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유키무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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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0일 (토) 09:3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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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1567년 2월 14일 - 1620년 6월 3일)은 일본 센고쿠 시대의 전설적인 무장이다. 개명 전의 이름은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전국 3탄정으로 꼽히는 다케다 신겐의 참모, 사나다 유키타카의 손자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아들이다. 사나다 노부유키(眞田信之)의 동생이며, 아들로 유키마사(幸昌), 타다유키(忠幸) 등이 있다.

대중에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10년부터의 행적이 주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 시대 이래, 전설과 소설 등에서 사루토비 사스케(猿飛佐助), 기리가쿠레 사이조(霧隠才蔵)를 위시한 사나다 10용사를 이끌고 대적 도쿠가와에게 대항하는 천재 군사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미지로, 오사카의 진의 행적이 크게 부각되어 알려져 있다.

생애

다케다 가신 시절

에이로쿠(永禄) 10년(1567년), 시나노 국의 유력 호족인 사나다 마사유키(당시 이름은 무토 기헤에(武藤喜兵衛))와 정실 야마노테도노(山手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덴쇼(天正) 3년(1575년), 사나다 가문(真田氏)의 주군으로 가이・시나노를 다스리는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오다(織田)・도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때 부친 마사유키의 두 형이 전사함에 따라,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을 잇게 되어 유키무라는 마사유키를 따라 고후추(古府中, 현재의 고후 시)를 떠나 코즈케의 이와비츠 성(岩櫃城)으로 가게 된다.

덴쇼 10년(1582년) 3월 11일, 오다・도쿠가와・호조(北条) 연합군이 일제히 카이로 침공함에 따라, 사나다 마사유키는 주군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신푸 성을 나와 사나다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와비츠 성으로 갈 것을 진언하였으나, 결국 카츠요리는 오야마다 가문의 이와도노 성 행을 택하였고, 성주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배반하여 오다 군으로 투항함에 따라, 다케다 가문(武田氏)이 멸문하고 당주 카츠요리는 할복한다. 다케다 가문의 멸망 이후 사나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귀순하여 같은 해 3월 19일, 오다 중신으로 간토 간레이(関東管領, 간토관령)로 파견된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에 의해 다케다 가문의 영지 분할이 이루어졌을 때, 사나다 가는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나다가 투항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에 머무르던 오다 노부나가를 불시에 습격,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고 혼노지의 노부나가와 니죠 성의 적남 노부타다가 모두 할복함으로써 오다는 멸망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오다가 일순간에 사라지자 다케다 가의 세력권에 있던 카이와 시나노는 다시금 공백상태에 놓여지고 이 때를 노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 간토의 호조 우지나오는 일제히 구 다케다 영지로 진군한다. 이를 일컬어 덴쇼 임오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때 호조에 복속하였다가, 그를 배신하고 도쿠가와에 들어갔으나 도쿠가와는 호조와의 동맹을 맺으면서 사나다 가문이 차지하던 코즈케의 이와비츠 성, 누마타 성을 양도하도록 한다. 이에 마사유키는 우에스기에 복속하면서 차남인 유키무라를 인질로 보낸다.

에치고 성에서 인질로 생활하던 시절엔 제법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키무라의 측근이던 야자와 산쥬로 요리유키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겐지로 님은 에치고의 생활에 제법 잘 적응하시고 있다. 허나 요즘 부쩍 말수가 줄어드셨다는 느낌이 든다. 겐자부로[1]님과 생각이 비슷해지고 있으시는지, 주군[2]이 상전을 자주 바꾸시는 것에 대해서 내 생각을 물어보시곤 한다.

 
— <산쥬로 일기>에서

이 즈음, 유키무라는 마사유키의 주군편력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 즈음의 유키무라는 어려운 자는 마땅히 돕고, 강한 자에 대해선 마땅히 맞선다라는 우에스기 가문의 가풍과 올곧기로 이름났던 카게카츠의 인품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에스기 가문 전기>에서 보듯이 카게카츠 또한 유키무라를 크게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에치고에서의 생활은 유키무라의 성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오사카 진에서 그의 성품은 널리 알려진다. 한편 마사유키는 일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속하던 때 우에스기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시나노 우에다(上田)에 도쿠가와 군의 재정으로 이용해 성을 쌓았었는데, 마사유키가 배신한 이후 이에야스는 지속적으로 우에다 성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마사유키가 이후 우에다 성을 반환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격분, 우에다 성으로 진격하는데, 이를 제1차 우에다 성 전투라고 한다. 이때 사나다 가문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지자 유키무라는 우에스기에 우에다 성으로의 출진을 요청,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우에다 성에 병력을 출진하는 대신 유키무라의 귀환을 허락함으로써 우에스기의 손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유키무라는 우에다 성으로 복귀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이때 유키무라는 적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고, 3만의 병력으로 밀어닥친 도쿠가와군은 사나다 마사유키의 계략에 말려 대패, 2천 명의 사나다군을 상대로 8천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퇴각한다.

이후 에치고로 다시 돌아온 유키무라는 총무사령을 선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뒤이어 우에스기 본진에는 도요토미의 상락 요구문이 당도한다. 에치고에 문서가 이를 무렵에 서신을 받은 사나다 마사유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상락을 진언하고, 나오에 카네츠구 등 가문 중신들의 일치된 진언에 의하여 우에스기 가는 오사카에 방문, 도요토미에 상락한다.

오사카 체류 시절

오사카로 상락한 우에스기 일행은 약 2주간 오사카에 머무르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한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상락이 늦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으며 히데요시에 의해 시나노, 카이를 비롯한 영지를 도쿠가와에 할양하게 된다. 사나다 가문이 히데요시에 의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재편성되자,

오사카의 진

나카토사 대합전

다시 우에다로

여담

각주

  1. 형인 노부유키를 의미한다
  2. 마사유키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