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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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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국학'''(<small>[[영록어]]</small>:英鹿國學)은 [[영록]]의 고전과 고중세사를 연구하고 [[도교]]와 [[불교]] 및 [[유교]]의 유입 이전, [[영록인]]의 정신을 밝히고 영록만의 독자적인 사상적 측면을 연구하고 해석하고자 내세운 학문이다. 국학의 기원은 기존의 토착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책으로 집대성한 [[마타노 코시오나루]](又野輿悟國, 1377-1422)에서 시작되었다고 학계에서 입을 모으고 있다.
'''영록국학'''(<small>[[영록어]]</small>:英鹿國學)은 [[영록]]의 고전과 고중세사를 연구하고 [[도교]]와 [[불교]] 및 [[유교]]의 유입 이전, [[영록인]]의 정신을 밝히고 영록만의 독자적인 사상적 측면을 연구하고 해석하고자 내세운 학문이었으며, 근세부터는 영록 내에서 다루어지는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아우르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국학의 기원은 기존의 토착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책으로 집대성한 [[마타노 코시오나루]](又野輿悟國, 1377-1422)에서 시작되었다고 학계에서 입을 모으고 있다.


== 고중세의 국학 ==
== 고중세의 국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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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을 학문으로 성립하는 과도기에 있어서 그 중심을 찾으라고 하면 단연 [[마타노 코시오나루]]라고 할 것이다. [[난코토]](ナン琴)에서 기나사비(キナサビ)<ref>道士, 당시에는 도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종교계에서 힘을 쓰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의미 확대가 일어났다.</ref>를 지낸 그는 [[영록인]]의 정신 사회에 대한 수행을 위한 과정에서 고어고전(古語古典)을 익히고 연구할 것을 장려했다. 이후 [[엔쿠소루]](王城)로 상경한 그는 무속 신앙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하늘을 숭배하고 사람을 더불어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자세에서 모든 토착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이러한 사상이 민족의식의 원형이자 윤리 의식에 기반으로서 온 사회에 작용되었다고 말했다.
국학을 학문으로 성립하는 과도기에 있어서 그 중심을 찾으라고 하면 단연 [[마타노 코시오나루]]라고 할 것이다. [[난코토]](ナン琴)에서 기나사비(キナサビ)<ref>道士, 당시에는 도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종교계에서 힘을 쓰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의미 확대가 일어났다.</ref>를 지낸 그는 [[영록인]]의 정신 사회에 대한 수행을 위한 과정에서 고어고전(古語古典)을 익히고 연구할 것을 장려했다. 이후 [[엔쿠소루]](王城)로 상경한 그는 무속 신앙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하늘을 숭배하고 사람을 더불어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자세에서 모든 토착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이러한 사상이 민족의식의 원형이자 윤리 의식에 기반으로서 온 사회에 작용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고전을 탐구할수록 인본(人本)의 기치가 크게 작용됨을 인식하여 기존의 제천 의식과 설화들을 총망라하여 연구하였고, 이를 《[[일월지집]](日月之集)》이라는 책으로 엮어 고대 천상 사회의 실현을 통한 토속 윤리 가치관의 회복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하늘의 자손이 지상으로 내려와 계율과 덕목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천손강림계도치인''''(天孫降臨戒道治人)을 통해 당시 군권(君權)을 사상적 가치와 융화하여 이를 신적 존재로서 [[영록의 천하관|천하관]]의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특히 고전을 탐구할수록 인본(人本)의 기치가 크게 작용됨을 인식하여 기존의 제천 의식과 설화들을 총망라하여 연구하였고, 이를 《[[일월지집]](日月之集)》이라는 책으로 엮어 고대 천상 사회의 실현을 통한 토속 윤리 가치관의 회복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하늘의 자손이 지상으로 내려와 계율과 덕목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천손강림계도치인'(天孫降臨戒道治人)을 통해 당시 군권(君權)을 사상적 가치와 융화하여 이를 신적 존재로서 [[영록의 천하관|천하관]]의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마타노 코시오나루]]의 뒤를 이어 토착 사상론을 내세운 [[하라나 다케마마루]](原竹ママル, 1404-1459)는 현세 중심적인 무속 신앙 및 토착 사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고어고전에서 현세구원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이를 일일히 각주를 다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세계관의 형성 및 확대의 사상적 측면을 다룬 《[[고훈지력]](古訓之力)》을 집필함으로서 이를 내세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정'(情)과 현세 중심적 사고 기반으로서의 '인'(仁)의 대립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情)과 인(仁)의 대립과 인본(人本)과 천본(天本)의 대립을 극심히 고민했을 토속 문헌에서 참된 정신(眞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타노 코시오나루]]의 뒤를 이어 토착 사상론을 내세운 [[하라나 다케마마루]](原竹ママル, 1404-1459)는 현세 중심적인 무속 신앙 및 토착 사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고어고전에서 현세구원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이를 일일히 각주를 다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세계관의 형성 및 확대의 사상적 측면을 다룬 《[[고훈지력]](古訓之力)》을 집필함으로서 이를 내세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정'(情)과 현세 중심적 사고 기반으로서의 '인'(仁)의 대립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情)과 인(仁)의 대립과 인본(人本)과 천본(天本)의 대립을 극심히 고민했을 토속 문헌에서 참된 정신(眞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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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자의 결여와 영록의 유학 ===
=== 보편자의 결여와 영록의 유학 ===
{{본문|카누 다메하나|도라 카제시}}
일본 주자학의 거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와 [[하야시 리잔]](林羅山, 1583-1657) 등을 통해 [[퇴계학]](退溪學) 등이 전래되면서 유학자들은 국학과 함께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을 얻고자 했다. 허나 조선의 주자학과는 달리, 일본의 유학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던 영록 유학자들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수양 덕목을 천리(天理) 회복을 제거한 뒤, 실천 윤리로 자리매김토록 했다. 이에따라 영록의 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천리 회복의 과정이 생략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합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다.
일본 주자학의 거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와 [[하야시 리잔]](林羅山, 1583-1657) 등을 통해 [[퇴계학]](退溪學) 등이 전래되면서 유학자들은 국학과 함께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을 얻고자 했다. 허나 조선의 주자학과는 달리, 일본의 유학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던 영록 유학자들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수양 덕목을 천리(天理) 회복을 제거한 뒤, 실천 윤리로 자리매김토록 했다. 이에따라 영록의 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천리 회복의 과정이 생략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합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다.


양명학과 실학을 연구하던 [[카누 다메하나]](秋爲一, 1635-1711)는 주자학의 지나친 관념성을 크게 비판했다. 그는 [[미나치루 타케오루]]와의 사상적 접점을 이끌어 나갔고, 현실론적 면모가 부족한 유학의 문제점을 직시한 뒤 사변적인 탁상공론의 틀에서 머물지 말고 자연의 이치(물리, 物理)를 받아들이기 위해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후 하늘에서 자연의 관점으로 천리(天理)를 옮긴 뒤, 오륜(五倫)과 같은 인간 도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물리의 관찰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했다.
양명학과 실학을 연구하던 [[카누 다메하나]](秋爲一, 1635-1711)는 주자학의 지나친 관념성을 크게 비판했다. 그는 [[미나치루 타케오루]]와의 사상적 접점을 이끌어 나갔고, 현실론적 면모가 부족한 유학의 문제점을 직시한 뒤 사변적인 탁상공론의 틀에서 머물지 말고 자연의 이치(물리, 物理)를 받아들이기 위해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였다. 이후 하늘에서 자연의 관점으로 천리(天理)를 옮긴 뒤, 오륜(五倫)과 같은 인간 도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물리의 관찰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와 [[카누 다메하나]]의 영향을 받은 [[도라 카제시]](石楓詩, 1664-1739)는 천리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후 현실 통치자인 천손(天孫)의 가문과 중앙 정청의 고위 관료들, 특히 [[히리코노시 가]](昼コノ視家)를 천인(天人)으로 추앙하는 현실주의적 정치론의 방향으로 급전환 시키게 된다. 이후 형식적인 틀에 머무르던 보편자와 절대자의 인식은 현실 정치에 이입되었으며, [[천하론]](天下論)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와 [[카누 다메하나]]의 영향을 받은 [[도라 카제시]](石楓詩, 1664-1739)는 천리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후 현실 통치자인 천손(天孫)의 가문과 중앙 정청의 고위 관료들, 특히 [[히리코노시 가]](昼コノ視家)를 천인(天人)으로 추앙하는 현실주의적 정치론의 방향으로 급전환 시키게 된다. 이후 형식적인 틀에 머무르던 보편자와 절대자의 인식은 현실 정치에 이입되었으며, [[실존론]](實存論)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형성 ===
{{본문|야츠무 이치노케}}
18세기 중반은 영록 사회에 있어서 변혁적 면모를 보이던 시기였는데, [[미나치루 타케오루]]의 정덕분리론과 [[카누 다메하나]]의 성즉리 비판으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체적인 개인(個人)의 개념이 형성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야츠무 이치노케]](ヤツム壱能化, 1711~1783)는 인간의 본성을 욕구의 긍정화하는 모습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상하귀천의 구분을 짓지말고 주체적인 실천을 통해 고루한 사회 질서의 혁파를 추구했다.
 
야츠무 이치노케는 또한 사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주지권]](自主之權)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분 사회의 기강을 흔들기 시작했다.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자연권적 인간 권리의 해석을 기초로 하여 만월지항(滿月之抗)을 내세워 국가권력이 무분별한 민생 개입에 대해 주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음을 밝혔다.


== 각주 ==
== 각주 ==

2019년 4월 22일 (월) 16:0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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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국학(영록어:英鹿國學)은 영록의 고전과 고중세사를 연구하고 도교불교유교의 유입 이전, 영록인의 정신을 밝히고 영록만의 독자적인 사상적 측면을 연구하고 해석하고자 내세운 학문이었으며, 근세부터는 영록 내에서 다루어지는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아우르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국학의 기원은 기존의 토착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책으로 집대성한 마타노 코시오나루(又野輿悟國, 1377-1422)에서 시작되었다고 학계에서 입을 모으고 있다.

고중세의 국학

토착 사상의 집대성

국학을 학문으로 성립하는 과도기에 있어서 그 중심을 찾으라고 하면 단연 마타노 코시오나루라고 할 것이다. 난코토(ナン琴)에서 기나사비(キナサビ)[1]를 지낸 그는 영록인의 정신 사회에 대한 수행을 위한 과정에서 고어고전(古語古典)을 익히고 연구할 것을 장려했다. 이후 엔쿠소루(王城)로 상경한 그는 무속 신앙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하늘을 숭배하고 사람을 더불어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자세에서 모든 토착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이러한 사상이 민족의식의 원형이자 윤리 의식에 기반으로서 온 사회에 작용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고전을 탐구할수록 인본(人本)의 기치가 크게 작용됨을 인식하여 기존의 제천 의식과 설화들을 총망라하여 연구하였고, 이를 《일월지집(日月之集)》이라는 책으로 엮어 고대 천상 사회의 실현을 통한 토속 윤리 가치관의 회복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하늘의 자손이 지상으로 내려와 계율과 덕목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천손강림계도치인'(天孫降臨戒道治人)을 통해 당시 군권(君權)을 사상적 가치와 융화하여 이를 신적 존재로서 천하관의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마타노 코시오나루의 뒤를 이어 토착 사상론을 내세운 하라나 다케마마루(原竹ママル, 1404-1459)는 현세 중심적인 무속 신앙 및 토착 사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고어고전에서 현세구원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이를 일일히 각주를 다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세계관의 형성 및 확대의 사상적 측면을 다룬 《고훈지력(古訓之力)》을 집필함으로서 이를 내세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정'(情)과 현세 중심적 사고 기반으로서의 '인'(仁)의 대립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情)과 인(仁)의 대립과 인본(人本)과 천본(天本)의 대립을 극심히 고민했을 토속 문헌에서 참된 정신(眞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나 이러한 토착 사상의 집대성은 중세 사회를 거치면서 점차 사멸했다. 지나치게 토속 문학에 대해 우호적인 한편, 불필요하게 내용과 해석을 부풀리는 등 많은 지식인들에게 토착 사상의 연구를 꺼리게 하는 경향을 낳은 점도 있으며, 관학(官學)으로 우대받아 지나치게 어용학문(御用學文)으로 그 의의가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세의 국학

국학의 부활과 정덕분리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性理學)과 양명학(陽明學)이 유입되었다. 이때 영록의 유교 사상은 크게 형이상학적 측면을 다루는 이기학파와 현실주의와 주관적 실천주의를 강조하는 육왕학파로 나뉘었다. 허나 현학적이고 실생활에 적용하기 어려운 주자가례의 재해석과 각주를 다는 행위를 비난한 미나치루 타케오루(ミナチル竹可, 1632-1705)에 의해 '정덕분리론'(政德分離論)이 등장하였다. 그는 정덕분리론을 통해 정치와 도덕의 분리, 더 정확히는 '권력과 도덕'을 이원화하여 각각의 특성을 이해하는 한편,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자는 입장이었다. 그는 현재 영록 사회를 움직이는 유교가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허학(虛學)이라며 비판했다.[2]

토속 사상을 정리하는데 치중하던 중세 국학에서 정치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사회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던 국학은 미나치루 타케오루의 제자로 선진 유학과 공양학(公羊學)을 연구하던 다나오 마치나루(月尙衙國, 1674-1757)가 그 기조를 이어나갔다. 그는 저서인 《녹국개제고(鹿國改制考)》을 통해 인본지치(人本之治)를 강조하여 동양적 민권 사상의 틀을 제시하였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실천 덕목으로 앎(知)을 강조했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사물의 관찰을 통한 자연 원리의 합리적 진리를 마련하는 것을 도(道)의 기초라고 하였다.

보편자의 결여와 영록의 유학

일본 주자학의 거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와 하야시 리잔(林羅山, 1583-1657) 등을 통해 퇴계학(退溪學) 등이 전래되면서 유학자들은 국학과 함께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을 얻고자 했다. 허나 조선의 주자학과는 달리, 일본의 유학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던 영록 유학자들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수양 덕목을 천리(天理) 회복을 제거한 뒤, 실천 윤리로 자리매김토록 했다. 이에따라 영록의 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천리 회복의 과정이 생략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합하는 역할에 국한되었다.

양명학과 실학을 연구하던 카누 다메하나(秋爲一, 1635-1711)는 주자학의 지나친 관념성을 크게 비판했다. 그는 미나치루 타케오루와의 사상적 접점을 이끌어 나갔고, 현실론적 면모가 부족한 유학의 문제점을 직시한 뒤 사변적인 탁상공론의 틀에서 머물지 말고 자연의 이치(물리, 物理)를 받아들이기 위해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였다. 이후 하늘에서 자연의 관점으로 천리(天理)를 옮긴 뒤, 오륜(五倫)과 같은 인간 도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물리의 관찰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와 카누 다메하나의 영향을 받은 도라 카제시(石楓詩, 1664-1739)는 천리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후 현실 통치자인 천손(天孫)의 가문과 중앙 정청의 고위 관료들, 특히 히리코노시 가(昼コノ視家)를 천인(天人)으로 추앙하는 현실주의적 정치론의 방향으로 급전환 시키게 된다. 이후 형식적인 틀에 머무르던 보편자와 절대자의 인식은 현실 정치에 이입되었으며, 실존론(實存論)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형성

18세기 중반은 영록 사회에 있어서 변혁적 면모를 보이던 시기였는데, 미나치루 타케오루의 정덕분리론과 카누 다메하나의 성즉리 비판으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체적인 개인(個人)의 개념이 형성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야츠무 이치노케(ヤツム壱能化, 1711~1783)는 인간의 본성을 욕구의 긍정화하는 모습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상하귀천의 구분을 짓지말고 주체적인 실천을 통해 고루한 사회 질서의 혁파를 추구했다.

야츠무 이치노케는 또한 사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주지권(自主之權)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분 사회의 기강을 흔들기 시작했다.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자연권적 인간 권리의 해석을 기초로 하여 만월지항(滿月之抗)을 내세워 국가권력이 무분별한 민생 개입에 대해 주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음을 밝혔다.

각주

  1. 道士, 당시에는 도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종교계에서 힘을 쓰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의미 확대가 일어났다.
  2. 그는 또한, 선진 유학과 토속 사상의 인본 사상을 연결하여 '인본주의적 혁명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급진적 정치 개혁 사상은 히야니루 참칭정부의 중앙 정청 독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