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카라컨테이너|body={{카라}}<br> {{카라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 정보}}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일반적으로 영국(United Kingdom) 또는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으로 불리는 1801년부터 1925년까지 존재했던 유럽 대륙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국가이다. 영국은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 간의 연합법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지배적인 세계 강국이었으나, {{카라링크|대전쟁}}에서 {{카라링크|독일}}에 패배하면서 급속히 쇠퇴해 {{카라링크|영국 혁명|1925년 붕괴}}했다. == 역사 == === 대영 제국의 세기 ===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영국은 19세기의 제국주의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로 알려진 강대국들 사이의 상대적 평화 기간은 영국이 "위대한 고립"이라는 외교 정책 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영제국은 이후 "대영 제국의 세기"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확장을 계속했다. 1839년 중국에 대한 영국의 아편 수출은 {{카라링크|청나라}}와의 제1차 아편 전쟁을 촉발시켰고, 이로써 영국은 홍콩섬과 5개의 조약 항구를 갖게 되었다. 당해 {{카라링크|영국령 인도}}는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카라링크|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이것은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대전략의 시작이었다. 또한 영국은 1853년 크림 전쟁에서 {{카라링크|러시아 공화국|러시아}}에 개입하여 쇠퇴하는 {{카라링크|오스만 제국}}을 이용하는 것을 막았다. 1857년 {{카라링크|영국령 인도}}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은 직접적인 왕권 통치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데이비드 리빙스톤 박사는 중앙 아프리카를 탐사한 것으로 유명한 탐험대를 이끌었다. 제1차 보어전쟁과 제2차 보어전쟁은 영국이 {{카라링크|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1871년 이후 {{카라링크|독일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는데,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강국 및 제국으로서의 영국의 지위를 빼앗겠다고 위협했다. 독일은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많은 식민지를 획득했지만,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현실 정치의 전략으로 일반적인 평화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888년 {{카라링크|빌헬름 2세}}가 독일의 왕위에 오르자, 그는 비스마르크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독일의 해군력을 강화하여 영국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아들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했다. 새로운 세기는 노동계급 사이에서 증가하는 정치적 요구로 특징 지어졌으며, 노동조합의 부상과 {{카라링크|노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1900년대 제2차 보어 전쟁 당시의 고립적인 외교정책을 포기하고 1904년 프랑스, 1907년 러시아와 {{카라링크|협상국|삼각 협정}}을 맺었다. 3국 협정의 형성은 프랑스와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영국 관계를 개선 시켰지만 독일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유럽 외부에서도 {{카라링크|미합중국|미국}}과 {{카라링크|일본 제국|일본}}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붕어하고 아들 조지 프레드릭 어니스트 앨버트가 {{카라링크|조지 5세}}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 대전쟁 (1914-1919) === : ''본문: {{카라링크|대전쟁}}'' 1914년 8월 4일 {{카라링크|자유당}}의 총리 H. H. 애스퀴스의 조언에 따라 독일과 {{카라링크|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 내각이 전쟁에 돌입한 이유는 {{카라링크|독일}}이 서유럽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카라링크|프랑스 공화국|프랑스}}의 패배를 막음과 동시에 자유당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쟁으로 영국은 재정 비축량을 다 써버리고 {{카라링크|미국}}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가 참호전으로 정체되면서 전쟁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과 빠른 승리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1916년까지 지원병들의 부족은 영국 정부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을 채택하도록 내몰았다. 그 해 부활절 봉기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극적으로 악화 시켰고, 징병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1916년 12월 {{카라링크|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로 수상이 교체되었으나 실패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었다. {{카라링크|캐나다}} 징병 위기는 1918년 전면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되었고, 동시에 본토에서 경찰파업이 시작되었다.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암리차르 학살은 대영제국의 상황이 옹호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었고, 이에 따라 영국은 1919년 11월 6일 {{카라링크|명예로운 평화}}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고,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 붕괴와 혁명 (1919-1925) === : ''본문: {{카라링크|영국 혁명}}'' 대전쟁에서의 패배는 대영제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미국에게 큰 빚을 지게 했으며, 영국을 심각한 사회 불안 상태에 빠지게 했다. 독일의 경제 패권은 ''{{카라링크|미텔오이로파}}'' 블록의 형성과 함께 공식화되었고, 사실상 유럽의 많은 지역과 영국 사이의 무역을 단절 시켰다. 로이드 조지는 1919년 총선에서 보수당 앤드루 보나르 로가 1923년 {{카라링크|영국-아일랜드 조약}}을 통해 {{카라링크|아일랜드}} 분쟁을 종결시켰다. 1923년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첫 노동당 정부가 출범했지만 보수당과 자유당 기득권층에서 보기에 노동당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노동당의 급진적 생디칼리스트들이 보기에 노동당은 너무 온건했다고 여겨졌다. 1924년 오스틴 체임벌린이 이끄는 자유당과 보수당의 연합은 새로운 국민 정부를 구성하였고, 영국 해군을 포함한 전체 비용을 삭감하는 논쟁적인 {{카라링크|영국 혁명|긴축 예산}}을 통과시켰다. 1924년 5월 18일, HMS 후드 선원들의 {{카라링크|영국 혁명|반란}}은 플리머스에서 도시 전체의 시위로 확대되었고, 현지 경찰과 영국 해병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교통일반노동조합(TGWU)은 영국 정부가 TGWC를 불법화하자 350만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조합회의(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TGWU)를 결성했다. 9월 5일에는 사우스 웨일스의 포트 탤벗에서 벌어진 {{카라링크|영국 혁명|충돌}}로 5명의 파업 노동자가 사망했고, 이는 영국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영국 정부는 9월 16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글래스고, 맨체스터, 리버풀 등 주요 산업도시가 소요사태에 휩싸이자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노동당은 조지 랜스베리가 맨체스터에서 열린 연례 회의에서 {{카라링크|조지 5세}}의 정치적 개입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찰스 1세의 의회 처형을 언급하면서 불법화되었다. 10월 초 {{카라링크|카디프 코뮌|카디프}}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북부 반란군은 대담해졌고, 북군은 {{다크링크|영국 혁명 국가들 (카이저라이히)#글래스고 자유 코뮌|글래스고}}와 {{카라링크|스코틀랜드 임시 공화국|에든버러}}를 점령했다. {{다크링크|영국 혁명 국가들 (카이저라이히)#리버풀 자유시|리버풀}}은 12월에 북군에 의해 확보되었고, 반란군 통제 구역은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2월 20일 노동당, 국민노동당, 자유당 대표들은 리버풀 선언문을 발표하여 {{다크링크|영국 혁명 국가들 (카이저라이히)#브리튼 연방 임시정부|브리튼 연방}}을 영국을 대체하는 연방 공화국으로 선언하였다. 봄의 해빙으로 반란군은 영국의 산업 중심지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6월에는 그들의 스코틀랜드 동맹국들과 연결되었다. 같은 달, 왕실은 {{카라링크|캐나다}}로 대피했고, 이는 {{카라링크|오스왈드 모즐리}}가 버밍엄을 장악한 직후였다. 노팅엄은 7월에 오랜 전투 끝에 함락되었다. 비록 가을비가 생디칼리스트의 공세를 중단시켰지만, {{카라링크|프랑스 코뮌|프랑스}}의 지원은 12월에 교착 상태를 타개했다. 생디칼리스트 군대가 런던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12월 20일 영국 정부의 마지막 잔당들이 {{카라링크|영국 혁명|런던을 떠났다}}. == 둘러보기 == * {{카라링크|브리튼 연방}} * {{카라링크|영국 혁명}} * {{카라링크|대영 제국의 붕괴}}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ontainer (원본 보기) 틀:Container/style.css (원본 보기) 틀:꽉찬사진 (원본 보기) 틀:다크링크 (원본 보기) 틀:카라 (원본 보기) 틀:카라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 정보 (원본 보기) 틀:카라링크 (원본 보기) 틀:카라컨테이너 (원본 보기) 틀:카이저라이히 (원본 보기) 영국 (카이저라이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