에 동원되어 아군의 보급로를 유지할 능력을 가졌다.[9] 이러한 공중전 특히, 무차별 폭격 임무에는 다수의 민간인 희생이 따랐다.[참조 6] 독일 공군은 작전 시작일 까지 브뤼셀 제1 공군사관학교, 브레멘 왕립 공군사관학교, 베를린 정예 공군사관학교[주 10], 아른헴 제1국민공군훈련소, 브뤼셀 제2국민공군훈련소와 같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조종사 다수를 마련했으며,[10] 전투기 622대(주로 MBB 람피리데 또는 Se96 제뫼베), 폭격기 286대(주로 Ma90B 슈바르츠 전략 폭격기), Sc89f 토우버 전폭기 490대, 기타 훈련정찰기 625대로 편성되었다. 당시 독일은 총 2,000대에 가까운 항공기(대다수가 신예기)를 보유하고 있었다.[7] 그러나 당시 독일군의 최고 기밀 사항이 공군의 규모와 제원, 장비 현황 등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들 중 작전에 투입된 군용기는 정찰기 20기에 지나지 않았다.[11][주 11]

해군미국영국, 프랑스와 같은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의 공업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이 시기 건조된 주력함의 절반에 달하는 함선은 미국에서 건조되었다. MFFK 계획에 따라 건조된 함선들은 독일로 인도되었다.[12][참조 7] 하지만, 작전 당시까지도 어느 주변국[주 12]보다 약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작전 기간 동안, 공산 진영 함대와 직접 마주쳐 교전을 벌이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차례의 공중전 동안 다국적군 항공모함 전대의 호위를 맞았기 때문에 적 전투기에 의해 경미한 피해만이 있었다.[11] 실제로 작전에 동원한 함선은 당시 보유 함선의 일부로 독일 해군은 1987년 시점으로 15척의 구축함과 3척의 순양함, 8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었다.[13] 이에 비해 작전에 직접 동원된 함선은 방공구축함 5척에 불과했다.[11][참조 8]

독일 민주공화국

1949년에 수립된 독일 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주 13]정부군부는 냉전의 핵심 지역으로서 여러 제약을 받았다.[주 14] 개인의 자유를 엄격히 제안하여 국가의 역(役)에 징발하였다.[주 15] 그들은 국가 산업을 증진시키는 의미에서 옛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이자 독일 산업의 근간인 루르 지역에 막대한 산업 투자를 진행했다. 1980년에 이르러서는 브라운슈바이크 작전으로 훼손된 국토의 산업력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아우토반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 대한 교통 시설과 생활 시설들이 복구되었다. 1985년에는 루르 지역의 산업−공업력은 1975년의 2배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소련 인민과 군인의 생필품으로 사용되었다.[14] 1986년 1월에 들어서는 대다수의 공장이 군수 공장으로 목적이 변경되었다. 카토비세 공세[주 16]에 동원될 군수 물자와 일본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군 능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15] 이와 더불어 실질적인 군사 훈련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이전에는 민방위 개념으로 훈련했었고, 대부분의 군사를 소비에트 연방에 의지하고 있었다.[각주 4] 1976년부터 1986년까지는 전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의 주둔군인 서 라인강 원정군이 국방을 맡았으며,[주 17] 이전의 군대는 각각 나눠져서 폴란드 주둔군서 라인강 원정군, 독일 인민방위군에 편입되었다. 이 중에서 독일 민주공화국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의 군대는 독일 인민방위군이 유일했다. 이들은 1987년 서 라인강 원정군폴란드 주둔군에 편입되어 독일 민주공화국을 벗어나자 이들 중 2개의 사단을 자국으로 편입시키는 것에 성공했다.[주 18] 1월 초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고 일부 소련군의 편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성장했으며 군대 명칭을 동독 정규군으로 개정하여 군을 재편성했다.[주 19][각주 5]

동독 정규군 육군은 수치상 1987년 1월까지 104만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약 8만 명씩 각각의 야전군으로 묶여 편제되었다.[16] 하지만, 이들의 대다수, 약 95만 명은 입대한지 1년도 안 된 신병이었고[주 20] 장비 또한 대다수 소련군이 쓰지 않는 구식 병기였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각 사단이 일부 지역(특히, 루르 공업 지대)에 치우쳐져 배치되었으며, 보병들은 기계화는 고사하고 차량화 조차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각주 5][주 21]

독일 민주공화국은 개전에 대한 관념으로 지구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소모전과 지구전으로 시간을 지체한다면 소비에트 연방의 직접적인 원조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7] 그들은 가장 먼저 장기전에 필요한 공업력의 중심지인 루르 일대에 대한 요새화를 1982년부터 시작했다. 개전 시기까지 에센부터 뒤셀도르프 일대까지 밖에 건설하지 못했지만 바이에른 접경지대에 대규모 지뢰 매설과 참호 구성, 라이프치히 외곽의 요새화(엑시투스)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크기는 프랑스 접경지대(서부방벽), 바이에른 접경지대(동부방벽), 브란덴부르크 주 일대(폰 베르크 선), 북 루르 지방(도시방벽)에 걸쳐 건설되었다.[18] 하지만, 정작 전장이 시작된 시점에는 서부와 동부 방벽을 총괄하는 제10지역군이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양 쪽 모두 허무하게 돌파되었다.[참조 9] 이외의 도시방벽은 독일군에 대해 어느정도 손실을 강요시키기는 하였으나 그 용도를 이행하지 못하였고 그 정도가 미미하여 이해타산을 따지면 명백한 손실이었다.[각주 6]

개전 당시에 동독 정규군 육군은 12개의 야전군과 예하의 58개의 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3개의 예비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은 개전 이후에 2개의 방면군으로 재편되었고 각각 동부 방면군서부 방면군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행동했다.[주 22][주 23] 58개의 사단들은 역할에 따라 6개의 기갑사단(주로, T-55를 운영하였다.), 38개의 보병사단, 6개의 지원사단, 8개의 포병사단으로 나뉘었으며 이와 더불어 2개 예비 기갑여단[참조 10], 3개의 기계화 보병 여단[참조 11], 2개의 포병 여단이 편제되었다.[7][19]

동독 정규군 공군은 현대화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대다수의 장비는 노후된 기종(주로, MiG-21)이거나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8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비행기는 500여 대였다. 그마저도 36대는 운영불가였고, 352대는 구식에 노후되어 있었다. 실질적으로 전투용으로 이용 가능한 군용기는 112대 정도였으며 이들 중 그나마 독일 전투기와 제대로 된 교전이 가능한 기종은 MiG-21 bis 전투기 32대와 MiG-23 전투기 52대가 정도였다. 훈련기도 부족하여 제대로 된 과정을 밟은 전투기 조종사는 86명 정도가 다였다.[19][각주 7][주 24]


동독 정규군 해군구축함잠수함 및 소형의 호위함, 어뢰정, 고속정만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였다. 그마저도 구축함은 3척을 넘기지 못했으며 잠수함은 5척을 보유했고 코니급 호위함 3척과 타란툴급 고속정 6척을 운영하고 있었다.[19][각주 8]수병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항구가 봉쇄되자 배를 그대로 독일군으로 이양했다. 코니급 호위함 2척과 타란툴급 고속정 2척은 무사히 이양되었으며, 구축함 2척과 타란툴급 고속정 1척은 자침되었고[주 25][참조 12] 구축함 1척과 코니급 호위함 1척, 타란툴급 고속정 3척은 이양 과정에서 소련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다행스럽게 잠수함 5척은 무사히 소련의 리가 항으로 대피했다.[11][각주 1]

개전 전 단계

이미 1976년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은 소비에트 연방의 활동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주 26] 중부 유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며 자유 진영 독일을 짓밟은 이후로 그 영향과 우려는 극심해져 갔다.[20][21] 그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독일의 정권을 통합한 에른스트 폰 하이덴베르크[주 27]는 1976년 중반에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의 주요 지역을 신(新) 독일의 이름으로 합병했다. 네덜란드벨기에의 주요 반대 정치 세력은 이미 새로이 구축한 독일 극우 단체, 우폴벤(Unvollständig Überleben, Uvolben)의 사병 집단인 슈츠겔로크(Speziell Gefolge des Ordnung, Schuzgellog)[주 28]의 지속적인 감시 아래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각주 9]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경제 부흥 정책을 펼쳤다. 3주 만에 독일 출신의 피난민과 이주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1976년 9월에 이르러서는 총선거에서 독일 출신 정당이 정치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주 29] 1976년 10월에는 즉시, 미국과 이탈리아, 스페인의 동의 하에 3국 합병을 진행했다.[각주 1] 바로 다음 달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우 독일인 단체인 디츠(Deutschland in Tschechien, DITs)가 슈츠겔로크와 함께 프라하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정권을 장악했다.[참조 13] 체코슬로바키아 군이 다음 날부터 바로 무단 정권에 대항하여 프라하[참조 14]로 진입했지만 디츠-체코 정부독일에 요청하여 슈츠겔로크와 독일군 소속의 2개의 바이에른 사단을 투입했다. 국가 분쟁을 앞둔 상황에서 미국, 프랑스, 영국이 개입하여 뮌헨 1976년 평화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독일 편을,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 편을, 영국은 기권하여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22][주 30] 회담 간에도 꾸준히 체코슬로바키아 군을 압박한 결과로 회담 결렬 1주일 만에 반군(체코슬로바키아 군)은 아사 직전에 몰렸다. 이들은 폴란드로 넘어갔는데 대다수가 수용소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각주 10][주 31][참조 15] 이로써 1976년 12월부로 (이전부터 독일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완전 병합되었다.[각주 11] 이로써 독일은 군대 재건의 발판, 나아가 국가 재건의 발판인 영토를 마련했다.[각주 1]

1977년, 최고 지도자에 오른 에른스트 폰 하이덴베르크오스트리아중부 유럽 상호방위조약[주 32][각주 12]을 체결함으로써 자유 진영의 수호에 힘쓰듯 행동했다. 2월에는 프랑스, 영국과도 상호방위조약, 국가 간 무기대여법을 체결했다.[주 33] 3월 소비에트 연방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상황을 틈타서 미국과 범 유럽 안전 조약과 무기 원조에 대한 5건의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각주 13] 또한 이러한 협상의 결과로 MFFK 계획을 진행할 타국의 조선소도 마련했다.[주 34][각주 1]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미국에 진 부채의 대부분을 탕감했다.[각주 13] 이런 여러 조약에 힘입어 독일은 군비 확장 정책을 강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선 뒤로 북대서양조약기구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upreme Headquarters Allied Powers Europe, SHAPE)에 독일 본토 탈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소심했던 영국 장교들과 프랑스 장교들의 독일에 대한 불신으로 진전되지 못했다.[참조 16] 또한, 프랑스 측은 제2차 세계 대전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독일의 이상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나아가 앞서 체결한 군사 조약의 사안을 다시 조정하며 여러 조건을 붙였다.[각주 14] 영국프랑스를 따라 일부 조항에 제한을 걸었다.[주 35] 독일은 전쟁을 위해서 큰 위협을 감당하게 되었다.[23]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각종 군사 및 군수 시설을 건설하고 배치하자 폴란드 남쪽 측면에서 올 위협을 우선 제거하기 위해 STAVKA(최고중앙지휘사령부, Stavka Verkhnono Glavnokomandovaniya, STAVKA)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을 구상할 것을 명령했다.[주 36] 이 작전이 바로 카토비세 공세(Наступление Катовиче)였다.[주 37] 작전 개요는 1982년에 완전히 만들어져서 고위 장교의 기밀로 치부되었다. 이는 일명 제로 문서(нуль документ)로 불렸다.[24][주 38] 이 작전은 1986년에 실질적으로 실행 계획에 접어들었다.[25] 이를 위해 독일 민주공화국에 주둔 중인 서 라인강 원정군의 일부를 차출하여 폴란드에 배치하기 시작했고 원정군의 장비도 하나 둘씩 폴란드로 운반되었다.[25][26][주 39] 그러던 중, 1987년 1월 3일, 도이치 국방군 정보군(NIA)는 소비에트 연방의 암호화 전신을 도청하는 것에 성공했고[주 40] 그 과정에서 카토비세 공세의 개요마저 자유 진영에 알려졌다.[참조 17] 소련군은 그런지도 모르고 꾸준히 작전을 준비하여[주 41][참조 18] 1987년 동안, 지속적으로 차출해 폴란드에 배치했던 서 라인강 원정군을 해체했고 이 소식도 독일 첩보부에 포착되었다. 이는 독일군 내의 기밀로 취급되었고 국방성 장관과 재무성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토비아스 슈뢰더에 의해 기밀이 유지되었다.[주 42][각주 15] 그는 비밀리에 폰 하이덴베르크와 일부 고위 장성(게브하르트 겐트너, 하인츠 클라인 외 2명)과 회담을 하여 이 내용을 자유 진영에 알리기로 합의했다.[각주 13] 즉시 북대서양 조약기구 채널을 통해 안트베르펜 자유진영 회담의 개최를 확정지었다.[각주 1]

안트베르펜 자유진영 회담 개최일 2일 전, 헝가리 인민 공화국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총기 사건이 생겼고 이를 구실로 소비에트 연방의 힘을 업은 헝가리 군이 부르겐란트 주를 무단 점거하자[각주 16] 이에 긴박함을 느낀 자유 진영은 회담 일정을 앞당겨서 하루 일찍 열렸다. 1987년 6월 15일에 회담이 개최되었고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독일 등 12개국의 대표가 참석했고 부르겐란트 6.14사태에 대한 해결 방안과 카토비세 공세에 대한 내용과 대응 방안을 주로 논의 했다.[27] 효과적인 대응 방안에서 서 라인강 주둔군의 해체를 들어서 독일 측면에서의 반격이 확정되었다.[각주 1] 이 과정에서 토비아스 슈뢰더프란츠 바이덴펠러[주 43]의 활약이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를 상대로 국경 면의 안보 문제로 작전 참여를 권유함으로써 프랑스와의 관계를 완화하였으며 나아가 이후 일어날 지 모르는 전쟁에서 활약할 그들의 육군을 독일 전역에서 소비하게 했다.[주 44] 이러한 선전과 선동에 덴마크, 미국, 영국, 프랑스가 군사 지원을 약속했으며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의 베일을 유지했다.[각주 15] 1987년 11월 동안, 미국에게 M-1 에이브람스 전차 4천여 대를 지원받았고 M-16 소총 8만여 필을 지원받았으며 다량의 석유도 지원받았다.[참조 19] 프랑스는 11월 20일에 도이치 정부에 8만 여명의 병력을 파견할 것을 정식적으로 통보했고 영국은 12월까지 HMS 인빈시블을 중심으로 구성된 R-6 해상 타격대HMS 아크로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R-7 해상 타격대북해 함대에 배치하겠다고 했으며 미국도 1월 중에 2개의 항모 전대가 도착할 것임을 알렸다.[23][각주 14][각주 17] 이렇게 독일의 전력이 강화되는 기간동안 소련은 일본의 도발에 대응해 아시아 전선으로 군사 병력 및 물자를 이동시켰고 그나마 유럽에 남아있는 병력도 카토비세 공세를 준비하느라 동부 폴란드에 편중되어 있었다.[25][28][주 45]

1988년 1월 4일, 독일을 포함한 자유 진영은 독일 민주공화국폴란드 인민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이를 중재하여 회담을 개최하려 했으나[29] 자유 진영은 카토비세 공세에 대한 정보를 국제 사회에 공개하며 이러한 소련의 양면적인 행보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독일카를하인츠 폰 슈타인호프는 비밀리에 소비에트 국방성 외무장관인 니콜라이 볼코프와의 회담을 개최하여 칼리닌그라드 불가침 조약을 채결했다.[각주 1][각주 13]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이번 작전에 개입하지 않게 되었고 폴란드와 헝가리, 독일 민주공화국은 큰 열세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주 46] 하지만 다음 날, 소비에트 연방은 비밀리에 독일 민주공화국폴란드 인민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각 군의 참모 및 외무장관과 만나서 군사 동맹을 견고히 했다.[각주 18][참조 20]

1988년 1월 5일 오후 8시부터 독일 민주공화국은 독자적으로 전시 징병제를 선포했고 긴급 동원령, 계엄령을 내렸다.[주 47] 에른스트 폰 하이덴베르크는 작전 개시 일을 1월 6일로 확정했고 이미 자정부터 모든 군대는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었다.[각주 13] 그 시각, 독일 민주공화국 각지에서 군사 동원되어 예비군들이 자대로 배치되었으나 작전 시작까지 동원된 예비역의 비율은 전체의 21%였다.[30][각주 1][참조 21]

전투 서열

우폴벤 독일, 독일 민주공화국의 편제는 각각 독일 전투 서열 (비그리드), 동독 전투 서열 (비그리드)을 참고하십시오.

장비 보유

진행 과정

우폴벤 독일의 계획

독일 민주공화국의 계획

제1단계 : 공중전

제2단계 : 서부에서의 침공

제3단계 : 동부에서의 침공

제4단계 : 적군 참전

희생된 시민

그 후

여담

조작된 이야기

더 보기

참조

  1. Militärkommando des Deutschwehr (1986). 《Leistungsbericht der militärischen Ausbildung für die Jugend》
  2. Militärkommando des Deutschwehr (1977). 《Regelmäßige Aktivitäten der deutschen regulären Armee stehend》
  3. 3.0 3.1 Tobias Schröder (1978). 《Wirtschaftspolitik Buch der Deutschen-Regierung in der Zwischenkriegszeit》
  4. Tobias Schröder (1981). 《Plan K für die Küstenverteidigung und Landepunkt Beschränkungen》
  5. Deutsche Agentur für Landmanagement; Tobias Schröder (1976). 《1. Fortschrittsbericht des Erklärung zur Stärkung der nationalen Macht für die nationale Erholung》
  6. Heinz Klein (1986). 《Eine kurze Meinung zu den Details des Armeehauptquartiers》
  7. 7.0 7.1 7.2 Oberst Strategische Taktische Abteilung; Gebhard Gentner (1987). 《Zentralgebiet Invasionsplan Übersicht A》
  8. Heinz Klein (1982). 《Ein kurzer Überblick über die Manöverlehre》
  9. 9.0 9.1 Friedrich von Maltke (1983). 《Über Manöverlehre》
  10. Erich von Liningen (1985). 《Bildungsleistungen der Luftwaffe》
  11. 11.0 11.1 11.2 11.3 Militärkommando des Deutschwehr; Konrad Wilhelm von Hessen (1988). 《Überprüfung und bericht des Fall H》
  12. Oberst Strategische Taktische Abteilung; Karl von Württemberg (1986). 《Kommentare zum Fortschritt des MFFK-Plans》
  13. Regionale Strategische Taktik Abteilung; Bernhard Karl König (1987). 《Bedenken über Seestreitkräfte》
  14. Ost-Rhein-Industrie-Abteilung (1987). 《Beide Aspekte der industriellen Entwicklung》
  15. Walter Begen (1986). 《Industrielle Kontakte mit der Sowjetunion》
  16. Verteidigungsagentur des Ost-Rhein (1987). 《Militärischer Organisationsbericht des Ost-Rhein》
  17. Hermann von Hannover (1986). 《Planung für eine neue Militärstrategie》
  18. Heinrich Zimmermann (1986). 《Über die nationale Befestigung》
  19. 19.0 19.1 19.2 Hubert Vogel (1987). 《Eine Studie über die aktuelle Armee A》
  20. US Secondary Government Archives; Nicholas Ziegler (1976). 《Speech by US President, 3. 5. 1976》
  21. US Secondary Government Archives; Mariano Trevion (1978). 《Speech by US Minister of Foreign Affairs, 2. 8. 1978》
  22. NATO Archives (1976).《Munich 1976 Peace Minutes》
  23. 23.0 23.1 Jean de Beauharnais (1986). 《What did the Second World War Alliance do for the Third World War? - Speech》
  24. Михаил Морозов (1986). 《Ставка Коммуникационный документ. номер.2158-3》
  25. 25.0 25.1 25.2 Михаил Морозов (1986). 《Порядок подготовки к наступлению Катовице》
  26. Михаил Морозов (1985). 《Действие против немецких выступов》
  27. NATO Archives (1987).《Antwerp First World Talks》
  28. 刘伟; 全国人民日报 (1987. 12. 25). 《来自欧洲的增援(波兰)》
  29. Сергей Павлов (1988). 《Доклад советского пацифизма в 1988 году》
  30. Hubert Eberhardt (1988). 《Bericht der Reservearmee in Ostdeutschland》

출처

각주

주해

지리 도움말

비그리드 작전 (독일)
트리어
코블렌츠
마인츠
쾰른
뒤셀도르프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아헨
뮌스터
파더보른
카셀
기센
프랑크푸르크
카를스루에
슈투트가르트
뷔르츠부르크
올덴부르크
브레멘
함부르크
플렌스부르크
렌츠부르크
뤼벡
하일브론
에르푸르크
페를레부르크
비텐베르게
울름
게라
할레
그리마
예나
나움부르크
빌레펠트
민덴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볼프스부르크
메펜
링엔
아이제나흐
노르트하우젠
로스토크
노이브란덴부르크
귀스트로
슈베린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마그데부르크
비그리드 작전 동안의 주요 지역

문서 역사

 1차 설정본 (16-09-30; Document name: The Rhine Military Campaign, 라인 강 전역) 
1989년 1월 1일 새해에 연합국은 무자비한 무력침략을 한 소련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의 유럽지역 총 사령부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항공력을 동원해 독일지역을 폭격하는 작전을 제정했다. 미국은 즉시 CVN-68 USS니미츠 함과 CVN-69 US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함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구축하여 북해에 파견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HMS 인빈시블 함과 HMS 아크로열 함을 북해에 파견하여 다각도로 항공 전력을 확보하였다. 1989년 1월 16일 해가 뜨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영국 공군사령관인 데이비드 밀러 중장의 명령이 런던의 공군기지에 하달되어 영국과 미국의 항공기가 런던에서 이륙하여 독일 북부의 대도시인 함부르크를 향해 이동했다. 런던에 배치되었던 200대 가까이 되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모두 출항하자, 에드워드 허디슨 소장은 항공모함의 함재기 이륙을 명령했다. 프랑스와 미군의 전투기는 영국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모두 출격했을 때야 비로서 이륙을 시작했다. 1500대가 넘는 전투기와 폭격기, 전폭기들이 독일 상공으로 향했고, 아침 9시 30분쯤 함부르크를 지키던 12기갑사단이 제일 처음 적들을 확인했다. 당시 레이더상으로 수 많은 표시가 들어와있었다. 독일 북부 사령관으로 부임받은 폰 하인트 준장은 곧바로 미그-29 전투기 80기를 출격시키고,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에 증원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STAVKA의 참모부는 독일과 폴란드의 전군에게 출격준비를 명하고, 대규모 공군을 출격시켰다. 모스크바에서 전투기가 출격할 때쯤, 연합국의 혼성부대는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함부르크는 북해에서 출격한 항공모함의 함재기에 쑥대밭이 되었다. 제 12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전투기의 공대지미사일에 절반이상이 피격되어 거리에서 불타거나 뒤집혀있었다. 남부로 약 450km 거리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상공에 프랑스 소속의 전투기가 나타났다. 프랑크부르크에는 제 5 보병연대가 참호를 파고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상공의 프랑스 전투기들은 대공포화에 다수가 도시외곽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런 소련군의 저항에도 프랑스군은 도시외곽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뒤따라오던 미 폭격기는 도시를 방어하던 제 5 보병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 동부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베를린 남부의 라이프치히를 지키는 주요 군을 괴멸시켰다. 그에 따른 대가도 컸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제 1 베를린 요새라 명명되어 로닌 소장이 거느리며, 방어임무를 띄고 있었다. 독일에 주둔한 군사들 중 절반이 그곳에 배치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는 그곳에 2차 폭격을 준비했다. 1차폭격이 끝난 뒤, 데이비드 에반 소장의 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함재기가 다시 라이프치히로 출격했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출격했지만, 그들은 곧 그들이 맞이할 전투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오후 1시쯤, STAVKA의 추가 병력이 라이프치히 상공에서 방공임무를 띄고 있었다. STAVKA의 스미르노프 소령은 그들이 다시 라이프치히로 올 것이라 확신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2시까지 주변을 정찰했다. 2시쯤 미국의 함재기들이 라이프치히 외곽에서 미그 전투기를 식별했고, 공중전투가 펼쳐졌다. 물론 지상에서는 소련군의 대공포가 불을 뿜었고, 절대적으로 소련군이 유리했다. 항모에서는 전투가 시작한지 10분이 돼서야 알아챘다. 데이비드 에반 소장은 퇴각을 명령했지만, 이미 미그 전투기와 소련군의 대공망에 겹겹으로 싸여 뚫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결국 미국의 함재기는 1기 조차 돌아오지 못했다. 제공권이 붉은 군대에 다시 넘어가자, 연합군 측은 3차 공습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번의 목표는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끄는 것이다.

이미 11시쯤, 서독에게 모든 지휘권과 주권을 상실한 네덜란드 군과 서독의 군대 8개 사단이 서쪽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1시간 즈음 후, 동쪽에서도 7개의 사단과 모든 권리를 상실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이 양동작전을 펼쳤다. 당시 폴란드는 대규모 기갑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합류하여, 독일로 진격한다면, 연합군의 손실은 막대해지고, 작전기간도 늘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의 3개의 사단이 폴란드 남부의 세르게이라고 명명된 요새에 양동작전을 펼쳐, 시간을 끌었다. 하인츠 대장이 이끄는 제3,10,4,5사단은 장갑사단을 이용하여 빠른 돌파를 계획했다. 진격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쯤, 장갑사단과 기계화 보병사단은 서독의 수도였던 본 외곽에 도착하여 정렬했다. 본에는 카를 중령이 제 4 보병여단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다. 하인츠 장군은 전차대대와 기계화 대대를 이용해 본을 포위한 후, 뒤늦게 따라오는 보병사단과 같이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 사실을 빠르게 알아낸 카를은 군사들을 집결하여 돌파를 시도했다. 남부에는 주요거점인 프랑크푸르트가 있었다. 카를은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카를은 하인츠가 공격 명령을 하달하기 전에 남부의 도로를 탈환하여 도시를 버리고 빠르게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하인츠는 그 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쫒아가 완전히 소멸하길 바랬으나, 북부의 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두 갈래로 나눠져야 했다. 하인츠는 북부의 도르트문트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그 동안 카를은 후퇴를 위한 양동작전을 시작했다. 제 3 보병여단을 룩셈부르크로 이동시켜 역공을 했다. 비록 가망없는 자살작전이었지만, 이 작전으로 프랑크푸르트의 요새를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하인츠는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에게 맡기고, 북부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거기서 300km 북부의 브레멘에서는 서독군이 베저강을 도하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함부르크를 포기하고, 베를린을 고수 하기위해서, 군사들을 베를린 보호지역으로 재배치하고, 폴란드의 전차군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폴란드도, 갑작스러운 남부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보며 포위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일부 대대밖에 파견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남부에서는 겐트 폰 슈테인 중장 예하 사단들은 베를린 요새에 준하는 외곽방어선인 예나지역을 격파했다. 두 개의 기갑사단의 힘은 2차 세계대전의 바로바로사의 초기 상황과도 같았다. 소련군의 독일 주둔, 기갑부대는 라이프치히 방어선으로 모두 물러난 상태였기에 앞으로의 전투가 문제였다. 하지만,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며, 남부지역은 고립되어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작전 5일만에 카를 사령관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카를이 항복하기 2일전에는 함부르크를 제 1, 9사단이 탈환했다. 이 또한, 소련군이 버린 도시기에 무혈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군이 육로로 지원을 했고, 연합국은 2차례의 폭격을 베를린에 집중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베를린 방어선을 1월 23일까지, 라이프치히-마그데부르크-노이루핀로 확장하여 유지했다. 곧 이 곳은 죽음의 벽이 되었다.

 2차 설정본 (17-11-15; Document name: Operation Vigrid, 비그리드 작전) 
비그리드 작전(독일어: Unternehmen Wigrid, 영어: Operation Vigrid) 또는, 지도자 지령 3호(영어: Leader's 3rd Order)는 도이치 정부가 독일 본토를 수복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작전으로 신화에서 마지막으로 대전쟁의 서막이라는 뜻으로 노르드 신화에서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 들판의 이름을 따왔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동독서독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유럽에 빠른 공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다. 또한, 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는 공산권 국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안보의 위기가 발생했다. 그들은 독일의 지리적 중요함을 강조했으며, 그것의 회복을 회의에서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87년 1월 3일, 독일 국가 첩보 기관(NIA)는 소련에서 동독으로 전달되는 기밀문서를 가로채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가로챈 문서는 0급 군사 문서로서 소련이 계획하던 ‘카토비세 공세’의 작전 안이었다. 그것은 동독과 소련의 군대체코슬로바키아로의 진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 내부에서 최고 기밀 사항으로 붙여졌고, 정보부 장관이자, 국방부 장관토비아스의 발표에 언뜻 언급되었다. 그는 이 자료를 살펴보고 기밀로 치부한 다음 한 연설에서 나토의 안보적 위협과 함께 동유럽의 도미노 현상에 대응해야 함을 독일의 통일로 설명했다. 특히, 그는 체코와 같은 독일과 인접한 반공 국가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행동이 진행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설로 나토의 안트베르펜 회담이 개최가 확정되었다. 독일은 그 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군사적인 국토 회복 방안을 모색했다. 독일의 지도자인 하이덴베르크 1세는 왕권이 강화된 직후 지도자 지령 1호를 발령하여,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에 작전을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전술부에서는 크게 두 가지 안이 채택되어 상위 기관으로 올라갔다. 그 중 하나는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이었고, 또 다른 안은 하인츠 클라인의 안이었다.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은 북부의 평야를 통과하여 베를린을 주요 목표로 하여 기동하여 적에게 정신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었다면, 하인츠 클라인의 안은 두 개의 방면에서 공격을 감행하여서 적에게 양면 전쟁을 강요하게하면서 베를린에 중심으로 주변부를 우선적으로 공격하여 주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와 토비아스는 후자를 채택했고, 지도자 지령 2호를 발령하여 국내의 군 장비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가자, 그쯤이 1987년 6월 15일, 안트베르펜 회담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개최되었으며, 서독은 이 회의에서 비밀스럽게 하인츠 클라인의 작전을 소개했다. 소련의 공세에 초조하던 미국은 이를 승인했고, 지원을 약속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더 나아가 항공모함 전대의 지원과 대규모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는 자국의 안보문제라는 것을 역설하며, 육군 지원을 부탁했다. 이는 덴마크에도 요청했다. 대부분은 내부 공산화가 시작되었다는 위협감과 소련의 추가 군사행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대부분의 요청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오직 8개의 병력만이 투입되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는 프랑스가 독일을 믿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이었다. 대신, 영국과 미국이 각각 2개씩의 항공모함 전대 지원이 확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의 공군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전차 지원을 약속받았다. 1987년 11월 동안, 미국에게 M-1 에이브람스 전차 4,000대를 지원받았고, M-16 소총 80,000필을 지원받았다. 또한 다량의 석유 또한 지원받았다. 프랑스는 11월 20일에 도이치 정부에 8만 여명의 병사들만 지원함을 정식적으로 통보했고, 영국은 12월까지 HMS 인빈시블을 중심으로 구성된 R-6 해상 타격대HMS 아크로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R-7 해상 타격대북해 함대에 배치했으며, 미국도 1월 중에 2개의 항모 전대가 도착할 것임을 알렸다. 이렇게 독일의 전력이 강화되는 기간 동안, 소련은 일본이 일으킨 도발에 대응하면서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 전구(1988)로 군대를 계속해서 파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소련은 동독을 지원하면서 ‘카토비세 공세’를 진행할 폴란드 주둔군의 일부를 아시아로 이전 배치했으며, 동독 군도 일부 차출하여 아시아로 파견 보내며 전력이 약화되고 분산되었다. 그럼에도 서부방벽(1988)이 독일 남부에서부터 룩셈부르크까지 국경을 따라 대부분 건설된 상태였으며, 에센뒤셀도르프 일대에도 서부 방벽 공사가 완료되어갔다. 또한, 동독의 당시 병력은 총 104만 명이었다. 독일의 NIA는 공산군의 규모가 축소됨을 알아차리고 1988년 1월 중에 작전을 시행할 것을 확정했다. 그 기점은 미국의 항모 전대의 북해 배치일로 정해졌다. 지도자는 작전의 구체화를 위해 지도자 지령 3호를 발령하여 하인츠 클라인의 안을 거의 공식적으로 ‘비그리드 작전’으로 명명했다. 또한, 정규군을 동부 집단군(비그리드)서부 집단군(비그리드)으로 나누었다. 서부 집단군의 지휘관으로 하인츠를 배정했고, 기동전의 주된 역할이 수행될 예정이었다. 그 만큼 많은 88만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부 집단군은 지휘관으로 겐트너를 배정했고, 동부 전선의 소모-전지연-전을 담당했다. 80만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은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군이 국경에 배치되자, 항공작전을 시행할 일자를 정해야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긴급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독일 자체 항공력을 공개하지 않고, 동맹의 항공력만을 이용하여 본국의 직접적인 피해를 줄이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항공 작전이 작전에 포함됨이 확정되면서, 작전 자체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그들은 폭격해야 할 곳을 정해야했고, 3차례의 회의를 통해 8개의 주요 지역을 결정하였다. 그 중 여럿은 서부 집단군이 처음으로 돌파해야하는 도르트문트부터 까지에 이르는 도시 장벽(1988)에 위치한 6개의 대도시이며, 또 다른 곳은 적의 주력이 있는 라이프치히 방어선(1988) 일대, 또한, 베를린으로 향하는 군이 지나가는 올덴베르크함부르크도 폭격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 다음 회의에서는 공군 대장 에리히 폰 라이닝겐에 건의로 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도 폭격대상에 포함되었다. 이 사안은 1987년 12월 15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군사 고위급 장성 회의에서 각 공군에게 목표가 배정되었다. 프랑스는 본국과 가까운 독일 남부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과 뷔르츠부르크를 담당하게 되었고, 영국도 본국과 가까운 도시장벽을 폭격하기로 했다. 미국은 에드워드 메튜 제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이프치히와 독일 북부의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를 맡게 되었다. 2일 뒤, 미 정보국에 의해 라이프치히가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는 영국에게 모조리 책임이 넘어갔다. 프랑스 군은 뷔르츠부르크의 폭격이 너무 멀어 공중 작전의 효율이 떨어짐을 독일에게 제시했고, 22일부터 뮌헨 공군 비행장으로 프랑스 공군의 이전 배치를 허락했다. 12월 말 쯤에 미국 해군은 각각 USS 니미츠USS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구성된 제68기습전단제69기습전단을 구성하여 북대서양을 거쳐서 북해로 파견했다. 독일 공군의 제의로 공군력이 부족함이 작전에 큰 공백이 될 수 있음이 시사되자, 미국이 파견을 결정해주었다. 이들이 작전 위치에 도착하면 그 즉시 독일 군부에 의해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그것은 1월 초일 것이며, 다수의 다국적 공군의 도움에 힘입어, 계획의 작성자인 하인츠는 승전을 확신했다. 1988년 1월 5일 21시, 미국 2개의 기습전단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자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는 작전 일자를 1월 6일로 결정짓고, 새벽 7시부터 총공세를 펼치기로 모든 동맹에 알렸고, 밤 동안 모든 독일 병사들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었고, 북해의 항공모함 4기를 지키기 위해, 북해 정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 밤 동안 동독의 초계기가 함부르크에서 북해 정찰을 시행했고, 가까스로 이를 저지하여 공해 상에서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자, 작전이 시행되었다. ‘지즈 공세(Ziz Offensive)’로 후일에 명명된 지역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차 공세동안 1,100대의 전투기가 독일 상공에서 폭격을 했으며, 영국의 R-7 해상 타격대는 60대의 전투기를 올덴베르크 일대와 브레멘 서부 방어선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고, 그 과정에서 소련 제 12군의 군 사령부가 무너지며, 고위급 인사들이 사망하고,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또한 나머지 영국 공군은 600대의 공중 병력을 투입하여 도시방벽의 도시인 에센과 뒤스부르크의 외곽지를 폭격했고, 후방의 아우토반을 제외한 도로를 파괴하고, 주둔지를 붕괴시켰다. 이 공격으로 주둔지에 있던 제 8군의 고위 장교와 상당수의 병력을 붕괴시켰다. 그 동안 프랑스는 240대의 군용기를 통해 뷔르츠부르크를 폭격하여 앞선 군과 같이 지휘체계와 보급체계를 무너뜨려 제 2군의 붕괴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대신 미국은 더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전투를 맞이했다. 160대의 전투기와 10대의 전략폭격기로 라이프치히 방어선을 폭격을 맡은 이들은 동독의 공중 전투 부대와 격돌했고, 공중전동안 8기의 전략폭격기를 잃고, 10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지상 공중 방어 체계로 접근 자체가 위험해졌다. 폭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미국은 2차 폭격을 제의했다. 미국의 제안을 승인한 다국적군 최고 사령부(1988)다국적군(1988)의 공중 전력의 절반을 라이프치히로 투입시키며, 푸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또 다른 폭격을 시행되었다. 이들 폭격은 앞선 폭격보다 준비된 군과의 대면이기 때문에 효율이 낮았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라이프치히에서만 공중전이 다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공중전에서 동독의 제 8군은 라이프치히 방어선에 건설된 방공호로 모두 숨어들어서 지상 피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2차 폭격 공세의 취지와 어긋나게 공중전이 펼쳐졌다. 450대의 동독 국적의 전투기 출격하여 그들과 교전을 벌였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다국적군이 우월했으나, 이는 동독의 지상군의 엄호가 없다는 가정이었다. 실제로는 둘 다 모두 고전을 면치못했다. 약 30분도 채 안되는 동안, 425대의 동독 전투기가 격추되었고, 다국적군도 318대의 전투기를 잃고, 92대의 전투기가 피해를 입었다. 기지로 무사히 돌아온 다국적 군의 전투기는 총 140대였고, 동독 전투기는 3대에 불과했다. 이 공중전에서 승리한 다국적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3차 폭격도 예정했다. 동독은 제공권을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즉시 동독 군부는 소련에 공중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허가했다. 폴란드러시아 일대에서 약 2,000대의 전투기를 모아 파견했고, 이 시간은 약 3시간 뒤였다. 다국적군은 2차 공세가 끝나자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아침 8시 8분 모든 독일 군은 동독의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다. 약 144만 명의 대병력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즈 공세’간에 붕괴된 군을 제외하면 72만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막아야했다. 동독의 최고 군사 사령관이었던 슈나이더 폰 바덴부르크은 전황을 파악하는데 열중하라고 명령했다. 동독은 당시 전황파악부터가 우선이었다. 동독의 전황판단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하루가 지나서 서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서야 판단이 가능했다. 하인츠는 서부 전선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또한, 독일이 덴마크바이에른과 이어지는 회랑을 개척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강조해왔다. 또한, 2개의 군을 북부로 진격하여 덴마크에 이르게 준비했다. 덴마크 또한, 진격 준비를 했다. 덴마크까지 진격할 제 1군제 9군은 2차 공세 동안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동을 실시했다. 특히 기갑부대는 12시간 동안, 아무런 피해 없이 브레멘까지 진격해 나아갔다. 보병부대는 뒤이어 오면서 붕괴된 동독 제 12군의 패잔병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가 저항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덴마크 군은 동독 제 13군과 교전을 하여 을 점령해내었다. 제 13군도 공세에 큰 피해를 입어서 덴마크 군에게 쉽게 무너졌고, 이 또한, 대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13군의 병력은 동독 제 103사단에 흡수되었다. 이 2만 여명은 함부르크에서 항전을 준비했으나, 곧 큰 피해를 입고 파괴된다. 작전이 시작된 지 20시, 함부르크가 서독에 의해 함부르크가 포위되었고, 1시간동안 항공 폭격이 시작되었다. 103사단은 도심 속에서 항전을 이었다. 약 4시간동안 덴마크 보병들과 서독의 기갑부대가 시가지로 진입했고, 그들은 의미없는 항전 이후, 모조리 사살되었다. 그 시간에도 덴마크의 기계화 보병사단은 슈베린로스토크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작전이 시작한지 32시간이 지나 덴마크 군과 합류했으며, 로스토크까지 210마일을 진격했다. 제 2군은 북부 공세를 하는 제 1군과 제 9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로 하노버까지 아무 방해 없이 진군했고, 베를린 외곽 방어선(1988), 노이루빈에서 50킬로미터 거리의 엘베 강까지 진군하였고, 페를레베르크에서 덴마크 군과 합류하면서 진군을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 도시방벽 지역에서는 대규모 포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 10군이 도시방벽의 중간부분을 타개하고 들어가서 뒤셀도르프를 점령하고, 그 북부를 내달려서 제 8군의 절반과 도르트문트에서 만나면서 에센뒤스부르크포위망에 갇혔고, 그 안의 동독 제 5군의 패잔병들도 갇혔다. 이들을 제 3군이 처리하는 동안, 제 8군과 제 10군은 계속 진군하여서 뮌스터, 빌레펠트를 거치고 괴팅겐에서 다시 만나면서 아직 멀쩡한 제 11군을 포위했고 그 즈음이 작전이 시작된 지 20시간이었다. 더 남쪽에서는 뒤셀도르프에서 나뉜 제 10군의 절반이 쾰른을 거쳐 제 4군의 기동부대와 옛 수도 외곽에서 만나 폭격으로 혼비백산한 제 4군을 가두었다. 제 4군은 지도부의 명령으로 본에 집결하여 후퇴를 준비했지만,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하인츠는 포위망에 본만 들어가면 되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여분의 제 4군의 병력을 남쪽으로 진군시켰다. 작전 시작 약 48시간 즈음 포위망 3개가 모두 섬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독 제 4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부 병력이 포위망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부대는 루트비히 바그너 부 사령관이 직접 관할하고 있는 군이었기에 투항하는 인원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포위망을 열어제치고 슈투트가르트로 후퇴했다. 남쪽으로 진군하던 제 4군과 약간의 교전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사히 탈출했다. 제 4군은 남쪽으로 진군한지 약 20시간쯤 룩셈베르크의 동독 제 3군을 제 5군과 함께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포위 전을 진행하는 동안 동독 제 3군이 제 5군을 집중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입었다. 동독으로의 침공이 시작된 지 3일째인 9일이 되자, 동독 최고 군사 사령부는 전황 판단을 끝내었다. 제공권이 마비되어서 전황 판단이 힘들었고, 모든 곳의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명령을 따리지 않았다. 2일 동안 동독은 6개의 군이 무너져 내렸고, 총 48만명의 전력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반면, 다국적 군은 항공피해를 제외하면 한 전투에서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한 번을 제외하고 발생하지 않았다. 룩셈베르크 포위전에서 약 1,6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피해는 미약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덴마크 군의 피해였다. 또한, 동독은 슈베린, 페를레부르크, 하노버까지의 영토를 잃었고, 서부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다. 독일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2일 동안 거둔 승리에 매우 감탄했다. 기습이 제대로 통한 것이었다. 사령관인 하인츠는 ‘적들이 이제 공격의 방향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동부 집단군이 할 차례다.’라는 것을 통해 겐트너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겐트너는 바이에른 동부에 배치된 제 19, 20, 21군을 움직여 동부 방벽(1988)의 모든 부분을 공격했고, 19군과 21군의 대다수는 이를 우회하여 슈투트가르트로 진격했다. 이 동시에 제 4군도 서쪽에서 슈투트가르트를 향해 오고 있었다. 9일 12시가 되자, 제 19군은 텅빈 뷔르츠부르크를 점령하고 나머지 3개의 군이 슈투트가르트를 포위했다. 슈투트가르트에는 본 포위전에서 탈출한 동독 제 4군과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제 10군이 함께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약 16만 명의 군이 모여있는 곳이였기에 겐트너와 하인츠 모두 직접적인 공격말고, 고립을 하게했다. 그 대신 안전장치로 제 10군을 프랑크푸르트에 암마인에 진주시키며 나머지 군들과 완전히 분리시켰다. 제 19군의 북부에 동독 제 1군이 압박을 가하자, 오후 5시, 제 22군이 제 1군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겐트너의 억지로 후퇴하는 제 1군과 격렬한 전투가 펼쳐졌다. 이들 북쪽으로 제 8군이 괴팅겐에서 잘레 강까지 진격하면서 동독 사령부는 남은 군대가 후퇴해야 할 지역으로 폰 방어선(비그리드)을 지칭했다. 마그데부르크라이프치히를 이은 선인 폰 방어선은 막 공사가 끝난 상태로 병사들로 채워져야했다. 후퇴한 대부분의 병력은 그 곳으로 가게되었다. 하지만, 후퇴한 병력이 별로 없었고, 라이프치히 남부의 로닌 방어선도 지켜야했기에 항상 병사들이 부족했다. 10일 새벽 5시, 동독 제 1군은 전면전에서 패배하고 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제 22군은 큰 피해를 안은 채로 예나 서부로 진격했다. 예나는 로닌 방어선(1988)을 압박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꼭 차지해야할 곳이었다. 서쪽 포위망을 맡은 병력이 전면전으로 크게 약해지자, 프랑스 파견군(1988)이 투입되었다. 또한, 제 23군이 예나의 동부와 북부에 정렬하면서 예나와 그 안의 동독 제 9군은 포위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파견군이 양단한 뒤, 23군에 의해 분해되었다. 11일 오후 2시, 예나의 제 9군과 슈투트가르트의 제 4군과 제 10군이 모두 항복하면서, 서독은 거의 목표를 완수했다. 이때 소련이 직접적으로 참전을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련은 약 2,000대의 항공기를 파견하여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이는 독일의 폴란드 공세(비그리드)에 내부 혼란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STAVKA)는 공중 작전을 수립했고, 15일에 출격을 결정했다. 이 문서 또한, 동독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NIA에 의해 탈로나면서, 다국적군도 만만의 준비를 했다. 소련의 ‘노비코프 공세’는 쾰른을 타격하는 작전이었고, 라이프치히의 상공을 지나갈 예정이었다. 다국적군은 지난 2차 공세 때, 92대의 전투기의 수리를 마치고, 총 780대의 전투기를 곧장 라이프치히로 출격할 작정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라이프치히가 다국적군의 치하여야 했다. 일단 하인츠는 로닌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라이프치히의 공중 방어시설의 대다수가 로닌 방어선에 놓여있었다. 일단 폰 방어선의 동부를 압박하던 제 15군과 17군은 로닌 방어선의 동부를 공략하게 했고, 제 8군과 10군을 라이프치히 북서부에 배치했다. 또, 피해를 복구한, 제 22군을 포함한 19에서 23군까지 모든 병력을 로닌 방어선 서부에 집중시켰다. 중간에는 제 16군이 맡아서 돌파하게 되어있었다. 방어를 맡은 적은 제 8군으로 동독의 최정예 군 8만 명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13일 먼저 제 8군과 10군은 북부에서 로닌 선의 뒤를 공격하여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폰 방어선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직후로 5개의 군이 서부에 공격을 집중하여 돌파해내고, 로닌 방어선의 절반을 무력화했다. 나머지 3개의 군이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에 제 8군과 제 10군이 후방에서 남은 방어선을 덮쳐서 붕괴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에 7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이들의 공백은 금방 채워질 예정이었지만, 독일 측에서는 작전 중 전례 없던 사상자 기록에 꽤 놀랐다. 이제 이 작전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라이프치히 공중전(1988)이다. 15일 아침 6시부터 780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라이프치히 상공을 정찰했으며, 붕괴된 로닌 방어선에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방공장비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동안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슈투트가르트 반군(비그리드)이 시가지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이 반군은 다름 아닌 항복한 제 4군의 잔병들이었다. 그들은 1만 명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지만, 충분히 방공 장비의 운송을 지체시켰다. 이들을 하인츠는 남부를 담당하던 독일 제 4군에게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5일 오후 1시, 시가지를 포위한 독일 군은 시가지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라이프치히의 상공에 적기들이 출현했다. 수적으로 다국적군이 매우 불리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었다. 약 20분 동안 그들의 폭격기를 주 목표로 작전을 진행했다. 8일 동안이 전투에서 동독의 공군 전력이 전멸했으며, 약 300대의 폭격기를 파괴했으며, 80대의 미그기또한 격추시켰으나, 다국적군도 580여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양측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남은 적들도 연료 부족으로 후퇴해야 했고, 일본 공격으로 항공기를 아시아로 옮기면서 소련의 공세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국적군의 공군이 거의 전멸되면서 제공권은 잠시 소련으로 기울었다. 8일 동안 연일 공중전이 펼쳐지는 동안에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피의 시가전(슈투트가르크)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난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생긴 잔해들과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서 독일 군을 겨냥했으며, 이들 대다수가 저격병이어서 많은 수의 병력이 이 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 4군의 사상이유 1위는 저격이었고, 2위가 지뢰였을 만큼 저격의 위력이 상당했다. 4일 동안 밤낮으로, 건물을 수색해 나아가며 결국 적들의 숨을 건물이 없어졌고, 적들은 모두 투항했다. 하인츠 원수는 1988년 2월 23일, 라이프치히 공중전의 끝으로 작전의 종료를 알렸고, 17일간의 혈투의 끝을 알렸다. 살아남은 동독의 고위 장교는 그대로 서독의 하급장교로 임명되었고, 독일 지역을 서독의 땅으로 선포했다. 소련도 제네바 UN회의에서 이를 인정했고, 다음 분쟁이 없을 것을 당부했다. 안타깝게도, 소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미 에른스트 1세는 TS에 새로운 지령을 하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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