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에야마 연방국
八重山連邦國 (やえやまれんぽうこく)
국기 국장
표어 一期一会いちごいちえ
일생에 단 한번의 귀중한 만남
국가 자유여, 노래하세요.
自由よ、歌いなさい。
수도 타이쿄台京
최대 도시 고죠皇城
정치
공용어 표준 일본어
국민어 야에야마어
천제天帝 아케미야
緋宮
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
연방총리대신連邦總理大臣
다케토미 히야시
竹富冷是
세토 다메노리
瀬戸爲憲
역사
정권 수립  
 • 아케모토 번 지배권 확립 1489년 8월 9일
 • 야에야마 독립전쟁 1592년-1598년
 • 하세나가 막부 수립 1601년 6월 4일
 • 바둑전쟁 1793년-1798년
지리
면적 65,937㎢ (124 위)
내수면 비율 0.7%
시간대 YST (UTC+9)
인구
2018년 어림 21,346,568 명 (58위)
인구 밀도 323.7㎢/명 (21위)
경제
GDP(PPP) 2018년 어림값
 • 전체 8678억$ (30위)
 • 일인당 40,652$ (24위)
HDI 0.889 (26위, 2017년 조사)
통화 야에야마 엔 (Y¥)
기타
ISO 3166-1 393, UY, KY
도메인 .yy
국제 전화 +83

야에야마 연방(일본어: 八重山連邦國 (やえやまれんぽうこく), 영어: United Yaeyama)은 필리핀 해에 위치한 도서국가로서, 수도는 타이쿄(台京), 최대 도시는 고죠(皇城)이다. 북쪽으로는 일본 본토, 서쪽으로는 류큐 제도가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야에야마(八重山)으로 불려지나, 야에야마 연방이 위치한 야에야마 제도(八重山諸島)로 혼동될 수 있기에 '야에야마 연방국'(八重山連邦國)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며, 국내에서는 '연방'(連邦)으로 부르는 경우가 잦다.

개요

지리상의 이유로 일본 본토 및 류큐국과 크고 작은 교류를 해왔고[1], 근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의 경제발전의 부분적인 롤모델이 되었으며 현재도 한국과 일본에게 있어서 경제·문화적으로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단 과거사나 영토분쟁 등으로 인하여 일본과의 정치/역사적인 면에서는 관계가 안좋은 점도 공존하고 있다.

6.25 전쟁에 따른 전쟁특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부분적 경제 원조, 경제산업성(經濟産業省)을 중심으로 한 연방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등을 통해 고도 성장을 이룩하여 일본에 견주는 아시아의 경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으며 현재는 G20, OECD, 파리 클럽[2] 등의 회원국으로서 세계 경제 및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사력은 중국을 견제하고 국방비 부담을 줄이려는 서구 사회와 전략에 맞물려 세계 20위권에 머무르고 있으며, 야에야마 연방군(八重山蓮邦軍)에 대한 군사 투자 및 지출이 상당한 높은 위치에 있다. 다만, 이러한 높은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것은 중국에 대한 견제 외에도 국방력으로 10위권 안에 들고 있는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위기감을 인식한 점도 있다.

국호

'야에야마'(八重山)의 명칭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1719년에 류큐를 찾은 중국인 서보광(徐葆光)의 저서 『중산전언록』(中山伝言録)에는 야에야마 제도에 대한 류큐인들의 묘사에 따라 "8개(八)의 중산(重山)들이 모인 진귀의 땅"이라 묘사하였다. 야에야마어에서는 '야이마'(Yaima, ヤイマ)로 부르며, 현지 의미로 "산의 땅"으로서 부른다. 그외에 과거 일본인들은 이곳을 '무겐쿄'(夢幻鄕, むげんきょう)로서 "환상의 섬"이라 하여 허구적인 실체로 묘사했다. 이렇듯 이곳을 부르던 명칭이 다양하고 그 기원이 불분명한지라 학계에서도 명칭의 유래를 추측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에는 '야에야마 막부국'(八重山幕府國, 1945~1960)으로서, 일본에도 막부(江戶幕府)가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붕괴됨에 따라 "최후의 무가정권"으로 불렀으며, 서구권에서도 '마지막 쇼군국'(Last Shogunate)[3]로 칭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자국의 국호를 훈독한 '히노모토'(日の本)를 자국의 미칭(美稱)으로 부르듯이, 야에야마도 '야츠노에노야마'(八の重の山)로 칭하기도 하나, 대체로 시적인 표현이나 애국심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다.[주 1]

'야에야마'라는 표기 이외에도 과거 별칭으로 사용되던 '겐쿄'(幻鄕)를 사용하기도 하나, 예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일상회화 대신 고어체로 사용된다. 서양에서는 'Yaeyama'로 야에야마인들의 발음을 따르는 경우가 잦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팔중산'이라는 명칭의 괴리감을 느끼기에 현지 발음을 따를 것을 규정해놓고 있다.

역사

야에야마의 역사가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된 것은, 15세기에 아케모토 번(明本藩)이 야에야마 제도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기점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류큐와 같이 오랜 기간 선사시대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12세기에 이르러 도래인과 선진문물들의 유입 및 농경문화가 정착하면서 지방의 세력가들인 요노누시(世の主)[4]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흐름에 편입되는가 싶었으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형식상으로 따르던 야에야마의 가문들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천하 통치에 반발함에 따라 야에야마 독립전쟁을 벌인 뒤, 독립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추면서 독자적인 국가로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선사시대

마지막 빙하기(약 12,500년 전에 끝남)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낮아서 한동안 류큐 열도야에야마 제도가 육지에 붙어있으며, 이 때 다양한 육상동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야에야마 제도 전부가 육지에 붙어있었던 것은 해수면이 굉장히 낮아진 일부 시기 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초기 정착민들은 배를 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내에서 발견된 화석인류의 상당수는 오키나와 제도에서 발견되었듯이, 야에야마 제도에서도 상당히 많은 화석인류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는 일본 본토가 화산이나 지진 같은 지각변동이 심했으며, 화성암 토양에 비교적 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의 출토유물이나 화석인류가 별로 없지만, 야에야마 제도는 석회암 지질이고 지각변동은 덜 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주로 미야시로(宮白), 히가키(日垣) 등지에서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인류 화석들은 최소 1만년 내지 3만년 전의 것이며, 야에야마인의 조상이 남방계통이었다는 설의 근거로 활용된다.

인골 화석 뿐만 아니라 구석기 유물도 발견되는데, 2012년에 니바타 시(日股市)의 이리네오 동굴(イリネオ 洞)에서 인골과 함께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2015년 4월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낚시바늘이 발견되기도 했다.[5]

신석기시대에는 류큐처럼 패총이 발달했기 때문에 패총시대(貝塚時代)라는 이름이 붙었다. 야에야마의 패총시대는 약 1만년 전부터 12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야에야마 제도가 대륙이나 일본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발전이 느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야에야마 제도의 사람들은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했으며 패총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어로의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패총시대 말기에는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농경문화가 정착함에따라 지방 세력가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지의 등장과 일본인의 이주

농경문화가 정착하고 철기가 도입함에 따라 야에야마 섬 중부, 남부에서는 이전 부족장들을 위시한 일종의 영주들인, 아지(按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성'(城)을 짓고 다른 아지들의 영지를 침범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충돌이 벌어지면서 센고쿠 시대에 버금가는 혼란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농사를 짓기 적합치 못했던 야에야마 섬 북부에서는 일본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이후에 피란해온 이들, 혹은 부라쿠민(部落民)들의 강제 이주 등으로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아케모토 번의 성립 이전까지, 독자적인 촌락을 구성하여 살기 시작했다.[6][7] 아지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서기도 했다.

아케모토 번과 센고쿠 시대

1476년, 탐험가였던 고쿠다 노부자키(石田信崎)가 가족들과 휘하의 일본인들을 이끌고 난요쿄텐(南洋拠点)[8]의 자리를 잡은 뒤, 이전의 정착했던 일본계 주민들과 토착민들을 통솔하고 아케모토 섬 남부에 아지들과 교류함에따라 세력 거점을 확보한 고쿠다 가문은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일본 본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에게 복종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맹세하고 지금의 북부지방(北部地方)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으면서 성씨를 '아케모토'(明本)로 바꾸었으며, 아케모토 성을 짓고 거점을 난요쿄텐에서 지금의 타이쿄(台京)로 옮기게 된다. 아케모토 번 이후로 세토(瀬戸), 하세나가(支長), 하스루(蓮軽) 등의 호족 가문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 절대 다수는 아케모토 가문을 필두로 한 이른바, 야에야마 세력(八重山勢力)에 참여하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센고쿠시대(戰國時代)를 맞닥뜨렸으나, 본토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야에야마 제도에서는 본토의 전란에 휘말릴 일 없이 평온한 시기를 보냈으나, 대다수의 번주들은 섬 북부에 적합치 못한 농업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저수지와 개간을 진행하였고 아케모토 번을 중심으로 하여 각 번을 하나의 구니(国)로 하여 행정 통치를 정교하게 만들었으며, 중부와 남부에 포진되었던 아지들을 흡수하거나 몰아내는 형식으로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그 뒤, 토호들의 과도한 수취로 인한 미하라의 난(三原の亂) 이후에 각 번들은 조세의 일원화를 단행하여 토호들의 수취를 방지하는 한편, 농민들에게 가중되는 부담이 줄어들게 하여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9] 거대한 소비집단을 유지하기위해 직인, 상인들을 대거 주요 도시에 집중시켰다. 이에따라 농민과 무사, 상공업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수 있게 되었고, 이는 후에 전국 단위로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여 야에야마 독립전쟁에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아케모토 번의 번주, 아케모토 히토자키(明本仁崎)는 야에야마 세력에서 아케모토 가문의 맹주 지위를 확립하는 한편, 자유 무역 정책을 펼치고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을 채택하여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는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에따라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들이 등장했으며, 야에야마 제도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자들이 에도 막부의 탄압을 피해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일본 본토에서 천하인으로서 군림하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여 혹시 모를 본토의 야에야마 정벌 운동을 회피하려는 등 전란에 야에야마 제도가 가세치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세

야에야마 독립전쟁

야에야마의 독립은 점진적으로 계획하에 이루어진게 아닌, 매우 즉흥적으로 일어났는데 그 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야에야마 번들이 충성을 약속했던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주도했던 혼노지의 변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아케모토 번을 비롯한 야에야마의 번들은 혼란에 빠졌는데,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의 편을 들어야 할 지, 2인자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의 편을 들어야 할 지 정치적 고민에 빠진 것이다. 명분상으로 미약했던 미츠히데의 편을 선언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던 야에야마 번들은 히데요시의 편도 들지 못한 채 결국은 중립을 지키기로 했으며,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 이후에 히데요시쪽으로 대세가 기울여진 이후에도 이러한 중립 기조를 유지했다.

한편, 1586년에 바테렌추방령(伴天連追放令) 이후 활동의 어려움을 느낀 일부 예수회 신자들과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은 야에야마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아케모토 번주, 아케모토 츠키자키(明本月崎)에게 예수회 소속 신자들과 선교사들을 추방할 것을 명령하나, 이에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진 츠키자키는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야에마야 세력과 도요토미 간의 불화가 발생했으며, 츠키자키는 히데요시를 견제코자 비밀리에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의 제2황자, 도모히토 친왕(智仁親王)에게 자신의 딸을 정실로 하여 결혼을 제의하였고, 이에 조정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했던 고요제이 덴노의 생각과 맞아 떨어짐에 따라 도모히토 친왕은 야에야마까지 건너가[10] 츠키자키의 여동생, 아케모토 케이코(明本京子)와 결혼하였다.정략적인 목적이 강했던 이 결혼으로 츠키자키는 덴노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였으며, 고요제이 덴노는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츠키자키에게 '야에야마의 왕'(八重山の王)의 칭호를 하사할 것을 칙령으로 명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화를 금치 못한 채, 본토 통일 이후 , 조선의 정벌과 함께 야에야마 정벌 운동을 위한 준비를 계획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야에야마에 대한 정복 전쟁을 벌이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1590년 규슈, 오다와라를 차례로 평정한 뒤 본토 전역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함께 위협적인 세력으로 비춰졌던 아케모토 번은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특히나 오다와라 성 공방전[11]에도 히데요시를 도와 종군하면서 겉으로나마 히데요시를 인정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아케모토 츠키자키는 지속적인 도발과 함께 히데요시를 '본토의 태합'(本土の太閤)으로 인정하였을 뿐, 자신들의 태합이 아니라며 불복종을 선언했다.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명나라조선을 복속하는 침략 전쟁에서 야에야마까지 포함시켰으며, 이에 히데요시의 고다이로(五大老)였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에스기 가케가쓰[12] (上杉景勝)를 필두로 한 3만 명에 이르는 야에야마 원정군이 출정에 나섰고, 츠키자키는 야에야마 세력의 번주들에게 "자유를 쟁취하자."라는 구호 아래 저항군을 결성하여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덴노에게 야에야마 번들을 조적(朝敵)으로 삼도록 하여 아케모토 번과 황실과의 관계를 끊도록 했다.

조적으로 몰린 야에야마 번들은 히데요시와 본토 조정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을 목표로 향할 것을 결심하는 센베츠의 맹(仙瞥の盟)을 맺었고, 츠키자키를 총사령관, 하세나가 번의 번주, 하세나가 토야모리(支長洞爺杜)를 부사령관으로 하여 침략을 대비하였으며, 도모히토 친왕의 처우에 대해서는 츠키자키의 결정하에 본토 조정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서 일본으로 귀국시켰다.[13]

오랜 기간 전란을 거치면서 군사력을 갖춘 원정군이었으나, 오랜 기간에 걸친 항해와 우사키 미츠야로(宇幸光野老)[14]가 이끌던 번군이 포르투갈의 지원하에 갤리선의 도움을 받으면서 세키나미 해전(関浪海戦)을 치루어 원정군 내 상당수의 병력을 손실시켰다. 야에야마 수군을 힘겹게 격퇴한 원정군들은 야스센(靖戰)의 상륙한 뒤, 시라이루 성(白色城)[15]을 포위했으나 성의 주인, 하스루 가와마츠(蓮軽川松)가 농성전을 벌이면서 하염없는 시간만 보냈고, 보급과 지휘 계통의 엉망으로 위기를 겪던 원정군은 결국에 토야모리가 이끄는 저항군이 후텐 산(普天山)에서 가케가츠 군에 대한 배후 기습을 하면서 패퇴하였으며, 원정군의 지휘관이었던 모리 데루모토우에스기 가케카츠는 남은 병력과 측신들과 함께 남아있던 아타케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関船)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원정군의 지휘관이 패퇴하고 대다수의 원정군에 합류했던 영주들을 사로잡음에 따라 야에야마 정벌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후텐 전투, 普天の戦い)[16]

원정이 실패했음을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2차 정벌을 준비했으나, 조선정벌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에야스를 견제해야되는 고다이로들이 원정 실패 이후 전무해짐에 따라[17] 추가적인 파병을 이루어 낼 수 없었고, 히데요시 본인이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사망함에 따라 재차 정벌 논의는 무산되었다. 독립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츠키자키도 고령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으며, 본인의 후사가 없었기에 도모히토 친왕과 여동생, 아케모토 케이코 사이에서 낳은 아케모토 나가자키(明本長崎)[18]야에야마 세력의 맹주가 되었다.

하세나가 막부

센베츠의 맹으로 독립을 결의한 야에야마의 번들은 스노가키 회의(墨俣會議)에 따라 마침내 1601년, 본토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케모토 나가자키천제(天帝)로 추대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있던 천제를 보좌할 인물로서, 후텐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하세나가 토야모리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의 지위에 올라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세나가 막부 수립)[19]

토야모리는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기 위해 곧장 금위총장령을 장남, 하세나가 헤이모리(支長平杜)에게 양위하였으며 무로마치 막부를 본딴 바쿠후(幕藩)체제와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이후 바둑 전쟁 이전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면서 교통·상공업이 발달하였으며,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외교 관계에서도 에도 막부와 화의를 맺는 등[20] 번성하였다.

헤이모리 이후에는 각 번주들의 자유로운 독자적 상업 교역을 금지시키면서 쇠퇴를 겪기도 했으나, 막부 주도로 도자기와 국화(國畵)를 수출하고 통행세를 걷던 관소들을 폐지시키면서 국내 경제의 걸림돌을 치우고 금, 은 화폐 보편화를 비롯해 해상 교통을 정비하는 등 상업적인 발달을 일구기도 했다. 또, 에도 막부조선, 류큐에 협소한 대외 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달리, 야에야마는 세요마치(西洋町)를 세워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의 서양 국가들과 교역과 선교 활동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1]

그러나 1770년대를 기점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악천후, 이상냉해로 흉작이 늘면서 농작물의 생산이 급감하는 등 최대의 기근이 발생하였다. (코에이 대기근, 孝哀の大飢饉) 뒤늦게 막부가 번들을 통제하여 구휼 활동을 벌이고 구황 작물을 대거 재배토록 지시하였다. 또, 상인들을 통제하여 쌀값을 안정화 시키려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 등 전국적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에 바둑전쟁(囲碁戦争)을 거친 뒤 전국적 혼란이 가속화 되는 듯 싶었으나, 헤이온 시대(平穩時代, 1810-1831)를 맞이함에 따라 불안했던 중앙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서민문화가 부활하고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던 서구의 문물을 바탕으로 양학(洋學)이 대두되는 등 재차 황금기를 맞이했다.

바둑전쟁

18세기 후반은 대기근의 여파로 수만 명이 아사하고 치안의 악화, 농업 생산량의 극감 등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에 서민 및 귀족 문화의 회생 과정에서 바둑이 국가적으로 도입되고 기소(碁所)를 설치하여 적극 장려했다. 특히 기소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바둑의 최고 기사(棋士)만이 오를 수 있는 명인(名人)의 자리를 두고 이들 명인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려는 가문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들이 하세나가 고도코로가(支長碁所家)였다.

(작성중)

근대

쇼에 개화

하세나가 헤이시게(支長平重, 재위:1839-1851)의 집권 이후로 바둑전쟁으로 붕괴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려 노력했으나, 점차 하세나가 막부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지방 번들의 세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또한 이들 번들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서구와의 무역을 감행하여 근대 산물을 수입하고 이들과의 교역으로 재정적 부를 축적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지방 번들의 주도로 서구와의 밀무역이 진행됨에 따라 서구의 문물과 학문을 습득한 지식인들의 개혁 요구, 서구 국가들의 지속적인 통상 요구로 막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포기하는가 싶었으나, 헤이시게는 '개화책'(開化策)을 선언하고 쇼에 덴테(昭英天帝)[22]를 설득하여 형식상의 조정의 허가를 구한 뒤, 독단적으로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James Biddle)과의 협상을 통해 1846년의 팔미통상조약(八米通商条約)을 체결하여 통상 개화를 시작하였다. 막부는 조정의 지지와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 지방 번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중앙군(中央軍)을 육성하였으며, 흔들리는 중앙 정권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지방 번주들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고 점차 번들을 굴복하였다. 그 뒤, 각 번들의 중심지를 '부'(府, )로, 그 외를 '현'(県, )으로 하는 부현제(府県制, 부켄세이)를 도입하고 각 부지사와 현령은 중앙에서 파견하여 번주들의 독단적인 지방 운영을 예방하였다. (쇼에 개화, 昭英開化)

막부는 반발하는 지방 세력들을 억누르는 한편, 기존 신분제를 폐지하고 명목상으로나마 신민평등(臣民平等)의 조치를 취함으로서 세수를 확보하고 귀족층을 하나로 규합한 뒤 통제하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신분개혁은 헌법에 의거하여 통치하는 입헌정치(立憲政治)에 대한 요구 움직임의 시발점이 되었다.

덴케이 혁명

막부는 통제력을 회복하는가 싶었으나, 헤이시게의 급사 이후로 막부의 영향력을 유지 할 구심점을 잃었으며, 뒤를 이은 하세나가 헤이모치(支長平茂)는 부족한 정치적 능력과 병약한 신체로 막부를 이끌어 가기에는 무리였다. 막부 내에서는 헤이모치의 후계자를 두고 정쟁이 벌어졌고 조정은 막부의 통제와 후계자 결정에 대한 불가침을 선언하면서 중앙 정치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당시 중앙군의 총사령관, 다케토미 이치로(竹富一部)는 헤이시게 사후의 중앙군이 하세나가 막부의 사병 조직으로 변질된 것에 대해 크게 안타까워 했으며, 동시에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는 부패하던 막부 지도층에 대한 쇄신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자신들이 본래 주어진 역할이었던 지방 번들의 통제에 대한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였고, 특히나 중앙 정계의 지속적인 혼란은 지방 번들이 동요하는 위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당시 하스루 번(蓮軽)의 번주, 하스루 가와마로(蓮軽川麿)[23]를 비롯한 조정파 막신(幕臣)들의 재정적 지원과 막부의 쇄신을 함께 절감하던 조정[24]의 지지하에 중앙군은 "쇄신개혁"(刷新改革)이라는 기치 아래 막부의 중심지였던 오카모토 성(岡本城)을 공격하였다. (덴케이 혁명, 天慶革命)

오카모토 성 분투(岡本城の奮鬪) 이후 하세나가 막부는 명목적으로 존재하던 통제력까지 붕괴되었으며, 급히 추대된 금위총장령, 하세나가 헤이아키(支長平揚)가 조정에게 당시 막부가 가지고 있던 대정권(代政權)을 위임하는 것으로 덴테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 막부의 해체를 막아내려 했으나, 직접 덴케이 덴테(天慶天帝)가 "새로운 막부을 옳게 여겨 뜻을 같이하고 낡은 막부는 고쳐 없애겠다."(新幕贊同舊幕革弊)라 답장을 보내면서 조정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헤이아키는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판단, 막부를 상징하는 금부채였던 "타이켄지가미"(大権地紙)를 다케토미 이치로에게 넘기면서 1855년, 254년의 통치를 거쳐 하세나가 막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조정파와 다수의 지방 번들의 지지를 받아 다케토미 이치로를 금위총장령으로 추대하면서 새로운 막부의 시작을 알렸다. (다케토미 막부)

신막수립과 입헌민권운동

제국주의와 양차 세계대전

현대

야에야아 막부국

야에야마 연방국

각주

  1. 야에야마의 시작부터 야에야마 제도를 중심으로 영지를 확보했던 번주(藩主)들이 일본 본토의 간섭과 굴복에 대한 저항으로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서 시작되었던 역사와 지리적으로, 좋든 싫든 이들과의 교류는 필수불가결했다.
  2. 전세계 23개 채권국 국가의 비공식 그룹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흥 개발도상국들을 지원하는것을 목적으로 한다.
  3. 정작 야에야마에서는 일본 본토로부터의 독립 이후 성립된 하세나가 막부부터 마지막 막부 정권(물론 국명 교체 이후에도 지위와 이중정권의 모습은 계승되고 있다), 다케토미 막부까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칭호 대신, 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여 본토와 차별된 모습을 보였다.
  4. '세상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며, 아지와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5. 현재는 2016년 9월에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된 낚시바늘이 발견되면서 타이틀을 빼앗기게 되었다.
  6. 남조를 지지했던 다이묘(大名)들과 아시가루가시라(아시가루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을 일컫음)들에 대한 야에야마 제도의 귀향도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는데 이들은 곧장 통제력을 갖추어 야에야마 제도에서 독립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7. 이들 중에서도 여러 호족 가문들이 출현했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야에이마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던 우사키(宇幸).
  8. 지금의 다카오카 시(高岡市)
  9. 가뜩이나 일본 본토에서처럼 수십 만 석 규모의 농업 생산량을 내기에는 적은 농업 인구와 척박한 토양으로 무리였다. 실제로, 아케모토하세나가 등의 명문 있는 가문들의 수십 만 석의 고쿠다카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야에야마의 번들은 많아야 수만, 수천 석에 불과한 쇼묘(小名)나 하타모토(旗本)들이었다.
  10.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은 선박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1. 참고로 히데요시와 대립했던 호조 가문의 반(反) 히데요시 자세는 이에야스의 지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도리어 이에야스가 종군을 해버렸으니 무너질 수 밖에...
  12. 원정군 당시에는 고다이로가 아니었으나, 1597년의 고바야카와 다카가케(小早川隆景)가 사망한 뒤 고다이로가 되었다.
  13. 도모히토 친왕의 귀국을 도왔던 야에야마의 10인의 무사들은 히데요시의 명령 아래 죽임을 당했으며, 이를 들은 야에야마의 각 번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신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신사가 바로 나카쵸 신사(中忠神社).
  14.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령의 나이로 우사키 번을 이끌던 인물이며, 아케모토 번의 통치 이전에 야에야마 제도에 정착했던 도래인의 후손이었다.
  15. 흰색 빛깔을 내는 성으로서 성(聖)스러움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16. 사로잡힌 영주들 대다수는 에도 막부의 수립 이후 배상금을 지불하는 형태로 귀국시켰으며, 일부 영주들은 원정군의 항복을 종용하고 비밀리에 야에야마 번들과 내통한 공로가 인정되어 영지를 수여받아 정착하였다.
  17.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이 있었으나, 256만 석에 달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횡을 막는데는 무리였으며, 데루모토와 가케카츠 역시 패퇴 이후에도 고쿠다카를 유지했으나, 야에야마 독립전쟁 이전 처럼 상비군을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8. 천제(天帝) 추대 이후에는 쇼미야(笑宮)로 개칭하였다.
  19. 다만 일본 황실처럼 야에야마 황실이 단순 얼굴마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이 수십만 석 수준의 고쿠다카를 가지고 있던 아케모토 번의 영지를 대부분 계승하였기에 하세나가 가문의 독단적인 정계 운영에는 어느정도 무리가 있었다.
  20. 야에야마의 독립 과정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던 고다이로의 세력을 약화시켜 전체적으로 히데요시를 지지하던 서군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어 동군이 손쉽게 전국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한 기여가 있었던 점도 어느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1. 물론 세요마치 외부로 서양인들이 야에야마인들과 교류하고 선교 활동을 했을 시에는 엄격히 처벌 받았으며, 반대로 야에야마인들이 무분별하게 세요마치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제한하기도 했다.
  22. 쇼에 덴테는 헤이시게의 개화책을 승인함에따라 야에야마가 서구화를 달성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과 이에따라 조정의 발언권을 높이는데 기여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명군으로 칭송받으나, 개인적으로는 서양에 대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23. 하스루 가와마로덴케이 혁명에 대한 공로로, 중앙 정계에 깊숙히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며 내각제 도입 후 수립된 초대 내각에서 대장대신(大蔵大臣)을 비롯한 주요 요직들을 역임하게 되었다.
  24. 막부를 지지하여 지방 번들의 통제를 통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 그러나 덴케이 혁명 이후에 수립된 다케토미 막부가 번을 대체하는, 미국(State)와 흡사한 쿠니(国)를 도입하면서 갈등을 안게 되었다.

주해


인용 오류: "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룹에 대한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references group="주" />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