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시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 펼치기 · 접기 ]

일본국 제46대 내각총리대신
시데하라 기주로
幣原 喜重郎 | Shidehara Kijuro
출생
1872년 8월 11일(1872-08-11)
일본 오사카부 맛타군 가도마이치반촌
사망
1951년 3월 10일 (78세)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재임기간
제46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08월 17일 ~ 1948년 06월 30일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내 시데하라 마사코
학력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지역구
오사카 3구
의원 선수
2 (중의원)
의원 대수
22, 23
소속 정당
무소속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외무성 관료

시데하라 기주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일본의 제46대 내각총리대신이다. 1945년 종전조서 이후 1950년 도쿄 선언 이전의 기간인 공정기(空政期)의 정치적 혼란을 막고, 현재 일본의 기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1945년 8월 연합군 사령부의 추천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총리에 내정되었다. 이후 인간선언과 신헌법 작성에 몰두하였으며, 1946년과 1947년 두 번의 중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헌법이 비준된 1946년 말과 시행된 1947년 5월이 지나며 그에게 쏟아졌던 연합군 사령부의 찬사는 점점 거둬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제2제국이 아직도 동남아에서 연합군을 들쑤시고 있었고, 이러한 원인에는 일본 제국이 오가사와라 해전 이후 수 백 척의 함정 통제권을 일부러 방기해 연합함대 반란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일본 정부는 전쟁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군과 정부의 책임소재를 분리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6월 이러한 내용이 담긴 시데하라 문건이 미군에 발각되자 연합군 사령부는 시데하라를 해임, 중의원에서 요시다 시게루를 총리로 올리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미군에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으나 요시다 총리는 시데하라를 계속해서 기용, 시데하라의 중의원의 임기가 끝나는 1949년 초까지 외무대신으로 일할 수 있었다. 결국 시데하라는 1945년부터 1949년 1월까지 외교정책을 책임지며 일본의 전후외교의 기틀을 만들었다.

일본의 전쟁책임의 경감, 일본 제2제국의 방기, 세계적 추세에의 동조라는 3원칙은 공정기의 외교대원칙이되어 1951년 완전히 태평양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물론 이후에도 일본 제2제국의 잔당들이 해적이 되어 태평양의 바다를 위협할 때도 이러한 원칙은 계속해서 살아남아 일본은 해적 문제에 대해 무조건 방기라는 대응을 보이고 있다.

그의 눈부신 외교성과에도 그는 자신의 외교성과의 산물인 도쿄 선언을 본지 불과 7개월만인 1951년 3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