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에야마 연방국
八重山連邦國 (やえやまれんぽうこく)
국기 국장
표어 一期一会いちごいちえ
일생에 단 한번의 귀중한 만남
국가 자유여, 노래하세요.
自由よ、歌いなさい。
수도 타이쿄台京
최대 도시 고죠皇城
정치
공용어 표준 일본어
국민어 야에야마어
천제天帝 아케미야
緋宮
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
연방총리대신連邦總理大臣
다케토미 히야시
竹富冷是
세토 다메노리
瀬戸爲憲
역사
정권 수립  
 • 아케모토 번 지배권 확립 1489년 8월 9일
 • 야에야마 독립전쟁 1592년-1598년
 • 하세나가 막부 수립 1601년 6월 4일
 • 바둑전쟁 1793년-1798년
지리
면적 65,937㎢ (124 위)
내수면 비율 0.7%
시간대 YST (UTC+9)
인구
2018년 어림 21,346,568 명 (58위)
인구 밀도 323.7㎢/명 (21위)
경제
GDP(PPP) 2018년 어림값
 • 전체 8678억$ (30위)
 • 일인당 40,652$ (24위)
HDI 0.889 (26위, 2017년 조사)
통화 야에야마 엔 (Y¥)
기타
ISO 3166-1 393, UY, KY
도메인 .yy
국제 전화 +83

야에야마 연방(일본어: 八重山連邦國 (やえやまれんぽうこく), 영어: United Yaeyama)은 필리핀 해에 위치한 도서국가로서, 수도는 타이쿄(台京), 최대 도시는 고죠(皇城)이다. 북쪽으로는 일본 본토, 서쪽으로는 류큐 제도가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야에야마(八重山)으로 불려지나, 야에야마 연방이 위치한 야에야마 제도(八重山諸島)로 혼동될 수 있기에 '야에야마 연방국'(八重山連邦國)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며, 국내에서는 '연방'(連邦)으로 부르는 경우가 잦다.

개요

지리상의 이유로 일본 본토 및 류큐국과 크고 작은 교류를 해왔고[1], 근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의 경제발전의 부분적인 롤모델이 되었으며 현재도 한국과 일본에게 있어서 경제·문화적으로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단 과거사나 영토분쟁 등으로 인하여 일본과의 정치/역사적인 면에서는 관계가 안좋은 점도 공존하고 있다.

6.25 전쟁에 따른 전쟁특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부분적 경제 원조, 경제산업성(經濟産業省)을 중심으로 한 연방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등을 통해 고도 성장을 이룩하여 일본에 견주는 아시아의 경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으며 현재는 G20, OECD, 파리 클럽[2] 등의 회원국으로서 세계 경제 및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사력은 중국을 견제하고 국방비 부담을 줄이려는 서구 사회와 전략에 맞물려 세계 20위권에 머무르고 있으며, 야에야마 연방군(八重山蓮邦軍)에 대한 군사 투자 및 지출이 상당한 높은 위치에 있다. 다만, 이러한 높은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것은 중국에 대한 견제 외에도 국방력으로 10위권 안에 들고 있는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위기감을 인식한 점도 있다.

국호

'야에야마'(八重山)의 명칭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1719년에 류큐를 찾은 중국인 서보광(徐葆光)의 저서 『중산전언록』(中山伝言録)에는 야에야마 제도에 대한 류큐인들의 묘사에 따라 "8개(八)의 중산(重山)들이 모인 진귀의 땅"이라 묘사하였다. 야에야마어에서는 '야이마'(Yaima, ヤイマ)로 부르며, 현지 의미로 "산의 땅"으로서 부른다. 그외에 과거 일본인들은 이곳을 '무겐쿄'(夢幻鄕, むげんきょう)로서 "환상의 섬"이라 하여 허구적인 실체로 묘사했다. 이렇듯 이곳을 부르던 명칭이 다양하고 그 기원이 불분명한지라 학계에서도 명칭의 유래를 추측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에는 '야에야마 막부국'(八重山幕府國, 1945~1960)으로서, 일본에도 막부(江戶幕府)가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붕괴됨에 따라 "최후의 무가정권"으로 불렀으며, 서구권에서도 '마지막 쇼군국'(Last Shogunate)[3]로 칭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자국의 국호를 훈독한 '히노모토'(日の本)를 자국의 미칭(美稱)으로 부르듯이, 야에야마도 '야츠노에노야마'(八の重の山)로 칭하기도 하나, 대체로 시적인 표현이나 애국심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다.[주 1]

'야에야마'라는 표기 이외에도 과거 별칭으로 사용되던 '겐쿄'(幻鄕)를 사용하기도 하나, 예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일상회화 대신 고어체로 사용된다. 서양에서는 'Yaeyama'로 야에야마인들의 발음을 따르는 경우가 잦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팔중산'이라는 명칭의 괴리감을 느끼기에 현지 발음을 따를 것을 규정해놓고 있다.

역사

야에야마의 역사가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된 것은, 15세기에 아케모토 번(緋本藩)이 야에야마 제도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기점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류큐와 같이 오랜 기간 선사시대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12세기에 이르러 도래인과 선진문물들의 유입 및 농경문화가 정착하면서 지방의 세력가들인 요노누시(世の主)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흐름에 편입되는가 싶었으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형식상으로 따르던 야에야마의 가문들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천하 통치에 반발함에 따라 야에야마 독립전쟁을 벌인 뒤, 독립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추면서 독자적인 국가로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선사시대

마지막 빙하기(약 12,500년 전에 끝남)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낮아서 한동안 류큐 열도야에야마 제도가 육지에 붙어있으며, 이 때 다양한 육상동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야에야마 제도 전부가 육지에 붙어있었던 것은 해수면이 굉장히 낮아진 일부 시기 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초기 정착민들은 배를 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내에서 발견된 화석인류의 상당수는 오키나와 제도에서 발견되었듯이, 야에야마 제도에서도 상당히 많은 화석인류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는 일본 본토가 화산이나 지진 같은 지각변동이 심했으며, 화성암 토양에 비교적 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의 출토유물이나 화석인류가 별로 없지만, 야에야마 제도는 석회암 지질이고 지각변동은 덜 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주로 미야시로(宮白), 히가키(日垣) 등지에서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인류 화석들은 최소 1만년 내지 3만년 전의 것이며, 야에야마인의 조상이 남방계통이었다는 설의 근거로 활용된다.

인골 화석 뿐만 아니라 구석기 유물도 발견되는데, 2012년에 니바타 시(日股市)의 이리네오 동굴(イリネオ 洞)에서 인골과 함께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2015년 4월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낚시바늘이 발견되기도 했다.[4]

신석기시대에는 류큐처럼 패총이 발달했기 때문에 패총시대(貝塚時代)라는 이름이 붙었다. 야에야마의 패총시대는 약 1만년 전부터 12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야에야마 제도가 대륙이나 일본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발전이 느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야에야마 제도의 사람들은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했으며 패총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어로의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패총시대 말기에는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농경문화가 정착함에따라 지방 세력가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지의 등장과 일본인의 이주

농경문화가 정착하고 철기가 도입함에 따라 야에야마 섬 중남부에서는 이전 부족장들을 위시한 일종의 영주들인, 아지(按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성'(城)을 짓고 다른 아지들의 영지를 침범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충돌이 벌어지면서 센고쿠 시대에 버금가는 혼란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농사를 짓기 적합치 못했던 야에야마 섬 북부에서는 일본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이후에 피란해온 이들, 혹은 부라쿠민(部落民)들의 강제 이주 등으로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아케모토 번의 성립 이전까지, 독자적인 촌락을 구성하여 살기 시작했다.[5]

아케모토 번과 센고쿠 시대

1476년, 탐험가였던 고쿠다 노부자키(石田信崎)가 가족들과 휘하의 일본인들을 이끌고 난요쿄텐(南洋拠点)[6]의 자리를 잡은 뒤, 이전의 정착했던 일본계 주민들과 토착민들을 통솔하고 아케모토 섬 남부에 아지들과 교류함에따라 세력 거점을 확보한 고쿠다 가문은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일본 본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에게 복종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맹세하고 지금의 북부지방(北部地方)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으면서 성씨를 '아케모토'(緋本)로 바꾸었으며, 아케모토 성을 짓고 거점을 난요쿄텐에서 지금의 타이쿄(台京)로 옮기게 된다. 아케모토 번 이후로 세토(瀬戸), 하세나가(支長), 하스루(蓮軽) 등의 호족 가문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 절대 다수는 아케모토 가문을 필두로 한 이른바, 아케모토 세료쿠(緋本勢力)에 참여하였다.

각주

  1. 야에야마의 시작부터 야에야마 제도를 중심으로 영지를 확보했던 번주(藩主)들이 일본 본토의 간섭과 굴복에 대한 저항으로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서 시작되었던 역사와 지리적으로, 좋든 싫든 이들과의 교류는 필수불가결했다.
  2. 전세계 23개 채권국 국가의 비공식 그룹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흥 개발도상국들을 지원하는것을 목적으로 한다.
  3. 정작 야에야마에서는 일본 본토로부터의 독립 이후 성립된 하세나가 막부부터 마지막 막부 정권(물론 국명 교체 이후에도 지위와 이중정권의 모습은 계승되고 있다), 다케토미 막부까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칭호 대신, 금위총장령(禁衛總將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여 본토와 차별된 모습을 보였다.
  4. 현재는 2016년 9월에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된 낚시바늘이 발견되면서 타이틀을 빼앗기게 되었다.
  5. 남조를 지지했던 다이묘(大名)들과 아시가루가시라(아시가루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을 일컫음)들에 대한 야에야마 제도의 귀향도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는데 이들은 곧장 통제력을 갖추어 야에야마 제도에서 독립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6. 지금의 다카오카 시(高岡市)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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