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리에 테루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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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에 테루야'''({{llang|ja|東江照屋}}, [[1829년]] [[6월]] [[7일]] ~ [[1904년]] [[7월]] [[11일]])는 [[야에야마]](八重山)의 [[다케토미 막부|신막부 시대]](新幕府時代)와 [[덴케이 시대]](天慶時代), [[다이켄 시대]](大建時代) 초반에 활동했던 정치인으로서, 1870년대부터 활발했던 [[입헌민권운동]](立憲民權運動)의 중심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정당 정치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근대 초기에 야에야마에서 [[의원내각제|서구식 정당정치]]를 도입하려 노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아가리에 테루야'''({{llang|ja|東江照屋}}, [[1829년]] [[6월]] [[7일]] ~ [[1904년]] [[7월]] [[11일]])는 [[야에야마]](八重山)의 [[다케토미 막부|신막부 시대]](新幕府時代)와 [[덴케이 시대]](天慶時代), [[다이켄 시대]](大建時代) 초반에 활동했던 정치인으로서, 1870년대부터 활발했던 [[입헌민권운동]](立憲民權運動)의 중심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정당 정치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근대 초기에 야에야마에서 [[의원내각제|서구식 정당정치]]를 도입하려 노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 [[아시아주의]]를 신봉했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조선]]의 팔중시찰단 파견==
==[[조선]]의 팔중시찰단 파견==
1880년대부터 [[조선]](朝鮮)은 [[김홍집]](金弘集)을 주도로 했던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제국]](日本帝國)에 파견하는 등 주기적인 외래 문물 수용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때 조선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던 [[야에야마]]의 외무관, [[야마시타 간조]](山下莞徐)가 당시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 정부가 문물 시찰을 위한 시찰단을 다시끔 편성해 야에야마에 파견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이에 아가리에 총리는 혼쾌히 응답한 뒤, 당시 [[다이켄 덴테]](大建天帝)에게 해당 소식을 전달하고 윤허를 받았다.
1880년대부터 [[조선]](朝鮮)은 [[김홍집]](金弘集)을 주도로 했던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제국]](日本帝國)에 파견하는 등 주기적인 외래 문물 수용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때 조선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던 [[야에야마]]의 외무관, [[야마시타 간조]](山下莞徐)가 당시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 정부가 문물 시찰을 위한 시찰단을 다시끔 편성해 야에야마에 파견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이에 아가리에 총리는 혼쾌히 응답한 뒤, 당시 [[다이켄 덴테]](大建天帝)에게 해당 소식을 전달하고 윤허를 받았다.


아가리에 총리는 [[아시아주의자]]로서 [[일본]], [[청]], [[조선]]과 함께 야에야마의 사국(四國)이 동양의 근대적 발전의 협력하고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신봉해는데, 그의 뜻대로 [[일본제국]]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매수하여 친일파로 변절시켰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의 근대화를 돕기 위한 심산으로 시찰단에 대한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조선의 개화에 대한 암담하고 차가운 시선과 쇄국적인 태도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고 하며, 팔중시찰단이 찾아 온 후에 자신의 저서인 '동방평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한다.
아가리에 총리는 [[아시아주의자]]로서 [[일본]], [[청]], [[조선]]과 함께 야에야마의 사국(四國)이 동양의 근대적 발전의 협력하고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신봉해는데, 그의 뜻대로 [[일본제국]]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매수하여 친일파로 변절시켰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의 근대화를 돕기 위한 심산으로 시찰단에 대한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조선의 개화에 대한 암담하고 차가운 시선과 쇄국적인 태도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고 하며, 팔중시찰단이 찾아 온 후에 자신의 저서인 '동방평화론'에서는 "조선은 [[갑신정변|이전 혁명]]에서의 실패를 딛고 다시 계몽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국가"라며 일본의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말년에 [[조선]]에 대한 강도 높은 막말과 비난을 했던 것과는 대비되듯, 동양의 국가들의 근대적 발전에 대한 노력을 통해 계몽국가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인용문|동양(東洋)의 예(禮)를 다하는 곳([[조선]])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했더니 문물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높아 크게 놀랐다. 이전에 [[갑신정변|혁명의 실패]]를 두고 이에 나는 몹시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문물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이 있어 조선은 곧장 [[일본|동국]](東國)과 [[야에야마|남국]](南國)을 본받아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아가리에 테루야 《東方平和論》}} 민중경멸론자이자 제국주의자로 평가받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중국과 조선을 야만국으로 치부한 것과는 다르게 조선과 중국의 근대적 발전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렸다는 점에서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상적 평가==
대체로 [[야에야마인]]들은 아가리에 테루야를 근대시기의 정치인이자 위인으로서 가볍게 여기며, 근대 정치 및 역사학에서나 다뤄질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나, 그의 저서였던 '동방평화론'(東方平和論)은 당대 [[아시아주의]]가 변질되기 이전의 본질적 의미와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높은 가치를 지녔을 만큼, 그의 아시아주의적 사상과 [[흥아론]](興亞論)은 현재까지도 근대 사상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의 반성과 동양의 연대에 대해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동방평화론'은 대체적으로 [[안중근]](安重根)의 '동양평화론'함께 팔한중일(八韓中日)의 사국의 공동연대를 통한 일종의 [[유럽연합]](EU)의 형태를 강조하였다. 그외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국인 [[일본]]에 대해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다."고 했던 것에 반해 아가리에는 [[야에야마]]에 대해 "정부와 민중의 역사는 공존해 왔으며, 이는 현재도 유효하다."고 발언했는데, 근대를 맞아들인 [[야에야마]]에서 [[입헌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사상을 펼쳤던 그에게 있어서 정권과 정책은 민중의 요구와 움직임에 바뀐다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분류:야에야마]]
[[분류:야에야마]]

2018년 7월 4일 (수) 01:56 판

아가리에 테루야
東江照屋
야에야마제9대 연방총리대신
임기 1887년 1월 21일 ~ 1889년 3월 26일
전임: 모리모토 다카시(제8대)
후임: 세키 마사마에(제10대)

신상정보
국적 야에야마 야에야마
출생일 1829년 6월 7일(1829-06-07)
출생지 야에야마 야에야마 미야기 번 츠난 현
사망일 1904년 7월 11일 (75세)
사망지 야에야마 야에야마 규자키 국 미난 시

아가리에 테루야(일본어: 東江照屋, 1829년 6월 7일 ~ 1904년 7월 11일)는 야에야마(八重山)의 신막부 시대(新幕府時代)와 덴케이 시대(天慶時代), 다이켄 시대(大建時代) 초반에 활동했던 정치인으로서, 1870년대부터 활발했던 입헌민권운동(立憲民權運動)의 중심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정당 정치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근대 초기에 야에야마에서 서구식 정당정치를 도입하려 노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 아시아주의를 신봉했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조선의 팔중시찰단 파견

1880년대부터 조선(朝鮮)은 김홍집(金弘集)을 주도로 했던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제국(日本帝國)에 파견하는 등 주기적인 외래 문물 수용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때 조선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던 야에야마의 외무관, 야마시타 간조(山下莞徐)가 당시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 정부가 문물 시찰을 위한 시찰단을 다시끔 편성해 야에야마에 파견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이에 아가리에 총리는 혼쾌히 응답한 뒤, 당시 다이켄 덴테(大建天帝)에게 해당 소식을 전달하고 윤허를 받았다.

아가리에 총리는 아시아주의자로서 일본, , 조선과 함께 야에야마의 사국(四國)이 동양의 근대적 발전의 협력하고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신봉해는데, 그의 뜻대로 일본제국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매수하여 친일파로 변절시켰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의 근대화를 돕기 위한 심산으로 시찰단에 대한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조선의 개화에 대한 암담하고 차가운 시선과 쇄국적인 태도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고 하며, 팔중시찰단이 찾아 온 후에 자신의 저서인 '동방평화론'에서는 "조선은 이전 혁명에서의 실패를 딛고 다시 계몽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국가"라며 일본의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말년에 조선에 대한 강도 높은 막말과 비난을 했던 것과는 대비되듯, 동양의 국가들의 근대적 발전에 대한 노력을 통해 계몽국가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상적 평가

대체로 야에야마인들은 아가리에 테루야를 근대시기의 정치인이자 위인으로서 가볍게 여기며, 근대 정치 및 역사학에서나 다뤄질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나, 그의 저서였던 '동방평화론'(東方平和論)은 당대 아시아주의가 변질되기 이전의 본질적 의미와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높은 가치를 지녔을 만큼, 그의 아시아주의적 사상과 흥아론(興亞論)은 현재까지도 근대 사상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의 반성과 동양의 연대에 대해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동방평화론'은 대체적으로 안중근(安重根)의 '동양평화론'과 함께 팔한중일(八韓中日)의 사국의 공동연대를 통한 일종의 유럽연합(EU)의 형태를 강조하였다. 그외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국인 일본에 대해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다."고 했던 것에 반해 아가리에는 야에야마에 대해 "정부와 민중의 역사는 공존해 왔으며, 이는 현재도 유효하다."고 발언했는데, 근대를 맞아들인 야에야마에서 입헌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사상을 펼쳤던 그에게 있어서 정권과 정책은 민중의 요구와 움직임에 바뀐다라고 확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