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Wien
시청 소재지 프리드리히 슈미트 슈타츠 1, 1010 빈
상위 행정구역 오스트리아 연방주
하위 행정구역 11구
면적 414.9㎢
인구 2,450,000명
인구 밀도 5,905.0명/㎢
시장 사회당 빌헬름 슈타이겐 (재선)
시의회 사회당 69석
국민전선 38석
녹색당 11석
민주당 2석
무소속 2석
국회의원 사회당 12석
국민전선 2석
구청장 무소속 11석
상징 시수 사자
시가 빈 시민의 행진곡
시조 독수리
지역 번호 01
IATA 도시 코드 VIE
ISO 3166-2 AH VIE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SNS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이자, 제국 내에서 2번째로[1] 큰 도시이다.

상세

면적은 414.9 제곱킬로미터로 605 제곱킬로미터인 서울보다 작다. 2021년 1월 기준 인구는 240만명 가량이다. 서울 주위의 수도권처럼 주변권역까지 다 합하면 인구 350만명 정도이며, 오스트리아 연방주의 종주 도시이다.[2] 현재 오스트리아 연방주 내의 하위 행정 구역에서 단독으로 분류되어 광역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크며[3], EU에서 6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이 거쳐간 도시이기도 하고, 2차 대전 도중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소실된 독일 본토와는 달리 17세기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관광지로서 인기가 높은 도시이다. 지역의 평균 소득은 바이에른, 북유럽과 더불어 유럽 연합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런던이나 취리히처럼 물가가 비싸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도시다.

현재 시장은 사회당 소속의 빌헬름 슈타이겐이며, 도시 소득은 95,000$ 가량이다.

역사

고대 로마의 전신 기지인 빈도보나(Vindobona)가 시초이며, 12세기경 바벤베르크(Babenberg) 가문이 소유하면서 도시로 발전했다. 13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거점 도시로 수도의 기능을 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두차례에 걸친 오스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공방전에서 모두 승리한 이후 도시는 더더욱 발전하여 1600년대 중반경 도시의 인구가 10만명을 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20만명이 넘는 인구로, 신성로마제국 내 도시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이 패함에 따라 1815년 빈에서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 이후 자유주의 시대인 프란츠 1세 시기에는 도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성벽을 허물고 본격적으로 도시 확장 정책을 추구하며 여러 음악가들과 미술가, 소설가, 사상가들이 활동하던 시대가 바로 이때이다. 주요 오페라 극장과 박물관 등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 빈은 19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중 하나였다.

1918년, 1차대전 종전 이후 부상병들이 몰려들면서 도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대전에서의 승전국이었으나, 전쟁에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여 복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그 결과 1919년 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시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현재까지 쭉 빈은 좌파 정당의 우세지였다. 1930년대에는 민족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두 속에서 전국적으로 우파 정당의 일당우위정당제가 되었음에도 빈에서만큼은 좌파 사회당과 공산당의 득표율 합이 60%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빈은 빨갱이 빈(Rotes Wien)으로도 불렸다.

2차대전에서는 나치 독일군의 공습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무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단 2개월만에 오스트리아 연방주를 포기하고 트랜실베니아 산맥 너머로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에, 빈은 1944년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소련군이 빈을 해방시킬때까지 약 4년간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유대인들의 중심지였던 빈에서는 약 3만명의 유대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다시 빈을 탈환하면서 도시가 해방되었다.

1950년대 종전 이후에는 이른바 "도나우강의 기적"이라고 하여 엄청난 경제 성장을 겪었는데 그 중심에 선 도시가 빈이었다.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전쟁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관광업, 제조업 등 여러 산업을 유치하여 당시 유럽 내에서 부다페스트, 라인강 지역과 더불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여러 대학생들이 주도한 68혁명의 중심지가 되는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급속 성장이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고, 또 1988년에는 부다페스트가 급격한 성장으로 빈의 인구수를 추월했다. 그럼에도 1992년 빈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또 1998년에 개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월드컵에서도 효과적인 도시 홍보가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빈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 있는 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천의 역사

빈 행정구역 지위 변천사
게마인데 (Gemeinde, 1867)
크라이스 (Kreis, 1902)
크라이스프라이에 슈타트 (Wien Kreisfreie Stadt, 1956)
게마인데스프라이에 슈타트 (Wien Gemeindesfreie Stadt, 1968)

하위 행정구역

빈의 하위 행정구역은 총 11개로 이뤄져있으며, 다음 표는 하위 행정구역의 명단이다.

지역 번호 지역명 지역 번호 지역명
101-01 알저그룬트 (Alsergrund) 101-07 비덴 (Wieden)
101-02 요제프슈타트 (Josefstadt) 101-08 츠비셴브뤼켄 (Zwischenbrücken)
101-03 노이바우 (Neubau) 101-09 오타크링 (Ottakring)
101-04 마리아힐프 (Mariahilf) 101-10 도나우슈타트 (Donaustadt)
101-05 마르가르텐 (Margarten) 101-11 플로리츠도르프 (Floridsdorf)
101-06 파보리텐 (Favoriten)

이중 8개구는 도나우강 서쪽에 있다고 하여 베스트도나우(Westdonau)라고 하고, 2개구(플로리츠도르프, 도나우슈타트)는 도나우강 동쪽에 있어서 오스트도나우(Ostdonau)라고 한다. 츠비셴브뤼켄은 지역명답게 도나우강과 도나우 운하(Donaukanal) 사이에 있는 하중도 비슷한 지역이기 때문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며 미테스도나우(Mittesdonau)라고 한다.

각 지역은 "구"라고 불리며, 구의회를 선출할 권한을 가지며, 구의회 다수당에서 구청장을 배출한다. 그러나 구청장과 구의회의 권한은 낮으며 실질 권한은 시장과 시의회에게 있다. 하지만 잡무는 대부분 구 단위로 해결된다.

대체로 문화 시설은 오스트도나우보다는 베스트도나우에 몰려있으며, 미테스도나우가 강남처럼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거주지는 오스트도나우쪽의 집값이 훨씬 싸지만 수 자체는 베스트도나우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베스트도나우에서 거주한다. 이중 가장 집값이 비싸고 오래된 구역은 마리아힐프와 비덴 지역이다. 그러나 집값은 런던처럼 미친 수준은 아니고 교외로 나갈수록 넓으면서 싼 집들도 많다.

워낙 도시가 오래된만큼 역사가 긴 중심부는 개발이 더디고, 최근에는 교외 지역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등 전형적인 도심공동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인구 추이

연도 인구수
1673 60,000명
1710 113,800명
1793 271,800명
1840 469,400명
1869 900,998명
1890 1,430,231명
1916 2,239,000명
1930 2,005,300명
1949 1,793,054명
1967 2,009,501명
1980 2,195,930명
1993 2,300,000명
2005 2,340,000명
2012 2,393,021명
2020 2,450,000명

정치

상술했듯이 빈은 정치적으로 좌파가 늘상 우세해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진보 우세지이다. 20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원 선거에서도 비례대표에서 사회당이 49.5%, 녹색당이 24.2%를 득표, 보수 세력에게 험난한 좌파의 텃밭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2019년 빈 시의회 선거 및 시장선거에서도 사회당이 시의회에서는 122석중 69석을 차지해 단독 과반을 차지했으며, 시장 선거에서는 사회당과 녹색당이 추천한 빌헬름 슈타이겐 후보가 72.2%를 득표하며 27.8%를 득표한 국민전선 소속의 미하엘 얀 후보를 여유롭게 제쳐 재선에 성공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금융업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에서는 국민전선이 약소한 우세를 보이며, 그 외 계층에서는 거의 대부분 사회당과 녹색당이 우세하다. 20~30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유주의, 진보주의 성향이 강한 녹색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고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은 기성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지지한다. 물론 전연령대와 세대에서 사회당이 대체로 우세하기 때문에, 1974년 시의회 선거 이후 사회당은 언제나 단독과반을 유지해왔다.

2015년 이후 브렉시트와 난민 위기 등 각종 악제로 현재 유럽 선진국 내에서 기성 사민주의 정당들은 힘을 잃고 있지만, 빈 내에서만큼은 사회당이 굳건한 조직을 유지하는 바, 앞으로도 쉽사리 좌파 우위의 정치 구도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경제

빈의 1인당 GDP는 명목상 95,000$이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7번째로 높은 지역에 속한다. 전체 GDP는 2,327억 5,000만 달러이다.

이렇게 경제 수준이 높은 도시이지만 실제 물가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매우 싸며, 실질 물가의 수준은 런던의 1/2정도밖에 안될정도로 싸다. 심지어 빈에 비해 도시 규모가 작은 잘츠부르크보다도 싼 물가를 자랑한다. 이 때문에 빈은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물자가 풍족한 도시로 꼽히고 있으며,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에 꼽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살인적 물가로 유명한 스위스의 시민들은 주말에 빈에 와서 쇼핑을 하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한다.

현재 빈 시민들의 대다수는 서비스업과 사무업에 종사한다. 제조업 등 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의 비율은 5%가 채 되지 않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은 이제 빈 시내에서 찾아볼 수 없다. 빈은 사무업,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이다. 현재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금융 회사인 외스터라이히-운가리셔 나치오날 방크가 빈에 본사를 두고 있다. 또한 빈 금융 거래소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시티 오브 런던, 도쿄 금융 거래소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규모로 기록되고 있다. 때문에 브렉시트 이후 런던에 본사를 둔 여러 금융사들이 빈으로 근거지를 옮기기도 했다.

관광업 역시 성업중이다. 클래식 음악의 성지중 한곳인만큼, 매년 국제적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가옥이 잘 보존되어있어 관련 관광업 사업도 잘 되어있다.

각주

  1. 가장 큰 도시는 부다페스트이다.
  2. 그러나 주도는 아니다. 주도는 잘츠부르크.
  3. 현재 오헝제국 내에서 연방주 하위 행정구역에서 독자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이 세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