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브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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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왕국
دەوڵەتی ئەییووبی
السلطنة الأيُّوبيَّة
Ayyubid Kingdom
국기 국장
국가 왕을 찬양하라
수도 다마스쿠스 북위 33° 30′ 47″ 동경 36° 17′ 31″ / 북위 33.513056° 동경 36.291944° / 33.513056; 36.291944
정치
공용어 아랍어, 쿠르드어
술탄 유수프 5세
총리 알 무함마드 이븐 아사드
역사
성립 쿠르드 독립 전쟁의 승리
 • 살라딘의 왕조 건설 1171년
 • 사파딘의 왕조 통합 1200년 2월 17일
 •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453년 5월 29일
 • 쿠르드 독립 전쟁 1919년 5월 19일 ~
1923년 7월 24일
 • 앙카라 조약 1923년 10월 9일
지리
면적 651,767km2 (43 위)
시간대 AST (UTC+3)
DST ADT (UTC+4)
인구
2018년 조사 64,395,431명 (23위)
인구 밀도 98.8명/km2 (78위)
경제
GDP(PPP) 2018년 어림값
 • 전체 31,821억$ (9위)
 • 일인당 49,416$ (23위)
HDI 0.836 (46위, 2018년 조사)
통화 디나르 (AYD)
기타
ISO 3166-1 042, AYB, AY
도메인 .ay
국제 전화 +961

아이유브 왕국(아랍어: السلطنة الأيُّوبيَّة 알 술타나 알 아이유비이야[*], 언어 오류(ku): دەوڵەتی ئەییووبی 듈레타 에유비이안), 약칭 아이유브(아랍어: الأيوبيون 알 아이유비이윤[*], 언어 오류(ku): ئەیووبی 에유비이안)는 중동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이다. 영토 면적은 651,767km²로,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쿠르디스탄, 동쪽으로는 이란, 남서쪽으로는 예루살렘, 남쪽으로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다마스쿠스이며, 주요 도시로는 바그다드, 쿠웨이트베이루트 등이 있다. 쿠르드인아랍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 지역에 80%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공용어로 아랍어쿠르드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며, 소수의 기독교도와 유대교 신자가 있다. 아이유브 왕국은 대표적인 산유국 중 하나다. 국가 생산의 절반 이상이 석유 수출에 해당하지만, 관광, 제조, 서비스 산업과 농업도 석유 산업에 못지않게 발달해있다.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 세계 9위의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역사

아이유브 왕국의 성립

아이유브 왕국은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 아디드의 사망 후,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성립되었다. 1164년 장기 왕조의 누르 앗딘이 이집트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십자군을 막고자 살라딘의 삼촌인 시르쿠를 파견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을 자신 휘하의 원정군 장교로 입대시켰다. 시르쿠와 살라딘의 원정군은 성공적으로 이집트의 재상인 디르감을 몰아냈고 전임자였던 샤와르를 복권시켰다. 다시 정권을 잡은 샤와르는 시르쿠에게 이집트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자신이 남아있는 것은 누르 앗딘의 지시라며 거절했다. 이후 수 년 동안 시르쿠와 살라딘은 빌바이스, 기자, 알렉산드리아, 하이집트에서 십자군과 샤와르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1169년 샤와르가 죽고 시르쿠가 차기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지만 시르쿠 역시 그 해 말에 사망했다.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 아디드에 의해 이집트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중세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티드는 알 아디드가 살라딘을 다음 재상으로 임명한 이유는 살라딘보다 약하거나 어린 사람이 없었고 어떤 에미르도 그에게 복종하거나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집트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한 누르 앗딘은 살라딘의 형인 투란샤를 통해 살라딘을 감시하며 아이유브 가문 내부의 불화를 유발하고 살라딘의 이집트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의 조언에 따라 명목상 주군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충돌을 피했다.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의 주도로 약 5만명 규모의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카이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집트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했다. 살라딘은 고위 관직에 가문원들을 임명했으며 수니파 이슬람 율법 학교인 말리키와 샤피 학교를 위해 대학을 세워 시아파가 지배적이었던 카이로에서 수니파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1171년 칼리프 알 아디드가 사망하자 이집트를 완전히 장악한 살라딘은 멸망한 파티마 왕조가 아닌 수니파 이슬람 칼리프였던 압바스 왕조에 충성했다. 1173년 살라딘은 헤자즈와 예멘을 정복하고자 형인 투란샤를 출정시켰고 투란샤는 2년만인 1175년, 예멘을 완전히 정복했다. 홍해를 지배하게된 아이유브 왕국은 홍해 무역로에서 발생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고 덕분에 이집트의 패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명목상으로 여전히 누르 앗딘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점점 더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러던 1174년, 누르 앗딘이 죽은 후 살라딘은 완전히 독립했다. 그 후 살라딘은 장기 왕조의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고, 11월 23일 다마스쿠스의 총독에게 환영받으며 무혈 입성했다. 살라딘은 파죽지세로 시리아를 점령해나가며 1175년 하마와 홈스마저 장악했다. 그러나 알레포는 포위한 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홈스의 지배권은 1179년 시르쿠의 후손에게 넘겨졌고 하마는 살라딘의 조카 알 무자파르 우마르에게 넘겨졌다. 살라딘의 성공적인 정복은 당시 장기 왕조의 수장이었던 모술의 에미르 사이프 앗딘을 놀라게 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하마 근처에서 살라딘과 맞섰다. 비록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살라딘과 그의 노련한 병사들은 사이프 앗딘을 물리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스타디는 살라딘에게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예루살렘 정복과 3차 십자군

제국으로의 확장

제국의 쇠퇴와 분열

쿠르드 독립 전쟁

오늘날의 아이유브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