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야마 저택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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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야마 저택 전투''' ({{llang|ja|篠山 邸宅の戦い, <small>시노야마 테이타쿠 노 타타카이</small>}})는 1969년, [[야에야마]] [[규자키국]](宮崎国)<ref>본래 한자 명칭은 '九崎'였으나 [[덴케이 혁명]]에 규자키 출신의 [[막신]]들이 대거 참여한 공로로 '宮'(きゅう)이 하사되었으며 이후로도 발음 표기는 변경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f>의 [[시노야마 시]](篠山市)에 위치한 저택에서 [[군주정|군주제]]를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의거한 국제 혁명을 지지하던 학생운동조직, [[붉은 바람]](赤い風)이 저택을 점거하면서 일으킨 사건이다.
'''시노야마 저택 전투''' ({{llang|ja|篠山 邸宅の戦い, <small>시노야마 테이타쿠 노 타타카이</small>}})는 1969년, [[야에야마]] [[규자키국]](宮崎国)<ref>본래 한자 명칭은 '九崎'였으나 [[덴케이 혁명]]에 규자키 출신의 [[막신]]들이 대거 참여한 공로로 황실의 거주지나 인근 지명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宮'을 지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시작이다. 때때로 '미야자키'라고도 불리나 같은 발음으로 불리는 [[미야자키 시]](宮座木市)가 있기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규자키'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ref>의 [[시노야마 시]](篠山市)에 위치한 저택에서 [[군주정|군주제]]를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의거한 국제 혁명을 지지하던 학생운동조직, [[붉은 바람]](赤い風)이 저택을 점거하면서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8 혁명]](Mai 68)에 흐름에 동조하던 학생 중심의 저항 운동은 붕괴되고 [[야에야마]]에서 왕성히 활성하던 극좌 세력의 와해를 초래하는 등 야에야먀에서 진보 세력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68 혁명]](Mai 68)에 흐름에 동조하던 학생 중심의 저항 운동은 붕괴되고 [[야에야마]]에서 왕성히 활성하던 극좌 세력의 와해를 초래하는 등 야에야먀에서 진보 세력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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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한 뒤, 인터넷 상 (특히 [[Kch]])에서는 이 사건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서 비롯하여 [[시노야마 시]]를 '''죽음의 산'''(死の山)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나, [[시노야마 시]]에서는 해당 멸칭에 대해 엄격히 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내놓고 있는 중.
사건이 발생한 뒤, 인터넷 상 (특히 [[Kch]])에서는 이 사건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서 비롯하여 [[시노야마 시]]를 '''죽음의 산'''(死の山)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나, [[시노야마 시]]에서는 해당 멸칭에 대해 엄격히 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내놓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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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야에야마]]
[[분류:야에야마]]

2018년 6월 24일 (일) 15: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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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야마 저택 전투
(일본어: 篠山 邸宅の戦い)
저택을 급습하는 경찰들의 모습
사건 정보
참가세력 붉은 바람 붉은 바람
야에야마 야에야마 경찰청
장소 야에야마 야에야마 규자키국 시노야마 시
날짜 1969년 9월 11일 ~ 17일
사망자 경찰관 3명
민간인 5명
부상자 경찰관 11명
민간인 15명
보도관계자 2명
결과 - 붉은 바람 조직원 7명 체포
- 인질 3명 구출

시노야마 저택 전투 (일본어: 篠山 邸宅の戦い, 시노야마 테이타쿠 노 타타카이)는 1969년, 야에야마 규자키국(宮崎国)[1]시노야마 시(篠山市)에 위치한 저택에서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의거한 국제 혁명을 지지하던 학생운동조직, 붉은 바람(赤い風)이 저택을 점거하면서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8 혁명(Mai 68)에 흐름에 동조하던 학생 중심의 저항 운동은 붕괴되고 야에야마에서 왕성히 활성하던 극좌 세력의 와해를 초래하는 등 야에야먀에서 진보 세력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여담

전투가 벌어진 해당 저택은 수리 후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 후 약 수 년 동안은 전투 현장의 치열함을 눈으로 보려 하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뤘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잊혀지게 되었지만 건물은 아직도 당시 전투 현장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운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외관이 깨끗한 것을 보아서는 관리가 계속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로 개인의 총기 소지를 허락하던 규자키국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지역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지역 의회를 거쳐 총기소지를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인해 현재까지 규자키국은 야에야마에서 유일한 총기 소지를 규제하는 쿠니(国)가 되었으며, 외부 지역에서 총기 반입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유일한 총기 규제 지역이라는 점에서 인터넷 상에서는 야에야마에서 총기 관련 사고나 사건이 발생하면 규자키는 오늘도 1승(宮崎は今日も1勝) 드립이 유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미국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이 드립은 흥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에 있다. 이번 가와타바 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Kch에서는 규자키 드립으로 전 게시판이 도배되었다고 한다. 규자키의 선견지명은 도대체...

사건이 발생한 뒤, 인터넷 상 (특히 Kch)에서는 이 사건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에서 비롯하여 시노야마 시죽음의 산(死の山)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나, 시노야마 시에서는 해당 멸칭에 대해 엄격히 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내놓고 있는 중.

각주

  1. 본래 한자 명칭은 '九崎'였으나 덴케이 혁명에 규자키 출신의 막신들이 대거 참여한 공로로 황실의 거주지나 인근 지명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宮'을 지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시작이다. 때때로 '미야자키'라고도 불리나 같은 발음으로 불리는 미야자키 시(宮座木市)가 있기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규자키'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